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손성현 옮김, 김진혁 / 포이에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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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를 향한 갈망, 그리고 진창 속에도 비치는 소박한 구원의 빛줄기.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저, ‘도스토옙스키 (부제: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를 읽고.

20세기 저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1919년 ‘로마서’ 제 1판을 출판한다. 이어서 3년 뒤 1922년, 제 2판을 출판한다. 2판은 1판과 많이 달랐다. 전면 수정이었다. 바르트 스스로도 거의 모든 부분을 다시 썼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의 신학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 변화로 인한 차이 때문에 ‘로마서’ 제 2판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다. 도대체 3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한 가지 단서는 ‘로마서’ 제 2판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판 서문에는 없던 내용이다. 거기서 바르트는 자신의 새로운 성서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키르케고르, 그리고 뜻밖에도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언급한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학자도 철학자도 아닌, 학위라곤 하나 없던, 러시아 출신의 생계형 소설가 이름이 당시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졌던 키르케고르와 나란히 전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1판과 2판 사이의 3년이란 시간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균열의 틈으로 시대를 해석하는 새로운 신학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해제’에서 김진혁이 썼듯) ‘인간성의 깊은 어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식 없이 응시하면서, 깨어지고 부서진 인간을 찾아오는 신적 자비에서 희망을 찾는 신학’이었다. 하나님의 내재성보다는 다시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학은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배우지 못한 통찰을 던져줄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그 누군가가 바르트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였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바르트에게 소개해준 친구가 이 책의 저자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진혁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바르트가 이후에 밝혔듯 투르나이젠이 없었다면 바르트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그저 그런 시골 동네 목사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신정통주의의 문을 연, 20세기 이후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바르트 신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었으며,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투르나이젠이었다. 

신학자 혹은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단 바르트의 친구로서 더 잘 알려진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읽고 깊이 연구했으며, 대부분의 강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연구는 1921년 스위스 아라우 대학생 총회에서 행한 강연으로 세상에 공식적으로 선보였으며, 그 강연 내용을 다듬어서 출간한 책이 바로 이 책 ‘도스토옙스키’이다. 번역은 ‘로마서’ 제 2판을 번역한 손성현이 맡았고, 김진혁이 해제를 담당했다.

감상 및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일러둘 것이 있다. 이 책의 이해와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즉 5대 장편이라 일컬어지는 소설 중 세 편은 먼저 읽고 접하는 편이 좋다. 그러한 공감대 없이 무턱대고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난해하다거나,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거나,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고 진지하게 그와 그 작품들을 이해하려고 애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비록 200 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사상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하는데 탁월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그 작품들 이면에 흐르는 중심 사상에 대한 해제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난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강력히 추천한다.

평온한 삶을 살던 사람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만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저자 투르나이젠은 그것이 마치 눈 앞에 갑자기 원시 야생의 세계가 펼쳐지는 느낌과 같을 것이라고 표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맛을 본 독자들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별다른 표현이 없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포장을 다 뜯어내고 남은 날 것 그대로의 삶, 그 이면에 붉은 피처럼 선명하게 녹아있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창 가운데서도 꺼지지 않고 진주처럼 빛나는 저 너머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갈망의 불씨, 그리고 마침내 저 너머에서 소박하게 찾아오는 구원의 빛.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대부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이유는 결국 우리네 인생도 작품 속 인생과 하등 다를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성의 불가사의함과 수수께끼로 가득찬 원초적인 삶을 마주하게 되고, 그 안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투르나이젠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것처럼 이 단순한 질문이 곧 도스토예프스키와 우리의 공통된 질문,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궁극의 질문이다. 저자는 이 질문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던진 유일한 질문이라고까지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도스토예프스키를 피할 수 없다며 투르나이젠은 그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통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책상 앞이 아닌 현실 한복판에서 그 현실을 이야기로 만들었고, 그 시대의 흐름을 낱낱이 관찰하고 파악한 후 작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갓 잡은 큰 물고기가 퍼덕대는 것처럼 살아있다. 야생 그대로의 느낌이다. 또한, 저자의 표현처럼, 그는 인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독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속에서 자기자신과 자기자신의 인생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순히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일종의 충격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것저것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답을 얻은 것 같았으나 그 답이 진짜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우린 노출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결코 경솔하게 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해석되어지지 않은 삶을 우리 앞에 펼쳐보일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 차원 높은 의미의 사실주의자에 불과하다. 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낱낱이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최고의 심리학자라고 치켜세우지만 어쩌면 그건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무런 해석이나 가치판단이 가미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저자가 간파했듯,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단순한 질문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것이 이미 해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뒤늦게 깨닫도록 이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묻는 그 질문 자체에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수수께기와도 같은 인간, 결코 한 마디로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인간, 한계를 가진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저 너머와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심겨져 있는 인간, 그래서 그 무엇을 갈망하는 인간. 그렇다.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야말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한 아름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제 2장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장편에 등장하는 핵심인물, 즉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세 형제들, 그리고 ‘백치’의 미시킨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역으로 고찰한다. 각 작품에 대한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죄와 벌.
관 같이 비좁은 방 안에서 홀로 세상과 타자와 단절된 채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어설픈 공리주의에 입각한 이념에 빠져 살인을 계획하고, 불행하게도 그것을 실행에 옮겨 버린다. 그 얄팍한 이념의 핵심에는, 자기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인 (헤겔이 말한 ‘세계사적 개인’에 상응하는 존재)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었던 그의 내밀한 욕망이 숨어있었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했듯, 이를 달리 표현하면,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에게도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과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는 도끼를 휘두르고 나서 처절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결국 자수하게 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가서도 몇 년 뒤에서야 소냐를 통해 인간의 이념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저 너머로부터 오는 그 무언가를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곧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범인이 되려고 했던 그 무모한 도약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시도에 다름 아니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자신도 한계를 지닌 유한한 인간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투르나이젠은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얻은 깨달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의 참된 삶, 본질적인 삶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 너머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심연의 바닥에 다다랐을 즈음에야 인간이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투르나이젠은 ‘죄와 벌’에서 재앙의 중심이 이념에 있었다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그 중심이 여자 (그루셴카)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 난 이 해석에 완전 동의하진 않는다. 여자뿐만이 아니라 돈 문제를 빼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와 벌’에서의 주인공은 명백하게 라스꼴리니꼬프 한 사람이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죄와 벌’에서처럼 재앙의 중심에 어떤 한 가지가 놓여 있다고 동일한 잣대로 해석하기에는 뭔가 억지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르나이젠은 이 작품에서도 ‘죄와 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인간이 결국 다다른 곳은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자리였다고 말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핏빛어린 비극 안에도 여전히 최종적인 구원의 불씨가 남아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카라마조프 가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무조건 구제불능의 운명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카라마조프 가에 흐르는 총체적 난국이 우리네 삶에 흐르는 그것과 다를 게 없다면, 우리가 처한 운명이라는 굴레 안에도 구원의 빛이 흘러들어 아무리 깊은 바닥에서도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백치.
바보, 정신박약, 머저리, 무지, 그리고 간질. 미시킨 공작에 대한 세상의 평가다. 그러나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러한 백치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온갖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뒤흔들고, 그들로 하여금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게 만든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백치의 존재는 “인생의 참된 의미란 얼마나 깊이 감춰져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과연 누가 백치이고 누가 지혜자인가? 투르나이젠은 이러한 역설적인 인물 미시킨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 그의 절대적인 모호성에 있다고 본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지칭한다. 인생의 거대함, 끔찍함, 모호함에 대한 놀람과 경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어린아이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존재. 흡사 그리스도 예수를 떠올리게도 만드는 존재.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백치’를 통해 다루고 있는 것이 곧 삶의 표현 불가능성,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비라고 짚어낸다. 이는 라스꼴리니꼬프를 뒤흔들었던 것과 같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격정에 사로잡혀 뛰어들었던 것과도 같다. 이어서 저자는 나스타샤가 로고진의 격정보다는 미시킨의 연민과 사랑에 더 마음이 흔들렸던 이유가 미시킨을 통해 드러나는 용서의 빛, 즉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빛 때문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결국 ‘백치’ 역시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처럼 인간의 삶 속에서 얽히고설킨 모든 혼란의 해명과 해결이 갖는 가장 심오한 의미를 짚어주는 단어가 용서, 곧 ‘죄의 용서’라고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다 보면 저 너머에 있는 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같아지고, 그 존재로부터 전적으로 비쳐오는 구원과 용서의 빛을 발견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세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들여다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 (혹은 신학)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 곧 하나님을 향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을 지표 삼아 옆길로 새지 않고 솔직하게 정면으로 그 질문을 마주하도록 유도한다. 유한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알고 보면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인물들. 투르나이젠은 그들 모두가 자기 자신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키는 존재라고 해석한다. 곧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우리 자신과도 같다면, 우리 모두 역시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는 존재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 사랑과 용서를 그려내는 작품은 이 세상에 허다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양극성’이라고 투르나이젠은 말한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실적인, 너무나 사실적인 인물들의 인간성을 작품 속에서 철저히 해부해 놓는 동시에, 그 인물들이 삶과 죽음 너머의 세계를 향해 영원히 도약하는 모습까지도 한 작품 안에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투르나이젠은 이 양극성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 인간관의 총체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고 하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특성과 비인간적이고 탈속적인 특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역설한다. 즉, 투르나이젠이 간파한대로,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핵심적인 경향인 것이다.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강조한 핵심적인 통찰은 곧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결코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 즉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기울인 유일한 노력은, 그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상화된 인간 영혼의 일부나 이 세상 현실의 일부로, 다시 말해 오로지 신적인 가능성에 속한 것을 또다시 인간에게 가능한 것, 혹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구성하는 관계, 즉 인생 저편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알고자 하지 않고 감히 신과 같아지려고 도약한다. 곧 반역이다. 반역한 인간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스메르쟈코프처럼, 혹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모든 일이 허용되었다”라는 구호를 따르며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모순됨, 즉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알고 향하도록 지어진 피조물이지만, 정작 그 궁극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그와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면서,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맞닿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을 이야기하면서 종교와 교회를 겨냥한 그의 공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투르나이젠은 이러한 면에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인물 이반, 이반이 쓴 서사시 ‘대심문관’, 그리고 이반이기도 하고 대심문관이기도 하며, 혹은 이반과 대심문관을 소유하고 조종한 악마에 대해서 언급한다. 

앞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기울인 유일한 노력은, 가짜 하나님을 진짜로 만들지 않도록, 즉 그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다움'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켜내는 것’이었고 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반역이란 초월적인 하나님을 끌어내려 알 만한 하나님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아론의 송아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문제 상황을 탈피하려고 하는 행위들의 전반일지도 모른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당시 세상의 종교와 교회가 교묘하게 이런 인간적인 시도에 가담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반역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데, ‘대심문관’은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는 오로지 ‘자유’만을 선사해주었는 데 반해, 대심문관으로 대표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연민보다 더 큰 연민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훨씬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사랑을 과시하며 인간의 짐을 덜어주고 필요를 채워주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을 드러낸, 일종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고소장인 셈이다. 이 고소장이 주장하는 바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알도록 힘쓰고 돕고 전파하고 그 나라를 살아내는 모델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예수가 인간에게 주었던 자유를 빼앗은 뒤 오히려 하나님 자리를 꿰차고 거짓 선지자 혹은 가짜 하나님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의 껍데기는 그대로이나 예수가 증발한 교회. 어찌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건 교회가 아니라 악마와 손잡은, 혹은 악마의 현현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이러한 엄청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서사시가 바로 이반이 만든 ‘대심문관’이다. 

마지막 장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문장 하나로 운을 띄운다. “형제들이여 인간의 죄 때문에 놀라서 뒤로 물러서지 말라. 비록 죄를 지으며 살고 있더라도 인간을 사랑하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형상이니라.” 톨스토이는 평생토록 이 비극 너머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일을 통해서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올 때 서로가 불안정한 존재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형제애가 비로소 가능해질 거라면서 ‘죄의 연대’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인간은 깊은 곤경 속에서 함께 버티고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모든 생명과 모든 자연과 모든 인간을 향해 적극적인 관심을 쏟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긍정하되, 그 존재가 지금 그대로의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역설적 긍정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톨스토이와 구별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신학은 다음 문장으로 다시 풀어 쓸 수 있다. “당신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와 더불어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죄 안에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투르나이젠이 강조한 것처럼,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모든 생명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실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곳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지금 이 모양 이 꼴의 세상 한복판, 즉 인간 존재의 수렁 같은 문제 상황 속이라고 한 데 반하여, 톨스토이는 그야말로 거센 반항심 속에서 사회에 비판을 가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존의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너그러웠던 것이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너무나 불의하고 끔찍한 사건에서도 그 속에 감춰진 긍정성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혁명의 파토스가 아닌, 그 위대한 이해와 용서의 파토스가 작동한다. 

투르나이젠이 꼽은 또다른 톨스토이와의 차이점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건주의적인 참회의 노력을 떠올리게 되는 데 반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비록 그런 결단과 전환의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회심자와 비회심자,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하나님 자녀와 세상 자녀로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경건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런 이분법적 구분이 있어야 하고, 심지어는 그러한 구분이 목표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주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예수 안에서도 오히려 이 세상과 하나님, 죄인과 의인이 모두 함께 어우러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려내는 ‘결정적인 변화’ (즉, 구원의 빛이 임하는 시기)는 인간이 종교적 도덕적 노력으로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단계나 가장 높은 단계가 아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여정은 인생의 바닥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 가시화된다. 결정적인 변화는 인간이 발버둥치고 억지를 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그분의 영원한 능력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그 변화를 위한 길은 특별한 성인이 가는 길이 아니다. 애쓰며 노력하는 사람의 길도 아니다. 오히려 누가봐도 세상의 자녀인 이들, 심지어 죄인과 창녀와 살인자, 불안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인 것이다. 용서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은 의인의 길이 아니라 죄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요소 하나는 어린아이의 존재다. 그는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요구한다.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어린아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인생 앞에 서라고. 절대적인 진실성을 지니고 순진한 무방비 상태로 삶을 맞이하라고. 마치 ‘백치’의 미시킨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알료샤처럼. 왜냐하면 자신을 하나님께로 활짝 열고 어린아이로 돌아간 사람 속에서는 서서히, 혹은 갑자기 가장 위대한 것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에 대한 감각, 사랑과 구원의 작은 불씨, 한 조각의 부활 말이다. 

한 가지 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하여 따뜻한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점은, 그는 항상 낮은 곳에 있는 겸허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투르나이젠도 간파했듯,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과 혁명보다는 그들의 감추어진 힘에 더 큰 기대를 걸기도 했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부정적인 느낌을 가진 사람은 아마도 읽다가 중간에 그만 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만약 한 작품이라도 끝까지 읽고, 가만히 그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난 누구나 가슴 따뜻해짐을 경험할 거라고 믿는다. 죄의 심연에도, 그 참혹한 어두움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실뿐 아니라, 아직 죄로 흥건히 젖어있는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인 나는 다시금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생각하며 인간의 정체성을 묵상할 수 있었으며, 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발적 순종으로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다짐까지 조용히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 이면에 흐르는 그의 사상과 신학에 대한 해제를 읽고나니, 그 어떤 신학책, 철학책보다도 묵직하게 내 마음을 울렸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마치 흩어졌던 파편들이 모여져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7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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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문장으로 읽는 구약 일곱 문장으로 읽는 성경
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김명희 옮김 / IVP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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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하나님나라 백성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일곱 문장으로 읽는 구약’을 읽고.

성경은 드라마다. 성경은 규율이나 교리로 가득찬 책이 아니라, ‘창조’라는 시작과 ‘새창조’라는 끝을 가진 거대한 내러티브이며, 그 안에 구속이라는 플롯을 담고 있는 온 세상에 관한 방대한 이야기다. 또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이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다양하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전히 진행 중인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초청 받는다.

신약의 존재는 구약의 폐기를 뜻하지 않는다. 바울을 잘못 해석한 나머지 율법과 복음의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구약을 율법, 신약을 복음이라고 여기거나, 예수를 잘못 해석한 나머지 구약의 옛 계명은 모두 폐기되었고 ‘사랑’이라는 새 계명만이 유효한 것처럼 구약을 그저 오래된 율법책 정도로 축소, 폄하, 왜곡시켜버리는 행위는 지나친 경솔함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예수와 바울이 어릴 적부터 읽고 듣고 암송하고 묵상했던 성경은,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선포했던 근거가 되는 책은 신약이 아닌 구약이었다는 사실을 우린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거대한 내러티브이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은 모두 이 내러티브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현실이라는 컨텍스트를 끊임없이 해석해나가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발견, 적용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근거는 이 거대한 내러티브이자, ‘이스라엘’이라는 특수성의 옷을 입고 있지만 ‘열방’이라는 보편성을 담지한 이야기, 즉 구약을 통해야만 한다. 그 안에 그리스도인의 뿌리가 있고 그리스도인의 변하지 않는 컨텍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약의 예수는 약속의 성취이고, 그 약속은 철저히 구약에 기반한다는 점을 이해할 때, 구약은 결코 그리스도인에게 악세서리 같은 정도의 책이 아니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일 것이다. 

언제나 기억하기보다 잊어버리기를 잘 하는 우리들에겐 정리가 필요하다. 실제로 성경 곳곳에서도 성경이라는 거대 내러티브가 간략하게 요약 정리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가 간파한 것처럼, 예수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두 가지로 성경을 정리했으며, 미가는 ‘정의와 인자와 겸손’ 세 가지로, 모세는 ‘경외하고 행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지키는 것이 전부’라며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또한 사도행전에 소개되는, 돌에 맞아 죽어간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 지도자들 앞에서 거침없고 담대하게 행해졌던 베드로의 설교,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쓰임 받은 바울의 수 차례 설교에 이르기까지 우린 성경이 함축적으로 정리되어질 때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되었던 역사를 목격할 수 있다.

저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성경을 일곱 개의 막 (1. 창조 – 2. 반역 – 3. 약속 – 4. 복음 – 5. 선교 – 6. 마지막 심판 – 7. 새창조)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로 본다. 이는 전통적인 ‘창조 – 타락 – 구속’의 플롯이 가진 허점들을 보완하고 더욱 풍성한 시각을 갖게 해주는 동시에 그가 대표적으로 칭한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백성의 선교’ 개념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 책에서 구약을 대표적인 일곱 문장으로 크게 정리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의 새로운 정리에서 우린 또 한 번 새롭게 구약 전체를 바라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더욱 풍성히 알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기존의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저작을 읽어본 사람들에겐 그리 새롭지 않다. 일곱 문장 중 앞의 네 문장은 여느 책과 마찬가지로 창조부터 시작해서 다윗의 왕정시대까지 이르는데, 각 챕터의 핵심은 저자가 이미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말했던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시내산) 언약’, 그리고 ‘다윗 언약’에 대한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첫 장 ‘창조’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좌표와 정체성, 죄와 악의 출현이 야기한 문제와 그 해결책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의 일부로 그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하나님을 대리하여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존재다. 이때의 다스림, 즉 왕권은 곧 섬김이며, 바로 그리스도의 방식이다. 반역과 불순종으로 인해 인간에게 들어온 죄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만이 제공하실 수 있다. 곧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 계획이다. 좋은 소식은 이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창조 세계 전체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운명은 이 땅 밖으로 구조되어 다른 어딘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창조 세계 전체와 함께 구원받고, 구속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창조 세계에는 다시 저주가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장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 즉 창세기 3-11장까지의 모든 문제들에 답을 제공하는 이야기의 서두를 그 핵심으로 한다. 저자는 아브라함 언약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고 계셨지만, 그분의 눈은 온 세상을 향해 있었다는 점은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는 게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택함을 받았던 것은 배타적인 특권이 아니라 막중한 책임이었다. 비록 그들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예수가 이를 성취하셨다).

세 번째 장, ‘출애굽’에서 저자는 ‘구속’에 이은 ‘책임’을 강조한다. 곧 시내산 언약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율법은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부과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율법은 이미 구속받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물이다. 출애굽 이후에 시내산 언약이 있지 않았는가. 다시 말해, 하나님의 율법은 이미 그분의 구속하시는 사랑과 능력의 은혜를 경험한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이 초점을 맞춰야 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라 생각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계획되었던 제사장 민족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것에 우리의 눈이 머물러야 할 것이다. 개인구원에 천착한 사적인 믿음이 아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윤리적 실천, 즉 복음의 공공성에 복음의 본질이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장, ‘다윗’의 핵심은 부활하신 다윗의 자손 메시야 예수가 모든 창조 세계의 주이자 왕이시라는 고백이다. 이는 바울 복음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확언이기도 한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수행할 통치자로서 부르신 다윗의 자손이 영원히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모세오경과 역사서를 뒤로 하고, 다섯 번째 장 ‘예언서’를 다루는 다섯 번째 문장은 저자가 ‘하나님백성의 선교’에서 자세하게 쓴 하나님백성의 윤리적 변화와 순종에 대한 내용을 기반으로 하며,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서 다룬 내용도 일부 포함한다. 윤리적 변화 없는 외형적 종교를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실제적인 사회 정의가 결여된다면 아무리 열정적인 예배라도 무가치할 것이다. 제의는 사회적 악을 상쇄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공의와 긍휼과 겸손이며, 이는 예수도 동의하신 바다. 또한 이 배경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 우리 시대에도 조용하지만 거대하게 울러 퍼지는 메아리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표현한대로 하나님나라에 굴복하는 일은 철저한 윤리적 변화를 뜻한다. 순종은 제사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그 순종은 복음의 공공성이 확립되어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가 행해지는 하나님나라의 실현에 있다.

여섯 번째 장 ‘복음’에서 저자는 예언서에 나타나는 복음에 대한 기대를 전한다. 예언자들은 경고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다. 이는 여섯 번째 문장, 즉 이사야 52:7이 잘 드러내준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마지막 일곱 번째 장 ‘시편과 지혜서’에서 저자는 시편과 잠언, 전도서와 욥기를 망라하며 중요한 한 문장으로 마무리짓는다. “우리가 사랑하고 예배하고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분별 있고 윤리적인 삶의 제일 원리, 즉 삶 전체를 이끌어 가는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저자의 저서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하나님백성의 선교’,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성경의 핵심 난제들에 답하다’를 읽은 나로서는 이 책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것들이 한 꺼번에 정리되는 것 같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일개 평신도로서 신학을 주먹구구식으로 섭렵하기 시작할 때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가 둘 있는데,  한국에서는 김근주, 외국에서는 바로 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다. 그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깊고 풍성한 앎을 얻을 수 있었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를 바라보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일개 교회의 목사에 의지하지 않고 가질 수 있었다. 1947년생인 그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에 나는 감사를 표한다. 성공회 사제이기도 한 그는 성공지향적인 가치관과 개인구원론에 천착한 사적 신앙에 갇혀 있던 나의 눈을 열어준 고마운 은인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난 이 책을 시작점으로 강력히 추천한다. 이후 나머지 전작들을 훑어간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6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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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 -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모든 순간을 나답게 사는 법
브레네 브라운 지음, 이은경 옮김 / 북라이프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나를 사랑할 용기: 이웃사랑을 위한 선작업.

브레네 브라운 저,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를 읽고.

다음은 시인 안젤루의 시 ‘그래도 나는 일어서리라’의 일부다.

“어디에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깨달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그럴 때 어디에나 속한다고 느끼죠. 비싼 값을 치러야 하지만 커다란 보상을 얻게 됩니다.”

저자 브레네 브라운은 대학생 시절 이 시를 처음 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소속감, 그 중에서도 ‘진정한 소속감 (True Belonging)’에 대해 깨달아가는 저자의 여정을 그린다. 저자는 어릴 적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가족’에조차 속할 수 없었던 마음의 상처를 지닌 아이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사람 (아이)이 아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황야’로 나아갔으며, ‘진정한 나’와 마주했고, ‘나’와 ‘타자’를 신뢰할 줄 알게 되었으며, ‘진정한 공감’과 ‘진정한 유대감’을 맛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노를 느낄 정도로 거부감이 심했던 안젤루의 시는 결국 살아나 그녀의 역사가 되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어릴 적 상처는 그녀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왔다. 그때 각인된 상처는 고통의 근원이었다. 가족에까지 소속되지 못했던 감정은 마음과 영혼과 자존감을 충분히 파괴하고도 남는 상처였다. 급기야 그녀는 부모 간의 불화로 인해 수치감까지 느꼈고, 그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한 채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남편이기도 한 스티브를 만나게 되면서 그녀는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한다. 말없이 수치스럽게 여기며 괴로워하는 대신, 용기 내어 마음 속 두려움과 상처를 털어놓으며 스티브로부터 진정어린 공감과 이해를 받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빛이었다. 사랑이었다. 어둡고 외로운 숲을 지나는 동안에 받은 단 한 사람으로부터의 진심어린 공감, 그 유대감. 이는 구원이란 단어를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진정한 소속감’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답을 내지 못했던 그녀는 어느날 남편과의 대화에서 유레카를 외친다. 

“당신이 당신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자기 자신과 일을 진실하게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속할 거야.”

Second Round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그녀는 조금씩 더 ‘진정한 소속감’에 대해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혼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는 양극단의 공존 가능성을 보게 된 것이었다. 안젤루의 시가 그녀의 삶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서서히 역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진정한 소속감은 불완전한 진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때만 생긴다”고. 이 글귀를 읽고 나는 한 방 맞은 듯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자신의 취약함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줄 아는 건 용기다. 취약함은 나약함이 아니란 저자의 고백에서 나 역시 용기를 얻는다. 홀로 설 용기, 완전히 홀로 설 수 있는 용기. 이는 곧 ‘나다움’이다.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해져야 할 과정은 ‘내가 나에게 속하는 것’이다. 이때의 ‘홀로’는 결코 외로움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자유다. 나 자신은 물론 타자와도 함께 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함께 하는 현재, 지금 여기’를 누릴 수 있는 힘.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이 신비로운 힘. 이 자유는 진정한 소속감으로부터 나오며, 진정한 소속감은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 취약한 모습마저도 담담히 드러낼 줄 아는 솔직함이 깃든 진정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자신이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여기는 안방, 즉 안전지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진정한 소속감을 원하는 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이미 많고 많은 예언자와 체제 저항자, 모험가가 거쳐가며 힘을 얻고 답을 얻은 ‘황야’로 담대히 나아가야만 한다. 

황야는 기꺼이 홀로 설 만큼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소속감이 깃든 곳이자 우리가 발 디딜 가장 용감하고 성스러운 곳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리고 진정한 소속감을 체험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용기는 황야에 용감히 ‘맞서는’ 용기일 뿐만 아니라 황야가 ‘되는’ 용기라고 덧붙인다. 또한, 나와 타자를 신뢰하는 과정은 자기 자신을 어딘가에 맞춰 적응시키려는 헛된 노력이 아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여정, 즉 ‘내가 나에게 속하는 여정’에 필수라고 역설한다. “Just be yourself!”, “This is me. All is fine!”, and  “I am fully allowed to enjoy this moment!” 곧 황야에서 일어나는 역사다. 

황야에서 마주할 수 있는 진정한 소속감과 진정한 자유함은 홀로 설 줄 아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건 결코 홀로 이룰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실제 경험과 자신의 연구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하여 타자와의 진정한 유대감이야말로 진정한 소속감을 얻기 위한 척도임을 간파해낸다. 우리는 살면서 모두 외로움을 느낀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단순히 철학자의 현학에 그치지 않는다. 요즘은 어린 아이도 충분히 느낄 정도로 우리 모두가 실제로 맛보는 현실이다. 편 가르기가 팽배하고 비인간화가 낭자한 세상에는 결코 소속감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린 아군이 아니면 적군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하며, 사람들의 개소리에도 관대하고 예의를 갖추어 진실을 말할 줄 알아야 하며,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 수만 있다면, 진정한 소속감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닐 거라는 저자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아멘으로 화답할 뻔했다. 저자가 바라마지 않는 세상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면 나타날 모습과도 닮았기 때문이다.

책에서 한 가지 재미났던 부분은 가짜 유대감에 대한 내용이었다. 우리가 흔히 맺곤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의외로 비난으로 맺어진다는 말에서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비난으로 맺어진 유대감은 비난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나누고 공감해야 할 것은 어떤 공동의 적이 아닌 기쁨과 고통이다. 순수한 사랑이다. 그것이 ‘진짜’ 유대감일 것이다. 아, 나는 이런 유대감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을까!

살면서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를 보려고 하며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 우리 인간은 소속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얻으려 한다. 이는 거의 본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속감의 시작은 진정한 ‘나’의 발견에 있다. 진정한 나를 대면하여 찾아내고 그 모습으로 살아갈 용기를 가지고서, 나 자신을 너머 타자까지도 신뢰할 수 있는 자세로 서로의 기쁨과 고통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다면, 진정한 유대감은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있는 열매이지 않을까 싶다. 다만, 그러기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 거치기만 하면 언제나 꿀보다 단 열매가 기다릴) 황야로 나아갈 용기를 우린 가져야 한다. 타자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기 전에 ‘나’를 먼저 사랑할 줄 아는 것도 바로 이 용기와 흐름을 같이 할 것이다.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선작업. 곧 나를 사랑하는 용기. 이런 용기가 궁금하다면 난 이 책을 자신있게 권한다. 잔잔한 감동과 함께 무언가 가슴 속에서 꽉 쥐어지는 용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며, ‘홀로’의 진정한 의미와 ‘유대감’과 ‘소속감’, 그리고 ‘자유’의 의미까지도 서로가 모순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63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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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 - 젠더로 읽는 기독교 2000년
하희정 지음 / 선율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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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기억: 조금 더 온전한 역사를 기록하다.


하희정 저,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을 읽고.

흔히 하는 말처럼 역사는 승자, 강자, 혹은 살아남은 (혹은 죽인) 자들의 과거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기록에는 늘 배제되거나 잊혀진 나머지 절반 (어쩌면 다수), 즉 패자, 약자, 혹은 죽은 (죽임 당한) 자들의 이야기 (혹은 진실)가 누락된 셈이다. ‘온전한 역사’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부재의 기억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온전한 역사’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는 기독교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가 간파한 것처럼, 2000년 역사를 통틀어 기독교 역시 ‘권좌를 위한 종교’, ‘종교 위의 종교’로 군림했던 시기가 더 길기 때문이다. ‘우는 자를 위한 종교’로 출발했지만, 기독교 내부에서는 약육강식이나 승자독식과 같은 힘의 논리가 여전히 유효했다. 예수의 사상과 정반대 되는 논리였다.

가부장적 위계질서는 이를 초월한 예수가 그 시작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유대인들의 문화는 남성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다시피 여성과 아이들은 사람 수를 셀 때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질서는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질서였으며, 불행하게도 시대를 초월하며 고질적인 문제로 남았다. 

이 책은 기록에서 배제되거나 기억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되살려 기독교 역사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저자의 표현대로 ‘역사 속 여성은 남성의 반대말이 아니라 배제된 자의 대명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제목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의 의미는 생물학적 여성을 넘어 잊혀진 모든 약자와 소수자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 순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진 대표적 여성들을 소환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역사관을 뒤흔드는 작업을 착실히 진행한다. 특히, 고대 편을 다루는 PART 1은 도입부부터 마치 탐정소설을 읽는 듯한 스릴까지 느낄 수 있으며,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실화로 교회가 일찍이 봉인해버린 내용 중 일부를 파헤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내게도 그랬던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 실수 때문에 창녀라는 누명까지 뒤집어 썼던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여러 나그함마디 문서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50년 이전에 먼저 발견되었던 ‘마리아 복음서’에서도 버젓이 제자로, 사도로 기록되어 있었다.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그리고 가장 뛰어났던 제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라 마리아였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성서 밖의 성서’들은 불행하게도 정경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외경으로 취급받아온 덕에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혹은 불경하게 여기거나 이단시하는 경향도 강하지만), 적어도 현대교회가 그리도 돌아가고 싶어하는 초대교회 시절 그리스도인들에겐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지위를 가지고 읽혔다. 정경와 외경을 구분하고, 정통과 이단을 구별한 역사의 배후엔 성령의 역사가 아닌 정치사회적인 힘의 논리가 은밀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절대 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찬가’에서 비춰지듯,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는 권력의 폭력성을 당당히 고발하며 종교의 본질적 가치를 성실히 살아낸 강직하고 신실했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마리아의 이미지는 육체적 순결함을 끝까지 지킨 정숙한 여인, 혹은 교회의 권위에 순종으로 응답한 믿음의 여인으로 탈바꿈되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찬미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 교묘한 술수는, 저자가 간파한대로, 힘 있는 자들 (주로 남성)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도 여성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에의 의지는 사악하고 간교한 프레임을 이용한 기만의 대가리를 먼저 움켜잡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당하는 쪽은 약자들이다. 

두 마리아 이야기를 뒤로 하고 저자는 다른 ‘성서 밖의 성서’에 기록된 몇몇 여성들을 더 소환하며 우리가 알고 있던 불완전한 기독교 역사의 퍼즐 조각을 몇 개 더 맞춰나간다. 생소한 이름들을 접하며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다가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장에서 독자들은 나처럼 조용한 분노와 함께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박해에 맞서 싸운 여성 순교자들의 신앙적 열정과 용기를 후대에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여전히 그들의 역할을 ‘여성성’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고 단순히 그들의 신앙을 교회의 모범으로 세우고 교육하고자 했던 교회 남성 지도자들의 비뚤어진 의도를 목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암흑 시대라고 알려진 중세는 그야말로 기독교 제국시대였다.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종 이전에 가졌던 가부장적 가치관은 성서에 의해 정당화되기 시작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기독교의 겉으로 보이는 위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했다. 여자를 죄의 본성으로 보았던 터툴리안,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했던 암브로스,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된 건 맞지만 그 도움은 출산일 뿐이라고 못박았던 어거스틴. 이들 모두는 여성이 남성 아래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창세기 2-3장, 그리고 베드로 서신과 바울 서신에서 찾았다.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신에게로 가는 길에 초대된 존재라며 안드로포스 (온전한 사람)를 이루는데 힘쓸 것을 권면했던 예수, 그 안드로포스가 되는 구원의 여정은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다고 가르쳤던 예수, 그 예수의 혁명적 정신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이었을까. 세속적 욕망과 공허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본질을 지켜내고자 했던 여성들을 이단으로 고발하고 마녀로 낙인 찍고 살해까지 감행한 교회의 남성 지도자들에게 과연 예수는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정경 선정자들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을 중요한 제자요 사도로 기록한 성서들을 왜 외경으로 분류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성이 강조되고 시민 사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근대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여성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시대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인간의 한계였을까. 종교개혁을 주도했고 ‘만인 사제설’의 ‘만인’에 여성을 포함시키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루터는 물론, 장로교의 시작인 칼빈마저도 남녀평등사상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씁쓸함을 던져주는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역사에는 의외로 짙은 그림자가 많이 드리워져있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또한, 그러한 시대와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수에 의해 이름도 빛도 없이 진행되었던 여성 운동의 존재는 칠흙같이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빛나는 등잔불이었다. 어쩌면 성령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기독교 역사에 더 많이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전해진 기독교의 정착사를 짧게 다룬다. 서구 기독교의 해외 선교는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근본을 바꾸어놓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엔 어두운 면도 존재했다. 식민주의 페미니즘이라고 알려진 개념 속엔 계몽이라는 명목 하에 감춰진 서구 우월주의에 대한 각인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잘 드러나있듯, 동양에 대한 서구인들의 정복주의적 상상력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만들어 낸 악마의 프레임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또 다시 묻는다. 안드로포스를 향한 여정에 있어서의 평등한 인권을 외친 예수의 정신은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피라미드 시스템 안에 과연 예수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존재할 수 있겠냐고.

학교과 병원 시스템 구축을 통해 효과적으로 들어온 기독교의 전파가 세계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내몰았던 영국과 미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은 과연 동아시아 해외 선교의 동력이 예수의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서구 열강들의 땅 따먹기의 일환이었는지 되짚어보게 만든다. 저자가 표현한대로, 과연 그 당시 기독교를 처음 접한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은 정말 기쁜 소식이었을까. 제국주의에 묻어 간 기독교 선교 역사의 어두운 면을 우리는 더 이상 덮으려하지 말고, 액면 그대로 바라보며 반성과 더불어 예수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닫는 말’에서 밝히듯, 이 책은 ‘무엇이 이단이냐’보다 ‘누가 이단을 말하느냐’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 전 역사에서 여성 (이때 여성은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하는 의미일 것이다)의 역사와 이단논쟁의 역사는 분리가 불가능할 만큼 그 역사적 궤를 같이 한다고 한다. 너무나 공감 가는 말이기에 나는 이에 할 말을 잃는다. 역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 역사의 불완전성, 그 불완전성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기만, 그리고 그 기만 배후에 있는 인간의 교만을 생각해본다. 저자가 왜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안치민의 말을 택했는지 알 것만 같다. 그렇다. 이 세상엔 유일한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성은 풍성한 조화로움의 뼈대다. 획일성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며, 이는 곧 살인자의 속성일 뿐이다. 살아갈 동안 얼마나 더 온전한 역사를 대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기대한다. 이런 책이 계속해서 나와 약자와 소수자의 억울함이 해소되고, 그와 더불어 비뚤어진 우리들의 역사관이 점점 바르게 잡혀가길.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61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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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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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예감: 책임과 혼란.

줄리언 반스 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이 책의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이다. 저자의 뛰어난 필력, 그리고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짜임새 있는 작품의 전개 덕에 숨가쁘게 책을 다 읽고, 쉴 시간도 없이 다시 책장을 앞뒤로 뒤적거리다가, 순간적인 전율과 함께 내용을 파악하고 나서야 난 비로소 한국어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원제를 직역했거나 – 이를테면, ‘끝의 예감’ 정도로 – 번역을 아예 하지 않았더라면, 책을 읽기 전 이 책에 대한 나의 인상은 분명 달랐을 테고, 저자의 의도는 물론 작품 속 복선 같은 여러 상징적인 메시지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을 것 같다.

한국어 제목은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효과를 내는 반면, 영어 원제는 끝이 열려 있다. 예감에 대한 결론을 함부로 내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을 영화화한 작품 역시 한국어 제목과 같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좀 실망스럽다. 작은 뉘앙스의 차이지만 내겐 원작을 전달하는 차원에 있어서, 비록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제목에 붙은 마침표의 유무가 의외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뭐랄까, 보이지 않는 마침표가 처음부터 상상력을 제한시킨다고 할까.

어쨌거나 그렇게 난 한국어 번역본으로, 그래서 사뭇 강제로 제한된 상상력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250 페이지 정도 되는 두께를 약 두 시간에 걸쳐 몽땅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저자 줄리언 반스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치밀하게 설계라도 한듯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말, 그러나 이미 그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 작품 여러 군데 깔려 있었음을 뒤늦게서야 ‘아..이럴수가.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하며 깨닫게 되는 책. 이런 소름 돋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난 이 책을 주저없이 권한다. 고전소설이 가져다주는 고유하고 묵직한 매력은 없지만, 현대소설만이 가지는 참신함과 순발력 (그러나 상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가벼운) 등으로 반나절 즐거운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복선은 아무래도 소설 속 화자인 토니의 고등학교 역사 수업 중에 등장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를 정의하는 조 헌트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들이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는 장면이다. 토니는 “역사란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며 거의 본능적인 대답을 했다. 이에 선생님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듯, “역사는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고 첨언했다. 반면, 이 소설의 비극적이면서도 신비로움을 머금은 인물 에이드리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에이드리언은 토니와 늘 함께 하던 패거리에 뒤늦게 합류했었지만, 어느새 조용히 우월한 입지를 선점하는 독특한 이미지의 인물이었다. 생각하는 수준이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았으며, 함께 있어도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동시에, 그는 언제나 암묵적인 리더였다. 또한 그는 학업에서도 남달랐는데, 그의 월등한 성적은 케임브리지에 입학할 정도였다. 토니의 어머니 말씀을 빌자면, 에이드리언은 “너무” 똑똑했다.

베로니카. 주인공 토니가 대학 시절 잠시, 하지만 의미 있게, 사귀었던 여자 친구 이름이자 노년의 토니와 재회하게 되는 인물이다. 사귈 땐 그녀의 집에 초대 받아 그녀의 가족과 함께 한 달 간 머물기도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속마음을 언제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토니는 결국 그녀와 헤어진다. 그리고 뜻밖에도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기 시작한다. 비극의 불씨였다.

당연히 탐탁치 않았지만 토니는 자신이 둘에게 쓴 편지에서 쿨하게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둘의 행복을 빌어주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 눈치 챘겠지만, 이 책은 예순이 넘은 토니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기억, 즉 그의 역사다. 비극적인 건, 그 역사가 고등학생 시절 자신이 역사 수업에서 대답했던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는 점이다. 그가 둘에게 썼던 편지 내용은 전혀 쿨하지 않았다. 4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자신이 쓴 편지를 읽게 되었을 때, 그는 곧장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스럽기 그지없고 추잡스럽고 악의가 가득한 저주의 말들이었다.

토니는 자신이 썼던 그 편지를 다시 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자신에게 남긴 유산에 관한 편지 한 통이 수면 아래 있던 그 기억의 문을 열어버렸다. 기대 밖에도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토니에게 남긴 건, 짧은 편지, 500달러,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었다. 토니는 앞의 두 항목은 그런대로 이해할 만했지만, 마지막 항목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베로니카가 아닌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도저히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일기장은 현재 베로니카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베로니카의 이메일을 알아내서 연락을 취하는 토니. 그녀를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그는 이십대 시절에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낀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반응은 그때와 같이 쌀쌀맞다. “넌 여전히 감을 못 잡는구나.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느지막한 나이에 그녀와 재회한 첫 날, 토니가 그녀로부터 받은 게 바로 자신이 이십대 때 썼던 그 편지다. 추악한 그 편지의 정점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미래를 저주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저주는 혹시라도 둘 사이에서 생겨날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여전히 베로니카가 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대신 그 편지를 주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녀를 세 번재 만나던 날, 그녀는 갑자기 토니를 데리고 어떤 자택 요양 간호 대상자를 만나러 간다. 그 대상자는 나이가 젊었다. 베로니카의 아들이 있다면 아마도 저 나이겠다 싶었다. 그 이후 토니는 베로니카의 의중을 알고 싶었는지 계속해서 그 곳을 찾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간호 대상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는 그가 에이드리언의 아들임을 확신하게 된다. 너무나 똑같이 생겼고 행동거지가 닮았기 때문이었다.

토니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저주가 현실이 되어있음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로니카에게 사죄의 편지를 쓰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토니는 자신의 기억이 그렇게나 부정확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의 역사는 결국 에이드리언의 대답처럼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임도 증명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게 결말이 아니다. 토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이드리언의 아들이 있는 곳을 또 찾아간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되는 충격적인 사실. 그건 에이드리언의 아들의 보호자로부터 들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베로니카는 엄마가 아니라 누나라는 것이었다!

이럴수가. 그제서야 나 역시 토니가 젊었을 적 한 달 간 머물었던 베로니카의 집에서 토니가 느꼈던 베로니카의 어머니에 대한 묘한 감정과, 그가 베로니카와 헤어진 뒤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친필로 작성해서 보냈던 위로 편지의 숨은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또한 베로니카가 의도적으로 토니를 자신의 어머니와 단 둘이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고, 그 이후 토니에게 좀 더 애정을 준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베로니카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라 경쟁자였음을 말이다. 어쩌면 토니가 베로니카의 집에서 에이드리언에 앞서 베로니카 어머니의 유혹에 넘어갔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토니 어머니 말씀대로 토니는 좀 덜 똑똑해서 (덜 민감해서) 그 유혹을 몰랐을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에이드리언. 토니는 40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싸늘하게 대했던 베로니카의 얼굴표정과 태도도 모두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책임감을 느꼈다. 죄책감을 느꼈다. 토니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어찌 보면 이 책은 싸구리 3류 영화 같은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작가의 뛰어난 필력과 스토리 전개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토리 전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인간의 심리와 본성 등을 탁월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에 대해서, 나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나의 역사는 나라는 승자의 거짓말로 도배되고 있는지, 아니면 나라는 패배자의 자기기만으로 가득차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부정확한 나의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나의 확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눈을 뜨고 나도 토니처럼 책임과 혼란을 느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6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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