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결혼, 어때? -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사랑과 연합의 여정
전신근.제행신 지음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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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나님이 흔적이 드러나는 삶


전신근, 제행신 공저, '이런 결혼, 어때?'를 읽고


기다리던 택배 상자를 뜯자마자 책이 아닌 책과 함께 동봉된 저자의 손편지에 손이 먼저 갔다. 정성이 느껴졌다. 아무리 작더라도 작가의 진심은 독자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는 법이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인가 하며 나는 가능한 천천히 읽었고, 아쉬워서 또 한 번 읽었다. 이 편지를 쓰기 위해 저자가 독자 한 분 한 분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보냈을 시간들이 그려졌다. 감사가 일었다. 갓 출간된 이 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2023년 10월 초 상봉몰에서 저자를 딱 한 번 뵌 적이 있다. 내 세 번째 저서 출간 기념으로 열린 조촐한 북토크에 일부러 발걸음을 해주신 날이었다. 남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 주는 행위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은혜받은 자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예기치 못한 구원의 빛 한 줄기가 어느새 어두운 관성에 젖어버린 나의 일상 속으로 침투하는 순간이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사랑한다. 누군가의 은혜는 누군가를 살리는 것이다. 수혜자는 섬김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2021년에 출간된 제행신 작가의 첫 저서 '지하실에서 온 편지'를 이미 읽었던 터라 나는 저자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 안을 수놓은 기적 같은 사건들, 기구한 사연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저자와 저자 가족의 삶을 '하나님의 흔적이 드러나는 삶'이라고 쓰기도 했다.


'지하실에서 온 편지'는 에세이집으로써 목포에 위치한 오래된 집 지하실에서 길어 올린 웅숭깊은 내면의 고백과 신앙, 사유와 경험들이 제행신 작가 개인의 목소리로 진하게 담긴 책이다. 반면, '이런 결혼, 어때?'는 부제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사랑과 연합의 여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남편 전신근 목사의 목소리도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이 전신근, 제행신 공저인 이유다. 물론 제행신 작가의 목소리가 더 크고 또렷이 울려 퍼지긴 하지만. 


그리스도인 부부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를 이룬다. 부부 공저라는 사실이 장점으로 부각되는 지점이다. 부부란 일방이 아닌 쌍방이고,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이며, 서로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 섬기는, 둘이지만 한 몸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지하실에서 온 편지'에서 아내의 목소리를 통해 소개된 남편 전신근의 직접적인 목소리는 자칫 편향될 수도 있는 부부 이야기에 객관성을 부여하며 중심을 잡아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부부가 한 목소리로 내는 화음을 듣는 기분이었고, 책 속에 소개되는 그리스도인 부부 생활에 대한 여러 팁들에 더욱 신뢰가 갔다.


한 부부의 이야기 정도로 축소시킬 수도 있겠지만, 진정성 있는 글은 독자의 어딘가에 파고들어 똬리를 틀기 마련이다. 나는 저자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부부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우리 부부도 결혼 20주년이 지나고 있건만 여전히 티격태격 말다툼이 끊이지 않고 서로를 상처 주는 일을 어리석게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녀석에게도 우리의 못난 모습들이 말 못 할 상처를 주었을 거라 생각하면 나는 깊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다. 이 책의 3부 '부부가 겪는 감정의 파노라마'를 읽으며 내 마음이 무겁고도 혼란스러웠던 이유다. 


다행히 4부 '지금도 사랑하며 배우는 중입니다'를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 사랑과 배움, 이 두 단어는 언제나 희망을 선사한다. 못난 내가 과거의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하며 성숙한 사랑으로 화답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몇 주 전부터 홀로 미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아내가 떠올랐다.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하다. 그리고 다시 같이 살게 되면, 책에서 언급된 대로 '괜찮다'는 말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괜찮은 남편이고 싶다. 


이 책의 뒷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책 속의 책'은 저자 가족이 겪은 어마어마한 모험들을 소개한다. 사실 내가 가장 몰입해서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제행신 작가의 목소리로 상세하게 들려지는 열 가지 모험 이야기는 내가 간략하게 알고 있던 저자 가족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여러 공간과 시간을 거치며 파노라마처럼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통합되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이번에도 동일했다. 저자 가족의 인생은 실로 하나님의 흔적이 드러나는 삶이었다. 책을 덮고 잠시 기도했다. 앞으로도 더욱 그 흔적을, 향기를, 그림자를 드러내는 저자와 저자 가족이 되기를. 나도, 우리 부부도,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 부부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죠이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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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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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와 작품을 듣다


한강 저, ‘빛과 실’을 읽고


손바닥 만한 크기에 백육십 페이지 남짓 되는, 여백도 많아 왠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으며 그 공간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이 책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소감, 미발표된 여러 편의 시, 산문, 일기들을 담고 있다. 한강 작가의 주요 작품만 읽어본 독자로서 함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한강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진지한 적적함과 읊조리는 듯한 농밀한 텍스트들은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도 여전했다. 


한강 작가 특유의 문체를 맛보는 것만 해도 즐거운 독서였다. 그러나 내가 주의 깊게 읽었던 부분은 수상 강연문이었다. 작가가 직접 말해주는 여러 작품들 (‘채식주의자’부터 ‘작별하지 않는다’까지)의 해제랄까, 탄생 배경이랄까, 작품 이면에 깃든 질문들이랄까 하는 내밀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장편소설이었던 ‘채식주의자‘부터 그녀는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전히 이 소설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네 번째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갔다고 한다.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 힘을 다해 기어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 번째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한강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며 다음과 같이 묻고 싶었다고 한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여섯 번째 장편소설은 알다시피 ‘소년이 온다’였다. 한강 작가는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직후까지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광주 학살을 시작으로 여러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그녀는 이십 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학살에 관한 자료들을 읽을수록 그녀는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게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는데 그건 그녀가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상실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랬다. 그러던 어느 날, 1980년 광주에서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고 위에 적은 두 개의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소설의 방향도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덕분에 회자되었던 유명한 질문이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한강 작가는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음을,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들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리고 짙은 어두움 가운데에만 있던 그녀는 생명의 빛을 보기 시작한다. 인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도 있는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동호는 그러므로 소설의 제목 ‘소년이 온다’에서처럼 과거에 죽은 혼으로 현재를 향해 걸어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걸어와 과거가 현재가 되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일은 시공을 초월하여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실제로 한강 작가가 꾼 꿈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라고 한다. 7년에 걸쳐 쓰인 이 작품 속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다. 한강 작가가 묘사한 정심에 대한 문장들에 나는 줄을 그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은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25페이지에서 발췌)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한강 작가는 다음의 두 질문이 자신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그녀의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고 한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러다가 최근에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 중 ‘작가의 말’ 속에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는 문장을 기억한다. 나 역시 정심의 삶을 사랑으로 읽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수십 년간 그녀가 칠순이 넘어 치매에 걸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고 고군분투했던 삶을 사랑으로 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짧은 해제를 읽고 마음이 묵직하면서도 감동이 되었다. 그 감동은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증폭되었다.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34-35페이지에서 발췌)


고통과 사랑, 이 두 단어가 남는다. 인간은 인간스러울 수도 있지만 인간다울 수도 있다. 나는 고통스러운 세계가 가진 아름다운 면을 놓지 않고 싶다. 포기하고 않고 작별하지 않고 싶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싶다. 이것은 한강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자 한강을 읽은 자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에크리

#김영웅의책과일상   


* 한강 읽기

1. 채식주의자: https://rtmodel.tistory.com/362

2. 소년이 온다: https://rtmodel.tistory.com/791

3. 작별하지 않는다: https://rtmodel.tistory.com/1360

4. 희랍어 시간: https://rtmodel.tistory.com/1409

5. 흰: https://rtmodel.tistory.com/1886

6. 빛과 : https://rtmodel.tistory.com/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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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필요한 시간 - 진리, 과학, 신앙, 그리고 신뢰에 관하여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은진 옮김 / 포이에마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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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에 이르는 길에 대한 평신도 과학자의 통찰


프랜시스 콜린스 저, '지혜가 필요한 시간'을 읽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던 창조과학은 생물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내게도 뱀처럼 다가와 그 매력을 발산했다. 나는 잠시 그 매력에 심취했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성경지식과 그 당시 아직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던 과학지식 사이에 생겼던 모호한 괴리로부터 해방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정직하게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조금만 더 과학지식을 객관적으로 습득하자 창조과학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창조과학은 과학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 결코 과학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유사과학일 뿐이었다. 어떤 신념 혹은 신앙에 경도되지 않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자가 가질 수 있는 창조과학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입장은 그것을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창조과학은 누구라도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 다만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마치 그것을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시늉하는, 철저히 비과학적인 사이비 종교 같은 것이었다. 합리적인 척하나 비합리적이었고, 지성적인 척하나 철저히 반지성적이었으며, 과학과 신앙을 조화시키는 척하나 그 어느 신념이나 종교보다 둘 사이를 갈라놓는 뱀 같은 존재가 내겐 바로 창조과학이었다. 창조과학의 정체를 알고 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지금도 지구 6천년설을 주장하고, 마치 진화가 창조의 반대 개념인 것처럼 호도하며, 성경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처하나 오히려 성경의 신뢰도를 격하시키고 있는 주범이 창조과학인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답이라 여기기도 했던 창조과학은 내겐 깊은 늪이었다. 다행히 나는 한국 과신대와 미국의 바이오로고스 덕택으로 별 어려움 없이 그 늪으로부터 과거의 신앙과 가치체계를 온전하게 유지하며 안전하고 건강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생물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내가, 7년 전 프랜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를 읽고 느꼈던 감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프랜시스 콜린스가 다시 책을 냈다. '신의 언어'에서 충분히 과학과 신앙에 대한 명료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 같은데, 과연 그는 또 무슨 할 말이 있었을까? 프랜시스 콜린스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총괄지휘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바로 그 경험이 발화점이 되어 쓰인 책이다. 그는 우리 인간이 너무 많은 부분에서 지혜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있진 않은지 두렵다고 고백한다. 오랜 시간 공적인 자리에서 활동하며 정치를 비롯한 여러 분열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시키는지 직접 목격했다고 실토한다. 정치와 여러 분열은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 과학에 대한 이해, 교회가 드러내는 신앙의 근본에 대한 기반까지 흔들어놓았다고 진찰한다. 그러한 왜곡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되찾기 위해 하나의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유례없던 코로나19 팬데믹을 총괄지휘하며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수많은 것들이 그를 통과하며 맺은 결실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한국어 제목보단 원제가 이 책의 정체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어 제목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즉 지금 혹은 오늘이 바로 지혜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듯하다. 그것 역시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이 책을 깔끔하게 요약하는 건 아무래도 원제인 것 같다. The Road to Wisdom on Truth, Science, Faith, and Trust. 이 책은 지혜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안내서이며, 저자는 그 지혜의 원천이 진리, 과학, 신앙, 신뢰라고 말한다. 과연 무슨 말일까?


막중한 책임을 어깨에 짊어졌던 공직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진실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거짓은 무지, 잘못된 정보, 허위 정보, 망상, 허튼 말들 (개소리), 선전을 통해 나타나므로 지혜를 찾는 과정은 거짓에 빠지지 않는 길 위에 있다고 말한다. 반지성적인 왜곡과 편향된 주장들, 의심을 훌쩍 넘어선 음모론 같은 것들로부터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의사이자 과학자인 프랜시스 콜린스는 지혜를 찾는 과정에서 과학이 자연의 진리를 밝혀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과학이 항상 옳은 결론에 도달하진 않지만, 스스로 교정하는 특성을 통해 객관적 진리에 이르게 하며, 이는 인간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토대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과학만능주의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스도인이기도 한 프랜시스 콜린스는 신앙 역시 지혜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앙은 진리, 과학, 신뢰와 손잡고 함께 작동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그는 기독교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도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기독교가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된 이유는 첫째, 위선, 둘째, 과학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이라는 통계자료를 언급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진화적 창조론을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신앙과 과학 사이의 괴리가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에클런드의 연구를 언급하는 등 기독교가 회복될 가능성에 희망을 건다. 미국 복음주의자 중 하나인 그의 입장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공감이 많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뢰를 이야기한다. 진리, 과학, 신앙,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행동에 반영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혼란스럽고 분열된 사회를 곧바로 치유할 수 없는 이유를 신뢰의 부재에서 찾는다. 어떤 메시지가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지 분별해 내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겪은 신뢰의 경험과 불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우리 사회에서 현재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게 모두가 함께 할 때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물론 신뢰에 이르는 뾰족한 정답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프랜시스 콜린스의 영적인 지도자였던, 지금은 하나님의 품에 안긴 팀 켈러 목사님이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기까지 가장 많은 기여를 하셨다고 한다. 세상적으로도 성공한 의사이자 과학자이자 공직자였던 프랜시스 콜린스가 말하는 지혜로 가는 길에 대한 통찰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도 보이지만 나는 뻔하고 진부한 것들 가운데 진리가 거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전문직 평신도가 말하는 신앙과 과학, 진리와 신뢰를 통해 지혜에 이르는 길은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포이에마

#김영웅의책과일상 


*프랜시스 콜린스 읽기

1. 신의 언어: https://rtmodel.tistory.com/662

2. 지혜가 필요한 시간: https://rtmodel.tistory.com/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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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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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읽기는 곧 작가의 삶


이승우 저, ‘고요한 읽기’를 읽고


‘생의 이면‘으로 처음 만난 이승우는 내게 이질감을 안겨주었던 작가다. 그의 낯선 문체, 이를테면 번복되고 되뇌고 산만하기도 하고 단정치 않고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그의 글쓰기가 거슬렸다. 안정효와 신형철이 말하는, 동시에 나도 지향하는, ‘정확한 글쓰기’와 대조되어 내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고요한 읽기’는 산문집이다. 소설에서 이질감을 주었던 이승우의 문체가 산문에선 의외의 매력을 띄고 내 앞에 나타났다. 잘 잡히지 않던 문장들이 그의 문체 덕에 더 잘 이해가 되었고, 단문들의 반복은 강화와 심화 효과뿐만 아니라 친절함과 다채로움까지 리드미컬하게 자아냈다. 이승우의 진면목을 나는 이제야 보게 된 것인가. 


이 책은 읽기가 읽기와 쓰기를 낳고, 그 읽기와 쓰기는 다시 읽기와 쓰기를 낳게 되는 필연적인 연쇄가 무한히 반복되는 여정을 성실히 먼저 걸어간 작가 이승우의 주옥같은 생각들과 말들을 담고 있다. 그의 치열한 읽기, 루틴이 된 삶으로써의 성실한 읽기, 그리고 그의 치열한 쓰기, 루틴이 된 삶으로써의 성실한 쓰기에서 길어낸 웅숭깊은 통찰을 오롯이 맛볼 수 있어서 나는 이 책을 엘에이에서 한국 가는 열세 시간의 비행 중 한 문장 한 문장 가능한 천천히 씹으면서 읽었다. 그의 번복되는 듯한 고유의 문체는 같은 문장 혹은 단어도 더욱 다채롭고 풍성하게 드러내어 혹시라도 있을 법한 오독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를 내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저자의 의도를 오해 없이 파악할 수 있었다. 나로선 지경이 확장되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고요한 읽기‘란 무엇일까? 강윤정 편집자가 선물한 이 낯설고도 정확한 제목 속의 ’고요‘는 단순한 적막 혹은 침묵이 아니다. 조용한 곳에서 독서하는 것이 고요한 읽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고요’는 집중 혹은 몰두를 뜻한다. 그러므로 ‘고요한 읽기‘는 ‘집중하는 혹은 몰두하는 읽기’이다. 집중하고 몰두하여 내면 깊숙한 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생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여 쓰기와 또 다른 읽기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것이다. 여기에 나는 작가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행위라는 점에서 ’도상’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싶다. 그러면 ’고요한 읽기‘는 독서라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쓰기는 물론 읽기와 쓰기 사이에 난 미세한 모든 시간과 공간까지도 침투하여 장악하게 된다. ‘고요한 읽기’가 마침내 작가의 삶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한 꼭지만 읽어도 이승우 작가의 내공이랄까 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이 한 권의 책은 그가 오랫동안 길어 올린 깊은 우물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어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 그가 본문으로 가지고 오는 여러 책들의 낯선 문장들이 그의 독특한 문체와 어우러져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었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떤 부분은 서평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문학에세이로 보이기도 하며, 또 다른 부분은 쉽게 잘 다듬어진 설교 혹은 철학/인문학 강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그야말로 다채로운 읽기와 쓰기에 관한 찐 에세이인 것이다. 진지한 독자라면, 혹은 작가라면 이 책을 꼭 한 번 손에 들고 읽길 추천한다. 


고요한 읽기는 읽기와 쓰기라는 연쇄의 무한반복을 불러오지만 궁극적으로 읽어내는 대상은 ‘나’라고 이승우는 쓴다. 가장 먼 존재자가 내 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허를 찌르는 논리로 책을 읽는다는 건 곧 나를 읽는 거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나를 읽어내지 못하면 제대로 읽기라는 행위를, 다시 말해 고요한 읽기를 수행하지 못한 거라고 읽었다. 여기서 이승우는 덧붙인다. 나만 읽어서는 나를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타자와 세상을 읽은 후에야 나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고. 전적으로 동의했다. 책을 읽는 이유,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상기할 수 있었고, 나를 초월하기 위해 나를 알아야 하고, 나를 알기 위해 타자와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논리에 전적으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를 읽어냈던가?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다행히도 그랬던 것 같다. 나 역시 읽기와 쓰기를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 중 하나로서 독자이자 작가인 나의 위상을 성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일상에 ‘고요한 읽기’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이승우 읽기

1. 생의 이면: https://rtmodel.tistory.com/1588

2. 사랑이 한 일: https://rtmodel.tistory.com/1628

3. 고요한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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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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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다 이야기꾼이 더 드러나는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 저, ‘일인칭 단수’를 읽고

1. 돌베개에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거기엔 어떤 공통된 정서가 흐르는 것 같다. 이 짧은 단편을 읽고도 동일한 걸 느꼈다. 몇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이를테면, 죽음, 문학, 환상, 섹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어설픈 남자 주인공 등이다. 언뜻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키워드들은 하루키의 사상 혹은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관념과 통속의 조화를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진하게 맛보았던 나는 하루키 역시 그만의 독특한 방식과 고유한 문체로 소설을 쓰는, 현대문학의 거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도스토옙스키와 비교하면 깊이랄까, 통찰이랄까 하는 측면에서 내게 하루키는 가볍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러나 하루키만이 그려낼 수 있다고 보이는 현대인의 몽환적인 정서는 무척이나 인상적인데, 어쩌면 이것이 하루키 팬들이 그에게 빠져드는 주된 이유이지 않을까 한다. 은근히 매력적이고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돌베개에‘라는 단편은 바로 이러한 하루키만의 고유한 정서가 고스란히 발현된 작품으로 보인다. 젊ㅇ 남자 청년과 그보다 몇 살 연상인 한 여자 사이의 짧은 인연, 하룻밤의 정사, 여자가 남긴 시, 그리고 그 시를 음미하며 그 여자를 궁금해하고 그저 일상을 또 살아가는 남자. 이것이 이 소설의 전부다. 줄거리랄 것도 없는 이 간단한 설정 만으로 자기의 색채를 또다시 그려낸 하루키라는 작가의 비범함과 그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2. 크림
이 단편 또한 한 어리숙한 남자 재수생이 겪은 불가사의한 사건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떤 교훈이랄까 메시지랄까 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한 채 끝나버리는, 역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이다. 

어릴 적 같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한 여자아이가 느닷없이 보낸 피아노 리사이틀 초대권을 받고 찾아간 콘서트장은 고베의 어느 깊은 시골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고 용돈도 털어 그 생소한 장소를 찾아갔지만, 거기엔 오래 사용하지 않은 듯한 건물이 자물쇠로 잠겨 있을 뿐이었다. 속았나 싶은 생각에 허탈해하며 되돌아오는 길에 잠시 공원 정자에 앉아 쉬는데, 공황발작 같은 게 찾아왔고 그 발작 가운데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그 마을 주민인 것 같은 어떤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 할아버지는 뜬금없이 중심에 여러 개인 원,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인생에서 공을 들여 가치 있는 것을 이루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된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까지 던지고는 주인공의 발작이 사라지는 순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이 작품의 키는 주인공이 자기 이야기를 아는 동생에게 들려주는 말 가운데 있는 것 같다. 우리 인생에는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뜨리는 사건이 가끔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주인공은 그럴 때마다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에 대해 생각한다고 한다. 자기 안에 있을 어떤 특별한 크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는 말과 함께.

3.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음악, 그중에서도 재즈 애호가로 널리 알려진 하루키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1955년에 사망한 찰리 파커를 8년 뒤인 1963년 어느 폐간된 대학 문예지에서 주인공의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살려낸 사건이 발단이다. 세월이 흐른 뒤 뉴욕의 어느 한 레코드점에서 자신이 상상했던 가상의 음반을 발견하는 환상 섞인 경험, 그리고 찰리 파커가 나오는 꿈을 꾼 경험을 흥미롭게 이야기해 준다 (역시 하루키는 재담꾼이다). 문예지에 실은 글과 똑같은 마지막 문장이 이 소설 마지막 문장으로 쓰인 걸로 미루어 보아 주인공의 뉴욕 경험이나 꿈 이야기 모두 허구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모두가 허구이고 이 소설을 읽은 나는 하루키에게 또 보기 좋게 낚인 걸지도 모르지만, 하루키가 찰리 파커의 알토 색소폰을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허구가 아닌 듯하다. 즉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꾼이 남는 작품.

4. 위드 더 비틀스 
이 소설도 음악 애호가인 하루키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역시나 어리숙한 젊은 남자가 주인공인데, 고등학교 시절, 꿈인 듯 현실인 듯 기억에 남은 하나의 단편적인 장면을 소개하며 소설이 시작된다. 잘 알지 못하는 한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이 비틀스 앨범 (LP)을 들고 치맛자락을 날리며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는 장면이다. 이어지는 소설의 주된 이야기는 그 기억과는 별개로 진행되는데, 아마도 하루키는 과거의 기억을 그 장면처럼 아련하게 회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주된 이야기라고 해봤자 어리숙한 남자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 그리고 약속시간을 잘못 알고 찾아간 그녀의 집에서 예기치 않게 만나 뜻밖의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던 여자친구의 오빠 이야기가 전부다. 아니나 다를까 세월이 흐르고 남자 주인공은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도쿄에서 우연히 그 오빠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여동생이, 그러니까 우리 주인공의 첫 여자친구가 몇 년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그로부터 전해 듣게 된다. 기억은 날개를 날고 과거로 날아가 그녀와 헤어지던 날을 비춘다. 죽은 옛 여자친구의 오빠가 남긴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새겨졌을 듯하다. 죽은 사요코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에도 주인공을 가장 좋아했었던 것 같다는 말. 소설은 그 아련한 기억을 뒤로하면서 그렇게 끝이 난다.

5.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뭔지 몰랐다. 야구팀 이름이었다. 소설이 아닌 하루키 산문처럼 보이는 이 글은 하루키 본인이 주인공이다 (다른 작품도 하루키가 주인공일지 모르나, 이 작품엔 하루키라는 이름이 그대로 사용된다). 하루키가 왜 야쿠르트 스왈로스 팀을 응원하게 되었는지, 왜 그 팀의 홈구장인 진구 구장에서 팀이 이기든 지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유머를 섞어가며, 조금은 툴툴대며 써 내려간 글이다. 재미난 건 하루키가 엄청 유명해지기 전에 이 야구팀 경기를 보면서 끄적인 시들을 한데 모은 시집을 거의 자비출판 식으로 500부 찍었다는 사실이다. 300부는 팔리고 200부는 선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유명해지고 나서 그 시집은 희귀본이 되어 가격이 엄청 뛰어올랐다고 한다. 인생은 참 모를 일이다. 이 작품 덕분에 하루키가 야구도 사랑했고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 책 덕분에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라 작가 하루키를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6. 사육제
하루키의 클래식 사랑을 여과 없이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 속 주인공이 하루키 자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한 못생긴 여자와의 인연의 시작과 중간과정 및 끝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인데, 하루키의 여자에 대한 관점도 엿볼 수 있다. 우연히 콘서트장에서 친구 덕분에 만난 그녀는 클래식에 관한 취향이 비슷했고, 덕분에 둘이서 한동안 클래식을 같이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무인도에 들고 갈 단 하나의 클래식을 슈만의 사육제로 꼽는 두 사람은 사육제 마니아가 되어 우정을 발전시킨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로부터 소식이 끊기게 되는데, 주인공은 티브이에서 그녀가 사기범으로 체포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외면과 내면이 다른 우리 인간의 본성을 슈만의 사육제 연주에 빗대어 이야기하던 그녀의 이면에는 사기범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던 것일까? 주인공은 과거 어느 다른 못생긴 여자와 데이트했던 경험까지 소환하며 과거 회상을 마무리한다.

7.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발 닿는 대로 여행하다 밤늦게 도착한 어느 시골에서 인적이 드문 한 허름한 온천료칸에 주인공 남자가 투숙하게 된 일화를 그린 작품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배경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도. 일본 온천이 등장하는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정서를 풍기는 것 같다. 

하루키는 여기에서도 환상적인 요소를 빼놓지 않는다. 주인공이 아무도 없는 온천물에 호젓이 몸을 담그고 있을 때였다. 문이 스르륵 열리며 한 직원이 들어왔다.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였다. 물이 괜찮냐는 둥 이것저것을 물어보기도 하며 나중엔 일을 마치고 주인공의 요구에 따라 병맥주 두 병과 간단한 안주를 들고 방으로 찾아와 진지한 대화도 나누게 된다. 어쩌다가 원숭이가 사람 말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을 수 있었던 주인공은 원숭이가 자신의 성욕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그동안 흠모하는 일곱 명의 여자 이름을 훔쳤다는 난데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간직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료칸을 나갈 때 확인한 바, 그곳에서는 병맥주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간밤에 원숭이와 나눴던 대화는 환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주인공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속에만 담아 두는데, 세월이 지나고 어느 날 동료인 한 여자가 전화하다가 자신의 이름을 종종 잊어버린다는 고백을 듣고 주인공은 그때 그 원숭이를 떠올린다. 

8. 일인칭 단수
여덟 단편이 실린 이 책의 제목으로도 선정된 마지막 작품은 가장 짧기도 하지만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하루키 자신으로 여겨지는 남자 주인공은 일 년에 고작 서너 번 정도 정장을 차려입는데, 문제가 된 그날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정장을 차려입었고, 차려입은 김에 산책을 나갔으며, 산책을 나간 김에 평소에 가지 않는, 멀리 떨어진 바를 찾는다. 적당한 조명과 적당한 음악이 독서하기에 적당했으나, 거기에서도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정장을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색함을 넘어 위화감을 불러올 정도로 괴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일행 없이 앉아 있던 한 중년 여성이 바에 들어오는 여러 손님들에 떠밀려 주인공 바로 옆으로 밀려오게 되었는데, 뜬금없이 그 여자가 주인공에게 가시 돋친 말로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얼굴을 자세히 봐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삼 년 전 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라면서 주인공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을 내던진다. 몇 마디 하다가 결국 주인공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하게 되는데, 그 여자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 진실을 폭로할까 두려워서였는지, 그 여자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판단해서인지 분별하지 못한 채 바를 나선다. 

밖으로 나온 주인공은 모든 게 바뀌었다고 느끼게 된다. 분명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는데, 그 여자를 만난 후에는 세상이 갑자기 흉측한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주인공은 자꾸만 그 여자의 말을 되뇌인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이성과 무관하게 뭔가 수상한 기분이 드는 날. 좋지 않은 예감으로 생각과 마음이 충만하여 무엇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일상적인 일들을 꾸역꾸역 진행해 보지만,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날.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드는, 불길함을 가시화시키는 계시 같은 사건. 그 사건이 어떤 내밀한 감정을 건드리게 되면 마치 어떤 예언이라도 적중한 듯 묘한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이성으로 낱낱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저 이런 감성으로 이 작품을,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을, 나아가 작가 하루키를 느끼게 된다.

마무리하며
엘에이행 비행기 안에서 크게 집중하지 않고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가독성 높고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별 일 아닌 일들을, 사소하디 사소한 감정선과 사사로운 일상의 조각들에 숨을 불어넣어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작가 하루키. 소설도 좋지만 그의 산문 혹은 에세이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장엔 그의 ‘잡문집’이 기다리고 있다. 하루키는 현대문학의 숲을 조망하기 의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작가일 것이다. 분명 배울 게 많은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도 작가로 성장해 간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하루키 읽기
1. 노르웨이의 숲: https://rtmodel.tistory.com/655
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https://rtmodel.tistory.com/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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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인칭 단수: https://rtmodel.tistory.com/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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