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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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파괴된 관계에 구원이 임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죄와 벌'을 읽고.


찌는 듯이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해질 무렵,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미 수십 번이나 머리 속에서 계획했던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사전 답사를 가는 길이다. 대상은 전당포 주인이자 고리대금업자였던 한 노파였고, 살인 도구는 도끼가 될 예정이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감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가난했다. 돈이 없어 다니던 대학도 휴학했다. 그가 사는 숨막힐 듯 작은 방은 이미 월세가 많이 밀려 있다. 잘 먹지도 못해 건강도 나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사전 답사 다음 날, 때마침 배달된 어머니의 편지에서 그는 여동생이 돈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듣게 된다. 그는 여동생이 자신에게 돈을 부쳐주기 위해 일부러 희생하려 한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고, 즉시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마음이 들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모든 게 돈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사전 답사를 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살인을 망설이고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나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살인은 반드시 실행에 옮겨져야 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고독한 이상주의자이자 몽상가였다. 주위와 단절된 채 관 같은 작은 방에 틀어박혀 생각만 해댄 지 벌써 한 달째였다. 그가 가진 해괴망측한 사상은 자신을 포함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단번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였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돈을 많이 가진 극소수의 이 (lice) 같은 인간들을 제거하여 그들이 가졌던 많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설프게 산술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본성 (특히 양심의 존재)을 깊이 고려하지 못한 심각한 오류에 불과했다. 이론적으로 아무런 결함이 없더라도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순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인간에게도 살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은 여기서 또 한 번 큰 오류를 범한다. 살인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과 비범인 (초인)으로 나누는 이론을 믿기 시작한다. 살인을 하기 위해선 범인이 아닌 비범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같은 극소수의 사람만 해당되는 비범인.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범인들에겐 모든 것이 허용되며, 심지어 사람을 죽여도 죄를 짓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는 묻는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 영웅이 된 자들이 과연 죄인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칭송 받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이 만약 여기에서만이라도 멈춰줬더라면 아마도 살인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신이 비범인에 속할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모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참으로 불행하게도, 그는 이를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계획했던 대로 살인을 저지른다. 운이 잘 따라주어 살인 현장에 이르기까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계획했던 도끼를 구할 수 없어 잠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지만, 신기하게도 아주 우연찮게 다른 도끼를 손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 참으로 기막힌 순간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운명인 것만 같았다. 자신이 비범인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는 한 사람을 더 죽여야만 했다. 예정에도 없었던 그 무고한 희생자의 이름은 리자베따, 전당포 주인의 여동생이었다. 분명 그녀는 그 시간에 다른 곳에 있어야 했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라스꼴리니꼬프는 노파를 죽이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언제나 우연을 끌고 들어오는 법. 그녀의 약속이 바뀌었었는지, 도끼에 찍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있는 언니를 발견한 채 어느새 방 한 가운데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서 있는 것이었다. 리자베따는 언니에게 학대 받던 가난한 백치이자 유로지비 (holy full, 바보성자)였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녀의 언니인 전당포 주인을 죽여서라도 보호하고 도와주고자 했던 부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그녀까지 죽여야만 했다. 유일한 목격자이기 때문이었다. 비극이었다. 이 의도치 않은 두 번째 살인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적 오류가 무고한 피를 흘림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기도 했다.


감칠맛 날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가 전체 소설의 약 1/6에 해당되는 내용을 살인 동기 위주로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마지막 장,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80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소설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추는 살인사건 이후부터 자백하기 전까지의, 약 2주 간에 걸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이 얽히고 설킨 실타래라고 볼 수 있다. 그 복잡한 실타래는 모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되어 주인공의 불안하고도 혼란스러운 심리 변화를 적나라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탁월한 도구가 되어준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러시아 특유의 등장인물의 다채로운 이름과 짧은 시간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의 맞물림, 그리고 등장인물의 화려하고 긴 언변에 휘둘려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소설의 마지막까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읽는 내내 잠시도 엉덩이에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인간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만큼 탁월한 작가가 또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책의 본론 부분이야말로 과연 진미였다. (사실 이 부분은 내가 중학생 시절 너무 지루해서 미처 다 읽지 못하고 포기했던 부분이다. 나도 ‘언젠가 한 번은 '죄와 벌'을 읽어야지’ 했던 많은 독자들처럼 이 부분에서 길을 잃고야 말았었다.) 다시 말해, 죄를 저지른 이후 그 죄를 자백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이 이 소설의 핵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죄와 벌'을 읽어냈다고 하는 건 이 부분을 얼마나 소화해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자백할 때도, 또 자백한 이후 시베리아에서 1년 간 감옥 생활을 할 때조차도 사실 그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지 못했었다. 비록 양심이란 것이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직접 깨닫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분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죄를 자백한 이유는 그저 그 편이 더 유리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 뒤에 덧붙여진 짧은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라스꼴리니꼬프는 구원에 이른다.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을 깨닫고 난 이후였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친 이후, 그는 단절되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열게 되어,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환희의 순간이었다. 소냐도 라스꼴리니꼬프의 내적변화를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그는 마침내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죽여 이중적인 생활을 해왔던 소냐, 그리고 타인을 죽이고 자신도 죽여서 정의도 자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단절과 소외, 괴로움과 고독 속에서 딴 세상을 마치 벌을 받듯 살아왔던 라스꼴리니꼬프, 두 사람 모두에게 그 구원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주위 환경이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얼어붙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마음엔 처음으로 기쁨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남아있는 7년이란 감옥생활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고난 가운데에도 분명히 존재할 사랑과 희망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구원은 철저히 외부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책을 통해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도 양심도 돈도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과연 열매를 맺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소냐의 사랑이 차디차게 얼어붙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마음을 마침내 녹여냈던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자유를 찾았으며, 바닥에서 하늘을 맛본 자였다.


책을 덮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구원의 감격이 밀려왔다. 읽는 내내 긴장을 동반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더럽고 추한 인간의 본성에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 역시 그러한 인간이란 사실에 처절한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책 속에 나온 죄도 벌도 모두 나를 빗겨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겉으론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나도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았고, 모든 것이 인과응보대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서로 죽고 죽이는 추악한 인간의 삶 속에도, 한 줄기 구원의 서광이 비취게 되면, 동일한 환경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며, 그 동일한 환경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타락에서 구원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결말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신학서적에서도 잘 그려지지 않는 기독교적인 구원이 오히려 이런 문학 작품에서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놀라웠다.


인간은 소원을 성취하고 싶어하며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 인간만이 가진 이성은 이때 강력한 힘이 되어주지만,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성이 아무리 옳고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이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파괴하는 방향으로 쓰이게 될 땐 이성조차 죄가 된다. 살인은 명백한 죄다. '죄와 벌'은 살인이 피해자만이 아닌 살해자 역시 결국엔 살해한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보여주었다. 살인은 타자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본질적으로 이중살인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한, 조금 더 넓은 해석을 적용해보자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살인이지만, 관계를 죽이는 것도 살인이라고 볼 수 있다. 관계의 단절과 고립, 파괴를 야기하는 모든 행위가 살인에 해당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인을 저지르고 난 이후 라스꼴리니꼬프의 삶은 죽음보다 못한 죽음의 삶이었다. 그건 죄에 대한 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관계의 죽임이 죄라면 그 죽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벌이다. 이런 이유로 구원은 관계 속에 임한다. 막히고 끊어지고 파괴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소냐의 사랑이 없었다면 라스꼴리니꼬프의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라스꼴리니꼬프의 구원이 가능했던 것은 소냐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냐의 사랑을 드디어 느끼고 그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사랑해준다는 것, 이는 언제나 우리에게도 구원의 빛이 임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은 구원의 통로로써 진정한 은혜이자 선물이다. 글을 마치며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관계 속에서 사랑을 주거나 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관계는 살아있는가.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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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죄 -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올바른’ 믿음보다 신뢰를 원하는가?
피터 엔즈 지음, 이지혜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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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환대하기.


피터 엔즈 저, '확신의 죄'를 읽고.


의심은 예고도 없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간다. 사소하고 우연한 일상의 조각들도 모두 의심의 통로가 될 수 있기에, 우린 달갑지 않고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한 이 손님의 방문을 결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의심은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이다.


이 방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주무시지도 않고 성실하신 의심님의 공격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급이 차단된 채 안에서 곪거나 굶어서 자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불청객을 오히려 환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은 무너지는 것이 결국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버티는 동안은 자신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믿음의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전사로서 명예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끝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처절한 인지부조화와 복합적인 합리화로 가득 찬 위선적인 자기기만, 그리고 파멸이다. 이 결말은 이 책의 저자, 피터 엔즈가 정의하는 '확신의 죄'의 열매가 아닐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교회 목사의 진공 포장된 설교와는 너무도 다른 현실세계를 경험하면서 의심의 순간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반석과도 같았던 안전지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크레바스 바로 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의심의 씨가 우리 마음 밭에 싹을 틔우고 속수무책으로 자라나면서 그 동안 믿어왔고 확신해왔던 세계는 소리 없이 은밀히 함몰되기 시작하고, 이는 곧 내면세계의 비가역적 붕괴를 가져온다. 이 부분에서 피터 엔즈는 말한다. 퓨즈가 끊어지고 믿음이 멈추는, 이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순간들을 통과하도록 묵묵히 인도하신다고. 아멘. 그렇다. 의심은 신앙생활의 적이 아니라 주요 요소이며, 의심과 신뢰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비로소 예수를 닮는 삶을 현실에서 일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믿음과 의심, 그리고 알고자 하지 않는 지혜로움에 대한 책이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의 시작이요 과정이자 끝"이라고 한다. 그는 확신을 추구하고 고수하는 신앙생활의 위험을 간파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믿음은 올바른 생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역설하는데, 그는 이를 '확신의 죄'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태도가 '죄'인 이유는, 우리가 확신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실재이신 하나님을 지적인 영역에만 가두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우상 숭배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지에 대해선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불청객, 의심을 환대하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부분이라 쓰고 '모든'이라 읽는다)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신앙을 가지게 된 건 사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직관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이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어 회심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단 하나라도 존재했었다면, 그 많은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들은 모두 퇴색되어 버렸을 것이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며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연습을 하는 우리들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신비’ 이외에 적당한 단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신비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자 예수를 닮는 삶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내는 과정 또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뢰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이성이 우리를 배신해도 그대로 남아있는 신뢰. 그것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확신에만 가득 찬 믿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확신에 찬 신앙, 앞뒤가 딱딱 떨어지는 깔끔한 신앙,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은 우리 자아에게 모든 통제권을 재부여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역했던 죄인의 옛자아가 적절히 타협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타인들에게 가치를 두지 않는 나르시시즘으로 살아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유있고 인자하며 친절한, 모든 일상이 그저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신앙인들은 스스로 회심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만큼 비겁하거나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책에서 예로 드는 것처럼, 시편과 전도서, 그리고 욥기에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어쩌면 당돌하고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 구약 기자들의 솔직한 고백들이 많이 담겨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무사안일, 안빈낙도는 기도제목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구약 기자들이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나서도 결국엔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을 볼 때,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피터 엔즈가 말한 것처럼 “어쨌거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신뢰하는 삶이란 흔들리지 않는 독단적 확신을 넘어서 우리 삶에 지속되는 신비와 불확실성을 정상적인 신앙의 일부로 포용하여, 확신이 사라졌을 때에도 확실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하며, 우리의 이성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함으로 우리의 통제권을 일체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한 신뢰는 우리의 지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길들일 것이고, 의심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은 하나님이 보내신 신성한 손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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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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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백치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읽고.

‘백치’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한영사전에선 ‘(informal) idiot, (offensive) moron, (offensive) imbecile’로 설명되어있다. 즉, ‘백치’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만약 누구든지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충분히 모욕적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설사 실제로 뇌에 의학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의학용어가 아니기에, 결코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는 단어인 셈이다.

‘죄와 벌’에 이어 이번에 읽은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소설 중 두 번째로 쓰여진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제목이 ‘백치’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찾아본 나로선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왜 그는 굳이 이런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했을까? (러시아어로 된 원제목 역시 같다)

그의 첫 장편소설인 ‘죄와 벌’의 경우, 책을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한 뒤에야 ‘죄’와 ‘벌’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말해 제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심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가 소설 전체에 깔려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많았다. 

반면, 이 책 ‘백치’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설의 초반부터 백치가 누구인지 공공연하게 드러나있을 뿐더러, 그 설정은, 다분히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새어버려 읽다가 자칫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책의 중간부분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심지어 반전 하나 없이 소설의 끝까지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치’가‘ 죄와 벌’보다 약 200페이지 더 길다.)

자정이 넘은 밤,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 숫자인 943 고지를 탈환한 뒤 책을 덮고, 나는 상하권 각각이 약 500페이지가 되는 묵직한 두 권의 책을 책상 위에 쌓아보았다. 한 손에 잡히지가 않는 이 두꺼운 책을 약 2주에 걸쳐 짬 날 때마다 읽어왔다. 무언가 해냈다는 약간의 뿌듯함도 느끼며, 모두 잠든 캄캄한 밤, 홀로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도스토예프스키는 1,000페이지에 달하고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이 장편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에서 ‘백치’로 설정된 주인공의 이름은 레프 니꼴라예비치 미쉬낀. 그는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서, 나이 스물 일곱의 젊은 공작이다. 그가 백치라고 불리는 상황은 내가 사전적 정의로부터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모욕적이진 않아 보였다. 공작 스스로도 그 사실을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간질병을 어릴 적부터 앓아왔다. 언제든 발작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 그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훌륭한 귀족이 공작을 돌봐주기 시작하면서 그는 간질병으로 인해 얻은 백치라는 딱지에서 조금씩 해방 받게 된다. 그는 최근 약 3년간 스위스에서 요양 겸 치료를 받다가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재정을 지원해줬던 귀족이 죽었기 때문이다), 반강제적으로 러시아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이 소설은 그가 러시아로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시작된다.

이 ‘기차 안’이라는 공간은 소설의 도입부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빠르펜 세묘노비치 로고진’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로고진은 공작과 같은 연령대였으나, 상인 집안 출신으로서 신분이나 교양, 혹은 배운 지식으로는 미쉬낀 공작과 비할 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 사는 눈치 만큼은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빨랐으며, 어떠한 일도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청년이었고, 게다가 곧 막대한 돈을 상속 받을 예정이었다. 

남들 앞에서 내세워 보일 만한 건, 비록 몰락했지만, 그나마 귀족 출신이라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미쉬낀 공작과, 믿을 건 돈 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 같고 실제로 돈의 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살아가는 인간 로고진과의 대비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책에서 의도한 중요한 설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설정이 비록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할지라도, 이건 표면적이라고 봐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그러한 대비 이면에 더욱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신분이나 돈의 유무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차이는 다름 아닌, 공작이 로고진과는 달리 ‘백치’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로고진이라는, 즉 공작과 대비되는 인물을 통해 '백치'에 씌어진 부정적인 의미를 해체하고, 대신 순수한 인간성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과정을 통해 '백치'의 역설적인 승화를 이루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공작이 가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 그 때묻지 않은 감성과 지성. 비록 바보처럼 어수룩하게 보여, 소위 시대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경우'에 맞지 않는 말과 생각, 행동을 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상하다는 시선도 곧잘 받지만, 결국 사람들은 공작에게 찾아와 진심을 털어놓고 고민을 얘기하며, 공작이 사실은 전혀 백치가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임을 마음 속 깊이서부터 인정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 책을 읽고 어른들 (소위 상류계층의 사람들이나 지식인들을 모두 포함)의 지혜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다시 물어본다. 세상의 지혜는 그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나 온갖 미디어를 통하여 몇 수 앞을 내다보라고, 그래야만 남을 밟고 설 수 있다고 우리들을 부추긴다. 그러나 그 듣기 좋은 말들의 향연도 모두 이 세상이 피라미드 경쟁체제라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살아남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다. 내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시스템.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자가 과연 가장 강하거나 가장 지혜로운 자일까. 사람이 아프면 그것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거나 아무 계산 없이 도와주려는 마음이 고작 유아적인 행동으로 치부되고 말아야만 하는 것일까. 철저한 이해타산적인 계산을 진행하여 나 이외의 모든 타자를 내가 중심인 체스판 위에 올려놓고 넘어서거나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또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면서 은밀하게 타자를 속여서 이윤을 얻어내는 것이 과연 지혜자의 모습일까. 과연 시대의 '어르신'들이 공들여 쌓아놓은 'norm'에 따라, 그것의 도덕적 가치나 정의로움을 따져보지도 않고, 맞춰 살아가는, 소위 '처세술'이 지혜의 다른 이름일까. 만약 그것이 지혜라면, 어찌 지혜의 열매가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며 살인까지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행위를 낳는단 말인가. 그래 놓고도 과연 그것이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참지혜란 피라미드라는 사탄의 체제를 해체하고, 모함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며 나와 타자의 수직적인 위계를 무너뜨리는 나라에 있지 않을까. 

이 시대에, 시대가 정의하고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겐 참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는 지혜롭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보 같다고 무시 받고 천대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책의 '백치'처럼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로고진은 결국 '나스따시아 필리뽀브나 바라쉬꼬바'를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살인자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징역을 가게 된다. 주어진 로고진의 캐릭터를 고려할 때 그리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뜻밖인 첫 번째 사건은 공작이 살인자인 로고진을 나무라지도 않고 죽은 몸이 된 나스따시아와 함께 로고진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었다. 두 번째는 공작이 다시 백치가 되어 스위스로 보내지게 되는 부분이었다. 그는 스위스로 보내지기 훨씬 이전 상태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다시 스위스에서 공작의 치료를 맡은 슈나이더 교수는 공작의 지능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넌지시 알리기까지 했다.

첫 번째 사건은 공작의 순수함으로 설명이 대충 가능하다. 무리가 좀 있지만, 살인자까지도 품는 마음으로 해석도 가능하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어린애처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냥 얼어버렸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은 내게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참지혜로 대변되는 백치가 결국엔 참지혜인 척하며 지혜의 자리에 앉은 어른들의 norm에 의해 결국엔 꺾여버린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작은 예빤친 장군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주위 사람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었겠지만, 결국 공작은 희생당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백치가 모든 사람에게 전염이 되어 norm을 해체하길 바랐던 나의 소망은 굳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예수가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이나,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죽지 않고 뛰어내려 결정적인 순간에 상황을 단번에 전복시키길 기대했던 사람들의 바람과 한낱 같은 맥락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진행시키다 보니, 처음에 내가 물었던 질문, "왜 저자는 백치라는 제목을 사용했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래서 난 다시 묻는다. 과연 누가 백치였던가. 등장인물 소개에서도 버젓이 미쉬낀 공작이 백치라고 나와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저자 도스토예프스키가 파놓은 함정이 아니었을까. 공작이 아닌 나머지 모든 사람이 바로 진짜 백치 아니었을까. 

인간 심리를 철학자나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들보다도 더 세밀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소설에 모두 녹여낸 도스토예프스키. 그 유명한 철학자 니체도 그를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고 고백하지 않았었던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을 좀 더 알아간다. 어떻게 인간 심리를 문학 작품에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그의 작품 중 읽을 책이 읽은 책보다 아직 훨씬 많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기대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1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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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의 기도 - 개정판
김영봉 지음 / IVP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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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 사귐이 있는가?

김영봉 저, '사귐의 기도'를 읽으며.

몇 달이나 꽂혀 있었을까. 며칠 전, 새롭게 읽을 책을 하나 고르려고 뻔한 내 책장을 찬찬히 훑는 순간, 이상하게도 내 눈은 김영봉 목사의 ‘사귐의 기도’에서 멈췄다. 예전에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이후 책장에 꽂아두고 한 번도 끄집어낸 적이 없던 책이었다. 항상 다른 책에 우선순위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나로선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던 경험이라, 책을 꺼내어 앞부분을 들춰보다가 순식간에 수십 페이지를 읽고 나서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잠시 책을 덮고 조용히 묵상하며 나의 내면세계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되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었을 무렵, 고질적으로 영과 육을 나누는, 공식화된 이분법에서 점점 벗어나면서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의 책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사적인 복음의 충만함이 결코 공적인 복음으로 자연스레 넘쳐 흐른다거나, 누적포인트 전환하듯 바꿀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신앙의 본질이자 전부라고 여겼던 '개인 영성'을 위한 책들과는 부지 중에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책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가진 복음이 오로지 개인적인 경건함과 성숙함만을 향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함몰되어, 내가 아닌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타자들을 돌아보는 눈을 다시 잃게 될까 두려웠고, 개인 간의 거짓과 위선이 아닌 구조적인 불의와 악습 같은 것들로부터 저항하는 마음 보다는 그저 참고 견뎌내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듯한 삶을 또 다시 맹목적으로 살아갈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것이다.

24시간 예수 바라보기로 대표되는 개인 영성을 강조하다 보면, 희생자의 희생과 견뎌낸 자의 수고함을 치하하고 박수를 보내는 일에는 게으르지 않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희생하고 견뎌내는 자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와 응원도 아끼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진 너무나 좋다. 그러나 그러한 불필요한 희생과 견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놓치기 쉽다는 점이 간과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체제로 발현하는 사탄의 모습을 대적하기는 커녕 용인해주는 꼴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사탄은 "영적"인 존재에 국한되어야 할뿐, 가시적인 체제로 드러나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한 신앙은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적극적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인 사회 참여 자체를 불경하게 여긴다거나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여기는 경향까지도 갖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개인은 피해자나 희생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어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시스템, 즉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인 부조리를 인정하고 합리화시켜 버리는 역할까지도 충실히 해낸다 (비록 뜻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오로지 개인의 평안을 더 도모하고 의지를 더 굳건하게 만들어서, 어쨌거나 그 역경을 견뎌내도록 개인을 유도한다. 또한, 세상은 장망성이기 때문에 그저 그런 시련 속에서 꾸준히 경건함과 성숙함을 도모하여 죽기까지 지속할 것을 가장 큰 사명이자 신앙의 유일한 지향점이라고 판단하도록 간접적으로 조장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으로부터 그렇게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구조를 인정하고 아무런 저항이나 참여를 거부하면서 개인의 영적 상태만을 돌보는 행위가 과연 신앙인의 참된 모습일까? 거짓과 불의에 분노하거나 저항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참고 견대내면서도 묵묵히 바보처럼 착하고 바르게 살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과연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일까? 과연 그 모습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원하시고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습일까?

머리가 커지면서 여전히 개인 경건과 성숙에 함몰되어 있는 목사들의 설교를 언젠가부터 더 이상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교만한 자로 낙인 찍고 속으로는 온갖 정죄를 단행하면서도, 겉으론 마치 사려 깊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곤 했다.

유전자의 기능을 생체 내에서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특정한 유전자를 제거해보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물처럼 공기처럼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나보면 그 공간이 가진 편협함과 가식과 위선으로 오염된 모습과 더불어 조금은 더 객관적인 위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안에서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고 거기에 맞는 설교를 공급받으며 살아갈 땐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순수함은 배타적인 분리의 칼이 되었고, 그들의 열심은 더 큰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게 막는 눈가리개가 되어주었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 칼과 눈가리개로 훌륭하게 무장한 인간이 사실 작금의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왔던 주된 세력의 실체 아닌가. 어쩌면 개독교라는 말을 잉태한 산모 역할을 담당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즉 개인 영성으로의 치우침은 초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하나님나라의 모습과는 (믿지 않는 자들이 봐도 충분히 알 만큼) 거리가 멀어지도록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개인 영성 훈련 관련 책들을 멀리하게 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정치학적인 인간사회라는 현장과는 무관한, 마치 진공 속과도 같은 공간에서만 이뤄질 것 같은 가르침들을 계속 그런 책들을 통해 공급받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르침들과 내가 일상으로 살아내는 현실과의 간극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고, 그 괴리감은 이내 내게 죄책감으로 작용했으며, 그 죄책감을 나는 또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부족해서 그렇구나.'라는 말로 어떻게든 이해하고 합리화하려는 나의 몸부림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약의 희년법은 사적인 복음보다는 복음의 공공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난이 되물림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법을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큰 두 기둥인 정의 (미슈파트)와 공의 (쩨다카)를 근간으로 하여,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헤세드)의 실현이 바로 희년법의 의미 아니었던가. 예수의 핵심 사상 역시 '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님나라'라고 나는 믿는다. 구약이 그저 배경이 되는 신약이 아닌, 구약을 전제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더 크고 풍성하며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하나님말씀이 바로 성경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 24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하는 데에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언제나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한 법. 24시간, 아니 25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한다고 해서 희년법과 같은 하나님나라의 법이 아름답게 표현된 실체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복음의 공공성을 함께 모여 추구하는 것이 타당한 수순 아니겠는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진행되고, 다시 난 책을 폈다. 그리고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또 다른 내 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공적 복음의 중요성을 외치는 것까진 좋지만, 내가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똑바른가 하는 질문. 억압받는 타자에게 자유가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들이 바라는 무수히 다양한 것들을 어떻게든 성취가 되게 해주려고 도와주는 일이 과연 복음의 전부인가 하는 질문. 아무래도 사회정의 실현과 약자들을 돕는 일 쪽으로 알아가다 보면, 삶이 무미건조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삶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고, 해서 뭐하나 하는 체념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게 인생이려니 하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인이 되어간다. 예수는 서서히 증발되고 예수가 했을법한 행위들만 남아 복음을 실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억압된 자가 해방되고, 가난한 자가 구제 받는 등의 일들이 일어날 땐 보람과 희열도 느끼지만, 그것 역시 여전히 억압받고 소외 당한 무수히 많은 약자들을 생각할 때면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그러면 감사와 기쁨은 순식간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내 삶을 다 바쳐도 구제하지 못할 약자들의 부르짖음 소리에 눌리고 만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이 아닌 예수의 공생애 기간 때의 행적들을 좇아 일상에서 실천하며 살아내려는 초기의 의도와는 달리, 그 끝은 여느 인간 지혜자가 도달하는 최종결론처럼 '삶의 무의미함'이 되어버린다.

우익의 복음에 천착한 삶에서 염증을 느꼈지만, 좌익의 복음에 길들여지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몸부림에서는 허무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결국 그 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을까. 예수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존재 자체가 나와 함께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하나님과의 사귐이 내게 있는가. 그것으로 나는 기뻐하는가. 감사해 하는가. 혹시 그것 없이 내가 참여하고 도운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함으로만 나의 훈장을 하나씩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썩어질 면류관을 난 사모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예수의 사상과 행적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명분 하에 결국 내가 했던 건 예수를 증발시키고 나의 행위만을 남기는 짓을 하진 않았을까.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계된 모든 질문의 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거룩한 시간과 공간. 그래서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웃을 향한 사랑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는가.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이 책을 가능한 천천히 읽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의 내용보다는 이러한 질문으로 묵상하며 성찰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좌우에 치우친 복음이 아닌 하나님나라 복음.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지만, 언제나 이런 점검을 하며 앞길을 내디딜 수 있기를.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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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는 바울 - 바울의 역사와 유산에 관한 소고
존 M. G. 바클레이 지음, 김도현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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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이해하기에 좋은 길잡이.


존 M. G. 바클레이 저, '단숨에 읽는 바울'을 읽고.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사탕을 준다고 해서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네 식구였던 우리 집은 전세에 단칸방이었다. 사탕 같은 간식은 내겐 아주 귀했다.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난 그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친구는 얼마 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대로 교회 다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가문에서 처음으로 소위 '예수쟁이'가 탄생한 것이었다. 동시에 내겐, 이젠 30년이 넘는, 하나님을 향한 굴곡진 여정의 시작이었다. 사탕 하나로 이 기나긴 여정이 시작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내가 다니던 교회 (예장 합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선 성경 퀴즈대회를 자주 했었다. 학교에선 주관식 수학 문제의 답이 대개 '0' 아니면 '1'이었듯, 교회에서 치러진 주관식 성경퀴즈의 답은 십중팔구 '하나님' 아니면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그 범접할 수 없는 이름에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올렸던 이름이 있었으니, 구약에선 '다윗', 신약에선 단연 '바울'이었다.


어릴 적 내가 알던 바울에 대한 지식은 아주 단편적이었다. 신약에서 편지를 가장 많이 쓴 사람, 사도행전의 주인공 (?),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사울'에서 이름이 바뀌었던 (?) 사람. 이제는 이런저런 공부로 인해 이러한 지식이 부정확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땐 혼자 따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서 주워들은 지식이 전부였던 터라, 나의 성경 지식은 그 당시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들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내가 알던 바울은 그 정도가 다였다.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단편적이기만 했던 지식의 파편들. 이성적인 이해를 거치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시도하면 불경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냥 무턱대고 믿으라고 강요 받았고, 오히려 그것이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고 배웠던 그 시절. 이는 아마 그 당시 한국 기독교 신앙의 단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씁쓸함이 남는다.


바울을 더 정확하고 더 깊게 알고 싶었던 건 솔직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믿었던 나의 기독교 신앙은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서른 후반 즈음에서야 힘겹게 맞이한 가치관의 변화 시기에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어 나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를 지나오며 난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순 없겠지만, 이러한 방법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충분히 인생을 다시 보게 만들고 제대로 살아내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성의 영역이 인간이란 존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것은 그 빙산의 일각이라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회개나 거듭남, 그리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하여 마침내 얻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역시 이 빙산의 일각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정확한 지식은 하나님나라와 예수의 복음을 더욱 풍성히 알고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제목부터가 맘에 쏙 들었다. '단숨에 읽는 바울'. 그렇잖아도 이철규 원장님이 작년 엘에이 방문하시며 쓱 건네주셨던 '하나님의 비밀' (그레고리 K. 비일, 벤저민 L.. 글래드 공저, 새물결플러스 출판)도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고, 예전에 큰 맘먹고 구매했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저, IVP 출판)도 마찬가지 상태라, 난 이 두 책을 책장에서 볼 때마다 뭔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약 150 페이지의 짧은 이 책으로 이제 겨우 그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두 책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처럼 신학적인 전문지식이 전무한 사람에게 이 책은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바울을 감히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바울의 '역사'와 바울의 '유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울을 읽어나간다. 1부 '역사'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바울의 위치와 의미를 읽어낸 뒤, 바울의 편지들과 그것들이 가지는 역사적 정황들을 살펴본다. 이어서 자신을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으로 소개하는 바울과, 유대 전통에 비쳐진 그의 모습을 읽어낸 이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로마 제국에서 가졌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묘사한 이미지와 사람들에게 인식된 이미지들을 비교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바울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울이 유대인이었고 지성인이었으며, 돈을 버는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다메섹에서 그가 계시라고 부르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되었고, 예수가 정말 주님이라는 확신을 얻은 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으며, 그 사건을 통해 바울은 그의 삶과 그의 충성심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는 삶의 대전환을 경험했다는 것도 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남긴 유산의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남긴 유산은 무수히 다양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장들을 낳았다는 사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만이 아니라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아는 바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이러한 단편적인 바울에 대한 지식은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학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바울 신학의 다양한 해석이었다. 작년 권연경 교수님께서 참석해주셨던 독서모임에서 '로마서 산책'과 '행위 없는 구원?'을 함께 읽고 직접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끝내 말끔히 풀리지 않았던 부분은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학 문제처럼 문제가 하나 있으면 하나의 답이 존재할 거라는, 다분히 단순 무식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기독교 신학을 무분별하게 접하고 있던 시기라, 내게 있어 '해석'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또 하나의 낯선 세상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2부 '유산'에서 저자는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연구했던 여러 신학자들의 해석으로부터 바울의 유산을 찾아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와 칼뱅의 사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니체를 비롯한 다수의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왔는지 저자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준다. 


책을 읽고, 바울처럼 파다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쟁을 몰고 다닐 인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사실 바울이 직접 썼다고 인정되는 일곱 편의 서신 (더 많은 서신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 이상 일곱 편의 편지를 통해서만 바울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에서도 그는 상반되거나 모호한, 어쩌면 이중적일지도 모르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게다가 바울이 쓴 것은 신학 전문서적이 아니라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떤 특정 대상을 향해 쓴 편지이기에, 이 편지만을 가지고 바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바울 서신의 저작설에 관한 다툼도 꾸준히 있어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강조하듯, 신학의  문외한인 내게도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고 익히 알려졌던 바울의 사상을 확고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고 그것을 찾으려는 방식보단, 각 시대와 정황에 흐르는 맥락에 합당하게 본문과 꾸준히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능성을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탐색하는 방식이 더 올바를 것이다. 바울이 끼친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지만, 바울 역시 예수의 복음을 해석한 사람이며,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살아낸 사람이기에, 그의 사상이 성경을 읽는 하나의 눈을 열어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복음이거나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늘 염두해야 할 것이다. 


다시금 바울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도 아닐 뿐더러, 율법을 지키기는 커녕 율법을 다 알지도 못하는, 일개 이방인에 불과한 나에게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역할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를 박해했던 그도 부르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인간의 자격이나 가치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이 왜 비유대인들의 세계로 퍼져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여전히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이지만, 그의 소명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야훼의 종의 사명처럼 분명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열방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열방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어지는 거대한 선상에 나의 작은 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감사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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