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84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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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과 인간세계


나쓰메 소세키 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


“나는 고양이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의 화자는 놀랍게도 고양이다. 상식적으로는 현실세계 고양이가 말을 할 리 없다. 게다가 장르가 소설이니만큼 이 고양이는 작가의 생각과 말을 전달하는 의인화된 매개체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발적인 첫 문장 (알다시피 제목도 같다)으로 운을 떼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과연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우물 안에선 우물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객관성이 결여된 판단은 신뢰도가 떨어진다. 이와 같은 시선으로 이 작품을 해석하면 어떨까. 우물을 인간세계로 대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세계 안에선 인간세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이를 조금 더 풀자면 이렇게 쓸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인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말과 글을 사용하고, 생각하고 의심하고 묻고 따지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가 인간밖에 없으므로 이 말은 결국 실행 불가능한 말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누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에겐 이성도 주어졌지만 상상력도 주어졌다. 상상력을 이용하면 불가능한 많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인간의 뇌는 잘 속고, 또 마음만 먹으면 의지적으로 속일 수도 있기 때문에 상상력을 잘만 이용하면 우린 언제든지 가능성의 무한한 세계로 나아가서 탐험하고 또 여행할 수 있다 (이는 문학, 특히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화자가 고양이라는 점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이 아닌 존재의 눈과 귀와 입으로 인간과 인간세계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말없이 녹화된 일상 속 자기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게 될 때 느껴지는 상이함 혹은 야릇한 거리감의 다른 이름은 객관성일 것이다. 이 작품엔 고양이의 눈에 담긴 인간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화자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인간은 종종 나 자신으로 환원, 수렴되기도 하기 때문에 우린 이 작품을 읽으며 스스로를 관찰, 성찰할 수 있는 의외의 기회까지 얻게 된다. 나는 바로 이 점이 나쓰메 소세키가 이 작품을 통해 의도한 바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이 가진 또 한 가지 매력은 풍자와 해학이다. 화자인 고양이는 그냥 야옹야옹 대는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다. 인간처럼, 아니 평범한 인간을 넘어선 비범한 존재로 그려진다. 사실 이 부분이 작품 속에서 사뭇 진지하게 과장되곤 하는데, 이는 독자의 폭소를 자아내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천재적인 필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고양이는 등장인물들에겐 그저 여느 고양이로 보이지만, 실은 생각하고 의심할 줄 알뿐 아니라 해박한 지식까지 탑재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물론 고양이의 역사까지 꿰찬 듯한, 웃지 못할 부분도 군데군데 등장한다. 특히 이 고양이가 기거하는 집주인 진노 구샤미 선생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고양이 화자보다 못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듯해 보인다. 몸은 고양이이지만 정신만은 인간계를 넘어 신계에 속한다 할 수 있을 만큼 이 고양이 화자는 해박하고 노련한 베테랑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풍자와 해학은 그것이 겨냥하는 것들을 충분히 이해, 통찰한 이후에나 가능하다. 이해 없는 풍자는 빈정거림일 뿐이고, 통찰 없는 해학은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에 불과하다. 이름도 없는 이 고양이 화자는 마치 산속의 도인처럼 비치기도 하고, 모든 학문에 두루 능통한 이후 일선에서 물러난 은퇴 학자로 비치기도 하며, 인간의 숨겨진 욕망, 본능, 심리를 알아채고 모든 인간사를 경험한 듯한 신적 존재로 비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자기가 고양이라는 한계를 인지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선 마치 독자인 우리 인간들이 그동안 몰랐던 고양이 세계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듯한 묘한 인상마저 받게 된다. 묘하다는 말이 이상하게도 잘 어울리는 동물 중 하나가 고양이일 텐데, 이 작품은 그 말에 신비감을 더하는 효과도 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존재이지만, 이 고양이 화자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 모두를 거뜬히 넘어서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단, 열린책들 양장본으로 500 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다, 기승전결과 같은 소설의 기본적인 형식이 존재하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긴 호흡으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이 작품을 읽고 싶다면 당연히 처음부터 읽으라고 권하겠지만, 중간중간에 집중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은 나도 한 달이 넘도록 읽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비로소 어젯밤에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작품만이 가진 독특하고 고유한 시선과 나쓰메 소세키의 탁월한 필력을 맛보고 싶다면, 그리고 인간으로서 인간을 한 번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성찰을 경험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나는 이 작품을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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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 -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조지 오웰 자전소설
조지 오웰 지음, 자운영 옮김 / 세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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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 가지는 힘

조지 오웰 저,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을 읽고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의 자전소설이자 첫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제목에서 묘사하듯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의 빈민가, 그리고 그 안에서 전전긍긍하며 무의미한 하루를 겨우 연명하듯 살아가는 부랑자들의 실상을 낱낱이 보고한다. 르포르타주는 아니지만 이 책에 보고된 정보들은 모두 직접 체험하지 못하면 절대 알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지극히 사실적이다. 실제로 조지 오웰이 파리와 런던의 빈민가를 체험하고 그 체험담을 소설로 풀어쓴 글이기 때문이다. 30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작품은 시종일관 가난과 궁핍, 그 가운데서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의 삶에 대한 작가의 고찰을 담고 있다. 

세상엔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과 경험해도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극빈층의 일상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작가의 상상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방관자나 연구자의 눈으로 실행한 취재 혹은 보도자료로도 써낼 수 없는 이 작품은 함부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담고 있다. 비록 작가가 직접 경험했지만 다 알 수도 없고 또 다 설명할 수도 없는 현장이 가지는 힘이리라.

공교롭게도 조지 오웰의 작품은 여태껏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동물농장이나 1984도 모두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만 기억이 있다. 작가의 문체랄까 글이 담고 있는 뉘앙스랄까 하는 것들이 그 당시의 내 정서와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의 자전소설을 읽고 조지 오웰이라는 사람을 조금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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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 - 읽고 쓰기에 대한 다정한 귓속말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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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과 같은 첫 문장: 소설가는 따라갈 뿐


오가와 요코 저,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을 읽고

소설에서 첫 문장은 사람의 첫인상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첫인상이 좋아도 지나고 봐야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듯, 첫 문장이 아무리 좋아도 그다음 문장들이 형편없으면 그 소설은 요란한 빈 깡통, 혹은 서두에만 잔뜩 힘이 들어간, 허세에 부푼 초보 작가의 어설프고 허술한 글이 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둘 다 일리가 있다. 사실 둘은 상반되지도 않는다. 첫인상만 좋고 본모습은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그런 유형을 경계하라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강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은 결코 첫인상만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며, 첫인상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결코 첫인상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둘은 똑같은 말을 다른 각도에서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컨대 어쨌거나 첫인상은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첫 문장 역시 중요하다는 것. 그러나 그것만이 사람이나 글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진 않는다는 것. 

쌀로 밥 하는 말일지도 모르나 첫 문장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책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장은 첫 문장에 이어서 나오게 된다. 특히, 여러 소설가의 고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소설가는 저 앞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모든 걸 미리 계획하고 설계하면서 이끌어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특정한 시공간과 그 시공간에 내던져진 등장인물을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십, 수백 혹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글 한 편의 포문을 여는 첫 문장은 빛이 있으라 하는 신의 명령에 빛이 생겨나듯 작가에 의해 새겨진 백지 위의 첫 검은 활자로써 뒤이은 모든 이야기를 꿰는 첫 단추일지도 모른다. 이는 작가도 자신이 쓴 첫 문장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며, 그 문장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문장들을 놓치지 않고 주워 담은 결과가 하나의 완성된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한 여기서 우린 한 걸음 더 나아간 독법을 다음과 같이 구사할 수도 있다. 첫 문장은 소설의 주제문이라든지 상황이나 등장인물을 압축해서 표현한, 가장 나중에 쓰이는 문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처음 쓰인 문장으로써 그 문장 때문에 소설의 주제도 생성되고 상황이나 등장인물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즉, 소설의 전개와 결말까지 첫 문장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것.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니라 따라가며 포착한다는 소설가에게 첫 문장은 바로 그들이 따르는 이야기의 선두에 위치하는 그 무엇인 것이라고.

오가와 요코의 대표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쓰이게 된 사전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을 따르며 그녀가 세 차례 강연한 내용을 담은 이 책에서 그녀가 하는 말도 내가 아는 소설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가는 따라간다는 것. 주제를 먼저 설정하고 소설을 쓰긴 어렵다는 것. 작가는 스토리를 짓지 않고 포착할 뿐이라는 것. 작가는 그저 누군가가 떨어뜨린 기억의 조각을 주워 모아 그 사람이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어쩌다 가지게 된 언어라는 수단으로 소설로 쓸 뿐이라는 것. 그러나 한 가지 내게 묵직하게 와닿은 문장 하나도 남긴다. 소설은 언어로 쓰는데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것. 여기서 나는 모순을 느끼면서도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숙명이랄까 치명적인 매력이랄까 하는 것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된다.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묘한 위안을 얻게 된다. 소설이야말로 철학, 신학, 인문학 할 것 없이, 그리고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포착하여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티라미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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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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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인생을 훑다

신형철 저, ‘인생의 역사’를 읽고

평론이라고 하면 나는 왠지 경직되는 기분을 느낀다. 논문이라는 단어가 과학계에서 가지는 위상과 평론이 문학계에서 가지는 위상이 내겐 엇비슷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평론은 어렵게만 느껴지고, 고난도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시는 어떤가. 소설이 시보다 좀 더 대중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시는 이해하기 위해라기보다는 느끼기 위해 읽는다는 말까지 감안한다면, 나에겐 시 역시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저 너머의 무엇인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든 책은 무려 시에 대한 평론집이다. 시와 평론의 이중창이라… 이 둘의 무게만 생각하면 나는 압사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바로 이 책 저자의 이름이다. 신형철. 믿고 읽어도 되는 그 이름. 여전히 나는 시와 평론은 버겁다고 느낀다. 하지만 신형철의 이름 석 자를 신뢰하기에 나는 그의 신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구매하고 말았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는 시를 신형철은 인생에 빗댄다. 인생도 걸어감과 이어짐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별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우며, 그래서 불쌍하기도 하지만, 또 그래서 고귀하기도 한 우리네 인생을 다룬 작품들을 읽으며 인생을 공부해왔던 신형철은 2016년 한겨레에서 ‘신형철의 격주시화’로 연재했던 스물네 편의 글에 새로 쓰고 또 고쳐 쓴 글 몇 편을 더하여 이 책을 완성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는 그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 담긴 서른 편이 넘는 시들에 인생 그 자체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덕분에 독자인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그가 해석한 인생의 역사를 훑어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를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는 기회라니. 어떤가.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사실 나는 이 책을 펼치고 며칠을 뜸 들인 뒤에야 아끼던 선물 포장지를 뜯는 심정으로 프롤로그를 읽었다. 그 순간 신형철이 쓴 활자는 정확한 펀치가 되어 나를 정통으로 가격했고, 신형철 특유의 힘에 기분 좋게 압도당한 나는 전율했다. 


내가 뜸을 들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 기대가 과장된 나머지 혹시라도 실망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내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력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싶다. 그의 글쓰기는 내게 인문학의 포문을 열어주었고, 산문의 매력에 눈 뜨게 해 주었으며, 문학의 깊고 풍성한 맛을 볼 수 있게 해 준 시작점이 되었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마치 그를 잘 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나는 신형철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이 글은 딱 세 꼭지에 대해 짧은 감상평을 남기면서 전개해볼까 한다. 서른 편이 넘는, 인생을 담은 시가 소개되어 있지만,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혹은 내 인생과 강렬한 교감을 이루었던 세 편의 시라 해도 무방하다.


날 멈추게 하고 숨을 멎게 만든 프롤로그 제목은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이다. 무슨 말인가 갸우뚱하며 마지막 여덟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며 인식의 전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 새를 손으로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 | (26페이지에서 발췌)


이 문장을 읽자마자 내 생각은 아들과 단 둘이 살아냈던 지난 5년으로 돌아갔다. 나는 과연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아들을 잘 보호했던가,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책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 아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나는 과연 나로부터 아들을 보호했었는지, 너무 늦어버린 질문이지만, 묻게 된다. 보호자를 자처하고 감당했던 유일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어버릴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오늘 신형철의 통찰로부터 뒤늦게 알아채버린 탓이다.


감동은 1부 1장으로 연장되었고, 강력한 연타를 맞은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오래된 시인 ‘공무도하가’에 대한 신형철의 해석이다. 먼저 이 짧고 강렬한 시는 다음과 같다.


|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찌할꼬. | (32페이지에서 발췌)

신형철은 이 시에서 운명 혹은 숙명을 읽어낸다. 이 두 단어는 인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단어이지 않을까.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 인생에는 막으려는 힘과 일어나려는 힘이 있다는 것. 아무리 막아도, 일어날 어떤 일은 일어난다는 것. | (34-35페이지에서 발췌)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 꼭지를 마무리한다.

| 상고시가로 함께 묶이는 ‘구지가’나 ‘황조가’와는 달리 ‘공무도하가’만이 언제나 나를 사무치게 한다. ‘나는 내 뜻대로 안 된다. 너도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우리 뜻대로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수천 년 전의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들어본 적 없는 그 먼 노래가 환청처럼 들린다. 나는 백수광부다. 나는 그의 아내다. 나는 곽리자고다. 나는 여옥이다. 나는 인생이다. | (36페이지에서 발췌)


‘머피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언제나 하려는 일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고야 만다는 것. 이는 신형철이 공무도하가에서 읽어낸 것과 다르지 않다. 시공간을 차치하고도 인생이란 그 누구에게도 비슷한 의미로 다가가는 그 무엇인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그 무엇. 마치 모든 게 정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보이지 않는 묵직한 실체. 나 역시 문학이라는 숲에서 거하길 즐기고 그 안에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열매 따먹기 좋아하는 이유도 어찌 보면 인생의 맛을, 그 깊고도 오묘한 맛을 더 알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내게 꽂힌 문장이 담긴 글은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꼭지다.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 131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

이 글을 읽고 잠시 멈칫했던 이유는 누군가를 증오할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증오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가장 증오한다. 그런 나로 살게 만든 당신을 나는 증오한다.’ |


사랑 대신 증오를 대입하고 나니 나는 글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 마음속에 사랑보다 증오가 더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를 사랑하든 증오하든 결국 나는 나 자신을 함께 사랑하고 증오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은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인간의 본성이랄지 운명이랄지에 대해서. 결국 인간은 전적으로 타자를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르시시즘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굴레일 수밖에 없는가, 싶어서 말이다. 


이렇게 세 꼭지에 대한 간단한 감상평을 남기고 나니 결국 나도 인생을, 그 역사를 잠시라도 훑은 기분이다. 착잡해지기도 하고 고요해지기도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젠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자 내일의 어제이므로. 시간이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내가 살아내야 할 순간은 오늘, 바로 지금만이 존재하므로. 


#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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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전율을 느끼다

신형철의 신작, ‘인생의 역사’를 펼치고 며칠을 뜸 들인 뒤 나는 오늘 밤이 되어서야 아끼던 선물 포장지를 뜯는 심정으로 프롤로그를 읽어버리고 말았다. 신형철이 쓴 활자는 정확한 펀치가 되어 나를 정통으로 가격했고, 신형철 특유의 힘에 기분 좋게 압도 당한 나는 전율했다.

내가 뜸을 들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 기대가 과장된 나머지 혹시라도 실망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내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력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싶다. 그의 글쓰기는 내게 인문학의 포문을 열어주었으며, 문학의 깊고 풍성한 맛을 볼 수 있게 해 준 시작점이 되었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마치 그를 잘 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나는 신형철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날 멈추게 하고 숨을 멎게 만든 프롤로그 제목은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이다. 무슨 말인가 갸우뚱하며 마지막 여덟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며 인식의 전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새를 손으로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 (26페이지에서 발췌)

이 문장을 읽자마자 내 생각은 아들과 단 둘이 살아냈던 지난 5년으로 돌아갔다. 나는 과연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아들을 잘 보호했던가,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책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 아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나는 과연 나로부터 아들을 보호했었는지, 너무 늦어버린 질문이지만, 묻게 된다. 보호자를 자처하고 감당했던 유일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어버릴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오늘 신형철의 통찰로부터 뒤늦게 알아채버린 탓이다.

프롤로그만 읽었을 뿐인데 큰일 났다. 앞으로 서른 편의 시를 더 다루며 신형철은 매번 정확한 공격을 해 올 게 뻔한데,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다. 아, 마치 빈털터리가 된 기분이랄까. 그러나 이조차도 나는 황송한 마음이다. 오랜만에 문자의 폭격 다운 폭격을 받을 시간표가 왔고, 이는 (문학과 글쓰기 영역에서) 번데기로부터 성충으로의 변태 과정을 조금이나마 진척시킬 거라고 나는 강하게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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