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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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존 윌리엄스 저, '스토너'를 읽고.


새로운 작가의 글, 처음 만나는 세상, 가슴 설레는 기쁨. 하지만 이런 것들도 잠시. 어느새 난 책 속에 빠져들어 책의 일부가 된다. 더 이상 가슴 설레는 구경꾼이 아닌, 그 세상의 일부가 된다. 내겐 낯설기만 한 시공간,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세상에선 나만 이방인이다. 그곳에서 난 바라보고 듣고 느끼는 일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난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외적인 사건과 내적인 의식의 흐름까지도 파악해가는 유일한 자리를 꿰찬다. 그렇게 난 그 낯선 세상에서 어느덧 신적인 이방인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기꺼이 또 다른 한 권의 책의 독자가 되어 또 다른 낯선 세상을 여행했다. 오늘 오후에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모든 세상이 다르듯 모든 여행은 다른 느낌을 선물해 주지만, 이번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기분은, 음 뭐랄까. 조용한 절망감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느낌 속에는 예기치 않게 묘하도록 깊이 공감했던 나 자신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여 내 인생도 주인공의 인생과 똑같이 조용히 절망스럽다고 해야 할까 봐, 내 인생도 그렇게 고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봐, 어쩌면 난 그렇게 내심 두려웠했던 건 아니었을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비록 내겐 짧은 시간이지만, 덕분에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잔에 가득하게 따랐던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심지어 입도 대지 못한 채 빠져들어가며 읽었던 책이다. 책을 약 삼분의 일 정도 읽었을 즈음 깨달았다. 이 소설은 분명 내게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아직도 멍하니 어두워진 창 밖을 바라볼 때면 스토너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나와 함께 조용한 절망 위에 앉아있는 듯하다. 


책을 통해 그의 인생을 관조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정말이지 고독했고 절망적일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정작 스토너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절망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충분히 절망적일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끝까지 선을 넘지 않는, 바보스러울만큼 부드럽고 순응적인 자세를 보여줬고 제어된 열정을 조용히 간직한 채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분열되었던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회복되지 못한 채로, 유일하게 영혼의 사랑을 나누었던 캐서린과의 재회도 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던 로맥스에게 제대로 한 방도 먹이지 못한 채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그가 침대에 누운 채 가까스로 들었던 자신의 저서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밤의 적막을 가르며 바닥에 떨어지던 그 순간. 그의 마지막 순간. 아.. 인생이란 이런 걸까 싶었다. 평범함의 옷을 입고 있어 비록 아무런 티가 나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분열과 고독으로 점철된 슬픈 삶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특정한 목적도 없이 투박한 인생을 시작했지만, 우연찮게 대학이란 곳에 들어가게 되어 영문학이란 낯선 영역에서 자아의 눈을 뜨게 되는 여정과, 부모님이 바랐던 농부의 미래 대신 영문학을 전공하여 나중엔 그것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살아가는 여정이 소설의 도입부를 이룬다. 그리고 성격장애 기질이 농후한 아내를 만나 죽기까지 지속되었던, 조용한 지옥과도 같았던 분열된 결혼생활, 아내에게 느껴야 했을 공감 충만한 영혼의 사랑을 다른 여자에게서 느끼며 억제된 본능이 표출되었던 그의 슬픈 외도와 아픈 이별, 또한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거침없이 발현된 교만함을 고급스럽게 외교적으로 포장하여 스토너의 영혼을 죽는 날까지 쪼아대며 갉아먹었던 동료 교수의 횡포 등의 굵직한 내용이 소설의 중간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 스토너는 그가 가졌던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외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병들고 쇠약해진 모습, 급기야 암을 진단받고 외로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참 고독했다. 그렇다. 내가 이 책에서 묵직한 울림을 느끼며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독’이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며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한 나에게 이 책은 아주 묘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나보지 않았더라면, 결혼생활을 수년간 해보지 않았더라면, 결혼생활에서 아내와 다투고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았더라면, 직장생활에서 능수능란하지만 사악하게 외교적인 악질을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이 책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사건들과 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에 녹아있는 분열과 고독,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그것들을 그대로 안고 결국은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 인간의 무섭고도 놀라운 적응력, 그 어긋난 각도를 가진 삶의 모습은 아마도 모든 사람, 아니 적어도 인생의 내리막길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스토너의 인생은 곧 우리의 인생에 다름 아닌 것이다. 평범한 삶이란 영점 조정이 되어 아무런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진공 속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삶이란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채 슬픔을 안고 어긋난 각도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함께 하는 이의 사랑과 공감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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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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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선물 같은 쉼


김소영 저,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내게 왜 이 책이 굴러들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저자의 이름을 착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순간은 삶에서 종종 불가항력적인 반전을 만드는 법. 네 번째 저서가 될 초고를 완성하고 갑자기 찾아든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던 중 내 눈에 이 책이 잡혔다. 잡히자마자 손에 들려 반나절 만에 다 읽혀버렸다. 이 책은 내면의 거울이 되어 고전 소설을 즐겨 읽게 된 이후 에세이를 상대적으로 멀리 하던 내 모습을 솔직하게 비추었고, 그로 인해 의기소침해진 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오랫동안 잃어버린 사람처럼 이 책을 흡수했다. 적시에 찾아온 단비 같은 책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좋은 책이란 객관적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주관적인 그날의 기분과 상황, 그리고 개인적인 시간표에 맞춰 읽힌 운명 같은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덕분에 에세이의 맛을 오랜만에 맛볼 수 있었고, 책장에 꽂힌 여러 에세이집들을 뒤적거리며 주말 오후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겐 선물 같은 책이었다.


저자 김소영은 출판사에서 근무하다가 독서교실을 열어 어린이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작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키워드는 '어린이'다. 이 책은 딱딱한 명사형의 어린이가 아닌, 섬세한 아이와 같은 어른 김소영의 눈과 생각과 마음을 통과한 어린이라는 세계를 차분하게 그려낸다. 저자의 따스한 통찰이 잘 스며든, 어린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세계관을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자니,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고, 한때 나도 저렇게 해맑은 어린이였던 적이 있었는데, 하며 작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나는 잠시 흘러간 시간과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책은 3부로 이뤄진다. 1부 '곁에 있는 어린이', 2부 '어린이와 나', 3부 '세상 속의 어린이'. 2부에선 저자가 어린이였던 시절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독서교실의 어린이들, 그들과 함께 하는 어른 김소영, 그리고 과거 기억 속의 어린이 김소영, 이렇게 시간을 달리 하여 세 존재자가 만들어내는 화음 속에서 저자의 입체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3부에선 저자가 그리는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세상의 부조리와 어른들이 만들어 낸 불의와 거짓으로 물든 사회를 향한 일갈도 들을 수 있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여성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약자를 상징한다. 차별과 혐오와 배제로 얼룩진 세상에서 어린이라는 세계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로부터 어른들이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부와 3부도 좋았지만, 오늘의 나를 터치한 건 1부였다. 1부에서 저자는 독서교실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을 대하는 일상을 소개한다. 어른이 되어버린 저자의 시각과 어린이의 시각이 대조를 이루기도 하면서 묘한 감동을 준다. 어린이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있던 내 고질적인 몇몇 시선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문득 지금은 벌써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아들 녀석이 떠올랐다. 불과 얼마 전 어린이였던 아들을 어떻게 잘 사랑하며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나도 정말 많이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10년, 아니 5년 전에 이 책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이 책이 출간된 해가 2020년인 것을 알고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죄책감을 덜 느껴도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좋은 아빠, 혹은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현재 어린이를 자녀로 둔 모든 부모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작가로서도 나는 이 책을 추천한다. 특히 에세이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으며, 관찰과 성찰과 통찰에 이르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늘 하루 잘 쉬었다. 몸과 마음도 충만하게 쉼을 얻는 하루였다. 


#사계절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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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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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체감한 자의 고백


김미옥 저,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읽고


왜 글을 쓰냐는, 아니 어떻게 그렇게 계속 글을 쓸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는 항상 '절박함'을 든다.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며 내 영혼이 차갑게 생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내게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준 것이 '읽기'였다. 그리고 끝내 주저앉지 않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것은, 저자 김미옥처럼,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내게도 안식이자 도피처이자 탈출구였고, 나는 그로 인해 깊은 위로와 치유를 경험했다. 저자에게 글쓰기의 첫걸음은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 나도 비슷하다. 표현을 달리 하자면, 내게 글쓰기의 첫걸음은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였다고나 할까. 처한 환경과 맥락은 다를지라도, 읽기와 쓰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저자 김미옥에게도, 그리고 독자 김영웅에게도 동일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단 두 페이지의 '책머리에'만 읽고도 나는 읽기와 쓰기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체감한 자의 고백이 백이십 퍼센트 공감이 되어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이 책을 읽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타자의 상처와 여백을 어떻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어쩐지 나는 이 책의 서두만 읽고도 저자를 알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물론 착각이겠지만). 


결핍이 창조의 전신이라고 하면 경솔한 말일까.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한결같이 결핍을 머금고 있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노래하고 그 허한 여백을 넘치도록 채운다. 뿐만 아니다. 그 결핍과 충만의 방정식을 저마다의 삶의 맥락에서 체득한 자들에게 확성기가 되어 먼저는 공감을 그다음으로는 위로와 치유를 선물한다. 텍스트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것들을 결국 텍스트가 전달하게 되는 이 놀라운 화학작용. 나는 이를 '신비'라고 부른다. 이 신비를 맛본 작가들의 글은 언제나 반갑다. 그리고 고맙다.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아무나 할 수 있으나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의 소중함 앞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주어서 말이다. 


이 책은 여러 책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 책을 단지 서평집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기계적 서평의 느낌은 전혀 나지 않는 동시에, 마치 읽지 않고 함부로 아는 척하는 경박함도 일절 없다. 그저 한 명의 독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제2의 저자'로서 작품의 객관적인 해석은 물론, 주관적인 통찰까지 리듬감 있는 문장력과 따뜻하고 배려 깊은 문체로 아우른다. 또 하나의 장르를 개척한 듯한 느낌도 든다. 서평과 칼럼과 에세이의 하이브리드랄까. 일독을 권한다. 특히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두 배로 권한다. 


#파람북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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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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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길들여짐에 대해서


프랑수아즈 사강 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프랑스’, 그리고 ‘한 여자와 두 남자’. 

잘못 각인된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상징만으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 연애, 치정, 혹은 불륜 소설 이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목만 보고 절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소설’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법한 이 작품은 ‘브람스’라는 단어로 인한 우리의 즉각적인 인상과는 무관한 연애 소설이다. 그러나 ‘연애 소설’이라는 장르가 암묵적으로 지니는 천박한 이미지로 이 소설을 폄하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작품은 싸구려 삼류 연애 소설에서 흔히 다뤄지는 자극적인 남녀관계를 부각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통속적인 삼각관계를 통해 인간 심리와 사랑의 속성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섬세한 통찰을 선보인다.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통속적인 것에서 심오한 것을, 평범한 일상에서 진리의 조각을 찾아내어 세밀한 관찰과 깊은 통찰을 선보이는 작품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언제나 옳다.

한 달 전 즈음에 읽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여러 장면이 겹쳐졌다. 안나는 어느 날 운명처럼 다가온 브론스키를 선택한다. 남편도 아들도 뒤로 한 채 자신보다 한참 젊은 남자 브론스키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안나는 자살로써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비슷한 삼각구도가 등장한다. 안나의 자리에는 ‘폴’이라는 나이 서른아홉의 이혼을 한 번 경험한 인물이, 안나의 남편 카레닌의 자리에는 ‘로제’라는 사십 대 중년 미혼 남성이, 그리고 브론스키 자리에는 ‘시몽’이라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청년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와는 달리 폴과 로제는 부부가 아니다. 동거하는 연인일 뿐이다. 그런데 시몽은 브론스키와 사뭇 닮았다. 폴보다 현저하게 적은 나이의 남성으로서,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거침없이 접근했던 것처럼 시몽은 폴에게 접근하여 짧은 기간이나마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이 다르다. 안나는 초지일관 브론스키를 선택했지만, 폴은 마지막에 시몽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녀는 습관처럼, 혹은 그녀의 일상에 이미 각인되어버린 로제에게로 돌아간다. 위기를 지나고 나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로제에게로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폴은 다시 그 진절머리 나는 굴레 속으로 자진해서 갇히기로 한다. 안나는 죽음으로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마무리지었지만, 폴은 시몽과의 관계를 불장난이라고 결론을 낸 듯 로제에게로 회귀함으로써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폴의 선택 또한 어떤 면에서는 ‘죽음’과 비슷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몽 때문에 폴이 흔들렸다는 사실로 인해 위기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 폴을 대할 때, 마치 그동안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마치 잠시 잃어버린 소유물을 되찾은 것처럼,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끝나기 때문이다. 아무런 반성이 없는, 폴이 그렇게나 싫어했던 로제의 옛 버릇이 어김없이 반복되는 시공간, 로제가 주인 행세를 하고 폴은 그저 언제나 그를 기다리고 그의 외도도 받아줘야 하는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감옥’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안나와는 달리 비록 숨은 쉬고 있지만, 그녀의 영혼은 다시 노예를 자처한 것처럼 보였고, 그건 곧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폴의 선택은 현명했을까 하고 나는 묻는다.

로제와 시몽의 대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다음과 같다. 명문이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시몽이 폴에게 해준 이야기 속에서 나온 말이다. 

|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 (민음사, 43-44 페이지 발췌)

정말 무시무시한 선고이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사형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리고 이 명문은 폴의 운명을 미리 예견하는 듯하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로제였다는 점에서 그녀는 위에서 언급한 죄를 짓고 사형 대신 결국 고독 형을 선고받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나는 스스로를 사형시켰지만, 폴은 고독 형을 선고받고 족쇄를 찬 영혼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폴의 마지막 선택과는 달리 시몽으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는 잠시 행복했다. 시몽은 그녀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아의 존재를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장면은 이 작품의 제목이 등장하는 문장이다. 뜬금없이 시몽이 폴에게 브람스를 연주하는 공연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는 장면이다. 다음과 같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 (민음사, 57 페이지 발췌)

이 부분은 폴이 자아를 잃어버린 채로 로제와의 관계에 길들여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정체성은 그녀 자신, 즉 ‘나’가 아니라, 로제와 그녀, 즉 ‘우리’였던 셈이다. 말이 좋아 ‘우리’이지 주인과 노예 구도가 습관이 되어버린 ‘우리’가 과연 ‘우리’일까? 하는 질문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관계된 폴의 심정이 묘사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 (민음사, 139페이지 발췌)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 (민음사, 150페이지 발췌)

로제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를테면 자유와 책임감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아무래도 나는 폴의 선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랄까, 관념과 경험의 괴리랄까, 아니면 객관과 주관의 괴리랄까. 나는 변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상과 어쩔 수 없이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길들여지면서 안정감을 느끼고 거기에 안착하는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 사이에서 어느 쪽 입장으로 폴의 행동을 해석해야 할지 망설인다. 그리고 내 생각은 우리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하는 인간관계까지 확장된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그것의 해소 방법에 대해서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뾰족한 법칙을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답답함과 찝찝함을 동시에 느낀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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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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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저,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를 읽고.


나는 철학도 신학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감히 소설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주로 이성에 의지하여 문자로 번역해내는 작업이 철학과 신학이라면, 그 문자들이 가지는 본질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이성뿐만이 아닌 오감이 살아 숨 쉬는 삶이라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콘텍스트에 그것들을 오롯이 녹여내어 우리가 보다 깊고 풍성하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유일한 통로가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이 어렵사리 번역해낸 텍스트가 더 이상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인 설명이나 물음의 목소리가 아닌 총천연색의 삶이라는 옷을 입음과 동시에 곧장 가려져버려, 텍스트에 의해 소외되었던 원래 ‘무’의 신비까지 되살려내는 작업이 나는 소설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본질이 텍스트로 환원되었다가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시 비환원화되는 것이다. 이는 개별적인 경험이 때론 보편적인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공명시켜, 어떻게 소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작가와 독자 사이에 신비로운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소설은 단지 ‘허구’라는 단어가 던져주는 경박함을 거뜬히 뛰어넘어 어느새 삶의 본질까지 침투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믿는 소설의 힘이자 내가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다.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글들이 필요 이상으로 근사한 옷을 입고 있는지 모른다. 텍스트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이 시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글은 점점 패스트푸드처럼 인스턴트한 짧고 쉽고 빠른 메시지로 급속도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아니, 읽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아무 생각 없이 휩쓸려 가버린다면 사람들의 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갈수록 퇴화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글들은 점점 휘발성이 강해져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고, 때론 안 읽는 게 더 유익할 때도 많다. 중언부언과 동어반복은 기본인 데다, 진부하고 뻔한 말들을 어찌 그리 현란한 수사로 치장해대는지, 아무리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다 해도, 마치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요즘은 넘쳐나는 글들 가운데 정작 읽을 만한 글이 별로 없어 나는 종종 읽기 자체가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한다. 나는 홍수를 원하지 않고 마실 물을 원하며, 공해를 원하지 않고 깨끗한 공기를 원한다. 글은 양보단 질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글을 쓰는 입장에 있다면 적어도 그 글을 혹시라도 읽을 사람들을 조금만 더 배려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문 같은 글이 어떤 면에선 가장 쉬울지도 모른다. 생각이 깊고 풍성한 토론이 오간 뒤라면 탄탄한 논리에 의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쓰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논문을 쓰는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논문 쓰는 일이 실제론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소설이라는 분야의 창의성에 비한다면 금세 할 말을 잃고야 만다. 과학적으로 밝혀낸 사실들을 논리 정연하게 쓰는 일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텍스트에 담되 주관성과 보편성의 옷을 입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사실 비교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의 영역보다 나는 문학의 영역에 더 깊고 풍성한 진리가 녹아있다고 믿으며, 에세이나 논문 스타일의 글보다 소설이야말로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워야 하는 글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소설을 한 편 써야지 하는 마음이 늘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그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은 물론 시공간까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적인 권한을 스스로 거머쥔 채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그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글쓰기인 소설. 나는 이 형식을 빌려 언젠간 나의 사상과 신앙을 비롯하여 모든 사유와 감상을 한데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을 쓰게 될 날을 꿈꾼다.


시 같은 소설, 읽고 나면 한 편의 그림 같은 소설, 내겐 여전히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달에 울다’를 쓴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 이 책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는 제목에서 쉽게 알 수 있듯 저자가 미래의 소설가에게 하는 당부가 오롯이 담겨 있으며,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치밀하면서도 꽤나 강한 어투로 풀어놓은 책이다. 


앞부분만 읽어도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마루야마 겐지의 철학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흡이 빠르진 않아도 다분히 꼿꼿한 그의 자세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소파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앉거나 누운 채 편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왠지 정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고, 왠지 가벼운 운동복이 아닌 정장을 차려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글쓰기의 무사 같은 이미지의 마루야마 겐지는 적어도 내겐 그런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미래의 소설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나에게 그는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나를 환기시켜줬고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소설과 소설가의 정체성에 대한 마음까지도 가다듬게 만들어 주었다. 


저자가 바라는 소설가의 가장 크고 중요한 자질은 ‘자립’이다. 그는 소설가는 금전적인 문제로부터, 성공과 인정으로부터, 권력으로부터, 그 이외에도 자립을 방해하는 것들이면 무엇이나 다, 심지어는 도시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소설가란 백사장 근처,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얕은 바닷가가 아닌 망망대해의 깊은 물 위에서 홀로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무사처럼 그 길을 담담히 걸어가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지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모습으로, 글쓰기로 인해 파생되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글쓰기의 본질과 문학의 정수를 향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끝까지 정진하라고 요구한다. 


조금은 강한 어조와 단정적인 말투 때문에 이 책을 읽다가 도중에 내려놓는 독자들도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끝까지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 가진 신비하고도 강력한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즉 진정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기 자신과 솔직하게 정면으로 맞서서 소설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어느 분야든 깊은 우물까지 파내려 가기 위해선 꼭 필요한 준비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 쓰는 일을 그저 돈벌이나 second job처럼 경히 여기면서 소설을 통해 문학이 아닌 결국 자신의 은밀한 사적 욕망이나 채우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저자가 한창이던 시대보다 이 시대는 훨씬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기도 했고, 우린 전문가라는 단어조차 무색해지는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적인 면을 감안해서 저자의 바람을 이해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통해 소설가와 무사의 이미지를 조용히 마음속에서 연결시켜본다. 조금 더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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