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악령과 인간의 본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령’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악령’은 누가복음 8장 32-36절로 운을 띄우며 대단원의 막을 올린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열린책들’ 판에 나온대로 공동번역을 따랐다.


|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 (악령)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마귀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락으로 도망쳐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마귀 (악령)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마귀 (악령) 들렸던 사람이 낫게 된 경위를 알려주었다. |


본문에 등장하는 ‘마귀’라는 단어는 성경 번역에 따라 ‘귀신’이라고도 표기된다. 영문으로는 ‘demon’ 아니면 ‘devil’로 번역된다. ‘열린책들’에서는 소설의 제목이 지닌 의미를 살리기 위해 ‘마귀’에 ‘악령’을 병기했다. 나 역시 이 감상문에서는 ‘악령’이라는 단어로 통일한다. 참고로 이 작품의 러시아 원서 제목은 ‘Besi’, 영문 제목은 ‘The possessed’, 'Demons', 혹은 ‘The Devils’이다.


성경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악령의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악령의 존재방식과 힘, 그리고 이를 호령하고 제어하는 예수의 권세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 의거하면, 악령은 바이러스처럼 숙주를 필요로 하며, 숙주를 옮겨 다닐 수 있다. 숙주는 사람일 수도 돼지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악령의 존재방식과 힘, 즉 사람을 홀리고 장악하는 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혼란과 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전파 및 확산하는 일, 그리고 사람을 궁극적 파멸로 이끈 뒤 자신은 살아남아 또 다음 기회를 노리는 힘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이 책의 감상문을 작성해보고자 한다.


처음엔 단순한 궁금증이 있었다. 왜 이 성경본문인가? 그저 악령이 등장하기 때문인가? 악령이 등장하는 본문은 여기 말고도 다른 복음서뿐 아니라 사도행전에도 나오는데 왜 하필 이 본문인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답을 얻지 못했다. 마지막 페이지인 1097 페이지에 도달하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건만, 게다가 읽었던 곳을 읽고 또 읽고 하면서 다른 책보다 더 힘들게 읽어냈건만, 나의 이해는 여전히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틈틈이 읽고 생각하며 머리 속에서 재구성해보던 중, 어제 밤에야 비로소 실마리가 잡혔는데 그것은 전율과 함께 내게 갑자기 다가왔다. 계속 봐서 식상해진 글이 여태껏 숨겨왔던 의미를 마침내 드러낼 때 느낄 수 있는 그 소름 돋는 전율.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이 성경본문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용기가 났다. 이 성경본문으로 이 대작을 조금이나마 풀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작품은 감상문을 쓰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작품이라서, 어떻게 써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고, 그래서 그냥 포기할까 여러 번 고민했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누가복음 인용 용도와 목적을 중심으로 해서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풀어가다 보면, 비록 졸작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대가의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 Possessed: 먼저, 소위 ‘귀신 들렸다’라든지, ‘귀신에게 홀렸다’, 혹은 ’사탄에게 잡혔다’라고 표현되곤 하는 악령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다. 이 소설의 컨텍스트에서 악령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첫 번째 숙주 관점에서 접근해본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1869년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한 달간 주로 뻬쩨르부르그와 스끄보레쉬니끼 등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안똔 라브렌찌예비치'라는 사람이 기록한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연대기적 회고록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시점이 평범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소설 전체에서 볼 때,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는 소설의 화자가 실제 말도 하고 사건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는 인간 관찰자가 맞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전지적 작가 입장도 취하기 때문이다.


방대한 이 책의 본문은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라는 인물의 짧은 연대기로 시작한다. 소설 전체에서 스쩨빤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으로 등장하지만, 화자는 일부러 그의 젊은 시절을 간략히 연대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소설의 서론을 대신한다 (이 소설의 화자 안똔은 스쩨빤의 가장 친한 젊은 벗이다). 왜일까? 왜 스쩨빤의 과거가 이 대작의 서론으로 자리잡아야만 했을까? 스쩨빤은 중요 인물이긴 하지만, 주요 사건을 일으키거나 상황의 전면에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기력이 쇠한 노인네 아닌가). 화자가 밝히고 있는 이유에도 특별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그저 뜬금없이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최근에 일어난 아주 이상한 사건을 기술하기에 앞서 약간 멀리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말을 하며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뿐이다.


나는 여기서 화자가 아닌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이 소설을 악령의 존재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서론은 악령의 기원이라든지 아직 땅 속에 묻힌 채 발아를 기다리고 있는 악령의 씨앗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누가복음 본문에서 악령이 처음엔 돼지가 아닌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듯, 스쩨빤도 이 소설의 컨텍스트에 있어서는 악령 들린 첫 번째 숙주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장장 천 페이지를 넘는 이 대작의 서론이, 조금은 뚱딴지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스쩨빤 한 사람의 전기로 대체되어야만 했던 게 아니었을까. 악령의 존재와 그 미미한 시작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 본다. 19세기 러시아 철학과 사상은 1840년대와 1860년대로 구분지을 수 있다고 한다. 뚜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1840년대 세대를 ‘아버지 세대’로, 1860년대 세대를 ‘아들 세대’로 나눈다. 역사를 이분법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경솔한 시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구분이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는지 여부를 떠나, 두 세대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이 가시적이자 상징적이었다고 보았다. 1840년대 러시아에는 서구의 자유주의가 물밀듯 들어와 있었다. ‘인텔리겐찌야’라고 불리는 러시아 특유의 지식인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는데, 각각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로 양분되었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스쩨빤은 1840년대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서구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입만 열면 프랑스어를 남발했고, 러시아 역사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현실감을 상실한 이상주의자로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1821년생이며 1881년에 타개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두 세대를 모두 직접 함께 한 장본인으로서, 이 소설의 주배경이 알렉산드르 2세가 1861년에 시행한 농노 해방령이 발효된 후 민중의 분노가 극에 치달았을 1869년인 것을 감안하면, 아버지 세대의 결코 안정하지 않았던 서구 자유주의의 급기류가 아들 세대로 하여금 결국 피를 흘리게끔 만든 악령의 씨앗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즉, 1860년대 말에 있었던, 혁명이란 옷을 입은 광기 어린 폭동을 일으킨 아들 세대에게 안착한 악령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저자는 고발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마치 악령이 사람에서 돼지로 옮겨간 것처럼 말이다.


2. Moving to enter: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죽지 않고 영원한 악령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다. 말하자면 두 번째 숙주 관점에서 풀어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미처 다 읽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 책의 창작 배경이 그 유명한 '네차예프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임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급진적 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네차예프는 1869년 모스크바에서 '민중의 복수'라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조직원 중 하나였던 '이반 이바노프'라는 사람이 그의 방법론에 반대를 하며 조직을 탈퇴하려고 하자, 네차예프는 동료 4명과 함께 이바노프를 살해해 버린다. 이 사건은 그 당시 러시아에 팽만했던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필두로 했던 극단적이고 광적인 혁명 운동을 상징하며, 혁명 세력의 비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건을 접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정치 풍자적인 내용의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었고, 그만의 독특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며 또 심리학적이기까지 하면서 야생마처럼 결코 다듬어지지 않은 그만의 총천연색 필체가 가미되어 이 책 '악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실제 작품 안에서도 '네차예프 사건'은 거의 그대로 모방된다. 소설의 절정 부분에 나오는 일련의 흉측한 범죄 중에서도 정점을 찍는 사건으로 등장하는데, 살해 수단이 총이었다는 것, 살해 장소가 인적이 드문 연못 근처였다는 것, 시체를 연못에 빠뜨려 유기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진상이 다 밝혀졌다는 것까지 모두가 동일하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는데, 나는 이 차이점에 착안하여 저자의 숨은 메시지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네차예프 사건'에서는 범죄를 주동한 네차예프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고 이후 종신형으로 대체되어 투옥 8년 만에 병사했다는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 소설에서 네차예프 역을 맡았던 '표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 (스쩨빤의 성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 표뜨르는 스쩨빤의 아들이다)는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공범과는 달리 홀로 잡히지 않고 도주하여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표뜨르는 표면적으로는 네차예프처럼 혁명을 일으키길 원하는 자처럼 그려진다. 적어도 그가 입김을 지속적으로 불어넣고 있는 조직원들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네차예프와의 공통점은 아마도 공모하여 살인을 주도했다는 점 빼고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네차예프는 당대 유명했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의 지원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조직을 결성하는 등 실제 혁명을 일으키려는 자였지만, 표뜨르의 경우는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뤄내자고 하는 겉으로 포장된 선전과는 달리 실제로는 혁명이 아닌 혼란만을 야기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적인 지원자도 없었고, 훈련 받은 적도 없었으며, 실재하는 조직조차도 없었다. 오로지 거짓과 위선으로 무장하여 경솔하고 간사하며 비열하고 뻔뻔하며 무례하기까지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인조라는, 실재하지도 않지만 조직원들은 실재하는 것처럼 믿는, 오합지졸 같은 조직을 충동질하여 계획한 범죄를 깔끔하지 못한 방식으로 기어이 저지르고야 마는 악령의 실체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죽거나 파멸 당한 자가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를 제외한 악령의 두 번째 숙주는 누가복음 본문의 돼지 떼가 몰살당한 것처럼 모두 희생당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어쨌거나 표뜨르 개인의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저질러졌던 것이다. 그렇다. 그건 혁명이 아니라 범죄였다. 그 범죄는 혼란이었다. 불이 났고 폭동이 일어났고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혼란 야기는 충분히 성공했다. 마치 마귀새끼 한 마리가 분탕질을 해놓고 도망친 것처럼, 마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들고 저 혼자만 내뺀 것처럼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표뜨르를 살려두었을까. 아마도 악령의 존재방식에는 절대 끝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악령의 불멸성을 말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저 잠복기와 휴지기, 그리고 활동기가 구분될 뿐 악령의 존재 자체는 그 어떤 모습으로든 영원하다는 것을 상기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3. Spiritual existence: 또 다른 축,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해본다.


여태까지 이 소설의 주인공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본문의 악령의 존재방식에 착안하여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표뜨르와 5인조로 대표되는 아들 세대로의 악령의 숙주 이동은 그 자체로써 독립적이고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이 구조로만 이루어졌다면, 그리 난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표뜨르를 주인공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스따브로긴이라는 인물을 대신 등극시켰다. 그는 이 때문에 작품을 전면 개정하는 수고를 더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 작품은 두 개의 축을 가지게 되었다. 두 축은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복합적이고 더 심층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가져왔는데, 어쩌면 이것이 이 작품을 대작으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일명 스따브로긴으로 대표되는 두 번째 축은 악령의 존재방식이라기보다는 악령의 습성 내지는 성품을 말해준다고 나는 보았다. 그는 비록 어릴 적 스쩨빤의 영향을 잠시 받은 적이 있고, 해외에 머물 때 표뜨르와도 관계를 잠시 맺었지만, 다분히 독립적인 이미지로서 이 소설의 저변에 흐르는 모든 어두운 힘의 움직임에 우월한 입지를 선점하며 관여되어 있다. 심지어 그는 저열한 모습으로 혼돈을 불러일으킨 악령의 행동대장 표뜨르가 선택하고 유일하게 우상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야심찬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스따브로긴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우월함과 언제나 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초월적인 이미지, 일탈을 일삼고 나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언제나 고독과 우수에 차 있는 그의 이미지는 신비하게까지 느껴졌으며, 표뜨르를 포함한 주위 모든 사람들이 스따브로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나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건의 전면에 나서서 악령의 더러운 손과 발 역할을 했던 사람은 표뜨르였지만,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더라도 모든 사건의 배후에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사람은 스따브로긴이었다. 어쩌면 표뜨르는 스따브로긴 한 개인 안에 들어있던 악령을 외부에서 증폭시킨 역할을 담당했던 건 아니었을까. 악령의 이동이 아닌 악령의 영향력을 저자는 스따브로긴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굳이 숙주를 이동하는 수고로움 없이도, 거짓과 위선과 사리사욕에 눈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마치 악령이 거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악령의 힘을 묘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표뜨르를 움직인 건 어쩌면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이동된 악령이 아니라, 그 악령을 섬기면서 그에 의지하여 표출하고자 애쓴, 한낱 가련한 인간의 탐욕이 아니었을까.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악령은 어쩌면 어떤 초월적인 인격을 가진 제 3의 영적 존재가 아니라, 탐욕과 거짓과 위선과도 같은 인간 스스로의 내밀한 본성일지도 모른다는 걸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인간의 참담한 실체, 그 어두운 심연의 그림자를 가감없이 이 소설 속에서 보여준 건 아니었을까.


악령의 존재 유무를 논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나는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고 싶다. 악령을 원망의 대상이나 핑계거리로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말이다. 악령을 탓하는 행위가 당면한 문제의 이면에 있는 영적 실체를 인지하여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 꿇고 마음을 낮추는 자세를 가져온다면 좋겠지만, 탓하는 그 행위에서만 머물며 마치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상황을 초래한다면 악령의 존재를 차라리 부인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악령 탓만 하는 행위 자체가 악령이 가장 원하는 것일지. 그게 바로 악령일지.


한 달간 이 책을 읽어나갈 때도 도스토예프스키만의 독특한 필체 덕분에 정신이 없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정신 없기는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의 그 길고 긴 이름은 부수적인 스트레스일 정도다. 워낙 방대하고 심층적인 소설이라 해석 자체가 어려웠다. 아직도 난 이 작품을 얼마나 소화했는지 감도 잡을 수가 없다. 역사에 길이 남을 니체를 포함한 철학자들 뿐만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자, 신학자, 그리고 기타 여러 사상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이나 ‘백치’와는 또 다른 맛의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렇게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조잡한 리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나의 글이 기라성 같은 이 작품에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7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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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 고전산책 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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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하시길, 친구.


레프 톨스토이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나는 가방에 보통 한 두 권의 책을 넣고 다닌다. 마침 어제 감상문을 하나 마무리하며 책 한 권을 끝낸터라, 오늘은 새로운 책을 하나 시작할 참이었다. 출근 전 습관처럼 책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무심코 가방에 집어넣은 책이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몇 분 후 출근 길에서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의 죽음은, 사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사실이었다.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공간적 제약이 있었지만, 언제 한 번 만나 배드민턴도 치고 타코도 같이 먹기로 했었다. 그 약속을 한 게 바로 엊그저께였다. 나는 갓길에 차를 멈추고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방 안에 든 책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책을 골랐을 무렵 이미 그는 하늘나라로 간 상태였지만, 난 그 책을 고른 나의 선택을 바보처럼 탓하고 있었다. 먼저 간 거라 믿네. 친구, 심왕찬. 부디 안식하시길.


같은 책도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공감도와 이해도가 달라진다.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나는 이 책을 읽어냈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 사람이지만, 그리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낸 두 사람이지만, 나에겐 책 속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현실 속 친구의 죽음이 겹쳐졌다. 그리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이반 일리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훌륭한 집안 출신이었고 존경받는 법조인으로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것과는 거의 무관하게 그 역시 한 인간이었다. 그가 살아낸 삶은 우리네 평범한 삶과 다를 바 없었으며, 그가 맞이한 죽음도 특별할 게 없었다. 또한 이 책의 탁월한 점이라고 할 수 있고, 저자 톨스토이의 집필 의도도 엿볼 수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방관적이고 형식적인 애도를 표하는,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심리 묘사에서도 난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모두 인간 이야기였고, 모두 우리들의 이야기였으며, 또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생활신조는 대체로 ‘쉽게, 편하게, 점잖게’였다. 법조인의 바쁜 삶을 살아내면서 그는 사회적으로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비록 결혼 후 부부 관계가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개인주의적으로 해결해버렸다. 이러한 모습 또한 우리네 삶에서 흔하게 겪는 일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지나갔다. 모든 게 대단히 멋있었다. 그는 일 뿐 아니라 상류계층의 삶도 즐길 줄 알았다. 이반 일리치가 진정으로 기뻐할 때는 브리지게임을 할 때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생활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 이면에 놓인 인간의 공통적인 습성을 날카롭게 꼬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몸에 이상 징후를 발견한다. 아니, 벌써부터 느껴오던 것이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병이었다. 맹장과 신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 했다. 그 병은 그의 쉽고, 편하고, 점잖은 삶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몸이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하자, 삶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브리지게임에서도 뭐가 잘 안 되면 금새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다. 그는 외로웠다. 능수능란하게 인간관계를 조절하며 그는 늘 주인공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병이 들자 그 관계들이 모두 위선과 거짓의 옷을 입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아내 조차도 남편의 병의 책임은 남편 자신에게 있고 자신은 남편의 병 때문에 죽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존재가 주변 사람들에게 장애물로 여겨지는 것 같은 기분도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에게조차도. 비참했다. 톨스토이는 여기서 이렇게 쓴다. “그는 파멸의 끝자락에 서서 이해하고 동정해주는 사람 없이 외롭게 버텨야 했다.”


공과 사를 탁월하게 구분했던 그도 통증이 점점 심해지자 직장 생활에서도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통증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한없이 절망했다. 그가 이뤄놓은 모든 삶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동안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고 은폐하며 파괴하던 자세가 죽음에 대한 저항의 행위로써 먹혀 들었으나, 하루하루 커지는 고통은 그마저도 전혀 작동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심이 오로지 과연 그가 곧 자리를 비워주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야기된 산 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인가 그리고 자신 스스로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에 쏠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편과 모르핀이 없으면 잠을 자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약 성분이 그의 정신을 잃게 만들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그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집사 역할을 하던 농부 출신의 게라심이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게라심에게서는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바로 거짓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는 게 명백한데도, 조금 아플 뿐이라는 거짓말,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치료를 받으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거라는 거짓말 등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은 죽음에 이를 것임을 알았다. 그것도 자기를 동정하는 사람 하나도 없이 홀로 말이다. 죽어갈 때 외로움은 가장 큰 고통임이 분명한 것 같다.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면서 이 책은 점점 그 혼자만의 관념적인 서술로 채워진다. 저자가 기술한 이반 일리치의 독백 중 내 마음에 꽂혔던 문장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현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쁨들은 더욱 부질없고 의혹투성이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항상 똑같았던 사람. 계속되면 될수록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삶. 산에 오른다고 상상했었지. 그런데 사실은 일정한 속도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어. 그래 그랬던 거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어. 근데 사실은 정확히 그만큼 내 발아래에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다 끝났어.”


그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계속 피해왔던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혹시 내가 살아온 삶이 바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어서 그는 예전에 도저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 즉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 번 그 생각에 저항하고 반대하고 합리화를 해댔지만,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에 와서 톨스토이는 그의 죽음 직전의 의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그는 매 순간 아무리 기를 써도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에 조금식 다가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며 힘들어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그 구멍에 기어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더 힘들어한다는 것 또한 느끼고 있었다. 구멍에 기어들어가는 걸 방해하는 건 자신의 지난 삶이 괜찮았다는 인식이었다. 삶의 정당화는 그를 붙들고 놔주지 않아 그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 점이 그를 제일 힘들게 했다.”


그가 사망하기 한 시간 전, 김나지움에 다니는 아들이 그의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갖다대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족과 자신을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순간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음을 본다. 그로부터 두 시간 임종의 고통은 더 지속되었지만, 그 자신은 죽음에 이른 게 아니라 빛에 이른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마음 속 독백은 다음과 같다.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이반 일리치의 삶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살아보고 싶어하는 삶이었다. 부와 명예를 누리며 여유도 즐길 줄 아는 보기 좋은 삶. 그러나 그 삶은 온갖 위선과 거짓으로 둘러싸인 삶이었다. 인간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에 높이 오른 사람들에게서 위선과 거짓의 힘을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 미끄러져 내릴까, 아니면 피라미드 체제 자체가 무너질까.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진실을 대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삶을 통해서도 인간의 추악한 이기적인 습성을 넌지시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죽음을 통해서도 인간 내면의 모습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삶을 화려하고 보기 좋게 만들었던 것들이 거품이었다는 것. 살았을 때 자신이 주인공 자리에서 이용하고 누리던 그 편리했던 것들이 죽을 때에서야 거치장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도구가 된다는 것. 결국은 아무리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아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을 때와 같이 바닥의 심연에 이를 때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고 동정받길 바란다는 것. 톨스토이는 분명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있는 깊은 구멍과 존재의 의미를 깊이있게 철학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는 전 세계의 모든 독자에 의해서 이반 일리치는 매일 매시간 또 죽는다. 그러나 나의 친구의 죽음은 단 한 번, 오늘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무리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도 현실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일반적인 답이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에, 그것도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답이 될 때가 많은 것이다. 친구를 생각한다. 그의 삶과 그의 죽음. 그를 통해 보았던 여러 나라의 사진들. 가족의 행복함. 생각이 맞는 사람을 만났다는 희열. 구독하여 종종 듣던 그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와 기타 연주.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을 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한 번 애도한다. 부디 거기서 안식하시길.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5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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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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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와 다른 맛의 성장소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미성년'을 읽고.


헤세를 읽으면 자아의 발견과 성찰, 성장과 성숙, 그리고 실현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자아의 분열과 대립마저도 점진적인 합일로 나아간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바닥까지 곤두박질칠 정도로 난잡하고 추잡한, 그러면서도 세밀하고 농밀한 인간 심리 묘사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헤세를 읽고 나면 무언가 흩어져 있던 것들이 모이고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나면 벌거벗겨지고 더욱 파헤쳐지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자칫 불쾌할 정도의 씁쓸한 기분까지 들기 때문에 그런 감정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나기가 쉽진 않다. 가끔은 정말이지 깔끔하게 목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비록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인간의 절망과 악함의 심연 가운데에도 소망과 사랑과 구원이 깃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렬히 보여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헤세가 절제되고 상대적으로 우아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보다 낮고 어두운 길이 여러 갈래로 나있으며, 전혀 정돈되지 않아 어지럽고 복잡한 야생의 숲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밀한 심리의 민낯을 대면하거나 탐구해보고 싶다면, 반드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다시 말해, 보고 싶은 것만이 아닌 언젠간 볼 수밖에 없거나 반드시 봐야만 하는 추악한 것들도 버젓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도 읽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읽는다면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당신은 분명 다를 것이며, 나의 이러한 권고를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만의 묘한 매력을 맛보았다면, 아마 나처럼 다른 작품들도 접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네 번째 장편소설인 ‘미성년’에서 나는 헤세의 냄새를 맡았다. 이 책 '미성년'에서는, 이미 읽은 세 편의 장편소설, 즉 ‘죄와 벌’, ‘백치’, ‘악령’, 그리고 곧 읽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의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른 느낌의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이렇다 할 만큼 강한 임팩트를 주는 서사가 부재하다. 또한, ‘죄와 벌’과 ‘악령’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이념과 사상의 의인화’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보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독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작업을 통해 '아르까지 돌고루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청년 (미성년)의 성장기를 다루는, 그래서 헤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작품이다.


임팩트 있는 서사의 부재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건의 부재다. 그래서 누군가가 줄거리를 말해달라고 하면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딱히 뭘 말해줘야 할지 난감하다. 커다란 사건들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은밀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복선을 알아차리며 느끼는 전율과, 마침내 사건이 발생하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끽할 수 있는 스릴이 고스란히 이 책에서는 주인공의 생각 흐름과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른 장편소설과 마찬가지로 천 페이지를 육박하는 작품이니, 이 책 '미성년'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얼마나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 내면심리에 중점을 두었는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헤세의 성장소설이 아닌 도스토예프스키의 성장소설이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이 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미성년'은 '아르까지 돌고루끼'의 자서전적 수기다. 그는 이 책의 제목이 가리키는 바로 그 '미성년'이기도 하다. 즉,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 돌고루끼를 통해,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현실과 이념 사이에서 부유하는 한 젊은 청년의 방황을 그려내고 있다. 모든 소설에서 작중 화자는 언제나 저자의 분신이다. 화자와 저자가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화자는 저자의 모습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특히 이 책처럼 거의 천 페이지 분량으로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면서 어찌 저자의 영혼이 화자에게 담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찾아보니,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서전적 소설로도 불린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미성년'이라는 제목이 아주 적절하다고 여겨진 건 화자인 돌고루끼에게 부여된 특성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성년'의 돌고루끼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어설프게 산술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가진 고독한 이상주의자도 몽상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치'에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처럼 순수한 인간미를 간직한 인물도 아니며, 미쉬낀 공작과 대비되는 로고진처럼 돈의 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물도 아니다. 또한, '악령'에 등장하는 표뜨르처럼 인간의 탈을 쓴 악령의 모습도, 스따브로긴처럼 모든 사건의 배후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처럼 그려지는 인물도 아니다. 돌고루끼는 그저 미성년이다. 설익은 채로 마치 어른인 것처럼 행동하는 인물이랄까. 성년이 아니면서 성년인 것처럼 보이려 하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미성년인 존재가 바로 돌고루끼인 것이다.


워낙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가 장황하기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에, 이 책의 주를 이루는 돌고루끼의 독백이 장황하다는 점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젠 그의 장광설과도 같은 필체를 보면 오히려 익숙하고 반가울 정도다 (사실 이 책의 초반부부터 의외로 나는 빨려 들어가며 읽어낼 수 있었고, '악령'에 비해 두 배 정도의 속도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다른 장편소설 주인공들의 독백이나 그들을 묘사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가 돌고루끼를 묘사하는 필체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그것들과는 달리 명료하지 않고 산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의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록 돌고루끼 스스로는 자신만의 이념을 위해 살아가려고 시늉하고 마치 그 이념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처럼 행세하지만, 그의 이념은 실현되지도 않았고, 그의 행동은 다분히 돌발적이고 감정적이며 자기분열적인 색채까지도 띤다. 이 모든 것들이 작가의 실수나 미숙함 때문일 리가 없다 (의도적인 미숙함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첫 번째 장편소설이 아닌 네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특히 미성년적인 특성과 정반대되는 강렬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악령'에 이은 바로 다음 작품이 '미성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더욱 원숙한 작가 정신을 발휘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젊은 영혼의 방황을 이보다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솔직하게 까발려서 보여줄 수가 있을까. 그러한 미성년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황한 필체보다 더 적확한 방법이 또 있을까.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만의 그 독특한 필체는 이 작품에서 가장 잘 활용되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얼굴을 본 것 같은 느낌. 난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그의 명성을 확인한다. 내 책상엔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놓여있다. 일부러 장편소설을 그가 쓴 순서대로 읽어왔다. 어떤 이들은 '미성년'이 마치 오류인 것처럼, 마치 옥의 티인 것처럼 평가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직은 읽지 않아 모르지만, 아마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그것이 증명되지 않을까 한다.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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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와 다른 맛의 성장소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미성년'을 읽고.


헤세를 읽으면 자아의 발견과 성찰, 성장과 성숙, 그리고 실현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자아의 분열과 대립마저도 점진적인 합일로 나아간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바닥까지 곤두박질칠 정도로 난잡하고 추잡한, 그러면서도 세밀하고 농밀한 인간 심리 묘사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헤세를 읽고 나면 무언가 흩어져 있던 것들이 모이고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나면 벌거벗겨지고 더욱 파헤쳐지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자칫 불쾌할 정도의 씁쓸한 기분까지 들기 때문에 그런 감정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나기가 쉽진 않다. 가끔은 정말이지 깔끔하게 목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비록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인간의 절망과 악함의 심연 가운데에도 소망과 사랑과 구원이 깃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렬히 보여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헤세가 절제되고 상대적으로 우아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보다 낮고 어두운 길이 여러 갈래로 나있으며, 전혀 정돈되지 않아 어지럽고 복잡한 야생의 숲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밀한 심리의 민낯을 대면하거나 탐구해보고 싶다면, 반드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다시 말해, 보고 싶은 것만이 아닌 언젠간 볼 수밖에 없거나 반드시 봐야만 하는 추악한 것들도 버젓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도 읽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읽는다면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당신은 분명 다를 것이며, 나의 이러한 권고를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만의 묘한 매력을 맛보았다면, 아마 나처럼 다른 작품들도 접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네 번째 장편소설인 ‘미성년’에서 나는 헤세의 냄새를 맡았다. 이 책 '미성년'에서는, 이미 읽은 세 편의 장편소설, 즉 ‘죄와 벌’, ‘백치’, ‘악령’, 그리고 곧 읽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의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른 느낌의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이렇다 할 만큼 강한 임팩트를 주는 서사가 부재하다. 또한, ‘죄와 벌’과 ‘악령’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이념과 사상의 의인화’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보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독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작업을 통해 '아르까지 돌고루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청년 (미성년)의 성장기를 다루는, 그래서 헤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작품이다.


임팩트 있는 서사의 부재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건의 부재다. 그래서 누군가가 줄거리를 말해달라고 하면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딱히 뭘 말해줘야 할지 난감하다. 커다란 사건들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은밀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복선을 알아차리며 느끼는 전율과, 마침내 사건이 발생하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끽할 수 있는 스릴이 고스란히 이 책에서는 주인공의 생각 흐름과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른 장편소설과 마찬가지로 천 페이지를 육박하는 작품이니, 이 책 '미성년'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얼마나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 내면심리에 중점을 두었는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헤세의 성장소설이 아닌 도스토예프스키의 성장소설이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이 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미성년'은 '아르까지 돌고루끼'의 자서전적 수기다. 그는 이 책의 제목이 가리키는 바로 그 '미성년'이기도 하다. 즉,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 돌고루끼를 통해,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현실과 이념 사이에서 부유하는 한 젊은 청년의 방황을 그려내고 있다. 모든 소설에서 작중 화자는 언제나 저자의 분신이다. 화자와 저자가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화자는 저자의 모습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특히 이 책처럼 거의 천 페이지 분량으로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면서 어찌 저자의 영혼이 화자에게 담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찾아보니,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서전적 소설로도 불린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미성년'이라는 제목이 아주 적절하다고 여겨진 건 화자인 돌고루끼에게 부여된 특성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성년'의 돌고루끼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어설프게 산술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가진 고독한 이상주의자도 몽상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치'에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처럼 순수한 인간미를 간직한 인물도 아니며, 미쉬낀 공작과 대비되는 로고진처럼 돈의 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물도 아니다. 또한, '악령'에 등장하는 표뜨르처럼 인간의 탈을 쓴 악령의 모습도, 스따브로긴처럼 모든 사건의 배후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처럼 그려지는 인물도 아니다. 돌고루끼는 그저 미성년이다. 설익은 채로 마치 어른인 것처럼 행동하는 인물이랄까. 성년이 아니면서 성년인 것처럼 보이려 하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미성년인 존재가 바로 돌고루끼인 것이다.


워낙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가 장황하기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에, 이 책의 주를 이루는 돌고루끼의 독백이 장황하다는 점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젠 그의 장광설과도 같은 필체를 보면 오히려 익숙하고 반가울 정도다 (사실 이 책의 초반부부터 의외로 나는 빨려 들어가며 읽어낼 수 있었고, '악령'에 비해 두 배 정도의 속도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다른 장편소설 주인공들의 독백이나 그들을 묘사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가 돌고루끼를 묘사하는 필체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그것들과는 달리 명료하지 않고 산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의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록 돌고루끼 스스로는 자신만의 이념을 위해 살아가려고 시늉하고 마치 그 이념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처럼 행세하지만, 그의 이념은 실현되지도 않았고, 그의 행동은 다분히 돌발적이고 감정적이며 자기분열적인 색채까지도 띤다. 이 모든 것들이 작가의 실수나 미숙함 때문일 리가 없다 (의도적인 미숙함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첫 번째 장편소설이 아닌 네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특히 미성년적인 특성과 정반대되는 강렬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악령'에 이은 바로 다음 작품이 '미성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더욱 원숙한 작가 정신을 발휘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젊은 영혼의 방황을 이보다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솔직하게 까발려서 보여줄 수가 있을까. 그러한 미성년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황한 필체보다 더 적확한 방법이 또 있을까.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만의 그 독특한 필체는 이 작품에서 가장 잘 활용되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얼굴을 본 것 같은 느낌. 난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그의 명성을 확인한다. 내 책상엔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놓여있다. 일부러 장편소설을 그가 쓴 순서대로 읽어왔다. 어떤 이들은 '미성년'이 마치 오류인 것처럼, 마치 옥의 티인 것처럼 평가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직은 읽지 않아 모르지만, 아마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그것이 증명되지 않을까 한다.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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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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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고독으로부터 찾는 해답 서양문학의 향기 10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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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인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포항 시골을 떠나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이면 나는 종종 습관대로 서면에 있던 대형 서점인 '동보서적'을 찾았다. 대학생이 된 나는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과학이나 의학 코너가 아닌 문학 코너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었다. 그땐 소설보다는 시를 읽었고, 맘에 들면 그 시가 담긴 시집을 구매할 마음도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중학생 때 칼릴 지브란과 헤르만 헤세와 괴테를 읽으며 스며든 문학적 감성이 대학생이 된 나를 시집 코너로 인도했던 것이다.


1996년.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젊은 시인들이 낭만에 가득 차 저마다 부르짖는 사랑 노래를 시로 담아 책으로 만들었었다. 연애 편지에나 사용할법한 낯간지러운 시부터 시작해서 몇 번을 읽어야 비로소 무언가가 묵직하게 와 닿는 시까지, 시집 코너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집이 넘쳐났다. 이 책 저 책 내키는 대로 시를 읽어가다 보면 한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메뚜기처럼 그날도 이 시집 저 시집을 들춰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의 시에 사로잡혀 난 그 책을 끝내 구매하고야 말았다.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시인 이름은 똑똑히 기억이 난다. 릴케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뭔가가 달랐다. 굉장히 감성적이면서도 절제가 잘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겉이 아닌 심층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릴케를 처음 만났다. 감수성이 여전히 예민했던 풋풋한 20대의 시작점에서 릴케를 만났던 건 행운이었다.


40대에 접어든 내가 저번 주말 중고 서점에서 우연히 릴케를 만났던 건 일종의 데자뷰였다. 언제나 중고 서점에 들르면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꼼꼼히 살피는데, 마침 릴케의 책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순간, 시간이 멈추면서 내 기억은 20여 년 전으로 훌쩍 뛰어갔고, 동보서적 시집 코너에 서서 시집 한 권에 몰입해있던 과거의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혼자서 기분이 좋아 입가에 웃음이 걸린 채 그 책을 구입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이 책은 시집이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오른 릴케의 작품인데 시집이 아니라니 나도 처음엔 의아했었다. 그러나 릴케는 시나 산문보다 훨씬 많은 양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책은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라는 이름의 작가에게 릴케가 보낸 열 편의 편지를 모아놓은 작품이다.


카푸스는 문학 지망생이었다. 릴케와 같은 사관학교에 다녔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릴케의 시집에 몰입해 있던 중, 릴케가 학생일 때도 있었던 호라체크 목사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릴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카푸스는 자신이 쓴 습작 시들을 릴케에게 보내 그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타고난 소질과 그가 가질 직업이 서로 어긋나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 무렵이었고 막 스무 살이 되려는 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카푸스는 단순히 그가 쓴 시에 대한 평가나 조언을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닌 솔직한 인생 고민까지도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편지로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그는 몇 주 후 릴케의 성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쓰인 답장을 받게 된다. 1903년 2월 17일 파리에서 보내온 편지였다.


그 후 열 번째 편지가 작성된 날짜는1908년 12월 26일이다. 약 5년 간의 기간 동안 주고 받은 편지, 그 안에 담긴 젊은 날의 무수한 고민과 좌절과 방랑의 여정. 그것들에 대한 인생의 선배이자 고독한 시인의 길을 꿋꿋이 먼저 간 릴케의 답장이 바로 이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릴케는 창작의 고통 중 마주해야만 하는 고독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삶과 죽음, 고독과 침묵, 그리고 그로부터 길어 올려 예술로 승화시킨 글, 곧 시의 언어. 무엇보다도 릴케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이니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권면한다.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것을 신뢰하고 매달리라고 말한다. 늘 충분한 인내심을 지니고 소박한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릴케가 가진 입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사랑입니다." 그렇다. 릴케는 섣불리 서로가 하나가 되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경솔함을 넌지시 지적하며, 개개인이 먼저 성숙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간다. 릴케의 시집이 왜 20대의 나를 사로잡았었는지, 왜 막 스무 살이 되려던 카푸스를 사로잡았었는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독 가운데,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지속된 훈련으로 스스로 몸과 영혼을 다진 뒤, 그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릴케의 사색과 성찰. 그리고 그것들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시. 아마도 나와 카푸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가진 고민에 릴케의 시가 나름대로의 해답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만간 정말 오랜만에 릴케의 시집을 하나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94?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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