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헤르만 헤세 지음, 김윤미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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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헤세

헤르만 헤세 저,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를 읽고

헤세의 작품에는 유독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작품 주인공이 예술가인 경우도 있고, 그림이나 음악이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헤세 자신이 예술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이 책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헤세가 쓴 음악에 관련된 글들을 여기저기서 모아 엮은 책이다. 그가 쓴 소설의 일부분이 소개되기도 하고, 그의 에세이, 시, 편지, 서평, 메모 등의 짧은 글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음악뿐 아니라 미술에 관련해서도 이런 책이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다. ‘헤르만 헤세, 그림 위에 쓰다’ 정도로 말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그의 여러 작품을 훑어보며 예술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면서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써나가도록 하겠다. 음악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예술로 범위를 확장할 때 헤세가 그의 모든 작품에서 조용히 외쳤던 합일 사상을 더욱 명료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을 읽고 단순히 헤세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식으로만 결론을 낸다면, 그건 아마도 곁다리만 짚는 격이 되지 않을까 한다. 헤세는 작가이지 음악가가 아니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되겠다. 음악은 주제가 아니라 소재라는 점도 간과하면 안 된다. 주제는 헤세의 철학 내지는 사상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도 수차례 언급되지만, 그것은 바로 ‘합일’이다. 두 개 이상의 대립된 자아나 성향을 보여주고 그 둘 사이에서 택일하여 하나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닌,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는 일’, 즉 합일 사상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헤세를 이해하는 게 이 책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황야의 늑대’에서 주인공 하리 할러는 음악과 문학,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자다. 그는 두 자아, 즉 ‘늑대’와 ‘시민’ 사이에서 고뇌하는데, 어느 날 꿈에 고전 음악의 대가 모차르트가 나타나 계시와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서로 반대되는 두 자아가 공존하고 상생하는 하나의 큰 자아, 즉 합일을 이루는 자아가 모든 고뇌의 해결책이라는 메시지였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르치스가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학자 스타일로서 정신적인 사람을 대표한다면, 골드문트는  천부적인 예술가 재능을 지진 사람을 대표한다. ‘황야의 늑대’에서는 한 사람 내면의 두 자아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대립되는 두 자아가 독립적인 두 사람으로 그려진다. 골드문트는 조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르치스와는 반대되는 길 위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방랑과도 같은 인생의 긴 여정을 마치고 죽기 직전 어엿한 수도원장이 되어 있는 나르치스에게 돌아와 마지막 조각품을 탄생시키는 장면은 여전히 강한 인상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나르치스에게 비친 그 조각품은 자신이 평생 몸을 담았던 지성의 길만이 아닌 그와 반대될지도 모르는 예술의 길로도 진리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작품이었다. 참고로, 예전엔 이 작품이 한국어판으로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각각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대변하는 단어다. 그리고 골드문트의 마지막 조각상은 바로 지와 사랑을 모두 겸비한 이미지가 구현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우린 헤세의 합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미안’에서도 미술과 음악은 이야기 전개에 있어 꿈과 함께 빠질 수 없이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싱클레어의 자아가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직접 그리는 새 그림 (이 장면에서 ‘데미안’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문구가 등장하게 된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라삭스다”)과 사람 그림 (꿈과 기억을 재료로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싱클레어의 개성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가 그린 사람은 그렸을 당시엔 누군지 몰랐지만, 나중에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과 너무 닮았음을 알게 된다. 비가시적인 아프라삭스는 가시적인 에바 부인과 같은 의미로써 총체적인 삶과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싱클레어에게 개성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피스토리우스는 오르간 연주자였다. 이 작품에서도 그림과 음악은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에서 음악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에서도 ‘유리알 유희’의 일부분과 작업 노트가 일부 소개되어 있다. 헤세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정수가 녹아있는 작품이기도 한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에 위치한 중학교로 부름 받기 위해 어느 날 음악 명인의 방문을 받고 테스트를 받았던 부분이 바이올린 연주였다.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에 가서도 음악과 라틴어에서 최고 점수를 받는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유리알 유희를 알게 되고 그는 그것의 명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유리알 유희란 모든 학문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고, 고도로 발전된 어떤 기호와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비밀 언어로 표현되는 정신적 유희이다. 이를테면, 천문학과 수학과 음악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총체적이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서양의 문화와 전통뿐만이 아닌 동양의 지혜까지도 균형 있게 포함하고 있기에, 유리알 유희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높고 순수한 인간의 정신성을 대변하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놀이인 것이다. 책에서도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는 명료하게 묘사되지 않을뿐더러 헤세의 상상력 속에서 만들어진 놀이이기 때문에 구름 속에 있는 듯 막연한 느낌을 주지만, 음악이 여러 학문들의 조화를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즉, 이 작품 속에서도 헤세는 음악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게르트루트’는 ‘쿤’이라는 한 음악가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다. 쿤은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다. 그와 대립되는 성향의 ‘무오트’라는 인물 역시 오페라 가수로 등장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예술가,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음악가의 두 스펙트럼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게르트루트’라는 한 여인들 두고 벌이는 두 음악가의 경쟁 구도도 엿볼 수 있는데, 소설의 초점은 주인공 쿤의 자아 성장에 맞춰진다. 쿤이 열등감을 가진 자아라면, 무오트는 오만함을 가진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오만함의 주자 무오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열등감의 주자 쿤은 자신의 교만을 이겨내고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비록 게르트루트와 하나가 되는 기회를 놓쳐버리지만 한층 큰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로스할데’에서는 주인공이 화가로 설정되어 있다. 로스할데는 요한 페라구트라는 저명한 화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어린 나이로 죽은 아들 피에르가 살았던 저택의 이름이다. 예술가의 혼에 집중하여 아들까지도 단념하게 될 정도로 그림에 열정을 쏟았던 요한 페라구트의 선택이 내겐 안타까운 결정으로만 보였던 작품이었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헤세가 일반 시민성과는 다른 예술가의 정신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목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헤세는 고전 음악에 심취했던 작가였다. 바흐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들었고 틈만 나면 연주회를 찾았다. 낭만주의 음악도 좋아했다. 슈베르트와 쇼팽을 좋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런 헤세의 음악 사랑을 단순히 음악에 대한 메시지로 읽으면 중요한 사실을 놓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헤세는 음악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철학인 합일 사상을 더욱 꿈꾸고 글로 그려내려고 애썼던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게 헤세를 좀 더 깊게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낫지 않을까 한다. 그는 음악은 이성을 통하지 않고 영혼을 곧바로 울린다고 믿었다. 음악만이 가진 초월적인 힘을 믿었고 그것에 심취하기도 하면서 영감을 얻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예술가 친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는. 어찌 보면 예술은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혹은 글이든 모두 통하는 게 아닌가 한다. 미술가는 그림이나 조각으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그리고 작가는 글로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결과물이 다를 뿐 모두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담고 시간과 공간에 담긴 이미지를 담고 고유한 가치를 창조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 헤세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군요, 하는 정보를 하나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헤세는 예술가로서 다른 예술 분야인 음악과 미술과 조화를 이루며 더욱 풍성한 예술 세계를 맛보고 그것을 살아낸 장본인이었군요, 하는 결론에 이르는 게 어떨까 싶다. 마치 유리알 유희의 기본 정신이 헤세의 인생 전체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북하우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3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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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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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과 가능 사이의 겸손함으로

신형철 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상처와 치유의 무한반복은 빙빙 도는 원과 같아서,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와 치유의 상대적 기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둘 사이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사람으로 변모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상처의 심연에 정체된 채로 원이 아닌 단 한 점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삶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낮은 마음으로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거기엔 상처 받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 어쩌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나로부터 남에게로 향하는 삶. 이 겸손한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공부.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인생은 타인의 상처, 고통, 아픔, 슬픔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공감해 나가는 긴 여정, 다시 말해 슬픔을 공부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나는 묻는다. 나는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목적으로 교활한 눈빛을 숨긴 채 핑크빛 물감이 잔뜩 묻은 커다란 붓을 들고 내가 아닌 타인의 삶과 내가 모르는 세상의 여백을 함부로 칠해왔던 건 아닌지. 공적인 자리에서는 피라미드 무한경쟁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은밀한 곳에서는 누구보다도 승자독식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칙을 고수하며 승자, 강자, 적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숨 가쁘게 타인을 무시하고  짓밟아 내 행복을 이루는 땔감으로 사용하려고 애썼던 건 아닌지. 내 얼굴이 아닌 상대적 약자들의 얼굴에 땀을 흘리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지혜이자 성공이라는 신념에 떠밀려 나도 몰래 무고한 그들의 등에 빨대를 꽂아 단물만을 빨아먹으려고 했던 건 아닌지. 나의 시간과 나의 열정의 방향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조용한 밤, 스탠드 불빛만이 책상을 비추고 있는 조그만 방에 앉아 나는 나 자신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그랬더니 금세 슬퍼진다. 니버가 말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괴리 때문에도 그렇고, 돌이켜보면 해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눈치 보며 망설이다가 결국 행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내 모습이 가소로워져서도 그렇고, 나는 이런 제한을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처량하게 느껴져서도 그렇다.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며 해가 갈수록 살아가는 동안 공부가 점점 더 필요한 것이며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의 가치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지만, 나의 인식과 공감의 한계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나는 슬프다.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전진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기분. 불가능과 가능 사이에 선 자는 존재와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고, 그 답의 파편을 조금씩 알아갈 때마다 조금씩 더 슬퍼진다. 나의 조심스러움이 훗날 미련함과 우유부단함으로 남을까 봐, 나의 용기 있는 결단이 상대방에겐 뜻밖의 상처를 남기게 될까 봐 나는 늘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부를 지속해야 함을 안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슬프다는 신형철의 말은 옳다.

상처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견뎌내는 모습이 각양각색이며, 상처나 슬픔의 정도 또한 아라비아 숫자로 단순하게 디지털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정작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우리들이 그 말에 담긴 진심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지는 언제나 미지수로 남는다.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슬픈 또 다른 이유는 마땅한 교과서의 부재, 아니 존재할 수 없는 교과서의 존재 때문이다. 적당하게 깊은 상처가 아닌 골수를 찌를 정도의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논리와 이성의 단계를 넘어섰고, 감정과 감각의 단계도 넘어서서 혼자만의 섬에 갇힌 채 사람들과의 소통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이라든지 공황장애라든지 하는 불청객과 동거하는 사람들이 상처 입은 사람들 중에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자 우리가 그들에게 마이크를 떠넘기는 행위조차 그들에겐 일종의 폭력으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상처 입은 자들의 말에 신뢰를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자칫 객체로 전락하고 마는데, 이러한 경솔한 현실에서는 아무리 상처와 치유에 대한 무성한 말들이 존재해도 정작 상처가 무엇인지 치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모순된 상황에서 그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어쩌면 우리에게도 아직 양심이 남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양심이 더 많이 발현되어 상처 입은 자들이 상처 받았다고, 그래서 아프다고 죽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꿈꾼다. 함부로 설교를 퍼붓거나 정답을 던져대는 경솔함은 사라지고, 경청하는 마음과 시간을 기꺼이 내는 겸손함이 살아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 바람에서조차도 나는 경솔함의 냄새를 맡는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작은 내러티브들을 마주할 것을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내 안엔 어떤 일괄적인 원칙이나 공식을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서다.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건 결코 일반화시켜 공식화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하게 필요한 건 진정성 어린 교감일지도 모른다는 것. 개별적인 타인의 슬픔 앞에 설 때마다 영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내 마음과 생각은 잠잠해지기가 어렵다. 불안과 초조, 긴장과 두려움이 동반되는 건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슬픈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건, 어쩌면 우리가 타자의 슬픔을 습관처럼 그동안 너무 함부로 대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고 아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신형철이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한 권으로 짜 맞춘 책이다. 제목도 글을 다 모아놓고, 내용이 비슷한 것끼리 분류하고, 출간되기 거의 직전에 아내와의 대화 가운데 우연히 얻어냈다고 한다. 이런 표현이 이 책의 무게를 경감시키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신형철이 직접 고백한 말이기에 사실은 사실인 셈이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평균 서너 페이지 정도의 짧은 기고문들의 모음집인데, 각 부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1부부터 슬픔, 소설, 사회, 시, 문화, 이렇게 다양하게 다뤄진다. 알다시피 신형철은 소설가도 사회부 기자도 시인도 문화평론가도 아니다. 그는 문학평론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문학평론가가 쓴 글로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사실은 특히 1부 슬픔 편을 읽을 때는 더 유념하는 편이 좋은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슬픔이라는 것이 소설, 사회, 시, 문화처럼 어떤 한 장르나 분야를 일컫는 분류가 아니라는 점,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심리학자나 상담가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가르치려 한다는 느낌은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함께 공부해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갈 필요가 없다는 이점을 가진다. 제목에 이끌리어 맘에 드는 글을 골라 그 글만 읽어도 되고, 다섯 중심 주제 중 하나를 택하여 그 부를 먼저 읽어도 된다. 만약 시간이 없다거나 이 책의 코어를 맛보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나는 1부를 추천한다. 

2018년 말, 가족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 중고서점에 들러 한 시간 정도 책을 구경하던 일상을 누리던 시절, 나는 이 책을 출간 즉시 훑어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형철이 누군지 몰랐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이니, 나의 인문학적 소양은 터무니없이 부족했을 때였다. 지금이라고 얼마나 늘었겠냐마는 그 이후 2년 간 내가 꾸준히 읽어온 책이 100권을 훌쩍 넘긴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언가는 달라져도 달려져 있을 것이라 혼자서 생각해본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짚어 들고 찬찬히 훑어보았을 때 내가 느낀 첫인상은 ‘어렵다’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땐 이 책이 이상하게 잘 읽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2년 전의 나와 지금 현재의 나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발견해야 할 터인데, 신형철 글의 난이도나 다루는 주제 등이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을 다루고 있는 건 아니라서, 어떤 구조적인 문제는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이루는 텍스트가 아닌 그 텍스트 이면에 흐르는 콘텍스트를 내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아마도 최선의 설명이 아닐까 한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책을 읽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너무 단순화시켜 비교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공부’가 있었다. 그 공부는 내가 전공했고 현재 밥벌이로 삼고 있는 생물학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신학 분야에서 읽고 쓰고 묵상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온 게 보이지 않는 차이를 조금씩 만들었고, 마침내 이 책이 출간된 지 2년 후 읽게 되었을 때 스스로 그 차이를 체감할 정도로 가시적인 효과를 내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동안 나 하나로 가득 찼던 내 인생에는 위로 향하는 공부만 있었을 뿐 옆을 바라보거나 뒤를 생각하는 공부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더 큰 나를 만드는 공부는 진정한 공부일 수 없다고. 적어도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의 공부와는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진정한 공부는 나를 넘어 남을 향하는 애씀이라고.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치 신형철과 직접 만나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깊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심정이다. 2년 간 그가 추천해준 여러 책을 읽어왔고 감상문도 남겨왔다. 그의 사상과 생각의 흐름과 방향이 나의 그것들과 많이 닮아있음을 느낀다. 글쓰기라는 행위에서도 배울 게 많았다. 글쓰기를 건축과 같은 행위라고 정의하는 그는 문장은 쓰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문장은 하나밖에 없으며 그 문장을 찾아서 사용하는 것. 정확한 글쓰기를 지향하는 그의 조언이 내겐 많은 지침이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쓰기 스타일과는 상극이라 할 수 있고, 소설을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작가의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조언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꼭 새겨들어야 할 말일 것이다. 

겸손한 자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고백한다고 한다. 반면, 교만한 자는 공부와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과 기술을 타인을 억압하고 군림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 대비는 타인의 슬픔을 공부할 때도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경우, 슬픔은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고, 그래서 슬픔을 더 모르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행이다. 겸손이 타인의 슬픔을 공부할 수 있는 문이라면, 적어도 나의 방향이 그리 틀리진 않은 셈이니 말이다.

#한겨레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61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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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7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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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문의 몰락, 그리고 그것의 의미

토마스 만 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천 페이지를 빼곡히 수놓은 문자들은 무덤덤하게도 한 가문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1877년 열네 살의 나이에 티푸스로 죽은 마지막 아들 하노에 이르기까지, 사 대에 걸쳐 진행된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 작품은 하노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었던 1835년, 하노의 증조할아버지 요한 부덴브로크 1세의 말년을 비추면서 문을 연다. 

그들은 최근에 근사한 저택을 새로 구입했다. 경사였다. 사업이 잘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어떤 가시적인 열매는 이어지는 일의 내리막길과 종종 맞물리며 나타나는 법. 표면적으로는 기뻐해야 합당할 일 앞에서도 당사자들은 마음 어딘가에 어둡고 묵직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게 똬리를 틀고 있음을 느끼며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게 된다. 기쁨이라는 껍질을 벗기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먹어선 안 되는 몰락이라는 이름의 사탕. 작가 토마스 만은 소설의 첫 장면부터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이중적인 톤을 탁월하게 묘사하며 긴장을 유지한다. 따라서 독자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이게 경사인지 아니면 어떤 일의 복선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그랬다. 게다가 나는 어렵고 잘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조차 받은 나머지 잠시 다른 책을 손에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 작품의 부제 ‘한 가문의 몰락’를 다시 찬찬히 읽게 되었고, 갑자기 머리에 뭐라도 세게 맞은 것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가시적인 경사의 표면보다는 그 어두운 몰락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티 나지 않게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곤조곤 이런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기운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 기운의 정체는 알다시피 몰락이다. 이 책은 몰락의 냄새가 나는 작품인 것이다.

몰락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덴브로크 가문에 큰 재앙이 들이닥친 적은 없었다. 천재지변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삼 대에 걸쳐 가문의 사업을 장남이 성공적으로 계승했다. 요한 부덴브로크 1세, 그의 아들 요한 부덴브로크 2세, 그리고 그의 아들 토마스 부덴브로크로 이어지는, 규모가 꽤 큰 국가적인 사업은 큰 어려움 없이 사십 년 이상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아래위로 굴곡을 그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부덴브로크 가문은 파산에 이른 적도, 불법을 행한 적도, 불의한 일에 연루되어 큰 사기를 당한 적도 없었다. 작품의 마지막, 부덴브로크 가의 마지막 아들인 하노 부덴브로크의 죽음으로 인해 당시 살아남은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이전과는 다른 삶을 맞이해야 했지만, 그 누구도 빈손으로 거리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은 기존의 몰락이라는 이미지에서 거품을 다 빼고 남은 알짜배기 몰락이었다. 파산은 몰락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였다. 몰락의 기운은 부덴브로크 가에 조용히 숨 쉬듯 자연스럽게 찾아왔고 사십여 년 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성실하게 제할일을 다했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사업과 가문의 중추인 네 명의 부덴브로크를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감으로써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토마스 만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살아 숨 쉰다고 하는 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이자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두어 달 전에 읽었던 ‘토니오 크뢰거’에서 느꼈던 삶과 예술,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 가운데서 고뇌하는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 속에서도, 비록 ‘토니오 크뢰거’에서처럼 명징하지는 않지만, 다뤄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토니오 크뢰거’가 나오기 위한 전신이라 볼 수 있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 가문으로 대표되는 ‘삶과 시민성’, 어머니 가문으로 대표되는 ‘예술과 예술성’,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그래서 두 진영 모두에 속하면서도 모두에 속하지 못한 중간인으로 평생을 고뇌했던 토마스 만. 그가 ‘토니오 크뢰거’에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 ‘시민성과 예술성을 모두 겸비하는 인물’로 성장하도록 플롯을 짰던 것도 어쩌면 바로 전 작품, 즉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 자신이 그려놓은 몰락이라는 이름의 알을 깸과 동시에 그 세상을 파괴하고 마침내 새롭게 태어나고자 했던 그의 결연한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토니오 크뢰거가 있기 위해선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품 전체에 진하게 배인 몰락의 냄새에 취한 채 작품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잔상에 의지하여 괜스레 몰락의 한숨을 쉬거나 몰락의 입김을 불어낼 필요가 없다. 궁극적으로는 이것도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일부일 뿐이니까. 몰락은 몰락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작품에서 조화와 합일로 나아가게 되니까. 휴, 다행이란 생각이다.

그렇다. ‘토니오 크뢰거’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토마스 만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중심 주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중심 주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삶과 예술,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생겨나는 이율배반성이다. 이것은 양부모의 혈통으로 대변되기도 하는 특징이기에 특별히 토마스 만에게는 존재론적인 모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깊은 고뇌를 어찌 공감할 수 있겠냐마는, 이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을 며칠간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맛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불어 마음 깊숙한 고뇌를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울 따름이며 진정 부러운 마음이 앞선다.

사람은 모두가 다르듯 삼 대에 걸친 부덴브로크 가의 사업을 대표했던 세 명의 부덴브로크들 역시 각자 개성이 강했다. 그러나 그 개성이라는 것도 그 시대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특히 상류층 가문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높지만 좁은 세상 속에 길들여진 구체제에 깊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 초반주에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하는 요한 부덴브로크 1세를 몰락의 전신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신은 아마도 몰락의 냄새조차 맡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고 합리적이었으며 자부심도 대단했다. 별 어려움을 모른 채 자식들에게 든든한 돈과 명예를 남기고 죽어간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이룩한 성공은 거침이 없었던 것 같고, 그건 다분히 시대의 조류를 잘 만났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하여, 요한 부덴브로크 2세는 그의 아버지가 가졌던 합리적인 시민성과 더불어 기독교 정신이 깃든 경건함이 가미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 경건함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다. 특히 군중이 귀족을 포함한 상류층에 대항하여 선거권에 대한 폭동을 일으켰을 때 그는 중재자의 역할을 해내어 폭동의 불씨를 사그라지게 만들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자신이 속한 신분의 특권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행해졌던 일이다. 그가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경건한 자였다면 신분제로 인한 차별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행보를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신분의 유지를 위해 끝까지 싸웠고 그 유지야말로 질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았던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어땠을까? 그는 일찍이 결혼 문제에서도 결혼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하는 게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을까?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규모 있는 사업에 대한 부담감이 막중했던 탓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는 마흔여덟이란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는데, 죽기 직전으로 치달을수록 그의 진정한 자아가 긴 잠에서 깨어 나와 그는 괴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른 나이부터 대학도 가지 않고 사업을 물려받아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일을 진행시켰고 시의원에도 당선되어 가문의 위상을 높였으며 할아버지가 구입했던 집보다 더 크고 으리으리한 집을 새로 건축하여 성공의 정점을 찍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간 진정한 자아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페르소나를 뚫고 나오게 되어 있는 법. 그 시기가 토마스 부덴브로크에게는 죽기 얼마 전이었을 뿐이다. 그는 마지막에 와서야 스스로를 성찰했다. 자신이 이룩해놓은 일들과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 모습이 모두 가면이자 연기인 것만 같다고 느꼈다. 회의가 몰려왔다. 비록 이튿날 다시 관성에 몸을 맡기듯 그동안 자신을 일구어왔던 시민성에 쉽사리 굴복을 당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저자 토마스 만은 이 부분을 중요하게 서술하고 있다. 마치 요한 부덴브로크 1세로부터 이어져온 몰락의 기운이 토마스 부덴브로크가 경험한 그 특별한 하루에서 마침내 분출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그 후 치통 때문에 발치를 하러 치과에 다녀오는 길에 쓰러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품위를 유지한답시고 외모 치장에 점점 더 시간을 할애하던 그였는데, 길거리에서 흉한 모습으로 고꾸러짐으로써 수치를 당했고, 그건 곧장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참으로 허망한 마지막이었다.

토마스 부덴브로크의 죽음으로 몰락이 멈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몰락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십 대 청소년이 된 어린 아들 하노 부덴브로크의 죽음이 보란 듯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 대에 걸친 몰락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 대에 걸친 몰락을 따라가며 눈에 띄는 사실 한 가지는 점진적인 인물의 변화다. 저자 토마스 만의 의도가 느껴진다. 요한 부덴브로크 1세에게는 철학이랄까 예술이랄까 하는 자신을 성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들 요한 부덴브로크 2세에게는 그것이 기독교적인 경건함으로 메워지는가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가 구현한 시민성은 신분제 유지에 그치고 말았다. 토마스 부덴브로크에 와서는 꽤 다층적인 모습이 보인다. 작품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성이 표면적으로는 잘 구현되고 있었지만, 내면에서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토니오 크뢰거에게서 나타난 예술성이 토마스 부덴브로크에게서는 자신을 성찰하는 철학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예술이든 철학이든 시민성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건 고무적인 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물론 토마스 역시 결국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한편, 마지막 비운의 아들 하노 부덴브로크는 태생부터가 시민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토니오 크뢰거의 극한이 어린 나이에 투영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사업에는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학생 신분으로 당연했던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다. 아버지 토마스 부덴브로크에게선 냉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을 삶의 도피처로 삼으며 속으로 고뇌를 삼키다가 죽음과 화해를 해버린 인물이었다. 이렇게 보면 요한 부덴브로크 1세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성공을 견인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민성이라는 가치는 요한 부덴브로크 2세와 토마스 부덴브로크를 거쳐 하노 부덴브로크에 이르러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다. 하노 부덴브로크의 죽음이 조금 과하게 그려졌다는 인상이 강하긴 하지만, 토마스 만은 사 대에 걸친 가문의 몰락을 이러한 시민성의 소멸 (혹은 파멸)로 설명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과연 이 파멸은 그런데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시민성을 신분제나 특권 혹은 기득권과 같은 범주로 보고 예술성을 예술이나 철학 혹은 종교나 성찰과 같은 범주로 본다면, 토마스 만은 시민성에 저항하는 것이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인간 스스로의 성찰로 이어진다고 본 것 같다. 그가 고발하고 청산해야 할 대상은 시민성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질서 (?)였던 것이다. 사람을 옭아매고 가두어 옹졸하고 편협한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무언의 힘. 안정감과 특권의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그 무엇. 반면, 성찰로 이어지는 예술이나 철학은 보다 인간다운 그 무엇이며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대비된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토마스 만의 고뇌를 공감하게 된다. 그러한 고뇌 가운데서 이렇게 훌륭한 문학작품을 만들어낸 그의 예술성은 아마도 그가 마침내 얻은 자유와 승리의 열매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면 충분하지 않냐고, 되물으면서.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2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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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6
토마스 만 저자, 홍성광 역자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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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문의 몰락, 그리고 그것의 의미

토마스 만 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천 페이지를 빼곡히 수놓은 문자들은 무덤덤하게도 한 가문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1877년 열네 살의 나이에 티푸스로 죽은 마지막 아들 하노에 이르기까지, 사 대에 걸쳐 진행된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 작품은 하노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었던 1835년, 하노의 증조할아버지 요한 부덴브로크 1세의 말년을 비추면서 문을 연다. 

그들은 최근에 근사한 저택을 새로 구입했다. 경사였다. 사업이 잘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어떤 가시적인 열매는 이어지는 일의 내리막길과 종종 맞물리며 나타나는 법. 표면적으로는 기뻐해야 합당할 일 앞에서도 당사자들은 마음 어딘가에 어둡고 묵직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게 똬리를 틀고 있음을 느끼며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게 된다. 기쁨이라는 껍질을 벗기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먹어선 안 되는 몰락이라는 이름의 사탕. 작가 토마스 만은 소설의 첫 장면부터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이중적인 톤을 탁월하게 묘사하며 긴장을 유지한다. 따라서 독자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이게 경사인지 아니면 어떤 일의 복선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그랬다. 게다가 나는 어렵고 잘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조차 받은 나머지 잠시 다른 책을 손에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 작품의 부제 ‘한 가문의 몰락’를 다시 찬찬히 읽게 되었고, 갑자기 머리에 뭐라도 세게 맞은 것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가시적인 경사의 표면보다는 그 어두운 몰락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티 나지 않게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곤조곤 이런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기운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 기운의 정체는 알다시피 몰락이다. 이 책은 몰락의 냄새가 나는 작품인 것이다.

몰락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덴브로크 가문에 큰 재앙이 들이닥친 적은 없었다. 천재지변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삼 대에 걸쳐 가문의 사업을 장남이 성공적으로 계승했다. 요한 부덴브로크 1세, 그의 아들 요한 부덴브로크 2세, 그리고 그의 아들 토마스 부덴브로크로 이어지는, 규모가 꽤 큰 국가적인 사업은 큰 어려움 없이 사십 년 이상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아래위로 굴곡을 그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부덴브로크 가문은 파산에 이른 적도, 불법을 행한 적도, 불의한 일에 연루되어 큰 사기를 당한 적도 없었다. 작품의 마지막, 부덴브로크 가의 마지막 아들인 하노 부덴브로크의 죽음으로 인해 당시 살아남은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이전과는 다른 삶을 맞이해야 했지만, 그 누구도 빈손으로 거리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은 기존의 몰락이라는 이미지에서 거품을 다 빼고 남은 알짜배기 몰락이었다. 파산은 몰락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였다. 몰락의 기운은 부덴브로크 가에 조용히 숨 쉬듯 자연스럽게 찾아왔고 사십여 년 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성실하게 제할일을 다했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사업과 가문의 중추인 네 명의 부덴브로크를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감으로써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토마스 만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살아 숨 쉰다고 하는 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이자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두어 달 전에 읽었던 ‘토니오 크뢰거’에서 느꼈던 삶과 예술,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 가운데서 고뇌하는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 속에서도, 비록 ‘토니오 크뢰거’에서처럼 명징하지는 않지만, 다뤄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토니오 크뢰거’가 나오기 위한 전신이라 볼 수 있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 가문으로 대표되는 ‘삶과 시민성’, 어머니 가문으로 대표되는 ‘예술과 예술성’,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그래서 두 진영 모두에 속하면서도 모두에 속하지 못한 중간인으로 평생을 고뇌했던 토마스 만. 그가 ‘토니오 크뢰거’에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 ‘시민성과 예술성을 모두 겸비하는 인물’로 성장하도록 플롯을 짰던 것도 어쩌면 바로 전 작품, 즉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 자신이 그려놓은 몰락이라는 이름의 알을 깸과 동시에 그 세상을 파괴하고 마침내 새롭게 태어나고자 했던 그의 결연한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토니오 크뢰거가 있기 위해선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품 전체에 진하게 배인 몰락의 냄새에 취한 채 작품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잔상에 의지하여 괜스레 몰락의 한숨을 쉬거나 몰락의 입김을 불어낼 필요가 없다. 궁극적으로는 이것도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일부일 뿐이니까. 몰락은 몰락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작품에서 조화와 합일로 나아가게 되니까. 휴, 다행이란 생각이다.

그렇다. ‘토니오 크뢰거’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토마스 만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중심 주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중심 주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삶과 예술,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생겨나는 이율배반성이다. 이것은 양부모의 혈통으로 대변되기도 하는 특징이기에 특별히 토마스 만에게는 존재론적인 모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깊은 고뇌를 어찌 공감할 수 있겠냐마는, 이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을 며칠간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맛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불어 마음 깊숙한 고뇌를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울 따름이며 진정 부러운 마음이 앞선다.

사람은 모두가 다르듯 삼 대에 걸친 부덴브로크 가의 사업을 대표했던 세 명의 부덴브로크들 역시 각자 개성이 강했다. 그러나 그 개성이라는 것도 그 시대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특히 상류층 가문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높지만 좁은 세상 속에 길들여진 구체제에 깊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 초반주에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하는 요한 부덴브로크 1세를 몰락의 전신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신은 아마도 몰락의 냄새조차 맡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고 합리적이었으며 자부심도 대단했다. 별 어려움을 모른 채 자식들에게 든든한 돈과 명예를 남기고 죽어간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이룩한 성공은 거침이 없었던 것 같고, 그건 다분히 시대의 조류를 잘 만났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하여, 요한 부덴브로크 2세는 그의 아버지가 가졌던 합리적인 시민성과 더불어 기독교 정신이 깃든 경건함이 가미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 경건함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다. 특히 군중이 귀족을 포함한 상류층에 대항하여 선거권에 대한 폭동을 일으켰을 때 그는 중재자의 역할을 해내어 폭동의 불씨를 사그라지게 만들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자신이 속한 신분의 특권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행해졌던 일이다. 그가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경건한 자였다면 신분제로 인한 차별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행보를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신분의 유지를 위해 끝까지 싸웠고 그 유지야말로 질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았던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어땠을까? 그는 일찍이 결혼 문제에서도 결혼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하는 게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을까?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규모 있는 사업에 대한 부담감이 막중했던 탓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는 마흔여덟이란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는데, 죽기 직전으로 치달을수록 그의 진정한 자아가 긴 잠에서 깨어 나와 그는 괴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른 나이부터 대학도 가지 않고 사업을 물려받아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일을 진행시켰고 시의원에도 당선되어 가문의 위상을 높였으며 할아버지가 구입했던 집보다 더 크고 으리으리한 집을 새로 건축하여 성공의 정점을 찍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간 진정한 자아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페르소나를 뚫고 나오게 되어 있는 법. 그 시기가 토마스 부덴브로크에게는 죽기 얼마 전이었을 뿐이다. 그는 마지막에 와서야 스스로를 성찰했다. 자신이 이룩해놓은 일들과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 모습이 모두 가면이자 연기인 것만 같다고 느꼈다. 회의가 몰려왔다. 비록 이튿날 다시 관성에 몸을 맡기듯 그동안 자신을 일구어왔던 시민성에 쉽사리 굴복을 당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저자 토마스 만은 이 부분을 중요하게 서술하고 있다. 마치 요한 부덴브로크 1세로부터 이어져온 몰락의 기운이 토마스 부덴브로크가 경험한 그 특별한 하루에서 마침내 분출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그 후 치통 때문에 발치를 하러 치과에 다녀오는 길에 쓰러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품위를 유지한답시고 외모 치장에 점점 더 시간을 할애하던 그였는데, 길거리에서 흉한 모습으로 고꾸러짐으로써 수치를 당했고, 그건 곧장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참으로 허망한 마지막이었다.

토마스 부덴브로크의 죽음으로 몰락이 멈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몰락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십 대 청소년이 된 어린 아들 하노 부덴브로크의 죽음이 보란 듯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 대에 걸친 몰락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 대에 걸친 몰락을 따라가며 눈에 띄는 사실 한 가지는 점진적인 인물의 변화다. 저자 토마스 만의 의도가 느껴진다. 요한 부덴브로크 1세에게는 철학이랄까 예술이랄까 하는 자신을 성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들 요한 부덴브로크 2세에게는 그것이 기독교적인 경건함으로 메워지는가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가 구현한 시민성은 신분제 유지에 그치고 말았다. 토마스 부덴브로크에 와서는 꽤 다층적인 모습이 보인다. 작품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성이 표면적으로는 잘 구현되고 있었지만, 내면에서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토니오 크뢰거에게서 나타난 예술성이 토마스 부덴브로크에게서는 자신을 성찰하는 철학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예술이든 철학이든 시민성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건 고무적인 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물론 토마스 역시 결국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한편, 마지막 비운의 아들 하노 부덴브로크는 태생부터가 시민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토니오 크뢰거의 극한이 어린 나이에 투영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사업에는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학생 신분으로 당연했던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다. 아버지 토마스 부덴브로크에게선 냉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을 삶의 도피처로 삼으며 속으로 고뇌를 삼키다가 죽음과 화해를 해버린 인물이었다. 이렇게 보면 요한 부덴브로크 1세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성공을 견인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민성이라는 가치는 요한 부덴브로크 2세와 토마스 부덴브로크를 거쳐 하노 부덴브로크에 이르러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다. 하노 부덴브로크의 죽음이 조금 과하게 그려졌다는 인상이 강하긴 하지만, 토마스 만은 사 대에 걸친 가문의 몰락을 이러한 시민성의 소멸 (혹은 파멸)로 설명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과연 이 파멸은 그런데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시민성을 신분제나 특권 혹은 기득권과 같은 범주로 보고 예술성을 예술이나 철학 혹은 종교나 성찰과 같은 범주로 본다면, 토마스 만은 시민성에 저항하는 것이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인간 스스로의 성찰로 이어진다고 본 것 같다. 그가 고발하고 청산해야 할 대상은 시민성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질서 (?)였던 것이다. 사람을 옭아매고 가두어 옹졸하고 편협한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무언의 힘. 안정감과 특권의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그 무엇. 반면, 성찰로 이어지는 예술이나 철학은 보다 인간다운 그 무엇이며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대비된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토마스 만의 고뇌를 공감하게 된다. 그러한 고뇌 가운데서 이렇게 훌륭한 문학작품을 만들어낸 그의 예술성은 아마도 그가 마침내 얻은 자유와 승리의 열매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면 충분하지 않냐고, 되물으면서.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2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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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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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기억과 집착이 만든 섬


모니카 마론 저, ‘슬픈 짐승’을 읽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 낮은 곳에서 용기 내어 나선 길. 그 길 위에서 좋은 길잡이를 만난다는 건 반가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설 즈음, 마치 사춘기를 다시 시작하듯 발걸음을 뗀 독서 여정에서 나에게 신형철은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다. 약 2년에 걸쳐 그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추천한 작품 중 열 권을 읽어 오면서 어느새 내 안에선 조용히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겨 버렸고, 급기야 나는 책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추천도서 이외에도 그가 각 꼭지에서 다룬 작품 중 마음에 와 닿았던 것부터 하나씩 기회가 되는 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도 그 새로운 여정에서 만난 작품 중 하나다. 아마도 신형철이라는 길잡이를 못 만났다면 평생 내 손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형철은 1부 ‘그녀, 슬픔의 식민지’라는 꼭지에서 이 작품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자기 나이도 잘 기억하지 못할 만큼 처절하게 섬이 되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건 단순히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거나 기억상실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기억도 무한히 반복해서 되새기면 변형이 되는 법. 확실한 것은 점점 사라지고,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혹은 무엇이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 무엇이 일어나길 바랐던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묘연해지게 되는 것이다. 기억이 집착을 만나면 환영이 되는 이유도 아마 이런 기작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과거에 경험했던 불꽃같던 사랑을 조금씩 기억해낸다. 부정확하고 불연속적인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녀의 독백들. 기억의 파편 하나하나에는 슬픔이 진득하게 배어있고, 그 슬픔은 서서히 그녀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수십 년 전 이야기 속에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는 그녀. 집착이라는 소름 돋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할 만큼 그녀는 오늘도 프란츠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의 이야기가 처절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프란츠도 그녀도 각각 가정을 가진 상태에서 만나는 은밀한 관계였기 때문이고, 보다 거시적인 이유는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모두 ‘기이한 시대’를 거치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눠진 독일. 작가 모니카 마론은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다시 통일된 독일. 그녀는 한때 서독으로 이주해 있다가 통일이 된 이후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작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시대가 작가를 통과하면 작품이 되는 법. 그 ‘기이한 시대’를 모두 통과한 모니카 마론은 한 평범한 서독 출신의 남자와 한 평범한 동독 출신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그 기이한 시대가 남긴 흔적과 상처를 평범한 사랑과 집착, 불안과 기다림, 그리고 슬픔이라는 단어로 응축해낸다. 마치 거대한 역사가 결국 스며드는 곳도 바로 우리네 평범한 일상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작가는 소설 속의 ‘나’를 기이하지만 평범한, 그러나 처절한 슬픔 속에 잠기게 한다. 섬이 되게 한다. 신형철은 이를 ‘식민지’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말은 소설 속 ‘나’가 프란츠를 만나고 그녀 안에 꿈틀거리던 사랑을 해방시킨 말이기도 하다. 그녀가 프란츠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녀 안에 있던 사랑이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행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기이한 시대’가 끝나던 무렵이었다.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사랑을 죄수로 만들었고, 통일이 그 종신형 죄수로 하여금 감옥을 부수고 나오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방으로 인해 만난 사랑도 결국엔 헤어짐으로 끝나고, 그녀에게 남은 건 오로지 슬픔뿐이었다. 그녀는 책의 마지막에서 프란츠와 함께 누워있곤 했던 침대에 크고 작은 짐승들과 함께 눕는다. 그녀의 슬픔은 환영까지 불러온 것이다.

읽고 나면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비록 강하진 않지만 오래 남는 작품이다. 저자의 글쓰기에서 나는 저자가 처한 시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나를 통과하면서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고 책을 덮으며 조용히 생각하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6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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