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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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할 만큼 고적하고 아름다운 에세이.


한정원 저, ‘시와 산책’을 읽고.


아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 조용히 압도되는 느낌.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이 휑한 아름다움. 이내 그친 눈처럼 아쉬우면서도 고독함과 애잔함을 잔뜩 머금고 있어,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도록 항상 옆에 두고 싶은 글. 이런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맞이할 때면 나는 경건한 자가 되어 입을 봉하고 눈과 귀만 열어 작가가 그려놓은 세계로 다소곳이 나아간다. 이 책의 감상을 적기에 나는 차라리 벙어리가 되는 편을 택하고 싶다. 그냥 느끼고 받아들이고, 또 젖어보기를 택하고 싶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몇 자 적어본들 하얀 눈에 섞인 까만 먼지가 될까 봐, 그래서 부서질까 봐 염려가 된다. 부디 이 짧은 감상문이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오가와 요코의 산문집,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를 읽고 곧장 분위기를 이어 표지부터 파랗고 하얀 눈을 연상케 하는 책을 골랐다.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이 무너질 땐, 오케스트라의 거창한 연주나 화려하고 높은음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독주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잔잔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적당히 느린 피아노 곡에 손이 간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수십 권의 책 중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제목부터 와 닿았다. ‘시와 산책’이라… 처음 보는 작가, 처음 보는 출판사. 모든 게 낯설었다. 그러나 그 낯섦이 나를 묘하게 끌어당겼다. 하얗고 깊은 숲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책 양 날개에는 아무런 소개도 없다. 텍스트로 승부하는 간소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첫 꼭지를 읽고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휑하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밤은 지새워도 충분히 용서가 될 것 같았다.


오가와 요코의 에세이를 읽고 에세이의 정수를 맛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정원의 에세이를 읽고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정수’라기보다는 ‘정수 중 하나’로 말이다. 두 에세이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느낌이다. 한 가지만 예로 들면, 오가와 요코의 글에서 사람이 느껴진다면, 한정원의 글에선 혼자가 느껴진다. 그래서 더 적막하고 외롭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아마도 두 작가의 삶의 배경 때문일 것이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워본,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해내고 예순의 나이를 바라보는 오가와 요코와 수도자가 되기로 작정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중년의 나이로 사람이 아닌 반려묘와 함께 살아가는 한정원. 에세이는 그 사람의 숨결과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책 전반에 배어 있는 이 서로 다른 느낌은 아마도 두 작가의 삶의 흔적과 현재를 반영하는 것일 테다. 두 에세이를 연달아 읽으며 나는 서로 다른 두 인생과 두 사람과의 조우를 통해 한층 더 깊고 풍성해진다.


글의 간결성과 절제미, 간접적인 표현 안에 숨은 도발적인 직접성. 시 같은 에세이. 에세이 같은 시. 마침 오가와 요코와 한정원의 책이 ‘산책’이라는 단어를 공유한다. 오가와 요코의 정겨운 산책이 있는가 하면, 한정원의 고적한 산책도 있다. 우리 인생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 인생을 그렇게 두 가지의 산책처럼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두 책 모두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놓아두었다. 종종 꺼내 읽게 될 것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따스한 시선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휑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맛보기 위해서.


#시간의흐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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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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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는 삶, 그리고 타자를 알아가는 애씀에 대하여.

서보 머그더 저, ‘도어’를 읽고.

아직도 눈을 감으면 나는 낯선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거리에 서있다. 그 거리에 자리잡은 공동주택과, 당장이라도 음식 냄새, 커피향, 여러 꽃향기가 뒤섞여서 날 것 같은 넓은 앞마당, 그리고 그 뒤로 마치 세상과 담을 쌓은 것처럼 언제나 견고하게 닫혀있는 에메렌츠 집의 문이 보인다. 이어서 이 모든 것을 관망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로 조곤조곤 그 세상을 내게 보여주는 ‘나’, 그리고 에메렌츠와 ‘나’를 이어주는 끈이자, 때론 에메렌츠로, 때론 ‘나’의 내밀한 자아로, 때론 인간의 영역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의 뜻을 전해주는 매개자로 역할하는 것 같은, ‘비올라’라는 이름을 가진 개 한 마리도 보인다. 

이 작품은 공간적으로 꽤나 정적인 구도를 가진다. 앞서 언급한 공간이 소설 대부분의 사건이 벌어지고 시간이 흘러가는 장소다. 에메렌츠와 ‘나’, 그리고 비올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조연에 불과하며, 나머지 공간과 시간도 부차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처음 만나는 이 책의 저자,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는 이 작품 속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여행 길잡이가 되어준다. 독자를 어느새 단 한 사람 에메렌츠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녀를 알아가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에메렌츠를 떠나보낸 ‘나’의 복잡한 심정을 주목하게 만든다. 

역사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어떤 오래되고 두꺼운 책 한 권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경이감에 찬 채 그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 책은 신비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 이 책이 제공하는 여행은 지리적인 의미가 아닌, 비로소 한 사람을 알아가는 끝없이 신비한 여정에 비유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나와 타자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여정과 겹쳐진다. 

주제 넘을지 모르겠지만, 책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이 책에 한 번 빨려들어가기 시작하면 아마 나처럼 어지간해선 헤어나기 어려울 거라는 점이다. 이 책이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정적인 이미지 안에는 아주 깊은 우물이 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건 그 우물의 깊이와 그 깊은 우물 속에서 천천히 물을 길어내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좁은 공간에 흐르는 시간의 깊이와 그것이 한곳으로 모여 마침내 한 사람을 이루고 있다는 신비도 이 책을 통해 보게 될 것이다.

저자 서보 머그더의 분신인듯한 일인칭 화자 ‘나’는 작품 속에서 잘 나가는 전업작가다. 그녀는 결혼 후 아이도 가지지 않고 남편과 단 둘이서만 산다. 오로지 할 줄 아는 건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이다. 청소며 요리며 할 것 없이 모든 집안일이 그녀에게는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인생의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집중해서 글을 쓰기 위해선 그런 귀찮고 하찮은 일들을 대신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수소문을 해서 그 일을 담당해줄 사람을 구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에메렌츠다.

에메렌츠가 죽기까지 20여년을 함께 살게 된 ‘나’는 에메렌츠와 티격태격하며 그녀에게 미운정 고운정이 들다가도 도무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다. 에메렌츠는 완전무결하며 무오하기까지 할 정도로 독립적인 삶을 스스로 완벽하게 통제하며 사는 아주 강한 개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 기질까지 보이는 그녀는 거의 모든 제도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관습이나 사상 등에 대해서 언제나 저항하며 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반사회적이라거나 이기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곤란하다. 그녀는 그런 단어와 삶에서 정반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에메렌츠는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 열정적이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이웃에게 관대했고, 기꺼이 나누며 흔쾌히 돕는 일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그녀는 실로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가서 자신의 신앙을 깊게 만드는 동안그들이 교회에 앉아서 소망하고 기도하고 다짐하던 이웃사랑을 길거리로 나와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말과 수사로 화려하게 도배하는 것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뭇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존중과 배려, 희생과 환대를 삶으로 조용히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녀에게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은 한낱 인공적으로 조작된 비극 영화처럼 충분히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비관론자, 반엘리트주의자를 자처했고, 뭇사람들의 오해를 쉽게 살 정도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삶을 살았지만, 에메렌츠에게 삶은 단순히 허황된 소망으로 치장한 뒤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자위하며 제자리 걸음이나 후퇴를 하는 시공간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삶이란 실제로 살아내는 일상이었다. 이런 면에선, 평론가 신형철도 간파한 것처럼 에메렌츠는 여성 조르바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에메렌츠를 의지하고 사랑하게 된다. 저자가 작품 속 화자 ‘나’를 전업작가로 등장시킨 이유는 저자의 분신이라는 의미도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에메렌츠가 살아내는 삶의 모습을 더욱 조명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머리로 대표되는 글만 쓰는 사람이 여기에 있고, 몸으로 대표되는 일만 하는 사람이 또 저기에 있다. 이 강력한 대비를 알아챈 독자라면, 아무래도 에메렌츠의 삶의 방식에 대한 매력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다분히 ‘나’의 입장에 천착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부조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작품은 단지 그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지는 않았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비록 마치 닫힌 문처럼, 여느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른 비범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에메렌츠를 궁극적으로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에메렌츠의 죽음에 대해 과도한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비록 영원히 뛸 것만 같던 에메렌츠의 심장이 어느날 멈추는 날이 왔었지만, ‘나’는 에메렌츠를 삶으로 사랑했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나는 책의 후반부를 가득 메우는 그녀의 내면의 독백에서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영원한 숙제이며, 머리에서 몸으로 전환되는, 마치 기독교의 성육신 개념과도 흡사한, 과정은 인간에게 있어선 완료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우린 그저 오늘도 애쓸 뿐이다. 타자를 안다는 것의 무게중심은 애씀에 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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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소중한 삶은 없다 - 방황하는 영혼들을 치유하는 끝없는 사랑과 연민의 힘
그레고리 보일 지음, 이미선 옮김 / 공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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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기.

그레고리 보일 저, ‘덜 소중한 삶은 없다’를 읽고.

머리말에서 저자 그레고리 보일 신부는 혹시라도 있을 이 책에 대한 오해를 예방하고자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라는 점. 둘째, 이 책은 ‘갱단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저자의 바람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공유하는 유대감의 범위가 확대되면 좋겠다. 이 책은 조직폭력배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찾아주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겪은 무시무시한 고난과 깨진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찾아내고자 한다.”

저자가 밝힌대로 이 책은 수많은 짧은 에피소드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는 실제 갱단에 소속되어 있던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임을 주의하라) 사람들의 실화다. 그만큼 하나의 이야기는 큰 임팩트가 있으며, 살아있는 메시지를 가진다. 특히 이야기들의 주인공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기에 더욱 그렇다. 

저자는 이 에피소드들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의 중요한 축이자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 근본적인 과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어떤 삶은 다른 삶보다 덜 소중하다’고 여기는 우리 마음속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책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제안하고 싶은 것 한 가지가 있다. 각 에피소드를 읽어나갈 때 갱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단순히 죽은 이들을 통해 교훈이나 뽑아내는 목적으로는 이 책의 무게가 너무 크다. 만약 이 책을 읽는 이유가 교훈을 얻거나 감동을 받기 위함이라면 당장 이 책을 내려 놓으라. 그건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감히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믿음의 선진들을 우상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일궈놓은, 누구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세상의 빛나는 저 높은 곳에서 벌어지는 변화가 아닌, 감히 ‘바닥’, ‘절망’, 심지어 ‘지옥’과 같은 단어가 어울릴법한, 어둡고 낮은 곳에서의 변화를 맨눈으로 목도하게 될 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나로선 그저 할 말을 잃고야 만다. 동시에 내 안에선 소요가 인다. 잊고 있었던, 혹은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두 세상의 차이, 즉 예수를 닮는다는 것과 실제 현장에서 그렇게 살아낸다는 것의 괴리가 걷잡을 수 없이 명징해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름 평온했던 내 마음에서 거짓과 기만의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한없이 작아짐과 동시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무래도 이 책의 큰 축은 저자인 그레고리 보일 신부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존재감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소개를 이 짧은 감상문에 굳이 옮겨다 놓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잠깐의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거기에 10 여분 정도만 더 검색에 시간을 투자한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레고리 보일 신부는 엘에이 갱단 한복판에 자진해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과 함께 변화를 일궈냈다. 마치 갈릴리 주민과 같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나라를 살고 보여주신 예수처럼 말이다. 

물론 그레고리 신부는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와 너무 닮았다. 그의 캐릭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행한 일에 대해서다. 그의 과거를 보면 아마 누구라도 예수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확성기에 대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열렬히 외치는 억지스런 행위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삶의 열매를 그레고리 신부는 조용히 자신의 인생을 바쳐 얻어낸 것이다. 그는 떠들지 않고 예수를 보여주었다. 예수라는 단어를 남발하지 않고도, 혹은 고급스러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누구나 머리 속 어딘가에 파편처럼 떨어져있던 예수에 대한 기억과 정보를 스스로 찾아내고 주워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남들과 동등하게 사랑받을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의 삶은 대형교회에서 자본의 힘으로 밀어부치는 선교라는 단어로도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선교 현장이었다. 

이 책은 여느 책과는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집중을 해야 한다거나, 저자의 어떤 숨어 있는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 이미 모든 메시지는 머리말과 프롤로그에 다 써져 있다. 1장부터 9장까지의 2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모두 실제 저자와 함께 했으며 저자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은 이들의 이야기로 빼곡히 들어차있다. 각 장들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아마도 많고 많은 에피소드들을 저자가 나름 분류하면서 공통된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각 장들을 하나하나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총 아홉 장의 제목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책의 중심된 축을 이루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연민’, ‘관심’, ‘유대감’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에게는 아직 이 책을 읽어낼 만한 충분한 공감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함을 깨닫는다. 연민과 관심과 유대감을 말하면서도 나는 그 단어들의 사용 범위의 경계를 나름대로 ‘안전하게’ 그어두고 살고 있음을 여실히 보게 된다. 물론 내가 지금 당장 그레고리 신부처럼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난 이상 뭔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일을 해내겠다거나 더 큰 일을 해내겠다는 어설프고 유치한 결단보다는, 난 예전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은 공감능력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책을 통해서 그러한 목적을 위한 점진적인 변화가 내 안에서 진행되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가져본다. 언젠가 한 번 엘에이 다운타운에 들를 기회가 있다면, 홈보이 인더스트리에 들려 커피와 빵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1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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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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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람.


김영하 저, ‘여행의 이유’를 읽고.


이 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김영하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토종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소설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이력을 가진 작가는 아직 소수에 불과한데, 김영하는 그중 하나다. 그럼에도 나는 여태껏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전문학 읽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은 우선순위에서 밀어두고 있었다. 궁색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의 작품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독서모임 9월 도서로 선정되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이 책을 일부러 구입하여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독서모임이 선사하는 다양성의 향연과 그에 따른 암묵적인 압박을 즐기기로 이미 오래 전에 결정한 나는 며칠 전 이 책을 구입했고 책을 통해 작가 김영하와의 첫 대면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출퇴근 길을 오갈 때도 일부러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몇 개 들었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 등으로 전달되는, 텍스트로는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운 그의 모습을, 책만 읽으면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괜한 오해 없이 사실적으로 알고 싶었다. 글이란 종종 가면 역할에 그칠 때가 많고, 글쓴이를 그가 쓴 가면을 통한 인격, 즉 그가 선정한 하나의 페르소나로서만 알게 되는 건 그닥 유쾌한 경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다면 이런 작업은 차후에 진행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산문집은 아무래도 저자와의 만남을 환상 속에서 시작하는 것보단 현실에서 시작하는 게 더 낫다. 나름대로 이런 규칙을 가진 나는 김영하라는 사람을 동영상을 통해 먼저 조금이나마 이해한 후 그가 쓴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 소설이 아닌 산문집으로 내게 처음 다가온 그는 어쩔 수 없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의 글은 의심할 여지 없는 작가의 글이었다. 때론 현미경과 같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때론 나이를 지긋이 먹고 이런저런 인생 경험을 다 해본 어른의 지혜로, 또 때론 나와 조금도 다를 것 없고 친근한 한 인간으로서 그는 타자와 세상, 그리고 자신을 관찰하고 성찰하고 숙성시킨 후 그 결과를 이 책 ‘여행의 이유’를 통해 글로 내뱉았다.


책 제목에 ‘여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해서 이 책이 단순히 여행 경험담이나 노하우, 또는 올 컬러 사진으로 도배한 여행 답사 기록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는 달랑 단 하나의 사진이 소개되는데, 그것마저도 그의 여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구 사진이다. 심지어 그가 찍은 것도 아니다. 나사에서 제공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에서 찍은 사진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여행 사진 하나 없는 여행에 관한 책이다. 이 점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차별화 전략일 수도 있고 상상하기 힘든 어떤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의도된 결과일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 ‘여행의 이유’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단순한 여행이나 여행 관련 정보가 아니다. 오히려 김영하라는 사람과 그의 타자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여행 다녀 오기 전의 김영하와 다녀 온 후의 김영하가 있다. 여전히 여행 중일 수도 있고 일상일 수도 있는 기묘한 이중적인 의미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한 사람 김영하가 있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여행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여행은 가도 결국 남는 건 사람이다.


여행은 그저 사람을 있게 한, 사람을 더 사람답게 한, 마치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고 고뇌하는 유일한 존재자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여행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읽었고, 그렇게 김영하를 만났다. 그의 시선에서 많은 공감도 했고, 여러 에피소드나 그의 남다른 관찰과 통찰에서 소소한 감동은 물론, 여전히 답이 없는 질문과 고민들도 떠안게 되었다. 


여행의 이유? 나는 답을 잘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한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 뒤에 펼쳐진 또 다른 세상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낯섦 가운데 던져진 채로 역설적인 자유와 안도감을 느끼고, 연대와 환대를 경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그네된 삶을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 어쩌면 여행의 이유는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라고 답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성의 없는 대답을 나는 해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1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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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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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움, 그리고 사람다울 수 있는 이유.

김현경 저,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자 중에서도 존재를 묻고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자, 즉 현존재다. 이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김현경은 인간을 한 번 더 걸러낸다. 바로 ‘사람’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건, 사람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결코 우생학적 관점에서 도출된 말이 아니다. 이 논리는 모든 존재자 중에서도 현존재인 인간을 구별한 하이데거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 역시 인간의 우월함을 말하고자 현존재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나 모든 사물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어떤 사용의 맥락 안에서 정의된다고 말했던 그가 인간의 우월함을 과시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별됨이 언제나 상하 관계의 우열을 의미하진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인간이지만, 모든 인간이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람답지 못한 인간이 있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김현경은 1장 ‘사람의 개념’ 첫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됨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문득 나도 사람답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이 책은 사람, 장소, 환대, 이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한 해제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인류학, 사회학 등의 전공 배경이 저자만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을 만나 탄생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역사와 문명은 물론 현 세태의 민낯을 날카롭게 파헤친 저자의 통찰을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를 살면서 꼭 한 번 쯤은 깊게 생각해 봄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나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마치 논문을 읽는 것만 같은 딱딱함도 책 중간중간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을 과감하게 건너 뛰더라도 충분히 책 전반에 흐르는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공돌이이자 인문학에 문외한인 나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문을 여는 프롤로그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담겨있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선 반가운 도입부였고 덕분에 몰입을 잘 할 수 있었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기존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해설은 빈틈과 오류를 가진다. 기존의 해설들은 그림자를 영혼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한데 반하여, 저자는 그림자를 오히려 영혼과 대립하는 외적이고 현세적인 그 무엇이라고 해석한다. 소설 속에 등장한 주인공 슐레밀은 그림자를 팔았지만, 여전히 인간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슐레밀은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즉, 그림자의 유무는 인간과 사람의 그 묘한 구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 무엇인 것이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림자의 상실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된 이 소설은 이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알레고리를 선사한다. 슐레밀이 그의 괴로움을 칠십 리 장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어디든 한달음에 갈 수 있는 장화 덕분에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슐레밀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이 해결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 대접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전제가 되어 있는 셈이며, 유일한 해결책은 사람들을 떠나는 것밖에 없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슬프게도 슐레밀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를 단념하고 순수하게 관조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한다는 말은 브레네 브라운의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에서는 진정한 소속감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었지만,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해석하는 김현경에 따르면, 그건 소외와 도피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슐레밀이 브레네 브라운의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진정한 자존감과 진정한 소속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림자가 없어 사람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했을까. 반대로 브레네 브라운이 김현경의 해석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막다른 골목인 ‘비장소화’밖에 없다는 김현경의 통찰을 브레네 브라운은 어떻게 생각할까. 브레네 브라운의 이론은 사회구조라는, 인간이 속한 환경이라는 더 큰 숲, 더 큰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진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아무리 홀로 황야를 거치고 이겨낼 만큼 비장한 용기를 낸다고 해도 그림자를 다시 얻을 순 없기 때문이다.

슐레밀의 최종 선택은 스스로 소외당함이었다. 이는 저자에 따르면 ‘비장소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사람다움이란 사람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 주어지게 된다. 즉, 타자의 존재가 필수다. 홀로 존재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소외시키고 소외당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 역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일 뿐일 것이다. 이를 다시 풀면, 우리 모두는 타자의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때의 환대는 타자에게 자리/장소를 주는 행위로 설명이 가능하다.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저자는 환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 장소, 환대,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서로 맞물린 채 사람다움이라는 한 단어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사람다움이란 한 인간이 타자에 의해 장소/자리를 제공받는 행위, 즉 환대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훌륭한 성품이라든지 고결한 도덕성이라든지 지고한 개인영성이라든지 하는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단어들은 오로지 사적인 영역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성품과 고결한 도덕성, 그리고 지고한 개인영성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0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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