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 - 성경을 방어하는 대신 성경을 신뢰하며 읽기
피터 엔스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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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성경 읽기: 참 자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더 크고 깊은 신뢰


피터 엔즈 저,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를 읽고


비록 십 년 전 출간된 책이지만, 피터 엔즈의 저서가 새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반가운 나머지 아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제목부터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라니! 멋지지 않은가? 원제를 찾아보니 ‘The Bible Tells Me So'이다. 직역하면 ‘성경은 내게 그렇게 말한다’ 정도가 될 텐데, 나 같은 아마추어도 이 문장을 그대로 번역서 제목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영어 관용구가 사용된 원제의 어감이 전혀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말 제목을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라고 바꾼 출판사의 의도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리고 이 간단한 제목 안에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의도한 그대로 성경을 읽고 받아들이라'는 것. 이 책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불건전한) 의도 혹은 (사적인) 기대를 품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와 그것이 낳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발려내어 원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부제를 살펴보면 더 감을 잡을 수 있다. 한국어 부제는 '성경을 방어하는 대신 성경을 신뢰하며 읽기'이다. 이는 원서의 부제 'Why Defending Scripture Has Made Unable to Read It'에 약간 수정을 가한 것인데, 그 수정은 독자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영어 부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이 성경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일견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수도 있는, 그러나 너무나도 적확한, 사실을 알려주는 데에 그치는 반면, 한국어 부제는 그 이유를 뛰어넘어 어떻게 성경을 제대로 읽을 것인지에 대한 앞으로의 방향까지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피터 엔즈의 '확신의 죄'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그의 성경 독법과 연구, 글쓰기, 그리고 그의 굴곡 진 드라마 같은 삶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모아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런 면에서 한국어 부제는 피터 엔즈의 사상과 삶의 핵심을 관통하는 단어로 보이는 '신뢰'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읽기를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을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말일까? 피터 엔즈 역시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으나 우리에게 쓰이지 않았다'라는, 성경을 읽을 때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쓰인 성경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세기 현재 우리들이 가진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르는 게 아니라 성경의 원청중, 즉 고대 근동 사람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시대, 문화, 지식의 차이를 무시한 성경 읽기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이 전해주는 초월적인 메시지를 놓치게 만드는 주범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해를 거친 후 해석이라는 단계를 잘 밟아야 하는 이유다. 성경이 가진 역사성과 초월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 본 사람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다. 성경은 읽을수록 은혜가 되는 책이기도 하지만 불편한 책이기도 하다는 사실. 많은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성경의 고대성을 무시하고 현대적인 시선으로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편함의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가나안 정복을 든다.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심지어 여자와 아이마저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셨을까? 


성경을 읽어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마주치는 난제 중 하나인 이 문제를 저자는 관점을 달리하여 풀어낸다. 모두가 난제라고 여기는 이유를 사람들이 성경을 방어하는 자세와 연결시킨다. 사랑의 하나님과 학살자 하나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들이 모두 실패하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그 해법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고대 근동에서 벌어진 문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읽는 현대의 문제들을 질문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사건과 상황에 백 퍼센트 역사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오류라고 짚으면서 말이다. 과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과 상황은 실제로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들일까? 성경을 읽으며 난제를 마주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혹시 이러한 행위 모두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어야만 하는 암묵적인 강박 때문은 아니었을까? 저자는 간결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시지 않았다고. 사랑과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은 그 학살을 명령하시지 않았다고.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일견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성경의 많은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또 다른 질문에 우린 모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관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썼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전혀 차원이 다른 질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에서 역사성을 빼는 용기(?)를 낸 이후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도 저자의 제안에 동참한다. 가나안 학살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거짓을 행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게 성경에 그렇게 기록했을까?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저자는 용기 내어 경계 밖으로 나와 성경을 해석해 보려고 시도하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안심시킨다. 


”고대 저자들이 고대의 관점에서 썼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신실하지 않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적 세계에 관해 썼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이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과학적 관점에서는 그들이 틀렸음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 점이 그들의 신앙이나 그것 배후의 하나님을 덜 참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나아가 저자는 성경의 고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탐구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성경의 몇몇 어두운 경로를 탐험하는 도전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어떻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의 특성에 맞지 않는 기대는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남기는데, 하나는 실제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일치하도록 우리의 기대를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우리의 틀 안으로 욱여넣을 모종의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언급하면서 저자는 기꺼이 첫 번째 선택지를 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주저함 없이 저자와 함께 한다. 두 번째 선택지가 낳는 폐해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역사책으로 읽고, 과학책으로 읽고, 또 행동지침서로 읽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숱한 반지성적인 모습들로부터 누누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읽지도 않겠지만, 읽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택하지 않고 중립 아닌 중립을 지킨다며 먼 산 보듯 구경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가장 지혜로운 자세라는 암묵적인 믿음 하에. 그러나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게 아니라 비겁한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자세는 무슨 일이 생기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두길 원하는 약삭빠른 자의 비겁한 행동이 아니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용기 내어 저자와 함께 끝까지 가 보자.


저자는 구약은 물론 신약까지 아우르며 성경의 저자들이 역사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요한계시록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먼 과거의 일들을 다룬다. 저자는 여기서 강하게 말한다. 성경 저자는 그들의 현재 상황이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과거를 형성했다고. 즉 어느 정도 과거를 창조했다고. 그렇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왕정과 유배기라는 성경이 기록될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그리고 그 후에 기록된 역대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앞 장들 (아담 이야기, 노아 이야기 등)과 출애굽의 서사마저도 모두 이스라엘 왕정의 음울한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고 말이다. 요컨대 성경은 시간 순으로 쓰이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의 현재를 반성하거나 설명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저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에 적당한 수정을 가하여 쓰인 책이라는 말이다. 어떤가? 불경하다고 느껴지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를 간결하게 정리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태곳적 이스라엘의 이야기들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 과거는 현재에 대해 말하기 위해 형성된다. 태곳적 이스라엘의 이야기 역시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형성된다."


그리고 저자가 충분히 받았을 여러 공격의 흔적이 녹아 있는 말까지 남긴다 (저자는 일련의 일들로 인해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는 성경을 끝까지 역사책으로 읽으려는 완고한 고집 가운데 빠진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겨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좀 더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에서 역사책으로서의 성경을 열정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의도는 좋지만 참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복종시키려는 처사다.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와 비슷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우상숭배라고 부른다."


아,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듯 시원하게 말해주는 피터 엔즈의 글쓰기가 나는 정말 매력적이라 느낀다. 


저자는 또 다른 여러 예를 들며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성경을 읽다가 문제에 부닥치게 되면, 그건 성경이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의도하지 않는 기대를 품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문제일 뿐이라고. 그래서 강력하게 제안한다. 성경을 의도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만들고 나서 그것을 잘못된 기대에 부합하게 만드느라 거친 부분들을 부드럽게 만들기를 중단하자고. 어쩌면 성경은 우리에 의해서 보호될 필요가 없는 책일지 모른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성경을 우리의 끊임없는 기대들에 정렬시키고 그것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경건한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사실은 통제와 확실성의 상실에 대한 숨겨진 두려움이자 내적 동요의 거울이며, 우리가 실제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경고 신호"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런 성경은 신앙의 확실한 토대가 아니라 참된 신앙의 장애물이다. 우리의 기대에 부합하는 성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영적 여정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 여정을 불구로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성경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초대장이다."라고 일갈한다. 


또한 기막힌 표현을 동원하는데, 다음과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전하고 얌전한 성경은 이 믿음의 여정을 회피하고 경건의 외양을 제공하는 안전한 길을 제공하며 그러는 과정에서 성경을 경시한다. 우리는 성경을 제시할 만하게 만들기 위해 엉킨 것들을 빗질하기보다는 성경을 있는 모습 그대로 놔두고 그것으로부터 배울 때 성경을 가장 존중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는 우리 자신의 여정, 곧 평탄하지 않고 때로는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경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밑줄 그을 수밖에 없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 책은 성경에 관해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지기 위한 어느 정도의 공간을 발견하기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관한 책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는 것은 고대의 순례자들과 나란히 걸으면서 그들의 여정의 충돌과 상처, 간극과 틈새, 골짜기와 평원과 씨름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반사되는 것을 보라는 성경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초대를 받아들이기에 관한 책이다."


3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었다. 신학자가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재미까지 느끼면서 읽었다. 피터 엔즈의 힘일 것이다. 다시금 성경이 어떤 책인지 리마인드해 본다. 성경은 역사책도, 과학책도, 그리스도인의 지침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분의 백성이 수백 년에 걸쳐 변화하는 환경과 상황에서 어떻게 그분에게 연결되었는지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이런 성경은 있는 그대로가 여전히 효과가 있다는 점. 성경을 설명하려거나 방어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 그러나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는 계속 성경을 읽고 성경과 씨름해야 한다는 점.


어떤가? 불편한가? 흔들리고 있는가? 피터 엔즈는 흔들리는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흔들리고 있는 신앙은 성숙하고 있는 신앙이라고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감이다. 흔들림 이후에는 참 자유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더 크고 깊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나도 그 증인 중 하나다.


* 피터 엔즈 읽기

1. 확신의 죄: https://rtmodel.tistory.com/696

2. 아담의 진화: https://rtmodel.tistory.com/1170 

3.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840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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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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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존 윌리엄스 저, '스토너'를 읽고.


새로운 작가의 글, 처음 만나는 세상, 가슴 설레는 기쁨. 하지만 이런 것들도 잠시. 어느새 난 책 속에 빠져들어 책의 일부가 된다. 더 이상 가슴 설레는 구경꾼이 아닌, 그 세상의 일부가 된다. 내겐 낯설기만 한 시공간,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세상에선 나만 이방인이다. 그곳에서 난 바라보고 듣고 느끼는 일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난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외적인 사건과 내적인 의식의 흐름까지도 파악해가는 유일한 자리를 꿰찬다. 그렇게 난 그 낯선 세상에서 어느덧 신적인 이방인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기꺼이 또 다른 한 권의 책의 독자가 되어 또 다른 낯선 세상을 여행했다. 오늘 오후에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모든 세상이 다르듯 모든 여행은 다른 느낌을 선물해 주지만, 이번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기분은, 음 뭐랄까. 조용한 절망감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느낌 속에는 예기치 않게 묘하도록 깊이 공감했던 나 자신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여 내 인생도 주인공의 인생과 똑같이 조용히 절망스럽다고 해야 할까 봐, 내 인생도 그렇게 고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봐, 어쩌면 난 그렇게 내심 두려웠했던 건 아니었을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비록 내겐 짧은 시간이지만, 덕분에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잔에 가득하게 따랐던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심지어 입도 대지 못한 채 빠져들어가며 읽었던 책이다. 책을 약 삼분의 일 정도 읽었을 즈음 깨달았다. 이 소설은 분명 내게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아직도 멍하니 어두워진 창 밖을 바라볼 때면 스토너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나와 함께 조용한 절망 위에 앉아있는 듯하다. 


책을 통해 그의 인생을 관조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정말이지 고독했고 절망적일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정작 스토너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절망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충분히 절망적일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끝까지 선을 넘지 않는, 바보스러울만큼 부드럽고 순응적인 자세를 보여줬고 제어된 열정을 조용히 간직한 채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분열되었던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회복되지 못한 채로, 유일하게 영혼의 사랑을 나누었던 캐서린과의 재회도 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던 로맥스에게 제대로 한 방도 먹이지 못한 채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그가 침대에 누운 채 가까스로 들었던 자신의 저서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밤의 적막을 가르며 바닥에 떨어지던 그 순간. 그의 마지막 순간. 아.. 인생이란 이런 걸까 싶었다. 평범함의 옷을 입고 있어 비록 아무런 티가 나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분열과 고독으로 점철된 슬픈 삶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특정한 목적도 없이 투박한 인생을 시작했지만, 우연찮게 대학이란 곳에 들어가게 되어 영문학이란 낯선 영역에서 자아의 눈을 뜨게 되는 여정과, 부모님이 바랐던 농부의 미래 대신 영문학을 전공하여 나중엔 그것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살아가는 여정이 소설의 도입부를 이룬다. 그리고 성격장애 기질이 농후한 아내를 만나 죽기까지 지속되었던, 조용한 지옥과도 같았던 분열된 결혼생활, 아내에게 느껴야 했을 공감 충만한 영혼의 사랑을 다른 여자에게서 느끼며 억제된 본능이 표출되었던 그의 슬픈 외도와 아픈 이별, 또한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거침없이 발현된 교만함을 고급스럽게 외교적으로 포장하여 스토너의 영혼을 죽는 날까지 쪼아대며 갉아먹었던 동료 교수의 횡포 등의 굵직한 내용이 소설의 중간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 스토너는 그가 가졌던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외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병들고 쇠약해진 모습, 급기야 암을 진단받고 외로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참 고독했다. 그렇다. 내가 이 책에서 묵직한 울림을 느끼며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독’이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며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한 나에게 이 책은 아주 묘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나보지 않았더라면, 결혼생활을 수년간 해보지 않았더라면, 결혼생활에서 아내와 다투고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았더라면, 직장생활에서 능수능란하지만 사악하게 외교적인 악질을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이 책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사건들과 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에 녹아있는 분열과 고독,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그것들을 그대로 안고 결국은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 인간의 무섭고도 놀라운 적응력, 그 어긋난 각도를 가진 삶의 모습은 아마도 모든 사람, 아니 적어도 인생의 내리막길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스토너의 인생은 곧 우리의 인생에 다름 아닌 것이다. 평범한 삶이란 영점 조정이 되어 아무런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진공 속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삶이란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채 슬픔을 안고 어긋난 각도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함께 하는 이의 사랑과 공감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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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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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선물 같은 쉼


김소영 저,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내게 왜 이 책이 굴러들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저자의 이름을 착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순간은 삶에서 종종 불가항력적인 반전을 만드는 법. 네 번째 저서가 될 초고를 완성하고 갑자기 찾아든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던 중 내 눈에 이 책이 잡혔다. 잡히자마자 손에 들려 반나절 만에 다 읽혀버렸다. 이 책은 내면의 거울이 되어 고전 소설을 즐겨 읽게 된 이후 에세이를 상대적으로 멀리 하던 내 모습을 솔직하게 비추었고, 그로 인해 의기소침해진 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오랫동안 잃어버린 사람처럼 이 책을 흡수했다. 적시에 찾아온 단비 같은 책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좋은 책이란 객관적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주관적인 그날의 기분과 상황, 그리고 개인적인 시간표에 맞춰 읽힌 운명 같은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덕분에 에세이의 맛을 오랜만에 맛볼 수 있었고, 책장에 꽂힌 여러 에세이집들을 뒤적거리며 주말 오후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겐 선물 같은 책이었다.


저자 김소영은 출판사에서 근무하다가 독서교실을 열어 어린이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작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키워드는 '어린이'다. 이 책은 딱딱한 명사형의 어린이가 아닌, 섬세한 아이와 같은 어른 김소영의 눈과 생각과 마음을 통과한 어린이라는 세계를 차분하게 그려낸다. 저자의 따스한 통찰이 잘 스며든, 어린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세계관을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자니,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고, 한때 나도 저렇게 해맑은 어린이였던 적이 있었는데, 하며 작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나는 잠시 흘러간 시간과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책은 3부로 이뤄진다. 1부 '곁에 있는 어린이', 2부 '어린이와 나', 3부 '세상 속의 어린이'. 2부에선 저자가 어린이였던 시절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독서교실의 어린이들, 그들과 함께 하는 어른 김소영, 그리고 과거 기억 속의 어린이 김소영, 이렇게 시간을 달리 하여 세 존재자가 만들어내는 화음 속에서 저자의 입체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3부에선 저자가 그리는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세상의 부조리와 어른들이 만들어 낸 불의와 거짓으로 물든 사회를 향한 일갈도 들을 수 있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여성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약자를 상징한다. 차별과 혐오와 배제로 얼룩진 세상에서 어린이라는 세계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로부터 어른들이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부와 3부도 좋았지만, 오늘의 나를 터치한 건 1부였다. 1부에서 저자는 독서교실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을 대하는 일상을 소개한다. 어른이 되어버린 저자의 시각과 어린이의 시각이 대조를 이루기도 하면서 묘한 감동을 준다. 어린이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있던 내 고질적인 몇몇 시선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문득 지금은 벌써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아들 녀석이 떠올랐다. 불과 얼마 전 어린이였던 아들을 어떻게 잘 사랑하며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나도 정말 많이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10년, 아니 5년 전에 이 책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이 책이 출간된 해가 2020년인 것을 알고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죄책감을 덜 느껴도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좋은 아빠, 혹은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현재 어린이를 자녀로 둔 모든 부모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작가로서도 나는 이 책을 추천한다. 특히 에세이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으며, 관찰과 성찰과 통찰에 이르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늘 하루 잘 쉬었다. 몸과 마음도 충만하게 쉼을 얻는 하루였다. 


#사계절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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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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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체감한 자의 고백


김미옥 저,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읽고


왜 글을 쓰냐는, 아니 어떻게 그렇게 계속 글을 쓸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는 항상 '절박함'을 든다.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며 내 영혼이 차갑게 생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내게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준 것이 '읽기'였다. 그리고 끝내 주저앉지 않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것은, 저자 김미옥처럼,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내게도 안식이자 도피처이자 탈출구였고, 나는 그로 인해 깊은 위로와 치유를 경험했다. 저자에게 글쓰기의 첫걸음은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 나도 비슷하다. 표현을 달리 하자면, 내게 글쓰기의 첫걸음은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였다고나 할까. 처한 환경과 맥락은 다를지라도, 읽기와 쓰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저자 김미옥에게도, 그리고 독자 김영웅에게도 동일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단 두 페이지의 '책머리에'만 읽고도 나는 읽기와 쓰기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체감한 자의 고백이 백이십 퍼센트 공감이 되어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이 책을 읽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타자의 상처와 여백을 어떻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어쩐지 나는 이 책의 서두만 읽고도 저자를 알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물론 착각이겠지만). 


결핍이 창조의 전신이라고 하면 경솔한 말일까.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한결같이 결핍을 머금고 있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노래하고 그 허한 여백을 넘치도록 채운다. 뿐만 아니다. 그 결핍과 충만의 방정식을 저마다의 삶의 맥락에서 체득한 자들에게 확성기가 되어 먼저는 공감을 그다음으로는 위로와 치유를 선물한다. 텍스트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것들을 결국 텍스트가 전달하게 되는 이 놀라운 화학작용. 나는 이를 '신비'라고 부른다. 이 신비를 맛본 작가들의 글은 언제나 반갑다. 그리고 고맙다.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아무나 할 수 있으나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의 소중함 앞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주어서 말이다. 


이 책은 여러 책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 책을 단지 서평집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기계적 서평의 느낌은 전혀 나지 않는 동시에, 마치 읽지 않고 함부로 아는 척하는 경박함도 일절 없다. 그저 한 명의 독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제2의 저자'로서 작품의 객관적인 해석은 물론, 주관적인 통찰까지 리듬감 있는 문장력과 따뜻하고 배려 깊은 문체로 아우른다. 또 하나의 장르를 개척한 듯한 느낌도 든다. 서평과 칼럼과 에세이의 하이브리드랄까. 일독을 권한다. 특히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두 배로 권한다. 


#파람북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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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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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길들여짐에 대해서


프랑수아즈 사강 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프랑스’, 그리고 ‘한 여자와 두 남자’. 

잘못 각인된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상징만으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 연애, 치정, 혹은 불륜 소설 이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목만 보고 절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소설’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법한 이 작품은 ‘브람스’라는 단어로 인한 우리의 즉각적인 인상과는 무관한 연애 소설이다. 그러나 ‘연애 소설’이라는 장르가 암묵적으로 지니는 천박한 이미지로 이 소설을 폄하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작품은 싸구려 삼류 연애 소설에서 흔히 다뤄지는 자극적인 남녀관계를 부각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통속적인 삼각관계를 통해 인간 심리와 사랑의 속성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섬세한 통찰을 선보인다.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통속적인 것에서 심오한 것을, 평범한 일상에서 진리의 조각을 찾아내어 세밀한 관찰과 깊은 통찰을 선보이는 작품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언제나 옳다.

한 달 전 즈음에 읽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여러 장면이 겹쳐졌다. 안나는 어느 날 운명처럼 다가온 브론스키를 선택한다. 남편도 아들도 뒤로 한 채 자신보다 한참 젊은 남자 브론스키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안나는 자살로써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비슷한 삼각구도가 등장한다. 안나의 자리에는 ‘폴’이라는 나이 서른아홉의 이혼을 한 번 경험한 인물이, 안나의 남편 카레닌의 자리에는 ‘로제’라는 사십 대 중년 미혼 남성이, 그리고 브론스키 자리에는 ‘시몽’이라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청년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와는 달리 폴과 로제는 부부가 아니다. 동거하는 연인일 뿐이다. 그런데 시몽은 브론스키와 사뭇 닮았다. 폴보다 현저하게 적은 나이의 남성으로서,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거침없이 접근했던 것처럼 시몽은 폴에게 접근하여 짧은 기간이나마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이 다르다. 안나는 초지일관 브론스키를 선택했지만, 폴은 마지막에 시몽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녀는 습관처럼, 혹은 그녀의 일상에 이미 각인되어버린 로제에게로 돌아간다. 위기를 지나고 나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로제에게로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폴은 다시 그 진절머리 나는 굴레 속으로 자진해서 갇히기로 한다. 안나는 죽음으로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마무리지었지만, 폴은 시몽과의 관계를 불장난이라고 결론을 낸 듯 로제에게로 회귀함으로써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폴의 선택 또한 어떤 면에서는 ‘죽음’과 비슷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몽 때문에 폴이 흔들렸다는 사실로 인해 위기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 폴을 대할 때, 마치 그동안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마치 잠시 잃어버린 소유물을 되찾은 것처럼,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끝나기 때문이다. 아무런 반성이 없는, 폴이 그렇게나 싫어했던 로제의 옛 버릇이 어김없이 반복되는 시공간, 로제가 주인 행세를 하고 폴은 그저 언제나 그를 기다리고 그의 외도도 받아줘야 하는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감옥’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안나와는 달리 비록 숨은 쉬고 있지만, 그녀의 영혼은 다시 노예를 자처한 것처럼 보였고, 그건 곧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폴의 선택은 현명했을까 하고 나는 묻는다.

로제와 시몽의 대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다음과 같다. 명문이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시몽이 폴에게 해준 이야기 속에서 나온 말이다. 

|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 (민음사, 43-44 페이지 발췌)

정말 무시무시한 선고이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사형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리고 이 명문은 폴의 운명을 미리 예견하는 듯하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로제였다는 점에서 그녀는 위에서 언급한 죄를 짓고 사형 대신 결국 고독 형을 선고받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나는 스스로를 사형시켰지만, 폴은 고독 형을 선고받고 족쇄를 찬 영혼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폴의 마지막 선택과는 달리 시몽으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는 잠시 행복했다. 시몽은 그녀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아의 존재를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장면은 이 작품의 제목이 등장하는 문장이다. 뜬금없이 시몽이 폴에게 브람스를 연주하는 공연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는 장면이다. 다음과 같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 (민음사, 57 페이지 발췌)

이 부분은 폴이 자아를 잃어버린 채로 로제와의 관계에 길들여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정체성은 그녀 자신, 즉 ‘나’가 아니라, 로제와 그녀, 즉 ‘우리’였던 셈이다. 말이 좋아 ‘우리’이지 주인과 노예 구도가 습관이 되어버린 ‘우리’가 과연 ‘우리’일까? 하는 질문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관계된 폴의 심정이 묘사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 (민음사, 139페이지 발췌)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 (민음사, 150페이지 발췌)

로제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를테면 자유와 책임감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아무래도 나는 폴의 선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랄까, 관념과 경험의 괴리랄까, 아니면 객관과 주관의 괴리랄까. 나는 변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상과 어쩔 수 없이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길들여지면서 안정감을 느끼고 거기에 안착하는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 사이에서 어느 쪽 입장으로 폴의 행동을 해석해야 할지 망설인다. 그리고 내 생각은 우리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하는 인간관계까지 확장된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그것의 해소 방법에 대해서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뾰족한 법칙을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답답함과 찝찝함을 동시에 느낀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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