침묵의 소리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동연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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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역설: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의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침묵 가운데서도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침묵’은 ‘침묵의 소리’로 다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침묵’을 오독했던 독자 중 하나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침묵’을 ‘침묵’으로만 읽었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묵의 소리’는 ‘침묵’에 해제를 붙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침묵’에 대한 오독이 엔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독 덕분에 우리들은 엔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좀 더 친밀하고 좀 더 친절하게 말이다. 나도 그랬다. ‘침묵의 소리’를 읽으며 ‘침묵’ 너머에 있는 엔도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침묵'을 읽을 때에는 못 느꼈던 것들이었다.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엔도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침묵’을 집필하게 되었던 이유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인생과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전해지지 않았던 (침묵했던) 엔도가 내겐 비로소 전해졌다 (소리로 들려졌다).


그는 토종 일본인이면서도 서양에서 전해져 온 기독교 (카톨릭)를 받아들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도, ‘어릴적부터의 기독교는 자신이 믿지도 않은 세계에 자신의 몸이 내던져진 사람이 겪는 이문화 체험’이라고 고백한다. 엔도에게 기독교는 그만큼 이질적인 문화였고, 그 속에서 그는 혼란스러웠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자인 김승철 교수 역시 서문에서, 엔도에게는 어릴적 자신이 받았던 세례에서부터 ’기독교가 일본에서 자란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늘 그를 따라다니던 물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엔도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일본인인 자신의 몸에 맞는 신앙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결심이 마침내 소설가 엔도를 탄생시켰다고 역자는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실로 소설 ‘침묵’은 엔도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책인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로부터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혀지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판 경우에는 아예 누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배교한 기리시단들을 한데 모여 살게 했던 기리시단 주거지에서 20년에 걸쳐 간수로 일했던 어느 하급 무사가 남긴 일기 형식의 문서이다. 엔도는 이 실제 문서를 약 10분의 1정도로 줄이면서 발췌해서 고쳐쓰는 방식으로 ‘관리인의 일기’를 작성하였고, 이를 ‘침묵’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게 해두었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번역판을 읽은 나에게 ‘침묵’의 마지막은, 끝내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와 이미 배교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향하여, 그리고 끊임없이 간교함과 성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던 기치지로를 향하여 결코 좋지 못한 시선을 줄 수밖에 없게 해 주었었다. 이는 반대급부로, 끝가지 후미에를 밟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낌없이 버린 순교자들을 향한 시선을, 마음 아프지만,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침묵이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샌가 배신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신앙을 버리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자 김승철 교수가 직접 해제 및 번역과 주해를 한, 이 책에 수록된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읽고 난 후, 난 비로소 의문이 해소될 수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강한 자들의 입장이 옹호되어지는 반면,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으며 배교하여 목숨을 건진 약한 자들의 입장이 멸시되어지는 듯한 분위기에서 나는 비로소 해방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기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하고 다른 이들에게 포교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간교함을 얼굴에 써놓은 듯한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예전과는 달리 로드리고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의 회복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침묵의 소리'의 도입부에서 엔도는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 안에서 동판에 새겨진 후미에를 만나고 그 나무틀에 남아있던 수많은 검은 발자국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믿는 것을 발로 밟았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약자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침묵'의 주인공으로서 담대하게 순교한 강자가 아닌 끝내 배교한 약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침묵의 소리' 책 안에는 엔도의 다른 단편 소설들이 몇 개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아버지의 종교, 어머니의 종교'에서는 엔도는 가쿠레 기리시단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시작은 순교가 아닌 배교였다. 그들의 신앙은 승리자의 신앙이 아니라 실패자의 신앙이었다. 그들 신앙의 출발점은 자신들이 배교자, 약자라는 자각이었으며, 그 어두운 출발점이 그들의 신앙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신앙이, '어머니 되시는 분'이란 단편 소설에서 말하듯이, 오랜 시간을 비밀리에 거쳐오면서 불교나 다른 종교, 심지어는 토속적인 미신까지 뒤섞여 있는 종교로 변질되었지만, 그들의 아픔과 회한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단번에 이교도나 이단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엔도가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침묵'을 썼다는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다. 때문에 '침묵'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찝찝함은 말끔히 해소가 되었다. 예수의 예언대로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엔도의 표현대로라면, 가쿠레 기리시단의 조상들처럼 후미에를 밟았던 셈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세 번의 부인함으로 인해 예수께 질책을 당하거나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지도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페레이라나 로드리고, 그리고 간교한 기치지로라고 해서 그들의 배교 행위 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며 그 영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았을 지 그 누가 알겠는가!


엔도는 말한다. 자신 역시 페레이라이고 로드리고이며, 또 기치지로라고. 자신 속의 여러 인격을 각각 독립시켜 그것을 작중 인물로 그려나갔던 것이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차이로 인해 다행히(?) 나는 고문과 죽음이 문 턱에 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뿐, 일상 속에서는 밥 먹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매일 배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이다. 가쿠레 기리시단은 일 년에 한 번씩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지속해야 했지만, 그 행위 이외에는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머리와 입으로는 하나님나라를 생각하고 말하고 가끔은 마음까지 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이 관성에 의해 나만의 가치관에 의해 나를 움직인다. 마치 기계 돌리듯 말이다.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겠지만,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통해, 약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신앙 지키기는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지 신은 침묵한다는 메시지나, 침묵 속에서도 말한다는 메시지를 넘어서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종합해 볼 때, 아니 내가 만난 엔도를 느껴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나 늘 잊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스스로 곱씹게 만들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시든지 침묵하지 않으시든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게 된 것이다. 엔도를 통해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약한 페레이라, 로드리고, 기치지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순간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침묵하시든 침묵으로 말씀하시든 상관없이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9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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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선집 박스 세트 - 전12권 헤르만 헤세 선집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외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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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탈리엔의 빛.


헤르만 헤세 저, ‘유리알 유희’를 읽고.


살아가면서 우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생을 마감할까.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알고 사랑하고 섬겼다면 그 인생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이 만남이고 만남의 가치가 양이 아닌 질에 있다면, 의미 있는 인생이란 깊이 있는 교제와 그 사람에 대한 깊고 풍성한 앎에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숨쉬며 서로의 이름을 알고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론 스킨십을 나누면서 오감을 길들이는 것이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반적인 방법이겠지만, 점점 각박해져 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자연에서 우린 더 이상 경이감을 느끼지 못하며, 날마다 편리해져만 가는 문명의 파도에 떠밀려가며 춤 추듯 살아간다. 사람을 직접 만나기 위해 시간을 약속하고 손목시계를 보며 기다리던 낭만은 간편한 스마트폰 덕분에 말끔히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화상전화의 발달로 인해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언제든 얼굴을 보며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낭만과 여유라는 틈새는 효율과 편리가 메워버린 것이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만나게 되었지만, 과연 우린 예전보다 사람을 더 깊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작년 말, 아내로부터 헤르만 헤세 전집을 선물 받아, 올 한 해 다 읽고 모두 감상문을 남기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나 나이 마흔을 넘기며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마음껏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글 읽기와 쓰기였다. 녹슨 고철이나 고인 우물처럼 정지해버린 나의 인문학적 소양을 소생시키고도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계획했던 검소한 방법은 몇몇 고전문학 작가들을, 할 수 있는 한도에서 깊게 만나보는 것이었다. 내게 평생 짐이 되어버린 안경을 쓰게 만들었던 추리소설을 탐독하던 중학생 시절, 어머니의 소개로 접한 첫 고전문학이 '데미안'이었다. 어느덧 25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첫 관문으로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내겐 적격이었다.


또한, 정신적인 전환기를 거치며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란을 경험했기에, 숙명적으로 나는 서로 다르면서도 상보적인 두 세계의 경계에 설 수밖에 없었고,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물음, 그리고 진리를 비롯한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고, 난 외로웠다. 응답되지 않은 무수한 질문들은 늪이 되어 나를 삼키기 시작했고, 나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내 자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치고 힘들었다.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의심의 숲을 지나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쳐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테지만, 지난한 이 시기가 쏘아대는 화살의 방향은 아무래도 외부보다는 내부를 향하는 법이고, 함부로 던져진 화살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다. 내 안의 자아는 그렇게 아파하며 치유를 소망했다. 다행히 반성과 성찰은 현미경과 같아서, 희미하기만 했던 자아에 대한 발견과 재발견, 그리고 하나인 것 같았던 자아가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선 아주 오래된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난 겨우 성장할 수 있었다.


헤세를 읽어낸다는 것은 헤세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두 세계의 존재와 그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넘어 공존과 화합에 이르기 위하여 끊임없이 내적 성찰을 거치며 성장해 나가려는 자아의 고뇌와 의지를 깊숙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렇다. 나는 헤세를 알도록 운명 지어져 있던 것처럼 헤세를 읽어냈다. 내 인생 전체를 봤을 때 헤세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건 참 다행이었다. 그로 인해 난 참 행복했으며, 내 마음은 감사함으로 충만하다. 많은 빚을 졌다.


두 세계는 자아의 서로 다른 외부 세계일 수도 있고, 한 육신을 공유하며 공존하는 서로 다른 두 자아일 수도 있다. 헤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헤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아의 성찰과 성장, 그리고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때론 상반된 두 자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독립된 두 인물을 창조해내기도 하고 ('수레바퀴 밑에', '게르트루트',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해당), 때론 서로 다른 두 자아가 한 인물 안에서 분열하도록 만들어 갈등을 넘어 통합으로 향하는 변증법적 자아성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페터 카멘친트',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 부분적으로 ‘크눌프’에도 해당). ‘유리알 유희’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담고 있다.


두께 (약 800페이지)에 압도당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던 건 어쨌거나 내겐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큼직한 내 손에도 묵직하게 잡히는 두께의 책을 일주일이 넘도록 시간을 들여가며 비로소 읽어냈을 때, 내게 남은 여운은 후련함이 아닌 아쉬움이었다. 800페이지가 오히려 짧게 느껴질 정도로 내 안의 나는 더 읽기를 갈구했다. 뜻밖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아직도 내 가슴 속엔 유리알 유희의 명인 자리를 내려놓고 마기스터 루디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카스탈리엔 밖, 즉 세상으로의 도약을 감행했던 요제프 크네히트와, 그의 마지막을 삼켜버린, 빙하가 만들어낸 그 고요한 호수가 잔상으로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했던 때는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여 아름답게 비치던 어느 스위스 산골의 이른 아침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마음은 아직 그곳에 머무는 듯하다. 호수가 차갑고 슬프다.


'유리알 유희'는 13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쓰여진 헤세의 마지막 소설로써, 그의 노벨 문학상을 결정짓게 만든 대작이다. 여기엔 그의 모든 작품이 다 녹아있기도 하다. 이 책을 그의 전집 중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던 이유는 적어도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을 모두 '유리알 유희' 안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물처럼 숨겨진 각 작품의 정수들이 이 곳에서 모두 한데 어우러져 그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혼자 몰래 마른 침을 삼키며 난 전율했다. 그렇다. 나는 그 전율과 함께 이 책을 읽어냈다. 각각의 작품에서 독립적으로 표현되어진 두 세계의 통합을 추구하는 헤세의 바람은, 그의 작품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땐 바로 이 책, '유리알 유희'에서 마침내 실현되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난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유리알 유희란 모든 학문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고, 고도로 발전된 어떤 기호와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비밀 언어로 표현되어지는 정신적 유희이다. 하나의 유리알 유희는 예를 들어, 천문학과 수학과 음악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총체적이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서양의 문화와 전통 뿐만이 아닌 동양의 지혜까지도 균형 있게 포함하고 있기에, 우린 유리알 유희를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높고 순수한 인간의 정신성을 대변하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을 그 목표로 하는 유희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유리알 유희는 현실에서 존재하진 않는다. 그저 헤세의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피부에 와 닿도록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책을 읽어도 도대체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리알 유희가 탄생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왜 헤세가 이런 상상력을 발휘했는지 조금은 더 이해를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직접 겪었던 헤세는 20세기를 인간의 정신성이 곤두박질친 시대로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순수한 정신적인 부분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된 특정 구역의 이름이 바로 '카스탈리엔'이다. 카스탈리엔은 타락한 정신성이 회복되어 이상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신적 유토피아인 것이다. 이곳은 세속적인 국가를 포함한 세상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면서 국가로부터 모든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세상 속에서 영재만을 발굴하여 데리고 온 후 그들에게 전 인생을 바쳐 오로지 순수 학문 연구를 수행하게 하고, 과거 수도원에서의 생활처럼 금욕적이고 경건하면서도 검소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구별되어진 작은 세상이다.


유리알 유희는 바로 이 카스탈리엔 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즉, 타락한 인간 사회의 반동적인 힘이 끝내 다다른 지점에 바로 유리알 유희가 있는 것이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비록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내적 갈등을 겪다가 카스탈리엔 밖으로 나가게 되지만, 카스탈리엔 안에서 가장 존경 받고 영예로운 유리알 유희의 명인으로 성장했었다. 이 책은 요제프 크네히트의 성장기라고도 할 수 있고, 한 인간의 성장과 자아의 재발견과 성찰, 이어진 내면의 갈등, 그리고 마침내 갈등을 이겨내고 초월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크네히트는 세속적인 부와 명예, 그리고 그것들의 정반대에 위치한, 정신적이기만 한 모습까지도 모두 던져버리고, 보다 통합되고 완전하면서도 순수한 것을 향하여 홀로 꿋꿋이 전진하는 정신적 승리자였다. 그는 실로 세속적 세상도 넘어서고 정신적 유토피아, 카스탈리엔도 넘어선 조화로운 통합의 상징, '유리알 유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해 본 자에게는 중재자나 화해자로서의 역할이 암묵적으로 기대되는 법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현실에서 그들은 그 특권을 거부하고, 오히려 분노에 가득 찬 채 가장 효과적인 파괴자로 군림하거나 아니면 고독한 아웃사이더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은 한 세계를 넘어 두 세계를 모두 얻고 싶어하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남을 향한 삶으로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깊숙이 숨겨졌던 지배욕과 몰래 감추었던 나르시시즘의 본격적인 발아 시기와도 같다. 그 결과, 중재나 화해가 아닌 견제와 장악이 선택되고야 마는 이 비극은 과연 인간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양쪽 진영을 모두 알아 화합과 통합을 도모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른 극소수의 사람들조차도 결국에는 두 세계를 모두 파괴하거나, 두 세계를 모두 등지고 떠나 고독한 방랑자가 되어버리는 이유는 아마도 우린 인간 내면에 뿌리깊게 각인된 근본적인 죄와 악에서 그 답을 찾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특권의 자리에 가도, 범인의 자리에 머물러도, 우린 모두 ‘인간’으로서 같은 선상에 위치해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네히트는 파괴자도 아웃사이더도 아닌 길을 선택했다. 그 둘을 모두 내려놓았지만, 죽기 직전까지 그는 그 둘의 화합과 통합을 위한 소망을 놓지 않았다. 비록 육체적 죽음을 맞이했지만 말이다. 난 이 부분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구별되어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카스탈리엔은 한 땐 세상의 모든 정신적인 부분을 총괄하고 배포하며 타락한 인간의 정신성 회복에 앞장섰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갇힌 우물이 되어갔다. 어찌 보면 크네히트는 지진이 일어날 것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지하는 예민한 동물처럼 카스탈리엔의 몰락을 예감했던 것이다. 카스탈리엔은 우리 시대의 일부 종교집단이나 상아탑 안에 갇혀 국민의 세금만으로 자기 배를 채우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 특권층의 사람들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거나 정화하는 peacemaker 역할이 애초부터 주어졌지만, 그 안에서만 머물며 세상과 소통 없이 고상함만으로 안락하는 peacekeeper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의 거짓과 불의를 정화시키고 그 이전으로 회복시킬 공적인 사명을 담당해야 할 기관이 사적인 안위만을 취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린, 특히 기독교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들은 우리들의 카스탈리엔이 본질적 임무를 다하고 있는지 점검해야만 하고, 우리에게 크네히트가 준비되어 있는지 자문할 때다. 장망성은 세상보다 카스탈리엔에서 먼저 시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세상 속에 함께 존재할 때 카스탈리엔의 빛은 흐려지지 않고 밝게 빛날 것이다. 교회와 나그네 된 하나님백성의 바른 위치와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점검할 때다.


#김영웅의책과일상


1. 수레바퀴 밑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43022562409185

2. 싯다르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50722494972525

3. 게르트루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4071523637622

4. 페터 카멘친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9595666418541

5. 황야의 늑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93746594003448 

6. 크눌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04866382891469

7. 로스할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44402088937898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906654982712608

9. 데미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71433049568136

10. 유리알 유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61378043906966

11. 요양객: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13336575377776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0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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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 / 남방 우편기 펭귄클래식 37
생 텍쥐페리 지음, 앙드레 지드 서문, 허희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제자리.


생텍쥐페리 저, '야간 비행'을 읽고.


늦은 밤, 아직도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아내의 전화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아들은 감기 기운이 있는지 아침부터 코를 훌쩍댄다. 몸도 마음도 무겁다. 나 역시 점심을 거르면서 또 하루를 살아냈다. 하지만,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이렇게 늘 있던 자리에 와 있다. 아내도 두어 시간 후면 올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에 있게 된다. 나는 그제서야 다리를 뻗고 잠을 청할 수 있을 테다.


'제자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제자리는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 아니, 지켜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가만히 멈춰있는 곳이 아니라 또 다시 돌아온 곳이다. 그러므로 제자리는 결코 정적이지 않다. 거기엔 보이지 않는 희생과 부단한 노력이 뒤따르는 법이다. 지친 하루의 끝에서 익숙한 제자리가 선사해주는 따뜻한 국밥과도 같은 친밀감이 없다면, 우린 만족이나 행복보단 불안과 두려움에 쉽사리 노출될지도 모른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우리들의 일상이, 언뜻 보기엔 지루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역동적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누군가의 희생을 배경으로 한다. 평화는 누군가에 의해 지켜져서 우리를 제자리에 있게 해주는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린 감사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현재를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랜만에 베드 타임 스토리를 해주겠다고 하니 아들이 좋아한다. 작년 중순, 그러니까 아내와 다시 함께 살기 전까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치 의식처럼, 자기 전에는 아들에게 책을 읽어줬었다. 그때가 생각난 것이다. 어차피 오늘은 엄마를 보지 못하고 잠이 들어야 하기 때문에, 괜히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인 나라도 뭔가를 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다섯 번째 챕터를 읽어나갈 무렵, 아들은 어느새 까딱까딱 가늘게 움직이다가 다시금 아기가 되어 쌔근쌔근 내 옆에 누워 잠이 든다. 사랑이 샘솟는다. 아들의 볼에 키스를 하고, 이불을 덮어준 뒤, 불을 끄고 방을 나온다.


아내는 아직 연락이 없다. 밤 늦은 시각의 엘에이는 위험하다. 운전 중일까봐 전화기를 들었다 내려놓기를 여러 번 거듭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밖에는 없다. 무력함에 기운이 더 빠진다.


리비에르가 파타고니아선 우편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물론 20마일 거리의 기다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소장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공포와 두려움을 리비에르는 밤을 지새며 홀로 고스란히 느꼈겠지만 말이다. 한 세기 전, 야간 비행을 홀로 추진하여 실행에 옮겨낸 그이기에, 한 대의 우편기가 밤을 뚫고 날아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이 그에게 있어선 피를 말리는 일과도 같았을 것이다.


같은 시각, 결혼한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파비앵의 아내는 노심초사 남편을 기다리며 밤의 적막을 꼭 잡고 있다. 그녀 역시 리비에르와 마찬가지로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파비앵은 남극지방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위험천만한 야간 우편기를 몰며 날아오는 조종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비행기 안에서 난항을 겪고 있었다. 리비에르와 파비앵의 아내가 기다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은 얄미우리만큼 청명한 별빛과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지만, 도착 예정 시간이 넘어 통신도 두절된 채 파비앵은 거대한 폭풍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 거대한 폭풍은 하늘을 구름 위와 구름 아래, 둘로 갈라놓고 있었다. 파비앵은 마침 천둥과 번개가 동반된 구름 아래의 세상에서 극도의 긴장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어둠 속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고도를 올려 구름 위로 올라왔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실 같은 별빛 하나도 희망의 모든 것이 되는 법이다. 그는 켭켭이 쌓인 구름 속에서 아주 잠시 나타난 가느다란 빛을 따라 구원이라도 받는 듯  탈출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바뀌었다. 고요한 평화. 저 잔잔한 달빛이 이렇게도 눈부신 적이 있었던가. 온 천지가 달빛을 반사하는 아름다운 빛의 향연 속으로 들어간 파비앵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 그 빛의 향연은 축제가 아니었다. 


파비앵의 비행기는 곧 연료가 바닥날 예정이었다. 가까스로 거센 폭풍을 뚫고 잠시 평화를 맛보고 있지만, 구름 아래의 세상에서 폭풍과 씨름하느라 연료를 많이 소진해버린 것이었다. 육지에 착륙을 하려면, 번쩍번쩍하는 화려한 뇌우를 가득 머금은 검은 구름층을 꿇고 내려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죽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다. 연료 계기판은 30분 정도 주행할 양만을 무덤덤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고요를 누리고 있지만, 곧 연료가 바닥날 비행기 안에서 폭풍 때문에 도저히 육지로 내려갈 수 없는 이 역설적인 평화.  이 기막힌 외통수. 


조심스레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다. 아아, 감사하다. "오늘도 수고했어. 사랑해." 하늘 아래,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 은혜다. 파비앵과 그의 아내, 그리고 소장 리비에르와도 같은 이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아내는 이런 자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린 오늘밤도 모두 제자리에 있다. 오늘은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잠을 이룰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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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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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질병일까?


스캇 펙 저, '거짓의 사람들'을 읽고.


"악은 질병일까? 치료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이질감이 먼저 느껴지는 건 아마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신학적으로 아주 오래된 문제인 '악의 존재와 근원'에 대해서 질문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명쾌한 답이 없지만, 그래도 이 질문은 꽤 익숙하기라도 하고, 의미 있는 사유거리로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악을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본다는 관점이 낯설게만 느껴진 것은, 그만큼 우리가 '악'을 인간이 다루거나 조절할 수 없는 어떤 상위 개념으로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다. 악은 과학적인 접근이기보단, 아무래도 우리에겐 형이상학적인 접근으로 다가서야 하는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글에서 자주 인용되어 궁금증을 자아냈던 스캇 펙의 책을 이제서야 한 권 읽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거짓의 사람들'. 내용도 역시 그랬다. 읽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왜 스캇 펙을 자주 인용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깊고 예리한 통찰이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을 넘어 책 속으로 빨려 들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책을 천천히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저자가 직접 경험했던 몇몇 상담 사례들을 기반으로 이끌어낸 기독교적인 해석과 주장, 그리고 그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성경에서, 거짓의 아비는 사탄이다. 보이지 않는 악의 실체다. 비록 성경을 모르더라도, 신문과 뉴스를 통해, 악한 사람들은 거짓을 즐겨 하며 거짓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이 책에서 '거짓의 사람들'이란 곧 '악한 사람들'을 말한다.


그럼, 악한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 거짓말쟁이만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진 않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은 그 대상이 타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악한 사람들의 타겟은 타인이기보다 자기자신이다. 거짓의 사람들은 남을 속이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속인다. 속이는 이유는 숨길 것이 있기 때문이고, 숨기는 이유는 숨길만한 것이, 어쩌면 숨겨야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발각되면 자신의 입지가 난처해지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숨김으로써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거짓은 진실보다 빠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때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걸며, 그리 숨기는 것일까? 바로 자신의 악한 의지다. 악한 의지는 '나'의 이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거나 파괴하는 행위까지도 서슴없이 일삼을 수 있다.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은 악의 본질인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evil (악)의 철자를 거꾸로 할 때 live (살다)가 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스캇 펙은 다음과 같이 악을 정의한다. '악이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데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또 같은 맥락에서 그는, '악이란 나르시시즘이 위협을 받을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깊은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에서 정의하는 죄를 자기중심적인 교만함으로 해석할 때, 나르시시즘은 죄의 결과이자 악의 VIP 보호 대상이다. 또한 악은 인간을 매개로 할 때만 살인과 같은 파괴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에, 악은 인간을 죄에 빠뜨린 뒤 숙주로 삼아 파괴의 무대 위로 올리고 자신은 무대 뒤에 숨어버린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이란 자기중심적인 의지의 표출로 인해 곤란해진(질) 입장을 복구하기(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거짓을 무기 삼아 죄를 숨기고 악을 기쁘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죄와 악, 그리고 자기애, 나는 이 세가지를 악의 삼위일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느 하나도 나머지 둘을 제외하고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을 정신분석학적 경험을 기반으로 정의하고, 악이 어떻게 사람을 통하여 실력을 행사하는지 고찰해 보며,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면에서 이 책은 탁월하다. 그러나 저자가 제안하고 바라는 대로 악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그는 악한 사람들을 나르시시즘적 성격 장애의 특수한 변이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다. 악함을 나르시시즘과 연결시키고, 그런 사람들을 강박증이나 공포증 같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과는 달리, 조금 더 특별하고 심각한 환자로 다뤄야 한다는 의미라면, 그의 제안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을 질병으로 덥석 규정해 버린다면, 그 진단을 받은 환자의 경우, 자신을 어떻게 여기게 될까? 앞서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하거나 다룰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나 개념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이름을 달리 해서 악을 질병으로 규정한다 해도, 자기가 악한 사람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면, 십중팔구 그들은 그 진단 자체를 부인하거나, 그 진단을 내린 의사를 신뢰하지 않고, 그를 망상가나 종교가로 치부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질병으로써 악을 규정하는 것은 치료 대상자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치료자 입장에만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런 경우 원치 않게도 인권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어, 혐오와 배제, 차별이 횡행하게 될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악한 사람을 진단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문제 또한 모호할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악함과 악하지 않음의 경계는 어디일까? 과연 그것을 수치화하거나 객관화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진단하는 의사마다 같은 진단이 가능하기나 할까? 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무래도 스캇 펙의 악을 질병으로 규정하자는 주장은, 악이란 것을 정신적 문제 중에서도 증세가 심각하여 어쩌면 과학적인 영역을 넘어설지도 모르는 문제라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치료하려면 차라리 종교적인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귀신 들림까지도 질병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귀신을 사람 몸에서 쫓아내는 '축사자 (엑소시스트)'를 악을 치료하는 치료자라고 말한다. 사실 난 이 부분에서 의문을 넘어 왠지 모를 거부감까지 느꼈다. 2천년 전의 사건을 다룬 성경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영화나 소설, 그리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몇몇 괴기스러운 사례들과 같은 비과학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까지도 과학적인 의학이라는 박스 안으로 집어넣어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를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그의 주장이 개인적으로는 무척 불편했던 것이다. 기독교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책 전반에 걸쳐 보이지만, 축사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과학이나 의학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색채보다는, 다분히 그가 경험한 단 두 차례의 축사 경험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하여 일반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으며, 그 경험에 저자 자신의 기독교적인 신앙과 믿음, 사상을 정신분석학적인 자신의 직업적 전문성과 함께 한데 버무려 끼워 맞추려는 의지가 보였다. 귀신 들림을 얘기하는 이 대목에서만큼은 그의 억지스러운 면과 치우친 면이 꽤 많이 부각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이자 과학자인 나에게도 이렇게 비춰졌다면, 비기독교인과 과학적인 사고에 길들여지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부분이 과연 어떻게 비춰질지, 나로선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한 축사에 대한 부분이 이 책의 주옥 같은 나머지 부분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책 전체나 저자에 대한 신뢰도까지도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난 우려가 되었다.


과학자나 신앙인으로서도 여전히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부분을 겸손히 신비로 놓아두는 자세가 그에게 필요하지 않았나 싶고, 이를 생각하면 그저 아쉽기만 하다. 니체와 헤겔, 그리고 데리다가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고 살려낸 '무'의 개념에 착안하여 생각해 볼 때, 그는 모든 것을 법칙화하여 술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칸트와도 닮은 것 같고, 모든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했던 과학주의적인 구조주의 사상가들과도 비슷한 면이 많은 것처럼 여겨진다. 풍부한 경험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사명감과 책임감까지 덧붙여 그가 주장하고 바랐던, 악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일의 문제점은, 악을 질병으로 규정하면 마치 치료가 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 있다. 그는 악의 치명적인 독성을 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하여, 악과 악한 사람들이 가진 훨씬 커다란, 아직 드러나지 않아 모르는 부분인 '무'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과학과 의학으로 악을 다스리려고 시도했던 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악한 사람도 악 자체가 아닌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했던 한 사람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캇 펙은 오래토록 사람들에게 기억되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똑같이 배우거나 경험하진 않지만,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심리에 대하여 그는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신비한 타자의 영역을 존중하여,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아 모르는 부분이 언제나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을 감안하고, 좀 더 신중하고 준비된 자세로 악의 치료를 고찰하고 도모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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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양장)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 옮김 / IVP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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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유진 피터슨 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IVP 출판)을 읽고.


정갈하면서도 뼈가 있고,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을 만난다는 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커다란 행운이다. 그 글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보석 같은 메시지를 들추어내어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때보다 더 큰 신선함과 놀라움, 그리고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을 조용히 전달해주는 글. 난 이런 글을 만날 때면 어느새 경건한 자가 되어 한층 더 낮아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마침내 나를 넘어서는 기로에 서게 된다. 벽을 뛰어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영문판, 원서 제목은 'Leap over a wall'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야 처음으로 만난 유진 피터슨의 저서,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은 내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다윗의 이야기가 주로 적힌 사무엘 상하서를 기본 틀로 하여, 유진 피터슨은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들어 익숙한 이야기에서부터, 비록 잘 알려져 있진 않으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에 이르기까지, 때론 상상력을 발휘하여 총 스무 개의 에피소드를 짤막하게 다시 들려 주며, 그것들이 가진 깊은 의미를 캐내어 현재 우리가 숨쉬고 있는 21세기로 소환해낸다.


2천 년이 훨씬 지난 다윗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걸어오는 말을 통해 저자가 소환해낸 메시지는 좌로나 우로, 혹은 도덕주의나 세속주의로 치우친 영성이 아니다. 제목이 분명하게 말해주듯, 그가 책에서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영성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밟고 있는 이 땅, 이 현실에 철저히 뿌리박은 영성이다. 눈물을 자아내고 적당한 반성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힘은 있으나 구름 속에 있어 손에 잡히지 않는, '영성'이란 탈을 쓴 막연한 '감상'은 결코 세상 속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이 될 수 없다.


다윗 이야기에는 우리가 흔히 정의하는 기적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으며, 저자는 다윗 이야기야말로 현실에 기반한 하나님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을 인식하고 올바른 영성을 기르는 데 적절하다고 말한다. 다윗은 제사장도 아니었고, 선지자도 아니었다. 그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위대한 사무엘이 방문했을 때조차 그의 앞에 데려오지 않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만큼 주목할 것 하나 없는 막내였고, 그저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는 평범했다.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독차지하지도 않았다. 그에겐 신비한 힘이 솟는 머리카락도 없었고, 기도할 때마다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도 없었다. 알고 보면 다윗은 그야말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일개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은 거룩한 성소나, 제사장들의 구별된 장소나, 기적을 일으키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신비한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나라는 우리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 실재하며 거기에 충만하게 임한다.


영성은 어떤 신비한 힘을 뜻하지 않는다. 영성이란 인간이 신격화되는 모습이 아닌, 가장 인간다워지는 모습에 있다. 그리고 이는 곧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모든 하나님백성이 지녀야 할 궁극적인 모습일 것이다. 원래 창조된 인간으로 회복되어지는 여정, 우리는 이를 성화 과정이라고도 하고, 영성이 훈련되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을 감히 일상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우리는 모두 천로역정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한 영성 훈련이란 우리의 힘을 키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어떤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쓰임 받는 깨끗하고 투명한 질그릇이 되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거기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만이 언제나 가장 우선시되는 현장이다. 그리고 그 현장은 바로 우리의 일상,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메시지일 것이다. 바로 그때 우린 현실에 가로막힌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우린 다윗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영성을 배우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벽을 뛰어넘는 현장은 곧 우리 자신을 뛰어넘는 현장이며, 사탄의 체제에 대항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땅을 일구는 현장일 것이다.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들의 일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 받고 나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계략으로 곤경에 처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갈 정도로 환란을 겪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늘 침묵만을 지키고 계신 것만 같다. 그 세력은 힘이 있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일 때도 많다. 때론 사탄의 체제 아래 놓여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질서를 지키며 연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정의와 공의의 기준조차 애매모호해질 때 쯤이면 우린 자신의 존재까지도 원망하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충동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지만,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문제들은 안팎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터진다. 승승장구할 때도 경험하지만, 바로 그때 유혹에 휘말려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셨고 또 계속해서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조차도, 죄와 악으로 가득 차 제거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조차도 모두 합하여 선을 이루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란을 이겨내는 묘안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부족함을 메우는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신뢰하며 소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부족함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일상이라는 인생 여정을 통하여 결국 우리가 얻는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영성이다.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하나님나라의 영성은 죄와 악으로 물든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다. 어두운 땅 속에 박힌 씨앗 하나가 발아하여 대지를 뚫고 나오는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그 견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 생명이 충만한 영성은 죄와 악으로 물든 현실이라는 대지를 뚫고 나와 바로 그곳에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만드는 힘이다. 후회와 미련, 원망과 절망으로 가득하고, 철저히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해 보이는 우리들의 현실 속에 깊게 뿌리내린 영성이야말로 생명이 있기에, 바로 그 생명은 하나님이기에, 마침내 싹을 틔우고, 그 대지를 뚫고 자라나 열매를 맺고,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다.


다윗을 생각한다. 양치기에서 소년 영웅으로, 궁중 악사로, 도망자로, 작은 공동체의 리더로, 왕으로, 그리고 모든 힘을 내려놓고 무릎 꿇고 앉아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할 줄 알았던 하나님백성, 다윗. 다윗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인 나를 돌아본다. 내 현장을 돌아본다. 영성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 여정과 현재 나의 일상 속에 거하는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근력, 그 작은 몸부림. 나를 통해서도 누군가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꺾임조차도 생명의 빛에 의하여 굴절되어 무지개가 되고, 남에게 힘이 되는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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