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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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진화

 
정유정 저, ‘종의 기원’을 읽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존재할까? 사람을 그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선한 사람은 선한 행동을,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행동은 생각과 마음에서 기인하므로 선한 행동은 선한 생각과 선한 마음에서, 악한 행동은 악한 생각과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사람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일까? 아닐 것이다.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보는 건 인간의 본성을 전혀 모르거나 인간관계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유아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율배반성, 모순, 예측불허성과 같은 단어들이 존재하는 이유,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 심리학과 정신분석학과 범죄학이 대두되고 발전한 이유,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대를 초월하여 지속해서 읽히는 이유 역시 인간의 본성은 함부로 정의할 수 없으며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과 악의 대립이 창작의 영역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되는 이유도 여전히 인간의 본성은 신비의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자신이 좋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싫기도 하는, 인간은 요컨대 결코 어떤 하나의 딱지를 붙여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휘몰아치는 필체를 구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정유정은 이번에도 인간의 악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시나 섬뜩하다. ‘7년의 밤’에서 오영제로, ‘28’에서 박동해로 분한 악이 ‘종의 기원’에서는 한유진으로 분한다. 한유진의 악은 오영제와 박동해의 그것보다 더 강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한유진은 박동해와 오영제보다도 어리다. 오영제는 가정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고, 박동해는 군대를 다녀온 청년이었다. 한유진은 태생부터 사이코패스로 등장한다. 악의 발현도 훨씬 이르다. 한유진은 일찍이 9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른다. 대상은 친형이었다. 소설 속 현재는 한유진이 26세로 그려지는데, 분량의 대부분은 한유진이 전혀 모르는 여자 한 명과, 엄마, 이모를 며칠 사이에 간단히, 깔끔하게 다 죽여버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할애되어 있다.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은 독자가 한유진을 그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한유진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통찰할 수 있는 렌즈로 작용한다. 특히, 간질인 줄 알고 평생 약을 먹고 살아왔는데, 실제로 그 약은 간질이 아니라 그의 안에 내재하는 사이코패스의 발현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는 설정은 한유진의 분노를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어릴 적 세계적인 수영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던 그의 삶을 망가뜨린 장본인은 약이었고, 그 약의 정체를 속여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조절했던 모든 기획은 정신과 의사였던 이모와 엄마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가장 포식자에 해당하는 부류에 속한 한유진을 사회에 무해한 존재로 평범하게 키우기 위한 이모와 엄마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이 갔지만,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평생 먹은 약의 정체와 자신의 실제 상태를 모른 채 살아온 한 인간의 비애를 생각하면 그것 역시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사이코패스와 악을 과연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사이코패스 역시 한 인간이라서 인권과 인격이 있기 때문에 동물처럼 애완동물처럼 취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소설 속 플롯은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사람을 어떻게 가정과 사회에서 대우하고 보살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경고장으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7년의 밤’이나 ‘28’에서와는 달리 ‘종의 기원’은 한유진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 3인칭으로 존재하던 악의 실체가 1인칭, 그것도 1인칭 관찰자도 아니고 급기야 1인칭 주인공 자리로 등극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살인자의 독백이나 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이는 정유정이 인간의 탈을 쓴 악의 실체를 소설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하고 애를 썼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쨌거나 작가의 일종의 분신이기 마련이기에 이 작품을 쓰면서 얼마나 정유정이 악의 모습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노력했을지 생각하면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악은 진화한다. 적어도 정유정의 작품 세계에서는 분명한 것 같고, 그녀가 작품 후기에서 밝히듯 그녀 역시 이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한유진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통해 악의 화신을 불러내어 우리 모두 안에 조금씩은 존재할 악함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끔찍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유정의 작품에 매혹되고 단숨에 읽어내고야 마는 우리들은 어느 정도 우리 안에 내재하는 오영제와 박동해와 한유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유정은 한유진의 내면세계를 두 가지 방법으로 기술한다. 하나는 일기와도 같은 실시간 독백이다.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한 인간임을 강조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도 잘 녹아 있다. 한유진 역시 갈등하고 고민하고 걱정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 회상이다. 약과 발작, 그리고 의도적 망상 때문에 불완전한 과거 기억을 완전한 기억으로 짜 맞춰가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긴장과 스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추적해가는 과정, 그에 따라 한유진의 마음과 생각이 변모해가는 과정에서는 애처로움까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공감은 한유진이 순간 저질러버리는 범행으로 인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지만 말이다. 한유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고 마는 그 본능은 현실세계에서 살인자의 주도면밀함으로 나타난다. 독자의 입장에선 기겁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에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두세 시간이면 아마도 다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가는 사람이 사이코패스 살인자라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임팩트가 있는 작품인데, 작가가 정유정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종의 기원’은 정유정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악함에 대한 사유 또한 해볼 수 있는 기회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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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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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많은 펠리시아를 생각하며.


윌리엄 트레버 저,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고.

아일랜드 출신 소녀 펠리시아는 어느 날 그녀에게 성큼 다가온 한 남자 조니 라이서트와 사랑에 빠진다. 스스로도 볼품없는 외모를 가졌다고 여기던 그녀였기에 펠리시아의 눈은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의 천박함을 꿰뚫어 볼 만큼 밝지 못했다. 조니는 그저 펠리시아를 갖고 논 건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짧은 만남이 한 여름밤의 불장난으로 끝났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흔적을 남겼다. 펠리시아의 몸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생명의 씨앗을 남기고 말았다. 

어린 펠리시아에겐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펠리시아는 할머니의 돈을 훔쳐 가족 몰래 영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뒤 대범하게도 행동에 옮겨버린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조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이 아빠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라 믿었던 불장난을 현실에서 연장하고 싶었던 한 순진한 소녀의 몽상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펠리시아는 조니가 아닌 어떤 다른 남자가 다가왔어도 똑같은 결과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세상사를 전혀 몰랐던 펠리시아는 쳇바퀴 도는 지긋지긋하고 궁핍하고 수렁과도 같았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나, 한 세계를 탈출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땐 진실의 옷을 입은 거짓을 잘 분별해내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펠리시아에게 있어 조니는 그저 때마침 열린 하나의 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펠리시아는 그걸 운명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온몸을 던졌지만 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펠리시아의 여정은 낯선 영국 땅에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시작부터 비극이었는데 끝까지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펠리시아는 조니를 끝내 찾지 못한다. 대신, 운명의 장난인 걸까. 펠리시아에게 친절을 베풀며 다가온 한 낯선 남자와의 인연이 시작되는데, 그는 불행히도 연쇄 살인범이었다.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이는 영국 남자 힐디치. 그는 이미 과거에 여러 여자를 유인해서 들키지 않고 살인한 경험이 있었다. 펠리시아는 그에게 굴러들어 온 다음 타깃이었던 것이다. 물론 결말에 가서 힐디치는 펠리시아를 죽이지는 못한 채 자살을 택하고 말지만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뒤끝이 개운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99퍼센트가 끝이 날 즈음에야 저자가 말하려던 메시지가 수면 위로 드러나서 맥이 빠진다는 기분도 들었다. 중요한 것에 비중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비중의 불균형이랄까. 작품 뒤에 달린 해설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그 선함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노숙자와 같은 약자와 소수자들 사이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그러나 힐디치 역시 아주 평범한 사람 중 하나로 설정해놓은 건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선함뿐만이 아닌 악함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닌 악함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여느 작품에서와는 달리, 어떤 특별한 계층의 이야기가 아닌 아주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이야기가 일상에 녹아든 작품인 것이다. 

처음 읽는 윌리엄 트레버. 필체가 예사롭지 않다.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하며 독자로 하여금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만드는 묘한 힘을 아주 잘 구사한다. 우아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다분히 비현실적인 이야기 소재로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지루함 없이 진행시키는 필력 또한 탁월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작품 마지막에 가서 노숙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삶에 임한 평안함에 익숙해지는 펠리시아의 모습에서 나는 결연함과 동시에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살해당하지 않은 것보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펠리시아,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도 존재할 펠리시아를 생각하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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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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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이란?

가즈오 이시구로 저,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인간은 특별할까? 다른 생물체에 비해, 다른 동물들에 비해 과연 무엇이 특별한 걸까? 특별하다면 그 특별함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기인한 걸까? 아니면, 철학적 혹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걸까? 인간의 특별함은 이미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사회정치학적으로 수없이 다뤄진 주제이고, 지금도 여전히 이에 대한 논쟁이 그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면, 아직 이렇다 할 답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상과학에서나 상상할 수 있었던 클론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것들이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는 추세도 있기에 이런 현상은 계속 지연되고 지연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우린 끝내 답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이런 논쟁을 역사적으로 지속하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특별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나 싶다.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묻고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자, 즉 현존재라고 정의했다. ‘모든 인간은 의미 중독자’라는 우스갯소리는 결코 우습게 넘길 말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은 소위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부르는 ‘숨 쉬고 먹고 자고 싸고 성장하고 번식하는’ 행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이다. 따지고 보면 자살이라는 행위를 범하는 유일한 존재자 역시 인간이기도 하다. 이 역시 의미를 묻고 찾고 따지는 인간의 속성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인간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여느 생명체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기독교 신학적인 관점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로써 특별하다. 인간만이 창조주로부터 그 타이틀을 부여받았다. 창조세계를, 즉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를 다스리고 관리하고 섬기며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신적 대리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어떨까? ‘종속과목강문계역’과 같은 전통적인 생물 분류도에서나, 다윈의 진화론이 반영된 계통 분류도에서나 마찬가지로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로 정의된다. ‘DNA 변이에 의한 다양성’이라는 진화의 좁은 관점으로만 보면 인간이 가장 진화한 생명체라고 단박에 정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진화에 있어서 최상위권에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며, 모든 동물과 식물을 먹이로 삼을 수 있고, 그것들을 함부로 파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생태계에서도 인간은 도구의 사용과 탐욕으로 꼭대기를 차지한 지 오래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누가 지구의 주인일까?”라는 질문 앞에서 당당하게 “인간”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한낱 산업혁명 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개척은 파괴가 되었고, 발전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터전의 상실을 가져왔다. 생물학적인 인간의 특별함의 근거를 크고 발달한 뇌와 고등한 지능에서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이 마음껏 사용된 결과들의 부정적이고 추악한 꼴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인간의 특별함이 무슨 가치가 있었는지 우린 조용히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쓰임새가 악의 도구로도 이용된 듯하지만 어쨌거나 인간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고도의 지능을 소유한 생명체이다. 얼마 전부터 ‘뇌과학’이라는 학문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아진 이유도 전혀 낯설지만은 않다. 모든 세상은 뇌로 조절하거나 만들어내는 현상일 뿐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주장도 있고, 영혼마저도 뇌의 부산물이라는 유물론적인 주장, 프로이트가 밝혀낸 무의식의 영역도 뇌세포의 기능을 밝혀내면 모두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의 주장까지 인간의 뇌는 알려진 것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여전히 많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인간의 특별함’을 ‘인간의 우월함’이 아닌 ‘인간의 인간다움’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인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생물학적으로도 공인된 인간의 뇌의 우수성을 전제할 때 우린 뇌가 작동하고 영향을 미치는 크게 두 가지의 영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이 그것이다. 이성은 논리, 합리성 등을, 감성은 감정, 공감 능력 등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IQ가 모든 것인 것처럼 여겼던 시절이 지나고 EQ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것도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똑똑하기만 해선 인간이 인간답다고 말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널리 퍼진 결과였다. 문학적인 표현까지 들어서 ‘메마른 사람’이라느니 ‘냉혈한’이라느니 하는 단어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어느새 인간다움의 정의를 이성의 작용만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감성의 영역으로 확대시켜 이성과 감성 간의 조화로써 설명하려고 애쓰게 된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은 이러한 ‘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소설의 허구적 장치를 활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클라라는 AF (Artificial Friend)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로봇이다. 가게에 가서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으며 각 AF마다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서 구매자의 기호와 요구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언젠가는 곧 닥칠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클라라의 시선을 통해 독자들이 인간을 한 걸음 떨어져서 객체화시켜 바라보게 만든다. 말하자면 인간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같은 시스템 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화자가 아닌 로봇 화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인간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모습들, 혹은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모습들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읽힌,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공감력’인 것 같았다. 단적인 예로 클라라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버전의 AF와 클라라가 속한 버전을 비교하는 대화를 들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새로 나온 B3가 인지 기억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공감력이 좀 부족한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렇다. 클라라는 다른 AF 보다, 심지어 기술적인 면에서 더 완성도 높게 제작된 B3 레벨보다도 공감력에 있어서는 월등했던 로봇이다. 로봇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클라라는 사람의 내면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분석할 줄 안다. 무엇보다 사람을 공감할 줄 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독특한 캐릭터인 클라라를 통해 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공감력에 있다고 넌지시 짚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또한 클라라를 구입한 조시 엄마의 계획은 클라라를 조시의 대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조시는 아팠다. 언니처럼 곧 죽을지도 몰랐다. 그때를 대비해 조시 엄마는 클라라로 하여금 조시의 모든 것을 배우고 복제하길 바랐던 것이다. 행동이나 표정뿐만이 아닌 마음 씀씀이 마저도. 

과연 어떤 특정한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공감력이 뛰어난 클라라라고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한 영역의 일일 것이다. 작품 속에는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도 등장하고 절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도 등장한다. 이들의 갈등 구조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클라라는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스포를 하고 싶지 않아 힌트가 될 만한 대사를 아래에 적어본다. 조시 아빠의 대사다. 

“너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니? 신체 기관을 말하는 건 아냐. 시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인간의 마음.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만약에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조시를 제대로 배우려면 조시의 습관이나 특징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어?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아?”

아래 역시 조시 아빠의 대사다. 

“하지만 네가 그 방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또 다른 방이 있다고 해 봐. 그리고 그 방 안에는 또 다른 방이 있고. 방 안에 방이 있고 그 안에 또 있고 또 있고. 조시의 마음을 안다는 게 그런 식 아닐까? 아무리 오래 돌아다녀도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 또 있지 않겠어?”

공감력에 탁월했던 클라라의 결정은 의미심장하다. 공감을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해서 결코 그 사람과 똑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특별함은 고등한 뇌 덕분이라고 생물학적으로 말할 수 있고, 뇌가 작동하는 두 가지 영역 중에서도 감성적인 측면, 즉 공감력에 인간의 인간다움이 심겨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 개인은 탁월한 인간다움으로도 결코 복제할 수 없다는 것. 모든 인간은 고유한 존재라는 것. 가장 인간다운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감력을 넘어서는 인간의 고유한 개별성. 저자는 바로 여기에 인간의 특별함 내지는 인간다움이 숨어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나의 두 번째 책의 두 번째 문학 파트너로서 당당하게 후보로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생물학적인 측면에 상응할 문학작품으로 ‘클라라와 태양’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전 작품 ‘나를 보내지 마’도 읽고 나서 천천히 결정해야겠다. 인간의 뇌, 이성과 감성, 지능과 공감력. 흥미로운 글이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0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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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캘린더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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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함의 이면.

오가와 요코 저, ‘임신 캘린더’를 읽고.

오가와 요코에게 1991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 ‘임신 캘린더’를 포함하여 이 책에는 ‘기숙사’, ‘해 질 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이라는 두 단편소설이 더 실려 있다. 이 글은 세 작품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임신 캘린더'에 대한 감상문이다. 

임신을 경험해 본 적도, 경험할 수도 없는 내가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이유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 먼저, 몇 달 전부터 오가와 요코의 글이 좋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심란하고 시간에 쫓기는 일상으로 치달을 때 그녀의 글을 읽으면 환기가 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쉬이 지나칠 사소한 것들의 소중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되돌아보게 도와주는 내 인생의 antidote랄까. 책장에는 아직 대기 중인 그녀의 작품 두 권이 더 있다. 괜히 마음이 놓인다.

딱 한 번 나는 아내를 통해 임신 전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내의 배가 서서히 불러오는 과정은 진기했다. 머리로 아는 지식과 현실 속 경험은 언제나 괴리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의사인 아내와 생물학자인 남편에게도 그 놀라움은 마찬가지였다. 불러오는 배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나, 그 배를 옆에서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나, 생물학적 원리를 상세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신기했던 것이다. 정확히 예정일에 맞춰 아들이 태어났고, 터지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 단단히 부풀어 오른 아내의 배는 곧 터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날을 떠올리면, 사실 나는 아들 녀석보다는 서른 시간 직접 해산의 고통을 겪어냈던 아내의 모습이 기억에 더 많이 남아있다. 다리를 벌리고 힘을 주던 그 숙연했던 장면. 땀이 범벅이 되어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과 이마에 끈적하게 달라붙어있던 아내의 모습. 나는 그 시끄러웠던 적막 속에서 첨예한 긴장을 느끼며 무능력하게 서 있기만 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모든 게 낯설었으며, 모든 게 서툴렀다.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적인 것만 같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에게 아이의 생일은 아내가 죽다 살아난 날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도 아내의 쭈그러든 배를 만지면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못 숙연해진다. 

위에 적은 나의 기억은 아무래도 간접적이고 정제된 입장일 것이다. 임신 당사자의 직접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예민해진 아내와 식성이 변한 아내를 맞추려고 노력하면서도 어설플 수밖에 없는 모습을 가능한 신경전 없이 유쾌하게 헤쳐나가는 것밖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남편의 입장, 즉 임신 당사자가 아닌 임신 당사자를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마치 ‘임신’ 하면 생각나는 자연스러운 공식 입장이 된 것 같아 나는 종종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 작품 ‘임신 캘린더’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물론 이것 역시 소설이라는 허구적 장치와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제한 때문에 간접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순 없겠지만 말이다.


언니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기까지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여동생이 이 작품의 화자다. 여동생은 언니의 임신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 혹은 곧 태어날 아이로 인해 생겨날 긴장 어린 행복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이 직접 임신을 한 게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임신 때문에 입덧을 하게 된 언니와 그 언니를 수발하며 무능력하게 조심스러운 형부, 그리고 그 때문에 요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밖에 나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기록해나간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얻어온 그레이프 후르츠로 잼을 만들어 과체중으로 임산부로서 위험한 상태에 처한 언니에게 계속해서 그 잼을 공급해준다. 그 과일에 아이에게 해로울지도 모르는 물질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고 알고 있음에도 그 일을 지속한다. 여동생의 행동에 의아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언니의 행복이나 아이의 생명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알 것 같으면서도 끝내 알 수 없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작품은 끝에 다다른다. 

여동생뿐만이 아니다. 임신 당사자인 언니 역시 임신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기쁨과 행복에 들뜨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입덧으로 아무것도 못 먹다가 입덧이 사라진 즉시 먹는 기계가 된 것처럼 쉬지 않고 먹어대는 동물의 이미지마저도 떠오를 정도였다. 곧 태어날 소중한 생명을 품고 있는 위대한 예비 엄마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거의 무시되는 형부 정도의 입장밖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언니나 여동생이 ‘임신’에 대한 직접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조금은 섬뜩하다는 생각, 조금은 이해할 것만 같은 생각, 그러나 나중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임신 우울증, 산후 우울증 같은 단어가 언젠가부터 낯설지 않게 들리는 것도 어쩌면 그런 것들이 임신에 대한 임신 당사자의 솔직한 입장이 더 진하게 담겨있는 건 아닐까,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 대한 숭고함 앞에서 감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이런 걸 미리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멍청하지 않은 남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답 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7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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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번 써봅시다 -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
장강명 지음, 이내 그림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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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기에 대한 동네 형의 진심 어린 조언.

장강명 저, ‘책 한번 써봅시다’를 읽고.

6년 만에 힘들게 박사 학위를 받아냈을 때, 사람들이 박사라고 불러주면 고맙고 기분이 좋았다. 부끄럽지 않았다. 나름대로 그에 합당한 애를 써서 성취한 대가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작년부터 새로이 듣게 된 ‘작가’라는 단어 앞에선 부끄럽기만 하다. 그 말을 듣기에 나는 여전히 무언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작년 말, 나는 한 일인 출판사 대표의 위험지수 높은 고마운 믿음 덕분에 책 한번 써본, 소위 ‘저자’가 되었고, 또 얼마 전에는 한 작은 기독교 출판사에서 개최한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부문 가작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작가라고 불리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은 두 번째 책을 낸다고 해서 쉽게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을 작가라고 부르기에 한참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서점에 가면 글쓰기에 관계된 책들 앞에서 기웃거리고는 한두 권을 훑어본다. 구매하는 책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서점에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하는 의식 중 하나다. 내 마음엔 여전히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말이다. 

나와 같은 세대인 작가,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를 구매하게 된 이유는 그의 유튜브 강의를 몇 개 들어본 경험과 그가 말하는 스타일에서 짐작되는 진정성 때문이다. 나에게 비친 장강명은 자기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와 주관적인 생각을 애써 포장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담백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말속에서 진정한 겸손함을 보았다. 거짓이 배인 입바른 겸손함이 아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줄 아는 겸손함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좋았다. 

나의 직관적인 느낌과 판단은 옳았던 것 같다. 이 책에서 그는 그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그리고 작가가 되고 나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예비작가에게 진심 어리고 실제적인 조언을 아낌없이 선사한다. 글쓰기에 관련된 많은 책들을 꽤 오랫동안 훑어본 나로서는 이 책이 가지는 차별적인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장강명이라는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았다. 

장강명은 책이 중심에 있는 사회, 즉 책이 의사소통의 핵심 매체가 되는 사회를 꿈꾼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릴 줄도 모르고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런 세상을 소망한다. 그곳은 생각이 퍼지는 속도보다는 생각의 깊이와 질을 따지는 곳이라고 말한다. SNS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사람들은 점점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카드 뉴스와 같은 짧은 글, 요약 버전의 글을 선호하며, 이젠 그마저도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매체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사람들은 긴 글만이 아닌 글 자체를 읽지 않게 되고 있는 것이다. 읽기 않고 보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게 되면 나중엔 결국 그것을 못하게 되는 것처럼, 언젠가 인류가 읽지 않게 되는 세상이 불쑥 도래할까 두렵기도 하다. 평소에 내가 가진 생각과 공명을 이뤄 나는 그의 소망에 두 손을 모았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책 쓰기’라는 주제로 써진 수많은 책들의 거품을 언급한다. 많은 글쓰기 관련 책들은 자전거 타기를 가르쳐주겠다면서 연습하기 좋은 공원의 조건을 길게 나열하는 것과 같다는, 단번에 공감이 가는 비유를 든다. 그가 말했듯이 자전거는 적당히 평평하고 사람 적은 가까운 공터에 가서 연습하면 된다. 글 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특별한 비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비법을 찾아 글쓰기 관련 책들을 탐독하는 건 아마도 자기 계발서에 심취해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샛길을 찾아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려는 기회주의자으 마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장강명은 강조한다. 그런 지엽적인 것들 말고, 글 쓰기의 본질은 하나의 테마로 200자 원고지 600매를 쓰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전문 레이서가 아닌 동네 형의 자리에서 글 쓰기에 대한 진정성 어린 조언을 하기 시작한다.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글 쓰기는 재능이 없어도 된다. 글쓰기 잠재력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학창 시절 들었던 선생님의 평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한다. 특히 이 부분에선 단락을 그대로 아래에 옮겨본다. 아마 글 쓰기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확 꽂히는 말이 아닐까 해서다.

| 형편없는 책을 발표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봐 무서워서 책을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 책을 쓰지 않고 계속 후회하며 사는 것. 둘째,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것. 셋째, 멋진 책을 쓰고 후회하지 않는 것. 물론 멋진 책을 쓰는 게 제일 좋다. 그리고 형편없는 작품을 내고 괜히 썼다며 후회하는 것과 책을 아예 쓰지 않고 후회하는 것, 둘 중에서는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 졸작을 써도 실력과 경험이 쌓이고, ‘다음 책’이라는 기회가 또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 기회도 없다.| 60-61페이지 발췌.

그리고 그는 글 쓰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유독 왜 쓰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며, 그 질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일갈한다. 왜 쓰느냐는 질문은 왜 골프를 치냐, 왜 산행을 하냐, 왜 달리냐는 질문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프로 골프선수가 되기 위해서, 산악인이 되기 위해서, 달리기 대회 우승을 하기 위해서 골프를 치고 산행을 하고 달리는 게 아니다. 그런 것들을 목적으로 해야지만 그 행위들이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글 쓰기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글은 베스트셀러 작가나 대문호가 되기 위해 쓰는 게 아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다. 그거면 된다. 책은 그러다 보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서 충고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고. 작법서를 참고는 하되 너무 신뢰하지는 마라고. 

이런 것들 말고도 꽤 많은 조언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딱딱한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아닌 친한 선배나 동네 형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듣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서, 글 쓰기에 관한 책을 고르느라 망설이고 있다면 나는 적극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역시 글은 멋보다는 진정성이다.

#한겨레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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