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쓰기 위하여 - 글쓰기의 12가지 비법
천쉐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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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진정성


천쉐 저, ‘오직 쓰기 위하여‘를 읽고


글쓰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쓰고 싶은 욕망은 여전히 가득했지만 정체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늘 비슷한 류의 글을 양산하는 복사기가 된 것 같았다. 총은 계속 쏘고 싶은데 총알도 떨어지고 총도 노후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뭔가 쇄신이 필요했다. 그즈음이었다. 나는 서점에 기웃거리며 작법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작가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알고 싶었다. 어떤 비밀스러운 팁이 있다면 얼른 습득하고 싶었다. 정체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서너 권 정도 읽었을 때 알았다. 시중에 깔린 글쓰기 책들 혹은 작법서들은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 도배된 채 수십 종이 넘게 출간되어 있다는 것을. 그 이후로 그런 책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점에서 훑어보는 정도로만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작법서들을 읽으며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법서는 작법을 잘하기 위한 목적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 그런 책들은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나다를 배우는 용도, 혹은 이미 글쓰기 경험이 다년간 쌓인 사람들이 공감과 위로를 받는 용도, 이렇게 두 가지 용도로 이용하면 된다는 것. 즉 글쓰기를 어느 정도 하다가 나처럼 어느 순간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이런 결론에 이른 나는 서점에 가도 작법서는 읽지 않게 되었고, 갈증이 느껴질 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정독하고 필사하는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런 패턴은 지속되고 있다.


문지혁 작가의 유튜브 채널을 보다가 알게 된 작법서 한 권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 끌렸던 건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가방에 챙긴 다섯 권의 책 중 당당히 포함되기도 했고, 실제로 탑승하자마자 읽어버린 첫 책이기도 했다. 바로 이 책, 처음 들어보는 작가 천쉐의 ‘오직 쓰기 위하여‘이다.


상업성이 가미된 듯한 인상을 주는 ‘글쓰기의 12가지 방법‘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라는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자신이 체득한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나눈다. 목차만 봐도 그 조언들은 쉽게 알 수 있다. 경력 30년 작가의 내공이랄까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겐 12가지 비법서가 아니라 천쉐라는 작가의 글쓰기를 향한 진심이 담긴 책으로 읽혔다. 부제보다는 제목이 이 책의 메시지를 더 잘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직 쓰기 위하여 저자는 자기 몸 관리, 마음 관리, 시간 관리, 관계 관리를 성실하고 지속적으로, 무엇보다 현재진행형으로 해 내고 있는 작가다. 치열하다고도 독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저자는 삶의 중심에 글쓰기를 두고 있다. 이런 여러 관리들을 어떻게 해 내는지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는데, 이것들이 비법이라면 비법이라 할 수 있겠다. 


편집 문제인지 저자의 글쓰기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이 책 한 권에는 중첩되는 내용들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이를 상술이라고 보는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눈엔 저자의 진정 어린 조언이 강조되는 부분으로 보였다. 글쓰기 비법을 전수하기 위한 책이 아닌, 저자가 작가가 되어가는 여정을 진솔하게 담은 책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성은 시중에 나온 천편일률적인 작법서들보다도 내겐 더 명징한 메시지로 와닿았다. 


저자가 강조하는 점이 내겐 크게 두 가지로 보였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두 가지라 해도 무방하다. 하나는 자기 관리, 즉 글쓰기라는 지난한 여정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동안 빈번하게 마주하는 절망, 좌절, 정체위기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잘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어야 하고 힘든 시기를 견뎌야 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마음과 생각이 그렇게 건강하기 위해서는 몸도 건강해야 하므로 기본적인 수면 시간과 작업 시간, 운동 시간을 성실하게 사수하는 것의 중요성을 저자는 강조한다. 


다른 하나는 경제적 수입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시장에서 장사하는 일)에서도 글쓰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 지금은 전업작가가 된 저자는 글쓰기를 위해 해 내야만 하는 여러 관리 중에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버는 돈의 액수를 어느 정도 정해 놓고 그 이상 욕심부리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글쓰기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저자가 주업이라고 여기는 소설 쓰기이고, 다른 하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여러 다양한 글들, 이를테면 인터뷰, 여행에세이, 자서전 대필, 칼럼, 기타 청탁받은 원고들, 그리고 강연들로 이뤄진다. 저자는 소설 쓰기를 지속하기 위해 다른 글들로 돈을 버는 일이 필수이나 그것이 절대 우선순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돈을 좇는 작가가 아니라 진짜 소설 쓰는 게 좋고 그것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행복과 만족을 얻는 작가로 살아가는 저자의 진정성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천성 작가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저자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혼하고 직장도 가지고 있으며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 작가들에게는 저자의 조언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만 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인데, 나처럼 이 책을 읽으며 비법 찾기가 아니라 진정성에 매료된다면 이조차도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저자의 작가로서의 철학과 삶과 미래를 응원한다. 저자의 진정성만큼은 나도 꼭 본받아야 할 점일 것이다. 


#글항아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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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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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이란? 


장강명 저,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제목 ‘먼저 온 미래’는 뒤표지 상단에 박힌, 마치 신문기사를 오려 놓은 듯한 문장으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다. 2016년부터 몇 년간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것이다.” 저자 장강명 작가 개인의 생각일 뿐일까? 내 눈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미 온 미래’를 기자 출신의 세밀한 눈으로 관찰하고 냉철한 머리와 부지런한 손과 발로 분석한 뒤 잉태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경고 내지는 예언으로 보인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위치한 한 예언자의 종말론적인 메시지로 들린다. 저 두 문장의 위치가 책 뒤표지라는 점도 기가 막힐 노릇이다. 책을 다 읽고 한숨을 쉬며 멍하니 있는데, 불현듯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뒤표지 글귀를 무심코 읽으며 나는 소름이 돋았다. 책 읽기 전과 후, 같은 문장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두 번째 문장은 더 이상 예언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온 미래‘는 팩트였다.  


논픽션인 이 책의 발단은 2016년 구글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와 당시 대한민국 최고 바둑기사 이세돌 9단 사이에서 치러진,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알파고가 4승 1패로 승리한 역사적인 대국이다. 저자 장강명 작가는 이 사건을 세계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 중 하나로 본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 의심 없이 믿어왔던 곳까지 침투하여 믿을 수 없이 압도적인 역량으로 점령하고 정복해 버린 공식적인 첫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 이후 바둑계를 초월하여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이를테면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지, 무엇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좀 더 확장하면 신학적이기도 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믿어왔던 것들, 자명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의 경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정의 자체가 존폐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바둑 몇 판의 패배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사건이 가진 함의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한 르포르타주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다. 인간의 존재론적인 물음까지 하게 만드는 철학책이자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사유하게 만드는 인문학책이며, 시대와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 걸친 통찰을 보여주는 사회과학책이다. 인간 본성을 깊이 통찰하게 만드는 이 책에 대한 팟캐스트 ‘책걸상’의 판단은 옳다. 나 역시 단연 올해 최고의 논픽션이라 생각한다. 


이 책이 냉철하고 객관적인 팩트만을 나열한 건조한 책이라거나, 인터뷰 기사들만을 추리고 육하원칙에 따라 기술한 보고서 같은 딱딱한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저자는 바둑계에 먼저 온 미래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지 자신의 통찰을 나누며 심도 있게 물을 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학계에서도 이미 온 미래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이야기하며 솔직한 한 인간의 두려운 감정을 토로한다. 이 부분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가 문학계를 이야기하듯 자연스레 자신이 속한 영역(업계)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기초과학, 그중에서도 생물학계에 인공지능이 침투하여 맹활약을 벌이고 있는 상황들(내가 직접 참여하진 않지만, 나는 알파폴드로 새로운 크리스퍼 구조를 예측하고 만드는 공동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는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소속 선임연구원이다)을 떠올리며 저자의 두려움에 깊이 공감했다. 저마다 다른 영역에 속해 있어도 우린 모두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이 절대 넘어설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인공지능이 쓴 논픽션이 아니라 인간이 쓴 논픽션이라는 사실이 나는 다행스럽게 여겨졌고, 인간다움의 한 조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건 다층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생물분류학적인 접근으로는 다른 동물과 비교하며 모든 면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중심적인 관점을 들 수 있다. 인류학적인 접근으로는 인간의 뇌 크기라든지 직립보행으로 인해 자유로워진 손으로 만든 도구의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비교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보다 창의성일 것이다. 여기에는 인공지능 역시 기계의 한 부류로 볼 때 아무리 계산이 빠르더라도 단순반복의 연장선에 있을 뿐 기계를 만든 인간의 창조성은 결코 따라 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은 바둑이었고, 바둑은 체스와 달리 단순한 게임이 아닌 무수한 경우의 수로 이뤄지는 하나의 예술로써 인간의 창의성이 가장 잘 발현되는 영역이라 믿어져 왔다. 인공지능이 체스를 정복했을 때에도 바둑계에서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다. 


알파고의 승리는 인공지능이 가질 수 없다고 믿었던, 혹은 가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인간의 고유한 창의성까지 침범하여 정복해 버린 사건이었다. 두려움까지 느끼게 만드는 인공지능의 능력에 대해서 인간이 느낀 건 단순히 어떤 상실감과 좌절감을 넘어 인간의 고유성과 인간의 존재 자체가 초라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마지막 보루를 빼앗긴 인간은 긍지를 잃었고 교리처럼 믿어왔던 인간의 위대함 혹은 우월성마저도 인공지능에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급했다시피 이 현상은 바둑계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먼저 시작되었을 뿐이다. 저자가 속한 문학계에서도 이미 인공지능은 ‘안나 카레니나’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같은 대작은 아니더라도 짧은 에세이나 소설은 써내고 있다. 역시 창의성의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인간의 마지막 보루 하나가 인공지능의 영향력 아래 조금씩 잠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이미 저자에게 두려움을 불러왔으며, 앞으로 급속도로 발전될 인공지능의 권세가 과연 어떤 일을 벌일지에 대해서는 저자 역시 모르기에 섣부른 판단을 자제한다. 단, 책의 뒷부분에서 여러 합리적인 대안 혹은 예상을 내놓는다. 무엇 하나 확실한 건 없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역시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불확실성 혹은 모호성이랄까 하는, 어쩌면 우리가 피하거나 감추고 싶은, 나약하다고 믿어왔던 인간의 속성들이 인간다움의 중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믿어왔던 우월성이 아닌 열등성이 인간다움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이 생각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걸 거꾸로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는, 어쩌면 우리가 믿어왔던 자명한 것들을 의심하고 다시 들여다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개별성을 띤 한 사건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재해석이 보편적인 통찰을 이끌어내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인간이라면, 특히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난다. 과연 인공지능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잠식당하지 않고 인간다운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는 어떤 고결하고도 절박한 의지를 읽어낼까? 아니면 인공지능에게 결국 패배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읽어낼까? 이러한 인간의 몸부림이 혹시 가소롭다고 판단하진 않을까? 수많은 궁금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저자는 말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현재 예상하고 있는 건 모두 틀릴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예상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무한반복의 시나리오 가운데 인공지능의 발전은 가속화될 것이다.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의 발전을 멈출 수 없는 인간. 결국 남는 건 최종심급 자본의 힘일까? 무엇이 문제인지 알면서도 자멸을 향하는 모순된 존재자 인간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인간다움의 하나로써 모순과 이율배반성을 꼽게 된다. 모호성, 불확실성, 모순, 이율배반성, 이런 속성이 결국 인간이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책을 덮고도, 이 글을 다 쓰고도, 계속 남아 있다. 비록 저자는 상상력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며 책을 온건하게 마무리하고 나 또한 조금은 무력하게 동의하지만 말이다. 


#동아시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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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교회로 가는 길 - 우리에게 맡기신 하늘과 땅과 바다
장준식 지음 / 바람이불어오는곳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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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대멸종 가운데 일어날 하나님의 선교

장준식 저, '기후 교회로 가는 길'을 읽고

생각해 보면 인류 역사상 지구가 종말의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가 없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진부해질 정도로 친숙해진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이러한 서사를 이루는 조각들인 동시에 그 서사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열매이기도 하며, 어쩌면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반대급부의 강력한 메시지를 함축한 예언이기도 하다. 짧게는 26년 전, 그러니까 20세기말,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가 오면 컴퓨터가 1900년과 2000년을 구분하지 못하는 등 엄청난 버그를 발생시켜(이를 Y2K라고 불렀다) 대재앙과 대혼돈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지구의 종말을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회자되어 전 세계가 경악했던 적이 있었다. 여러 전문가들 덕분에 별 다른 문제 없이 지나갔고, 일반인들에겐 괴담 정도로 기억된 채 역사의 한 장면으로 묻혔지만 말이다. 이러한 종말의 서사는 세기말 현상과 겹쳐 종교, 특히 이단과 사이비들에 의해 더욱더 심화되기도 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 멸망 예언과 더불어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가 팽배했던 그 시기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이 민낯을 드러낸 순간이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속았고 또 죽었다. 그보다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핵무기로 인해 지구가 종말을 맞이할 거라는 예측이 전 세계인들을 두려움과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었다. 제1,2차 세계대전은 또 어떠했던가. 근대를 연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직시하며 지식인들을 필두로 모든 이들은 인간의 한계에 실망과 좌절을 경험했다. 뿐만 아니다. 더 이전으로  올라가면 역사적으로 기록된 여러 전쟁들과 판데믹 상황들이 있었고, 이들 모두는 인류가 겪어 온 종말 서사의 한 조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는 지금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맞이하고 있다. 인류세라고 특별히 구별하여 부르는 이 시기는 현재 우리 모두가 속한 시대를 지칭한다. 공룡이 멸종했던 다섯 번째 대멸종까지 모든 대멸종은 전지구적인 기후 변화 때문이었다. 도저히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출몰하기 전에 일어난 이 일들은 말하자면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 재앙이었고, 모든 생물체들은 불가항력적인 피해자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원인은 우리 인간이다. 지구 온난화, 아니 지구 가열화 현상은 인류가 산업혁명을 이뤄내며 급격하게 증가시킨 탄소배출로 인한 결과이다. 매년 가장 더운 여름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 현상의 직접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셈인데,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의 착취,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과 결탁한 이기적인 인간 중심의 시스템, 그리고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이 모든 생명체가 거주하고 있는 이 지구에 또 한 번의 대멸종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세는 여섯 번째 대멸종이 현재진행형인 인류 종말의 대서사다. 이 역시 표현형은 기후 위기이지만, 인간이 주범이라는 원인론은 이 종말의 대서사를 지구가 겪어 온 모든 종말 서사들 중에서도 가장 치욕적이게 만든다. 그러나 다행스럽기도 한 사실은, 이 원인론을 깨닫고 증명한 것도 인간이고, 그러므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사실, 원인이기도 하지만 해결책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실은 인류세의 유일한 희망이기도 한데,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기후 교회로 가는 길이 들어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말이 아닌 희망이다. 지구와 우주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후 교회가 되라고, 되자고 촉구하는 탄원서다.

인간이 가해자이자 주범이라는 점을 기독교 신학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죄 문제로 소급될 수 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지으신 신께 반역하고 떠난, 소위 원죄 사건으로 인해 인간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안 되고에 따라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나누었고, 반역죄인의 욕망을 쫓아 인간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과학도 의학도 인류 문명을 위해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인류만을, 그것도 피라미드 상층부에 속한, 소위 가진 자들(갑)만을 위한 수단 혹은 시녀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듯한 인상마저 느끼게 되는데, 이미 그들 무리 안에 속한 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러고 있는지조차 사유하지 않은 채 오로지 편리함과 안위와 힘과 자본을 위해 살아가는 기계가 되어 버린 탓이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터전인 이 지구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생명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때론, 아니 빈번하게 타 생명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21세기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가슴 아픈 현실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죄의 열매이자 타락으로 해석한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수많은 전쟁과 살상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지구적인 문제가 도래했다고 본다. 기후 위기, 즉 지구 가열화가 이대로 지속되면 인류는, 다른 대부분의 생물 종들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찬란한 멸종’의 저자 이정모 작가는 2150년이 되기 전 인류는 대멸종을 맞이할 거라고 예측한다. 물론 인류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이대로 계속 같은 패턴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면 말이다.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 진짜로 우린 다 죽는다. 이정모 작가의 예측이 거짓으로 판명날 수 있도록 인간은 변해야 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한다. 기후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인간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패턴을 반성하고 회개하길 촉구한다. 이 지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터전이다. 구원의 하나님만을 생각하게 되면 이 지구는 장망성과 같아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할 장소라고 여기게 될 위험이 높다. 하지만 창조의 하나님을 함께 생각할 때 우린 이 지구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장소이자 인간과 함께 구속받을 모든 피조물들이 공존하는 공간임을 알게 되며, 인간만이 구원의 동아줄을 잡고 어딘지 모를 하늘 위 천국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재창조의 역사를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복음의 공공성이 사라지고 개인구원만이 목표가 되어버린 기독교 문화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중심적, 자기중심적인 원죄의 발현이라는 점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탐욕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고통에 처하게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조차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기후 교회로 가는 것은 어쩌면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맞이하고 있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하나님의 선교일지도 모른다. 모든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저자가 촉구하는 기후 교회로 가는 길 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을 수 있도록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바람이불어오는곳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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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펭귄클래식 64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도스토옙스키의 원형 혹은 쉬운 버전의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저, '외투'를 읽고


고골이라는 작가도, '외투'라는 작품도 모두 도스토옙스키와 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문장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문학 전공자도 아닌 내가 굳이 이 작품을 찾아 읽는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은 이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기에, 그가 지대한 영향을 받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을 못 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나는 고골이나 '외투'가 궁금했다기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눈에 비친 고골과 '외투'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쳤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작품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낯설다는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진부할 정도로 친숙함이 느껴졌고, 몇 단계 쉬운 버전의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듯한 기분마저 느꼈다. 문제는 다 읽고 나서도 도스토옙스키가 왜 그리도 극찬을 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문장을 명징하게 이해하고 동의하게 되길 내심 바랐는데 말이다. 물론 내가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경을 잘 몰라 놓친 게 있을 수도 있겠지만, 러시아 문학에서 고골이 가지는 의미를 이 작품 하나만으로 느낄 만한 능력이 내겐 없었다. 여러 모로 아쉬운 작품이었다.


찾아보니 고골은 1809년생이고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생이니 나이도 띠동갑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적어도 고골보다도 10년이나 이른 푸쉬킨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도스토옙스키와는 22년 차이이므로 한 세대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띠동갑이면 선후배라고 해도 될 만큼 거의 같은 세대이다. 그렇다면 '지대한 영향'이란 고골이라는 작가의 존재가 아닌 그의 작품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텐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외투'를 읽고도 도스토옙스키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성을 발견한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을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 혹은 탁월함으로 해석하는 게 맞겠다 싶다. 고골이 아닌 저 유명한 푸쉬킨보다도 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주관적인 평가이니 고골이나 푸쉬킨 팬들은 노여워하지 마시길. 


'외투'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중년의 9등 문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정서밖에 할 줄 모르는 오타쿠다. 극빈층에 속한 그의 외투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 더 이상 수선할 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수차례 수선을 해줬던 페트로비치에게 찾아가지만 그도 이번엔 단호하게 새 외투를 사라고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의 주인공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돈을 모아 페트로비치로부터 새 외투를 맞춘다. 늘 루저처럼 다니던 아카키가 새 외투를 입고 출근하자 직장에선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는데, 마침 명명일을 맞이한 직장 상사의 초대에 응하게 되어 저녁 식사에 참여한다. 그에겐 첫나들이, 첫 사교 활동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평소라면 잠잘 시간도 훌쩍 넘기게 된 그는 도저히 지루함을 참지 못한 채 다시 외투를 입고 먼저 자리를 뜨는데, 돌아오는 길에 그만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긴다. 아카키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에 흠뻑 취해있다가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봉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을 찾아 가지만 원하는 해결을 보지 못한 그는 그다음으로 '중요한 인사'를 찾아가는데, 거기에서 그만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분통이 터진 나머지 아카키는 병이 드는데, 어이없게도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여기에서 작품이 끝날 법도 한데, 고골은 이 장면 이후 유령을 등장시킨다.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고위 관료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실 고발성 작품에서 다분히 낭만성을 띤 환상소설로 넘어가는 것이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유령은, 독자들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행인들의 외투를 훔치게 되는데, 결국 그를 죽음으로 가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인사'가 걸려들고 그의 외투를 빼앗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설마 했는데, 그 '중요한 인사'는 유령을 만나 외투를 빼앗긴 이후 부하 직원들에게 질책을 하더라도 자초지종을 다 듣고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개과천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유령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고골은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다. "장군의 외투가 그 유령에게 꼭 맞는 게 틀림없었다." 아아, 이럴 수가! 이 클래식한 상상력이라니~!


이제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하고 싶다. '고골의 외투에서 나온 도스토옙스키'를 '고골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를 가뿐히 뛰어넘은 도스토옙스키'라고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기 전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순서가 아주 이상적이었을 것 같다. 이 책엔 '외투' 말고도 다른 단편들도 함께 실려 있다. '코', '광인일기', 그리고 '감찰관'이다. '외투'를 먼저 읽고 읽으려는 게 초기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수정해야 할 듯하다. 


#펭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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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잘 팔리는 책들의 비밀
한승혜 지음 / 바틀비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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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라는 허울


한승혜 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를 읽고


베스트셀러. 여전히 나는 이 권세 있는 이름 앞에서 온갖 상념에 잠긴다. 쿨한 척 이젠 상관없다고 믿다가도 책이 나오면 어느새 나는 다시 그 이름 앞에 조아리며 구걸하는, 빌어먹을 내 안의 나를 인지하게 된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경멸하다가도 출간 직후에는 그 이름을 내 마음대로 호령하고 제어해서 자본주의의 승자독식 피라미드 상층부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다시 느낀다. 한두 달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긴 하는데 그래봤자 정도만 다를 뿐 원하는 건 동일하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어떤 은밀한 뒷길이 없나 곁눈질하는 단계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즉 어떤 운명 같은 기적을 바라게 되는, 수동적인 모드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다가 좀 더 시간이 지나 이번에도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는 나는 다시 그 이름에 환멸을 느끼고 저주까지 퍼붓는 단계로 진입한다. 아, 구역질 나는 이 반복이라니.


작가라는 정체성을 띠고 저자라는 타이틀까지 갖게 된 이후 겪는 일상의 반복이다. 어쩌다가 해마다 책을 내게 되는 기회가 주어져 해마다 겪고 있는 반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한다. 브랜드가 되어버린 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작가들이 출간 직후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하는. 이율배반성은,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며 골수에 새겨질 정도로 깊이 숙지했던 점이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속성이라 믿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시녀로 태어난 우리들이 자본주의가 가진 양날의 검 앞에서 어떻게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사후 해석으로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지만 언제나 뒤끝이 남는 이 불유쾌한 감정은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다.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은 어쨌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이다. 그 이름을 거역하든 찬양하든 상관없이.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책이 일 년에 약 6만 종 이상이라는 보도자료에 기반하면 하루에 약 200 종에 가까운 신간이 발행된다고 한다. 그중 2천 부 안팎의 초판 1쇄를 팔고 2쇄로 진입하는 비율은,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으나, 20퍼센트 미만이라고 한다. 즉 중쇄만 찍어도 성공한 셈이라는 말이다. 이런 출판계의 분위기만 보더라도 대부분의 작가 및 저자들은 초판 1쇄조차 다 팔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슬픈 현실이다.)


위에 소개한 나의 사례가 와닿았다면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역시 베스트셀러라는 단어 앞에서 태연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작가나 저자가 될 기회가 없어 아직 독자로만 머물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느끼는 건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저자라는 타이틀을 갖기 전 내게도 베스트셀러 리스트는 독서라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처음 시작할 때 기대었던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홍수처럼 범람하는 책들에 압도되어 도대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막막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세상에 출간된 책은 무한을 떠올려도 될 만큼 많은 반면 내게 할당된 시간은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엉뚱한 책은 읽고 싶지 않다는, 소위 ‘효율’을 고려하는 차원으로 나는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기준으로 시대의 조류에 편승했었다. 그것이야말로 나도 독서인 대열에, 비록 끄트머리일지라도, 내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이라 여겼다. 소위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왠지 고상한 척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주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수십 권을 읽다 보니 이상하게도 내 안에서 뭔가 꺼림칙한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갖는 권세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따르던 존재가 실체가 없는 껍데기로 보일 때의 기분. 처음엔 내가 이상한가 싶어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끙끙대기만 했는데, 독서 반경이 넓어지면서부터는 암묵적인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베스트셀러는 소수의 책들을 제외하고는 허울이구나,라는. 그리고 한 가지 더.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베스트뤠드(best-read)가 아니라는 것. 즉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해서 많이 읽힌 책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책 읽지 않는 이 시대에도 베스트셀러가 계속 팔린다는 건 우리나라 특유의 속성, 즉 대세에 묻어가기의 일환(이것 역시 남들 시선에 맞춰 살아가는 풍토에서 기인한 것이리라)으로 해석해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남들이 사니까 나도 사는 것이었다. 이건 새것처럼 멀쩡한 수많은 책들이 중고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진실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언젠가부터 독자로서는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자가 되면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시적 노예가 되는 반복을 경험하고 있다. 책을 내면서 팔리지 않길 바라는 저자는 없을 것이기에 이건 브랜드가 되지 못한 이 시대의 모든 작가들이 어쩔 수 없이 겪는 굴레일 것이다. 역시 슬픈 일이다. 


내 얘기를 하다가 하마터면 이 책에 대한 얘기를 까먹을 뻔했다. 정희용 주간님의 강력한 추천과 책 제공으로 나는 이 책을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아 국수 말아먹듯 마셔버렸다. 그만큼 흡입력이 좋았다는 말이다. 한승혜 작가의 유려한 글솜씨는 읽는 내내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여성 특유의 문체도 잘 살아 있었고, 평론가 수준의 분석과 의의를 짚어나가는 부분도 정확해 보였다. 상당히 많은 부분 동의가 되었다 (백이십 퍼센트 동의된 책들: ‘자존감 수업’,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언어의 온도’, ‘모든 순간이 너였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법’,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82년생 김지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이런 책 읽는 시간에 차라리 잠이나 더 자겠다). 사실 조금 더 세게 썼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베스트셀러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을 가질 수 있는 데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책을 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용기를 내서 할 말을 해주어서 고마움도 느꼈다. 이런 책이 더 잘 팔려서,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서 편향되고 허세에 찌들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뭇 독자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베스트셀러 책들을 부끄럽게 만들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양서를 고를 줄 아는 문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자리 잡히길 잠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바틀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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