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의 고백 - 기억에서 회심으로, 그리고 확신으로 비아의 말들
마커스 J. 보그 지음, 민경찬 외 옮김 / 비아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커스 보그의 고백


마커스 보그 저, '마커스 보그의 고백'을 읽고


이 책은 70년이란 세월을 살아낸 마커스 보그가 그의 ‘기억’, 그가 경험한 세 가지 측면에서의 ‘회심’, 그리고 그 여정에서 얻은 ‘확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삶을 돌아보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관련된 생각을 정리한 역작이다.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특히 그 사람이 나이가 지긋이 든 경우라면, 내겐 우선적인 경청의 대상이 된다. 나는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채 시대의 조류와 어쩌다 맞아떨어져 연예인처럼 부와 명예와 힘을 거머쥐고 화려한 인생을 살다가 추하게 늙어버린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여럿 알고 있다. 그들의 말과 글은 공허하여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진리라면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이 진리여야 한다는 믿음이 내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어른, 진정한 믿음의 선진들이 희박해진 이 시대에 마커스 보그라는 존재는 빛나는 옥석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나오자마자 나는 손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마커스 보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주요한 단어와 문장들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신앙은 여정이라는 것, 회심은 갑작스럽고 극적일 수도 있지만 점진적이고 점층적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 하나님은 실재하며 신비하다는 것,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건 올바른 신념, 지적으로 정확한 신학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경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여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확신일 수 있다는 것, 구원은 내세보다 여기에서의 삶에 관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일 수 있다는 것, 예수의 죽음을 대속만으로 이해하면 여러 신학적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 복음은 단순히 내면의 평안이나 영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복음은 제국에 맞서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망이자 꿈이었다는 것, 그래서 성서는 정치적이라는 것, 등의 메시지가 내 머릿속과 마음판에 견고하게 박혔다.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자.


먼저, 신앙은 여정이라는 말에서 나는 내가 언젠가부터 좋아하게 된 ‘여정’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그렇다. 나는 인생도 그렇지만 신앙 역시 여정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회성의 사건도, 이루어내야만 하는 어떤 성취가 아닌, 말 그대로 ‘여정’이라는 단어가 내가 견지해 온 신앙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 끊임없이 길 위에 있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늘 깨어 있으면서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는 변화의 기로들이 바로 회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커스는 대학에서 전공을 바꾸면서까지 회심을 경험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대학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라는 과목을 들으면서 지적 열정을 갖게 되면서 삶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식이 있다는 관념이 사라지고, 해방감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지적 다양성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서른 후반에 겪었던 회심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유일한 진리로 의심 없이 믿던 것들이 그저 여러 입장 혹은 의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집의 우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다양성은 반진리적이거나 비복음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의 기본에는 다양성이 있다. 생명의 다양성만을 떠올려보아도 이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할 테지만.


마커스가 경험한 두 번째 회심 역시 지적인 측면이었다. 아모스서를 읽다가 일종의 계시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세상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으로 변혁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정, 갈망, 꿈, 바람에 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그저 여러 선지서 중 하나로만 알던 책일 뿐이었으나, 마커스에게 아모스서는 성서와 정치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였고, 성서가 얼마나 강하게 경제 정의를 열망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책이었다. 


마커스의 앞의 두 번의 회심이 지적 활동을 통해 일어난 것이라면, 세 번째 회심은 그것과는 달리 소위 ‘신비 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촉발되었다고 한다. 그는 홀연히 빛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이 경이로워 보이는 체험을 했다. 그는 압도되었고 의식 속에서 주객의 구분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서술한다.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는 보았고 느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가 신비주의를 신봉하거나 그것에 의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은 신비하시다. 신비한 존재를 체험하는 순간은 인간의 지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결코 지성적으로만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마커스 또한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그 순간 느낀 건 경이였다. 그는 말한다. 경이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여정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확신이라고. 하나님은 만물을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존재하게 하는 만물 그 이상의 분이시라고 담담히 고백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책의 중심이 되고 기초가 되는 확신은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 그리고 성서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곧 만물 그 이상의 분, 존재 그 자체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마커스는 이어서 구원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과 결이 다른, 그래서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칫 ‘위험한’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 마디로 구원은 내세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것. 나 역시 대한예수교 장로교 합동 측에서 신앙을 처음 가져서인지 오랫동안 구원은 죽어서 가는 천국 티켓을 받는 게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약 십 년 전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날 무렵 신앙의 재정립을 하며 마커스와 같은 결의 해석을 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짐을 체험할 수 있었다. 마커스는 말한다.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 내세에 관한 것인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이생에서의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구원이란 우리가 죽은 뒤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이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사실 마커스가 간파한 대로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전한 이야기의 핵심은 ‘죽어서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바울 역시 내세의 천국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새로운 삶이 변화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 강조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결코 구원과 동의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가진 상태로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구원은 그저 허상 혹은 망상에 머물지도 모른다. 마커스의 말은 옳다. 구원은 해방이며, 다시 연결되는 것이며, 새롭게 보는 것이며,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갈망이 충족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마커스는 성서 무오설의 허점을 짚으며 성서의 규범은 예수라고 강조한다. 마커스그 지적한 것처럼 성서 무오설은 개신교, 그 안에서도 특정 분파에서, 최근에 형성된 교리다.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고 동방 정교회, 그리고 역사 속 대다수 교회에서는 한 번도 성서가 무오하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오직 성서'라는 표어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서가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유일무이한 권위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한 이성도 함께 강조했다. 따라서 성서의 무오성, 성서의 절대 권위라는 생각은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 신학의 발명품이다. 성서가 무오하다는 표현은 17세기 후반 개신교 신학 저작들에서 처음 등장한다. 마커스의 강조대로 나 역시 성서 무오설을 신앙의 핵심으로 여기는 건 성서를 예수보다 신봉하여 우상으로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성서는 성령의 영감으로 인간이 쓴 저작물이다. 


또한 성서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그것이 쓰인 역시 고대 근동이라는 시대와 문화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성서는 우리에게 쓰인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와 문화가 바뀌면서 성서를 이루는 문자들은 성서가 말하는 진리를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의 한계이지 성서의 한계가 아니다. 성서의 진리는 문자에 갇히지 않고, 문자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성서를 읽을 땐 비유적 의미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마커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비유적 해석은 이야기 속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믿는 데 강조점을 두지 않고, 그 이야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고 받아들이는 데 무게를 두는 것이다. 나는 마커스의 다음 문장에 아멘을 외치며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믿음이란 실제로 일어났을 법하지 않아 보여도 이야기의 사실성을 믿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믿음은 훨씬 더 중요한 무언가와 관련이 있다.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며, 그분에게 충실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오만한 자기 확신도, 불안한 자기 의심도 아니다. 믿음은 깊은 평온함 가운데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일 수 있다. 성서의 주요 이야기들과 주제가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진리라는 데 나 역시 확신을 가진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마커스의 통찰은 전통적인 관점, 즉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함이라는 ‘대속’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부분 또한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겐 ‘불편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커스의 설명은 들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먼저 ‘대속’은 1098년 수도사이자 사제, 수도원장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무스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개념이다. 신학사에서의 새로운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대속은 별다른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안셀무스는 영주와 봉신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적용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 없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여길 것이라는 논리였다. 반드시 대가는 치러야 했다. 같은 논리로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은 그래서 필요하다고 결론이 지어진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었기 때문에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우리를 대신해 죗값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커스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만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첫째, 하느님께서 예수의 죽음을 계획하신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둘째, 하나님이 불순종에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전제군주로 이해하게 만든다. 셋째, 예수의 죽음만 강조하게 되어 죽기 전 그의 삶과 가르침과 활동의 중요성을 가리게 된다. 넷째, 우리가 믿는 것이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가 대신해주었다고 믿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 네 가지 문제들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며, 나는 마커스의 견해에 동의가 된다. 사복음서에를 수십 번 읽어보고 목사님으로부터 설교도 수없이 들어왔지만, 예수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으며, 그 하나님 나라는 내세가 아니었고, 그의 가르침은 천국에 가는 법이 아닌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는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논리 저번에도 예수가 살아낸 삶이 있는 것이지 않은가. 예수의 탄생과 죽음만으로 예수의 복음을 이해한다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마커스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사건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가릴 뿐 아니라 아예 지워버린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협으로 여긴 권력자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누군가가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복음서도 예수가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이 또한 동의가 되었다. 복음은 단순히 내면의 평안이나 영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인 구원만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복음은 제국에 맞서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망이자 꿈이었다는 마커스의 말은 이런 점에서 지극히 옳다.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 덕분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대한 깊고 풍성한 통찰을 얻는다. 성서는 정치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의 제자라는 말이 담고 있는 함의 역시 정치적이라는 관점을 빼고서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도 얻게 된다. 그의 다른 책, ‘기독교의 심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대가 된다.


#비아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고 쓰는 사람 이동진


이동진 저,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 이동진 독서법'을 읽고


이동진은 영화평론가로 잘 알려져 있고 여러 매체에서도 그렇게 소개된다. 그가 남긴 짧지만 강렬한, 그래서인지 긴 여운을 남기며 수려하기까지 한 많은 명문들은 이동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다. 영화를 많이 본다고 해서, 혹은 독창적인 비평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글쓰기를 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동진은 이게 가능했고, 그 재능은 그의 꾸준한 '읽고 쓰는 삶'이 맺은 열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말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소개되는 것처럼 이동진의 독서법에 관해서다. 굳이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고 하면 제목에 나와 있는 문구를 그대로 사용하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 이동진의 독서법의 핵심 키워드는 '재미'다. 어떤 지식을 쌓기 위한 특정한 목적으로 읽는 독서도 독서이지만, 그런 독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끝나는 일에 불과하고 지속할 수 없다는 단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동진의 독서법의 중요한 전제는 독서의 지속, 혹은 독서의 생활화라고 할 수 있겠다. 빈 시간에 별 망설임 없이 책을 들고 읽을 수 있는 문화를 염원하는 이동진의 바람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책의 키워드인 '재미'라는 단어를 이해했다고 해서 이 책을 닫으면 후회할 것이다. 내게 이동진은 글보다 말을 더 잘하는 인플루언서로 각인되어 있는데, 편한 구어체로 쓰인 이 책의 여러 꼭지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이동진이 옆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며, 곳곳에서 그의 낭중지추 같은 내공 혹은 통찰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삐져나온 송곳을 알아채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묘미이자 이 책의 가장 적확한 독법이 아닌가 싶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와 유사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이동진의 독서법은 아마도 책을 좋아하고 지속해서 읽어나가고 있는 무수한 독자들의 독서법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딱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아래에 조금 더 풀어볼까 한다. 


이동진은 책에서 길을 찾을 수도 있지만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니, 길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길을 잃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동진의 다른 표현으로 이는 각각 '쌓는 독서'와 '허무는 독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를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후자에 주목했다. 잠시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허무는 독서라니! 길을 잃기 위한 독서라니! 평소에 안개처럼 막연한 생각의 파편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던 것을 누군가 명료하게 정리한 문장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나는 이 부분에서 느꼈던 것 같다. 카프카의 유명한 말처럼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는 문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이 독서의 목적은 나도 모르게 게을러지고 있던 내 안의 나를 깨우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길을 잃을 용기, 잃어도 괜찮다는 용기, 그게 아니어도 괜찮다는 용기. 독서인으로서 늘 명심해야 할 깨우침일 것이다.


이동진은 2만 3천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평생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이다. 책 뒤엔 그가 추천하는 책 목록이 소개되어 있다. 무려 800권이다. 내가 지난 8년간 읽은 책들을 다 합쳐도 겨우 천 권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은데, 추천을 800권이나 할 수 있다는 건 도대체 그가 읽은 책이 몇 천권이란 말일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독서가들이 이 세상엔 많은 것을 다시 실감한다. 


이 책을 읽으며 예상 밖의 소득이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의 독서법이 있고, 글쓰기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으며, 그것들을 나누고 전달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읽고 쓰고 나누는 삶은 숨이 다할 때까지 계속할 것이니, 나도 언젠간 나만의 고유한 철학과 노하우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십 년은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볼 것이다.


#위즈덤하우스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박하고 친근한


이승우 저, '소설가의 귓속말'을 읽고


'고요한 읽기' 덕분에 이승우 작가의 에세이 혹은 산문의 매력에 빠진 이후, 나는 그를 전작 읽기 리스트에 조용히 올렸고, '생의 이면'과 '사랑이 한 일'을 읽으며 불편했던 그의 문체가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중첩되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그의 문장들이 가지는 독특한 매력이 어쩌면 이승우를 읽는 고유한 가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언젠간 '생의 이면'과 '사랑이 한 일'을 다시 읽어야 할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여러 형태의 글들이 한데 모인 산문집이다. 에세이, 비평, 서평, 칼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글들이 책 한 권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갈한 느낌이나 다듬어진 느낌보다는 조금 더 이승우 작가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제목에 쓰인 '귓속말'이라는 단어가 단박에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소설은 무엇인지에 대해, 혹은 소설가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어떤 명쾌한 답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에서 소설가 이승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귓속말은 그런 일체의 팁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저자는 자신의 여러 생각들을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에서 내게 더 의미가 깊었던 단어는 '귓속말'이 아닌 '소설가'였다. 소설을 쓰는 사람을 일컫는 일반적인 '소설가'가 아닌, '귓속말'을 들려주는 소설가, 즉 이승우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제 이승우 작가가 왠지 친근해진 기분이다.


한 작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작가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아니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일 테다. 그리고 좋은 책이란 다 읽고도 또 읽고 싶어 지게 만들고, 그 작가가 쓴 다른 책도 읽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책일 것이다. 내겐 이 책이 그랬다. 지금까지 읽은 이승우 작가의 다섯 작품 중 가장 소박한 책이지만 말이다.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 이승우 읽기

1. 생의 이면: https://rtmodel.tistory.com/1588

2. 사랑이 한 일: https://rtmodel.tistory.com/1628

3. 고요한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960

4. 캉탕: https://rtmodel.tistory.com/2024

5. 소설가의 귓속말: https://rtmodel.tistory.com/20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빈 자리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재의 편재


크리스티앙 보뱅 저, '빈 자리'를 읽고


보뱅의 글을 읽고 있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두운 곳에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비칠 때야 비로소 드러나는 먼지처럼, 보뱅의 글은 평소에 모르고 지나치던 모든 존재들을 세밀하게 비춘다. 먼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지 않기로, 그러지 말자고 연신 다짐해 놓고도, 또다시 쫓기듯 살던 나는 그제야 쫓기는 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걸음을 멈추게 되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시간도 멈추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응시의 시공간이 열리는 순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경건한 자가 되어 다소곳한 자세로 내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응시한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부재' 혹은 '결핍'을 보게 된다. '빈 자리'다. 신이 떠난 자리일까, 그 텅 빈 시공간은 누구의 빈 자리인 걸까. 아무것도 아닌 듯하나 모든 존재의 중심에 놓인 이것, 이 공허를 인지하는 것, 이 빈 자리를 깨닫는 것이 보뱅의 글을 위한 독법이리라.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 소설도 아니고, 어떤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사상이나 주장이 담긴 글도 아니다. 보뱅의 글은 어쩌면 '빈 자리'를 노래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응시하며, 그 가운데 있는 부재와 결핍을 따스한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며 그것들과 함께 한다. 편재한 부재의 미학이랄까. 부재의 충만이 만들어내는 향연이랄까. 보뱅의 글을 읽고 있으면 겸손해진다. 앞과 위만을 쳐다보며 살던 나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 존재를 증명하는 부재, 이 부재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를 가만히 응시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 안의 부재를, 그리고 그 부재를 통해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선행하는 부재, 어쩌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론적 한계일 것이다. 


정갈한 문장이 읽고 싶을 때 보뱅을 꺼내든다. 읽다가 자주 멈추게 되는 그의 글을 사랑한다. 중요한 것과 의미 있는 것, 아름다운 것과 기억에 남는 것의 경계가 흐려질 때 나는 다시 이 책을 손에 들 것 같다.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 크리스티앙 보뱅 읽기

1. 작은 파티 드레스: https://rtmodel.tistory.com/1437

2. 그리움의 정원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446

3. 환희의 인간: https://rtmodel.tistory.com/1449

4. 자리: https://rtmodel.tistory.com/20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용기


줌파 라히리 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읽고


제2의 모국어이자 주언어였던 영어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키고 이탈리아어를 제3의 모국어이자 제2의 주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줌파 라히리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저명한 미국 작가다. 그녀는 인도 벵골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이민자 신분으로 살게 되었고, 어릴 적엔 부모를 따라 벵골어를 사용하다가 미국 이주 후 영어를 사용하게 되며 이중 정체성을 평생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탈리아어가 느닷없이 그녀의 삶으로 들어와 중심부에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탈리아, 그리고 그곳의 언어를 흡수하고 싶었던 그녀는 미국 작가로 전성기를 누리던 2012년 돌연 이탈리아로 이주하는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로마에서 2년을 거주하며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걸 놓지 않는다. 그녀는 왜 이런 무모하게 보이는 행동을 했던 걸까?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하여 명성을 떨치며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해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답이다. 그녀는 말한다.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도주라고 생각한다고. 철저히 언어적 변신을 꾀하며 무언가에서 멀어져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하는 거라고. 영어에 대한 패배감이나 성공에서 도망치는 거라고.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어색한 구석이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구시대 우아한 긴치마에 티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슬리퍼를 신은 것처럼 이상하게 옷을 입은 느낌, 혹은 엄마의 옷장에 몰래 들어가 하이힐을 신어보고,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보석과 모피코트를 걸쳐보려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과 비슷하다고. 


그녀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평생 짊어진 사람이었다.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해도 인도계 외모 때문에 미국에서도 외국인 취급을 받았고, 이탈리아 로마에 2년간 거주할 때 이탈리아어를 남편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했음에도 이탈리아 현지인들로부터는 이탈리아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편보다 더 이탈리아어를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어딜 가나 현지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흡수하기로 했던 선택도 어쩌면 이런 정체성 혼란이 없었다면 오히려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성공과 정착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잠식되지 않고 창작에 대한 순수한 작가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모험을 용기 있게 선택한 줌파 라히리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용기에서 나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로 가득 차게 된다. 그녀의 작품들을 여러 권 구입했다. 전작 읽기 작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 줌파 라히리 읽기

1.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https://rtmodel.tistory.com/20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