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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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


양귀자 저, '모순'을 읽고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름은 안진진. ‘참 진’ 자가 두 번이나 연거푸 쓰였으나 성이 하필 ‘안’씨였던 사람. '진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안'이라는 성을 물려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딸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참한 성품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기대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성 때문에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 아버지의 타고난 그 무엇이 딸에게 기대했던 그 어떤 것도 부정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던 걸까. 혹시 아무리 강한 삶에의 의지도 천성이나 운명을 이길 수 없다는 철학을 무의식 중에 전달했던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무책임했던 걸까.


안진진에 의해 묘사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평범한 아버지 상을 거스른다. 그는 가정에서 폭력을 일삼았고 툭하면 집을 나갔으며 아내가 어렵게 벌어온 돈도 훔쳐갔다. 술주정쟁이에다가 돈도 벌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외로이 저항했던 걸까. 책을 다 읽고 보니,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의 무능력한 방탕함은 자신의 천성을 고스란히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 그의 마지막 가출은 5년 만에 끝이 났다. 다시 돌아온 그는 부랑자의 모습이었다. 중풍과 치매까지 업어왔다. 그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사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까지 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던 사람. 그가 바로 은연중 참하디참한 딸을 바랐으나 자신이 이미 갖고 있던 것으로 자신의 바람을 부정해 버린 안진진의 아버지다.


다행히 안진진은 아버지의 삶을 따르지 않은 듯하다. 아버지가 물려준 성이 아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대로 살아가는 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안진진은 이름의 권세를 극복했던 걸까.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을 닮아 비뚤어지고 반항하는 삶을 살아가는 남동생도, 시장에서 팬티와 양말을 팔아 남은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나가며 가족을 살리는 어머니도, 그리고 어머니의 일란성쌍둥이 동생인 이모까지 이해하고 품는 그녀는 동시에 사귀고 있는 두 남자 중 하나를 덥석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솔직하다. 그리고 자신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방법으로 극복해 나간다. 이십 대 중반까지 아버지가 자기 인생에 구멍 낸 곳을 메꾸느라 이룬 것 하나 없었지만 그녀는 큰 불평 없이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간다. 아마도 이 부분이 많은 독자들에게 암묵적인 위로와 공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진진의 이러한 씩씩한 삶은 책을 여는 첫 문장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책은 운명을 극복해 낸 한 여성의 간증집이 아니다. 제목부터가 '모순' 아닌가. 책의 마지막 부분, 그녀가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 (그것도 스스로가 자신의 반응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뒤 나영규가 아닌 김장우를 선택한 이후에, 또 그것도 온실 속, 아니 궁전 속 무료함 속에서 살아가던 이모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건을 현장에서 목도한 이후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나영규는 안진진보다 자기 계획의 성취 여부를 더 사랑하는 남자였다. 안진진은 나영규의 인생계획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조각일 뿐이었다. 한편 안진진은 김장우 앞에서와는 달리 나영규 앞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이끌림을 부정하고 끝내 그녀는 나영규를 선택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나영규와 헤어지기 위한 이유는 많았으나 그와 결혼하기로 한 이유는 많지 않았다. 


이모가 자살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교과서 같은, 아니 어쩌면 기계 같은 이모부와 이모부 덕분에 굴러들어 온 지극한 안정감이었다. 그 지극한 안정감이 무덤이 되어 이모의 목을 졸라맸던 것이다. 나영규는 이런 면에서 이모부를 닮았다. 그리고 굳이 대비하자면 김장우는 아버지 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이모부 유형과 아버지 유형, 이렇게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안진진은 과연 안정감을 선택했던 것일까. 저자 양귀자는 이 부분에서 모순을 극대화하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었을까. 


자살로 남긴 이모의 가르침을 거부하며 나영규를 선택한 안진진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모처럼 '무덤 속 같은 평온'한 삶을 살게 될까, 아니면 남편이 나영규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처럼 지루할 새 없는 삶의 전사로 살아가게 될까. 


안진진이 나영규를 선택한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왜 김장우를 선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 답은 모순이라는 단어 속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모순에서 엉뚱하게도 희망을 발견한다. 안진진에게 김장우는 아버지가 아니고, 나영규는 이모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 부모 세대에서 작동하던 이분법이 안진진 인생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면 그건 결코 모순이라 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안진진을 응원하기로 한다. 그녀가 나영규를 선택했기 때문도 아니고, 김장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다.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바로 이 책 첫 문장에 쓰인 안진진의 외침을 실현한 것이라 믿게 된다. 모순된 인생을 정면돌파하는 방법은 모순될지라도 나중에 잘못된 선택이라고 평가받게 될지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조용히 내리면서 말이다.


#쓰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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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 - 차별 없는 은혜, 오름 직한 동산, 은혜의동산교회 이야기 동네 교회 이야기 시리즈 8
김종원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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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교회, 공동체의 일치


김종원 저, ‘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를 읽고


늦게 잠들었음에도 모처럼 개운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감상문을 쓰기 위한 나의 루틴을 쫓아 어젯밤 책을 읽으며 노트에 옮겨놓은 문장들과 끄적거린 나의 단상들을 훑어본다. 새벽 2시경 잠들기 직전에 써놓은 마지막 줄에 내 시선이 멈춘다. 이 책이 내게 남긴 메시지다. 


“복음이면 되는구나! 교회면 되는구나! 공동체면 되는구나!”


어릴 적 교회 간증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채 나는 성인이 되었고, 그 이후 어지간해선 개인이나 교회 간증집을 멀리해 왔다. 의외로 많은 경우 간증은 영웅담 혹은 성공담의 포장지 역할을 충실하게 했고, 간증하는 당사자는 자신의 과거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그럴 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스스로도 은혜의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비극을 숱하게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저자가 지인이 아니었다면 내 손에 들리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사실 반쯤은 의무감으로 구입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지금은 그랬던 나를 반성한다. 이 책 읽길 참 잘했다.


이 책의 앞부분은 저자의 역사다. 저자는 폭력에 물든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겐 '어머니의 기도'라는 영적 배경이 있었고, 교회라는 도피처와 안식처가 있었다. 그래서 숨 쉴 수 있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이었다. 학창 시절, 개인 기도는 물론 공동체 기도의 힘을 체험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환상을 보았고 그것을 평상시 어머니가 해 주시던 기도의 내용과 합하여 선교사의 비전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자 즉시 자신의 삶을 그 비전에 맞추었다. 필리핀 파송 선교사로 갔지만, 막상 현장에서 마주한 건 벌거벗은 자신의 영적 실체였다. 그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이 준비된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사랑은 물론 성경 지식도 교회론도 턱없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고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귀국 후 갑작스럽게 찾아온 공황 발작을 수 차례 경험하며 부목사직을 사임하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목회 성공이 아닌 자신이 드려지는 거룩산 산 제사의 깨달음을 얻고 다시 하나님과 방향을 맞출 수 있었다. 하나님은 한 번도 그를 버린 적도 잊은 적도 없었던 것이다. 생계를 위해 맨발로 뛰면서 막막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청년부 수련회 강사로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목회에 대한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지하여 개척을 감행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저자의 집에서 첫 예배가 드려졌다. 


짧은 저자의 역사를 뒤로하면, 책의 대부분은 저자가 현재 담임으로 섬기는 ‘은혜의 동산 교회’의 개척 역사를 소개한다. ‘공황 발작으로 사임한 목사가 개척한 교회’라는 소문 때문이었을까. ‘은혜의 동산 교회’에는 개척 멤버부터 깨어진 자들, 구부러진 길을 걸어온 자들의 비율이 타교회보다 높았다. 담임 목사처럼 공황 장애를 겪은 사람도, 조현병을 앓은 사람도, 사채업자에게 쫓기며 가정 파탄을 일으킨 장본인도 인도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 정도로 문제아로 자리매김했던 청소년도, 이단 종교에 심취한 부모를 가진 자녀들도 하나님께선 은혜의 동산 교회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마음, 목회자의 마음 없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만 판단한다면 목사에겐 충분히 교회를 포기할 만한 이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달랐다. 그는 삯꾼 목사가 아니었다. 그는 목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두 번째 삶을 조금 먼저 살기 시작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랑의 빚을 갚아 나가는 한 사람이었다. 그는 깨지고 상처 입은 각 사람을 교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대했다.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한 마리의 양으로 말이다. 그는 믿었을 것이다. 모든 깨짐과 무너짐도 예수의 생명의 빛이 임하면 회복되고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그는 몸과 마음 모두를 실어 그들의 현장으로 직접 찾아갔다. 삶으로 예배하며 그들을 섬겼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모습에서 참 목자, 예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은혜의 동산 교회에는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현재진행형으로 임하는 곳임을 믿게 된다.  


이 책이 만약 이렇게 저자와 저자가 개척한 교회의 역사를 소개하는 데에 그쳤다면 나는 이 책을 그리 추천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여기 소개하지 못한 책 속의 많은 감동적인 일화들이 더 많이 소개되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진미는 저자인 김종원 목사 한 사람에게도, 은혜의 동산 교회 성도들의 감동적인 회심 이야기에도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재미와 감동이 잘 버무려진 한 편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으로 이 책을 술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로 '공동체'를 꼽는다. 김종원 목사도 은혜의 동산 교회 성도도 아닌 '은동교 (은혜의 동산 교회 줄임말) 공동체' 말이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마음 담아 읽는 독자라면 모두 이 사실을 발견하고 감동이 되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예수의 복음이면 된다는 것, 교회면 된다는 것, 그리고 공동체면 된다는 것을 더욱 믿고 신뢰하게 되리라 믿는다.


정말 오랜만에 예수의 복음, 교회, 공동체, 이 세 가지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나고 회복되는 증거를 볼 수 있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누려야 할 축복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덧붙여 저자 김종원 목사가 내 지인이라서 영광이다. 나도 한 다리 건너 공동체 일원임에 감사한다. 개인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여전히 예수의 복음으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의 살아있음을 보고 싶다면 나는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세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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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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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를 읽고 또 공부하다


석영중 저,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석영중 교수의 ‘백치’ 강의)’를 읽고


들어가며


’백치’를 두 번 정독했다. 아마추어 문학도가 이 작품의 정수를 알아채고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자유롭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해석해 버린 후 책을 덮고 “나는 그 책을 읽었다”라고 말하는 행위에 대해서 나는 감히 ‘무례하다’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전문학을 대할 때는 더욱더.


몇 달 전 존경하는 석영중 교수님의 ‘백치’ 강의가 책으로 나왔다. 마침 독서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에서 ‘백치’ 함께 읽기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망설임 없이 구매해서 책장에 고이 모시고 있다가 ‘백치’ 모임을 가진 후 곧장 꺼내 들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않은 사람, 특히 ‘백치’를 읽지 않은 사람은 읽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석영중 교수님 특유의 문체 덕분에 논문 혹은 러시아 문학 강의록 수준의 내용을 대중적인 언어로 상대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말이다. 나는 이 책 역시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야 할 부분을 표시해 두면서 정독했고, 또 한 번은 표시된 부분을 모두 노트에 옮기면서 (다 옮기니 A4지로 17장이었다) 그 부분 위주로 정독했다. 이 글은 감상문이라기보다는 요약 및 정리 정도가 되겠지만 (이 책에 대해 평을 할 깜냥이 안 된다), 세 가지 큰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방식으로 써보려 한다. 대부분의 문장은 책에서 가져온 것이다. 내가 한 작업이라고는 뜻을 그대로 살리되 석영중 교수님의 문장에 가한 약간의 수정, 그리고 추가한 나의 해석과 설명 정도가 되겠다.


1. ‘백치’는 어떤 작품인가?


석영중 교수는 ‘백치'가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 중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많이 붙는 소설이라고 소개하면서 책을 연다. 첫째, '백치'는 도스토옙스키가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힘겹게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그가 아내 안나와 함께 유럽에 거주할 때 쓴 작품인데, 생활비 부족, 도박 중독, 고질적인 간질 증상은 물론 첫딸이 감기 때문에 생후 석 달도 못 채우고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둘째, '백치'는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사랑한 소설이다. 옴스크에서 형기를 마친 직후 그가 남긴 편지에 쓰인 글귀는 유명하다.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께서 진리 밖에 계심을 내게 증명한다면, 그리고 진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배제한다면 저는 진리 대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을 바꾼 건 시베리아 유형이 아니라 그 기간 중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게 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셋째, '백치'는 독자에게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이자 연구자에게는 가장 연구 의욕을 자극하는 소설이다. 독서모임에서 이 작품으로 나눌 때 실제로 여러 말들이 있었다. '죄와 벌'과 비교해서 서사가 밋밋해서 지루했다는 말, 연애소설인지 뭔지 잘 파악이 안 됐다는 말,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런 두꺼운 책을 썼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정독조차 제대로 마친 사람이 드물었다. 앞서 말했듯 나 역시 정독을 두 번이나 했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숨겨둔 많은 의미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백치'를 강의한 이 책이 나 같은 독자에게 필요한 이유가 되어준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을 현실 속에 구현하는 것이 '백치'의 창작 목표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미래가 '백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정도로 이 작품에 몰입했고 올인했다. 가장 힘든 시기에 말이다. 그러나 그를 괴롭힌 것은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였지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무엇을 써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시베리아 유형 중에 이미 '백치'를 위한 아이디어는 이미 싹트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를 문학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유로지비(바보 성자)의 겸손과 온유를 주인공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삼았으나 그의 백치성만은 의학적인 것으로 규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주인공 미쉬낀에게 부여한 것이 바로 간질병이다. 간질병은 도스토옙스키 자신뿐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 ‘악령’에서 끼릴로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스메르쟈코프도 앓는다


'백치'와 관련한 가장 상투적인 논평은 '실패한 주인공'설이다. 사실 나도 그렇게 해석했었다. 물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아 선하고 온순하고 겸손한 간질병 환자가 현대의 러시아 수도에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사실상 저자가 의도한,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설의 아이디어였다. '백치'는 결코 실패한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구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세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데 실패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2. ‘백치’는 다른 소설과 무엇이 다른가?


'백치'는 개연성이 부족한 부분도 많고 억지로 짜 맞추었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도 많으며 살인의 테마에서까지 긴장감이 떨어지는, 일반적인 소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소설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실패한 소설이 아니라 진실로 성공한 소설인 이유이자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석영중 교수는 이에 대한 답으로 이미지의 문제를 제시한다.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나 플롯이나 주제가 아니라 이미지였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 부분에서 전공자, 아니 연구자의 격이 다른 수준을 느꼈다. 아마추어는 볼 수 없는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일까? 석영중 교수는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본질을 말해 주는 개념이 강생(성육신, 육화)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 형체가 없는 것이 형체를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백치'를 통해 해 나갔던 것이다. 성당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돌과 나무를 써서 3차원적으로 재현한 공간이라면, 도스토옙스키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언어로 형상화하여 책이라는 이름의 3차원적인 실제에 담아 놓았다. 그에게 소설은 서사로 구축한 성전이었다. 아, 놀라운 표현 아닌가.


석영중 교수는 '백치'에서 그리스도를 형상화하는 데 개재된 가장 강력한 세 가지 이미지로 철도, 칼, 그림을 선별했다. 철도는 당대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은 물론 러시아 상인 계급, 물신 숭배 사상을 담아내는 이미지이고, 칼은 폭력과 죽음과 종말에 대한 비전을 당대에 일어난 실질적인 범죄와 결부해 종횡무진 풀어 나가는 이미지이며, 그림은 이미지에 관한 이미지, 즉 메타이미지로서 도스토옙스키의 예술적 바라보기를 실현시켜 주는 궁극의 이미지라고 하면서 말이다. 


3. 왜 철도, 칼, 그림인가?


(1) 철도

19세기에 철도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중심이었다. 1860년대 러시아 철도 사업은 부흥기를 맞이했다. '백치'에서 두 주인공이 타고 온 상트페테르부르크-바르샤바 노선은 1862년에 개통되어 도스토옙스키가 '백치'를 쓸 당시에는 이미 상용화되어 있었다. 철도는 정치, 문화, 역사적인 차원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긍정적인 변화는 기차역이 물질적 이득의 거대한 분배 중심지 구실을 할 터인 광활한 유라시아 철도를 따라 새 문명이 건설되리라는 관점에서 천년 왕국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진보를 자처한 지식인들이 철도에 열광했다. 체호프는 철도를 비롯한 모든 기술 문명이야말로 야만적인 러시아에 인간의 모습을 부여해 줄 것이라고 천명했다. 


반면,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기차는 괴물로 인식되었고 러시아 문인들의 상상력 속에서 기차는 불길한 상징이었다. 가장 부정적인 시각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톨스토이에게 철도와 기차는 질서를 파괴하고 도덕을 교란하는 사악한 문명의 상징이었다. 파스테르나크 역시 기차는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을 태운 채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내전으로 피투성이가 된 러시아의 철길을 달리고 또 달리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그에게 철도와 기차는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모든 것을 상징했다. 


도스토옙스키의 기차에 대한 시각은 이중적이다. 기차를 하나의 이미지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현실 비판적인 맥락을 조성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미래를 위한 부국의 도구로서 철도의 역할을 강조한다. 석영중 교수는 당시 도스토옙스키가 의식한 철도와 가장 유사한 현대의 게임 체인저는 '월드 와이드 웹'일 것이라고 비유한다.  


철도는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도 한다. '백치'에서 미쉬낀이 치료를 받았던 스위스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공간이다. 기차에 오를 때 미쉬낀은 낙원의 추억에 마침표를 찍는다. 국경을 넘어서는 간질 환자 미쉬낀의 수평적 여행은 그리스도로서의 미쉬낀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하강 여행과 겹친다.


철도는 자본주의 혹은 돈 혹은 부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돈은 도스토옙스키의 주요 소재 중 하나이며 '백치'에서도 중심 주제 중 하나로 역할한다. 로고진이 그중 하나다. 로고진 아버지는 돈을 쓰기 위해 버는 것이 아니라 축적하기 위해 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모아 놓은 돈을 한 푼도 못 써본 채 고스란히 아들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하직한다. 그에게 돈은 마루 밑의 시체처럼 쌓아 두는 것이지 돌아다니도록 풀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돈을 죽이기 위해 모았다. 로고진은 대상이 다를 뿐 '죽이기'라는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복제본이다. 돈에 대한 열정이나 탐욕이나 인색을 훨씬 넘어서 두 로고진의 닮은 점은 잔인성, 폭력, 파괴, 사디스트적인 집착이다. 이런 유형의 인간에게 모든 관계는 돈이건, 인간이건, 사물이건 간에 소유로, 오로지 소유로만 귀착한다. 구매하고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만이 그들이 다른 존재와 맺는 유일한 관계이므로 그 모든 것은 시장 시스템의 결과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소유물을 상실할까 봐, 소유물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할 까 봐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치유 불가능한 단계까지 갔을 때 발생하는 것이 살해이다. 무언가를 영원히 소유하려면 그 무언가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 죽여서 박제를 해야 영원히 내 소유가 된다. 로고진 아버지는 돈을, 로고진은 나스따시야를. 둘은 대상이 다를 뿐 병적인 집착이라는 점에서 판박이다. 아버지가 돈을 죽였듯이 아들은 여자를 죽인다. 이 둘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사고파는 행위, 즉 상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한계를 뛰어넘을 때 발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들에게 사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고, 소유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다. 


돈의 물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극적인 장면은 나스따시야의 영명 축일에 벌어진 해프닝일 것이다. 로고진이 그날 그녀를 사기 위해 가져온 돈뭉치는 그냥 돈이 아니라 완벽하게 물건화된 돈, 보고 만지고 무게를 잴 수 있는 현물, 황금 덩어리, 혹은 다이아몬드 원석의 1860년대 버전인 돈 덩어리를 가져온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포장한 것은 돈에 관한 정보로 포화된 '증권 뉴스'라는 신문지이고, 끈은 19세기 러시아 교역의 주요 상품 중 하나인 설탕을 포장하는 데 쓰이는 노끈이다. 가로세로 크기가 분명하게 묘사되는 그것은 이미 돈이라기보다는 물건, 아니 물신이다. 돈이 물건을 사기 위한 수단을 넘어 그 자체가 물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종이를 싼 포장지는 다 타버렸지만 그 안에 든 돈뭉치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돈은 곧 무적이라는 뜻이다. 


철도 덕분에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주식으로 전형적인 신흥 자본가가 된 인물이 바로 예빤친 장군이다. 그는 귀족도 아니고 상인도 아니지만 거대한 부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실제로 첫 증권 거래소가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졌다. 철도 회사의 주식은 막대한 수익으로 이어졌다. 1867-1868년 러시아에서는 철도주 투기가 시작되었다. 정확히 '백치'가 써지는 기간이었다. 


철도 산업으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많은 돈이 시중에 돌게 됐다. 도스토옙스키는 부르주아 사회의 빈부 격차가 아니라 빈부 격차를 훨씬 넘어서는 총체적인 무질서와 천박함과 무교양과 무감각에 경악했다. 문제는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게 아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기에 그때까지 신성하게 지켜져 오던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고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문제다. 석영중 교수는 이 논리를 '대체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대체의 원칙은 '백치'에서 여러 차례 효과적으로 쓰인 원칙이다. 그중 가장 치명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그리스도를 대체한 이야기다. '백치'에서는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떠올리게 하는 이볼긴의 허풍으로 포장된 이야기가 하나 소개된다. 일개 사병 콜파코프가 사망했다가 6개월 뒤 버젓이 되살아났다는 일종의 도시 괴담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실만을 공유하는 동시에 부활 사건의 심오한 의미를 훼손하고 희화화한다. 이볼긴은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대속 대신 가상적이고 인위적인 사건만을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 없는 부활과 대속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보여준 것이다. 더욱이 부활했다고 추정되는 콜파코프가 이볼긴 자신에 대한 거울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 에피소드의 불경함은 배가된다.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는 술꾼 도둑 콜파코프 사병으로 대체도고 부활의 목격자이자 증거자인 사도는 술꾼 거짓말쟁이 이볼긴으로 대체되며 부활의 최종적인 공간인 새 예루살렘은 이름만 새 땅인 보병 연대로 대체되는 것이다.


'백치'에서 대체의 원칙이 가장 의미심장하게 적용된 사례는 아마도 철도와 기차일 것이다. 오늘날 알고리즘이 신을 대체하고 있다면 당대에는 철도가 신을 대체했다. 철도는 '팍스 테크니카'였다. 철도 부설은 기술 진보에 대한 믿음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였다. 그리고 레베제프의 해석에 다르면, 세 번째 봉인이 뜯어졌을 때 나오는 검은 말과 손에 저울을 든 기사는 저울과 계약의 시대를 상징하는 이미지이며 기차-철마는 바로 그 검은 말의 등장을 예고한다. 새로운 경제와 금융의 시대를 불러온 철마가 모든 것을 계산으로 마감하는 세상을 대변하는 검은 말의 기수와 중첩되는 것은 시각적으로 자연스럽다. 철마는 저울을 상징하는 검은 말이자 죽음을 상징하는 창백한 말이다. 


쁘띠찐은 극기와 절제를 통해 영적 성숙이 아니라 부의 축적을 꾀했다. 가냐는 그리스도 시대 박해자들이 왕 중의 왕에게 가한 최악의 모욕을 진지한 맥락으로 끌어들여 부자가 된 자신의 미래에 덮어씌웠다. 물론 가냐가 '유대의 왕'을 자신의 별칭으로 예고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부자로 유명세를 떨친 로스차일드 일가 덕분이다. 금융계의 제왕을 그리스도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은 소설 구성의 가장 큰 원칙인 대체의 원칙을 의미론적으로 완성한다. 부자를 꿈꾸는 모든 사람에게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 로스차일드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유대의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석영중 교수의 강의 덕분에 철도가 촉발한 경제, 돈, 금융의 관점으로 결국 요한의 묵시록에 도착했다. 철도와 돈은 종국에 가서 그리스도를 대체한다는 데 그 가장 두려운 의미가 있다. 철도는 월드 와이드 웹으로서 전 세계를 연결해 주었지만, 그 수평적 연결이 조밀해질수록 지상과 천상을 이어 주는 연결의 힘은 점점 더 미약해졌다. 결국 인간과 신, 지상과 철국의 고리는 끊기고 지상의 부를 장악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대체했다. 


(2) 칼

'백치'는 미쉬낀, 로고진, 나스따시야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흔히 논의된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미쉬낀, 로고진, 이뽈리뜨의 축으로 볼 수도 있다. 미쉬낀은 가장 먼저 처형의 모티프를 소개하는 인물로 주로 사형수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죽임 당함의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뽈리뜨는 죽임을 당하는 인물인 동시에 죽임을 당하는 것에 관해 사색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로고진은 죽이는 인물이다. 이 세 사람을 연결해 주는 결정적인 물건이 바로 칼이다. 


미쉬낀은 자신이 스위스에서 관찰했던 처형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칼의 이미지와 앞에서 다루었던 철도의 이미지가 '기계'의 이미지 속에서 하나로 합쳐진다는 사실이다. 번역문으로는 잘 전달되지 않지만 원문으로 읽으면 칼과 철도의 융합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사형수를 올려놓자마자 이만한 작두날 (nozh; 칼)이 기계 장치 (mashina; 마시나)에 의해 떨어져요. 그 단두대를 기요틴이라 부르는데 육중한 게 아주 힘이 세답니다." 흥미롭게도 마시나는 앞 장에서 다루었던 기차를 지시할 때도 사용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소설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표상하는 것이다. 그는 시간에 관한 사색을 공간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시간 자체와 공간 자체를 논하거나 탐구하는 대신 시간과 공간을 서로를 위한 척도로 도입한다. 그의 공간은 시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그의 시간은 반드시 공간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칼은 죽음을 의미하는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공간으로 구현된 시간을 나누는 도구이기도 하다. 특히 미쉬낀이 들려준 사형수의 최후의 5분은 이후 소설 전체에서 하나의 모티프처럼 반복된다. 사형수가 죽기 직전의 5분으로 돌아가 보자. 도스토옙스키가 '무한한 시간'이라는 표현에서 사용한 단어는 시간이 아닌 '기간' 혹은 '기한'이다. 기간은 정해진 동안의 시간이므로 굳이 공간화해 말하자면 닫힌 시간이다. 그런데 그 닫힌 시간에 끝이 없다라는 술어를 붙임으로써 도스토옙스키는 모순 어법을 창조한다. 그러니까 '무한한 기간'이란 '무한한 유한'이 되는 셈이다. 


죽기 직전 5분의 시간이 무한의 기간이라면, 되살아난 그에게는 같은 원리에서 남은 생의 1분이 한 세기가 될 수 있다. 그는 그것이 곧 무한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도스토옙스키가 '영원'이라는 단어 대신 '무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주목하자. 일반적으로, 도스토옙스키는 그 강력한 종교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영원이나 영원한 삶을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다. 무한은 무계, 혹은 무제한과 다른 개념이다. 무한은 또 영원과도 다른 개념이다. 우리는 수학적 무한은 상정해 볼 수 있지만 수학적 영원은 상정할 수조차 없다. 사형수에게 영원과 가장 근접한 상태는 '빛과의 일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1분을 1세기로 계산하자마자 영원은 사라진다. 오로지 무한의 환영만이 남는다. 


시간성은 사형수가 겪는 단절감을 최종적이고 완결된 것으로 만든다. 그는 혼자이고 나머지는 전부이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무이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남은 시간은 무한이다. 이른바 '시간 디바이드'가 극에 이르는 순간이다. 시간이 그어 놓은 경계선이 그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갈라놓는다. 그의 시간은 마치 칼로 도려내지듯이 살아 있는 모두의 시간으로부터 도려내진다. 이런 면에서 사형수와 이뽈리뜨와 미쉬낀이 체험하는 절대적인 고독은 공간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이다. 칼의 이미지는 이들의 시간적 고독을 공간적으로 표상하는 데 그 가장 시원적인 기능이 있다. 


공작의 행보는 기요틴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사형수를 연상시키고 칼을 든 손을 올리는 로고진은 형 집행인을 연상시킨다. 사형수가 기요틴의 칼날 아래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영원을 흘끗 본다면, 미쉬낀은 간질 발작이 일어나는 극도로 짧은 한순간에 영원이라 불러도 좋을 모종의 황홀경을 체험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창작의 목표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들어 있는 영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으로 야기되는 신비한 비전 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난 영원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다. 발작 직전의 미쉬낀이 감각하는 섬광, 빛, 불꽃의 이미지, 그리고 신기한 빛으로 충만한 정신과 마음은 처형 직전의 사형수가 상상하는 빛과의 합일을 환기한다. 그러나 사형수와 달리 그는 새로운 삶에 대한 현기증 나는 공포가 아닌 최상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기도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법열을, 문자 그대로 황홀경을 체험한다. 


미쉬낀의 시간은 이를테면 간질병적 시간이다. 영원과 맞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무한하지만 발작과 함께 끝난다는 점에서 유한하다. 그것은 종말론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이자 실존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 누구도 그 어떤 논리로도 규명할 수 없는 모호한 시간이다. 단순화해 말하자면 영원도, 시간 없음도, 황홀경도 일순간의 체험이다. 이때의 영원은 단 1초도 지속되지 않는 영원이라는 지독한 역설을 창출한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에게 영원이란 무엇인가? 영원은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니고 상태도 아니다. 영원은 시점이다.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점이다. 


칼은 살인 및 처형의 모티프에 이어 거세의 모티프를 활성화한다. 시간을 베어 버리는 칼의 이미지는 생식 기관을 잘라 버리는 거세 의식에서 가장 기괴하게 시각화된다. '백치'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로고진의 가문을 거세파로 설정함으로써 복잡한 종말론적 서사를 완성한다. 셀리바노프는 표트르 3세가 성 불구자였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거세란 진정한 세례 의식이자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거룩한 자정 행위라고 설파했고 수많은 지식인과 부유층과 귀족층이 그의 말에 현혹되었다. 거세파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이었다. 거세파 역시 시한부 종말론의 지지자들이다. 


칼은 거세파에게 두 가지 단절의 행위를 함축한다. 첫째, 시간적 단절. 그들은 거세를 통해 종족 번식의 가능성을 무로 돌렸으므로 오로지 동시적으로 14만 4천 명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둘째, 공간적 단절. 로고진의 저택은 단절을 건축학적으로 묘사한다. 나머지 사람들과 단절되어 천국의 도래만을 꿈꾸며 살아간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거세라는 파괴적 행위를 저지르면서까지 이 세상의 욕망을 뿌리치려 한 듯 보이는 그들이 유난히 돈의 축적에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어로 거세파는 동사 스코피치에서 파생된 단어로, 이 동사는 '거세하다'와 '축적하다'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 부의 축적과 거세가 언어학적으로로 연관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거세파 신도들은 주로 환전상을 했으며 로고진의 아버지 역시 거세파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모든 시한부 종말론자와 이단과 종파의 공통적인 특성이겠지만 거세파 역시 물질주의적 이상주의자들이었다.


로고진에게 집착의 대상은 돈이 아닌 여성이다. 그러나 시간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와 부친은 판박이다. 아버지가 모든 욕망 대신 치부를 선택했듯이 로고진은 다른 모든 욕망 대신 나스따시야를 선택한다. 아버지가 거세를 한 것은 절제와 극기라는 미덕에서가 아니라 부의 축적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듯이, 로고진이 도덕으로 완성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거세해 버린 것은 나스따시야를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서이다. 로고진이 칼로 나스따시야를 찔러 죽이는 것은 결국 거세의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거세파의 본거지인 로고진 저택에서 행해지는 살인은 성적인 욕망과 억제를 위한 거세 의식의 뒤집힌 재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거세파가 자해를 통해 시간을 동결하듯이 로고진은 살인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동결한다.


인간의 시간을 베고 찌르고 절단하는 도구로서의 칼은 로고진의 책상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나스따시야가 추천한 '고대 러시아의 역사'라는 역사책에 칼이 끼워져 있었다. 역사책이 기원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상징한다면, 칼은 역사의 흐름을 단절하는 동시에 역사의 페이지를 여는 기능을 한다. 칼로 인해 열려서 읽힌 역사의 텍스트는 의미로 충만하지만, 읽히지 않은 페이지, 열리지 않은 페이지는 무의미하다. 다른 한편으로 페이지를 가르는 데 사용되는 칼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해석, 그 칼을 사용하는 로고진은 단순히 질투심에 사로잡힌 살인범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암흑의 힘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칼로 그려지는 살인의 테마는 그 궁극의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살해로 좁혀진다. 요한의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처형당한 구세주가 아닌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으로 표현한다. 나스따시야는 영명 축일날 신문에 보도된 마주린 살인 사건을 양에 빗대어 설명한다. "면도칼을 비단에 싸서 몰래 자기 친구의 뒤를 쫓아가 양을 자르듯이 그 친구를 난도질하는 세상이에요. 얼마 전에 내가 직접 신문에서 읽은 기사예요." 미쉬낀도 로고진에게 발라바노프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는 양을 죽이듯 단칼에 친구를 베어 버리고 그에게서 시계를 뺐었다네."라고 양의 비유를 사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묵시록적인 어린양의 이미지는 로고진의 칼에 찔려 사망하는 나스따시야 자신과 깊이 연관된다. 나스따시야의 성이 어린양에서 파생된 바라시니코바라는 사실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의도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살인으로 점철된 소설의 스토리 라인은 종막을 향해 질주하다가 결국 예고된 바 그대로 어린양-여주인공 살인으로 귀착하면서 그동안 서사 속에 누적된 그리스도 처형의 테마를 완벽하게 활성화한다. 


칼의 이미지는 살인, 시간과 함께 삼각형 모티프를 이룬다. 결국 이 삼각형의 궁극적인 의미는 묵시록적인 영원한 현재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도스토옙스키는 지나간 과거도, 오지 않은 미래도 없는 유일한 시간으로서의 영원을 생각했다. 신이 곧 영원이다. 아니 오로지 신만이 영원이다. 인간은 오로지 신과 함께할 때만 영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시간은 신 속에서 정지한다. 도스토옙스키에게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순간과 영원은 같은 것이다. 


(3) 그림

도스토옙스키에게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교리도 성경도 윤리도 삼위일체도 아니고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되신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즉 강생(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신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였기에 자신의 신앙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강생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강생의 원리, 즉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현현하는 현상, 의미의 육화, 정신적인 것의 물화, n차원의 3차원화를 작품 구성의 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백치'는 강생의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강생의 살아 있는 증거로서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다. '백치'가 실패한 소설이라 믿는 자들에게 주인공 미쉬낀은 강생 하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으므로 실패한 그리스도로 불린다. 그러나 실패한 그리스도가 저자의 의도라면, 즉 저자의 구상 속에서 주인공이 그리스도와 비슷하지만 결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존재라면 그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주인공이 되는 셈이다. 


손 글씨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집착에 가까운 애정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의식주와 관련하여 검소한 삶으로 일관했지만, 필기구와 문구는 최고급 제품만을 고집했다. 그는 소설을 쓸 때 두껍고 고급스러운 재질에 줄이 너무 뚜렷하지는 않게 인쇄된 원고지만을 사용했다. 펜도 가늘고 견고한 제품만을 요구했으며 종이 사이즈는 반드시 21x17 센티미터여야만 했다. 잉크로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글쓴이의 보이지 않는 사상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즉 육화 된 정신의 일부인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필체에 대한 연구와는 별도로, 서예에 대한 그의 생각이 강생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예가 그리스어로 '아름다운/선한 글쓰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공작의 서예는 바로 그 아름답고 선한 것의 가시적 현현과 다름없다. 아름답고 선한 글씨를 쓰는 공작은 아름다움과 선의 합일을 추구한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의 대변자인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백치'를 저술할 무렵 사진술은 이미 어느 정도 유럽 문화에 정착한, 이를테면 중견 기술이었다. 나스따시야의 사진은 사물의 대량 복제와 무한 유통이 가능해진 세상에 대한, 즉 '백치'가 그리고자 하는 페테르부르크의 물신 숭배적 분위기에 대한 은유이다. 그러나 미쉬낀은 그 사진에서 어마어마한 아름다움과 어마어마한 고통을 함께 읽어 낸다. 


절세미인의 사진에서 남들이 볼 수 없는 고통을 볼 수 있는 미쉬낀의 능력은 연민을 느낄 수 있는 능력으로 치환되다가 결국 윤리적 책임으로 발전한다. 그러한 발전 과정은 레비나스의 이른바 얼굴 철학과 연계될 때 그 복잡한 의미가 드러난다. 레비나스 자신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시피 그의 철학의 근본은 도스토옙스키이다. 그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규정하면서 도스토옙스키의 타자 지향성을 윤리학의 한가운데에 심어 놓는다. 그에게 타자는 무엇보다도 얼굴로 표상된다. 얼굴에서 우리는 인간의 기본적인 인간성을 보고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근본적인 권리를 보기 때문이다. 얼굴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육신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가 바젤에서 홀바인의 그리스도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전에 카람진의 책 '러시아 여행자 서한'에서 카람진의 눈으로 그려진 그 그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뽈리뜨의 꿈에 등장하는 괴물은 이 세상에 그 형태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하게 한다. 이뽈리뜨가 묘사하는 파충류는 소돔의 이상, 악의 이상이자 로고진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 주는 '이미지 없는 이미지'이다.


홀바인의 죽은 그리스도에게서 이뽈리뜨가 발견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닌 죽음의 공허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이뽈리뜨가 홀바인의 그림을 보고 말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이 그림을 보면 자연은 거대하고 무자비한, 어느 말 못 하는 짐승처럼 비치기도 한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정확히 표현한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 그림 속에서 자연이란 위대하고 귀중하기 짝이 없는 창조물을 닥치는 대로 포획하고 무감각하게 분쇄해 마구 삼켜 버리는 엄청나게 큰 첨단 기계처럼 보인다." 석영중 교수는 바로 이 대목에서 사실상 소설의 모든 내용과 모든 이미지와 모든 철학적 사유가 하나로 수렴한다고 포착해 낸다. 이 단어, '거대한 첨단 기계'를 향해 앞에 나왔던 모든 이미지와 서사적 내용이 미친 듯이 달려와 한꺼번에 폭발하며 합쳐지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기차는 '기계'로 지칭되었고, 칼 (기요틴) 역시 '기계'로 지칭되었다. 그리고 이제 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홀바인의 그림을 휘어잡고 있는 압도적인 죽음 역시 '기계'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 책의 세 가지 중심 이미지인 철도, 칼, 그림은 이로써 하나의 거대한 무생물적 이미지인 '기계'로 통합된다.


요컨대 철도와 사업과 돈은 도스토옙스키의 어휘론에서 동의어이다. 다시 말해서 철도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체하는 돈, 사업, 성공, 금융 등의 의미를 함축한다. 또 로고진의 칼과 기요틴의 작두 날로 대변되는 기계 장치는 살인과 종말의 의미론을 활성화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고한다. 홀바인의 그림 속에 깔려 있는 '거대한 첨단 기계'로서의 죽음은 그 확정적인 힘으로 인해 그리스도 부활 가능성에 결정적인 대못을 박는다. 결국 이 책의 세 가지 이미지, 철도, 칼, 그림은 그리스도의 대체, 그리스도의 살해, 그리스도의 부활 가능성이라고 하는 신학적 차원에서의 의미론으로 귀결하는 것이다. 


석영중 교수는 나스따시야 시체에서 맴도는 한 마리 파리야말로 오로지 천재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궁극의 디테일이라 말한다. 살아서 윙윙거리는 파리는 나스따시야의 시신이 홀바인의 그림처럼 시간 속에 고정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녀의 맨발은 대리석 조각상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로고진이 그녀를 살해한 것은 바로 그러한 조각상의 테두리 안에 그녀를 영원히 가두어 두려는 탐욕에서였지만, 현실 속에서 그녀의 시신은 자연의 법칙에 종속된다. 


나가며


'백치'라는 작품을 두 번 읽고, 그것을 강의한 석영중 교수님의 강의가 담긴 책도 두 번 읽었건만, 아직도 나는 여전히 모호한 기분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문학도 수준을 조금은 더 확장시킨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내가 생물학이 아니라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고등학생 때 유일하게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과목이 '문학'이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렵지만, 재미있다.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백치'를 언젠간 다시 한번 더 읽어야 한다는 운명을 느끼게 된다.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9.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1849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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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길을 물었다 - 뉴욕식물원 가드너의 식물과 영성 이야기
이성희 지음 / 선율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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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하나님 나라


이성희 저,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를 읽고


이상한 일이다. 한 정원사의 글이 늘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하나님 나라를 재현해 냈다. 마치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내게도 일어난 것 같았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8)." 정원사의 언어가 과학자인 내 귀에 들렸고,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11)." 


저자가 내게 쓴 글귀가 떠올랐다. "자신의 언어로 복음을 담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별다른 통역 없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한 것이다. 그는 정원사이고 나는 과학자이지만, 그래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우리의 공통분모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그 기저에는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기치 못한 순간, 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에게 감사한다.


책을 읽고 동경이 하나 생겼다. 천이를 거쳐 마침내 다다른 극상림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것. 오랜 세월을 통해 최적의 생태적 안정성에 다다른 숲. 다양한 식물들이 햇빛과 공간을 나눠 쓰기에 가장 최적화된 모습으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정원. 숲 자체만 아름답게 빛나는 게 아니라 공기를 정화하고 가뭄과 홍수를 예방하는 기능까지 완벽히 해 내는 그곳. 이러한 '숲 정원'을 머릿속에 그리자 지체 없이 하나님 나라가 떠올랐던 것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천이'란 다양한 식물들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한 지역의 식생이 안정화되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 기나긴 여정이 다다르는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띤다고 한다. 


"이 숲은 전형적인 층위 구조를 보인다. 층위 구조란 성숙한 숲에서 나타나는 수목의 크기에 따른 계층 구조인데 가장 높은 곳에는 느릅나무, 참나무류, 백합나무 등 20-30미터에 이르는 교목들이 숲의 윤곽을 형성하고, 그 아래 그늘진 곳에는 생강나무, 단풍나무, 산딸나무 등 3-7미터 높이의 소교목 또는 아교목이 자리를 잡는다. 지면과 가까운 곳에는 진달래 등 2미터 이내의 관목들이 무성하고 맨 아래는 각종 지피식물들이 담요처럼 흙을 덮는다. (p120)"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인용구가 나에겐 하나님 나라를 생각나게 했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는 그곳 (사11:6). 동물의 왕 사자가 가장 나약한 짐승 중 하나인 어린양을 잡아먹지 않고 함께 뛰노는 그곳. 강한 자와 약한 자, 혹은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구분이 없는 그곳. 이미와 아직 사이인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를 가진 자, 귀신 들린 자, 억눌린 자들이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한 채 함께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눈물 없는 그곳. 그곳은 곧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덤덤히 묘사한 천이를 거친 극상림이 이런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내겐 너무도 닮아 보였던 것이다.


생물학을 전공한 내가 그리는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성이 아름다움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수가 열 개가 아닌 사람들, 입술이나 입천장이 갈라진 채 태어나 평생 그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 다운증후군을 비롯하여 여러 증후군을 가진 채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 그리고 성소수자와 성정체성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개별적인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꽃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곳 말이다. 


나는 창조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생명체들을 연구하는, 생명체들을 섬기는 각 사람의 언어로 복음을 담아 그것을 글로, 그림으로, 혹은 음악으로 다채롭게 표현하는 그날을 꿈꾼다. 그곳이야말로 하나님 백성들로 구성된 극상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극상림이 지금, 여기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이 되기를 책을 덮고 기도했다.


저자는 열두 가지 정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환대의 정원부터 시작해서 겨울 정원까지 이르는 여정은 저자가 미국으로 건너가 정원사로 거듭나기까지의 수년의 세월과 자연주의 정원사가 되어 현재까지 누리고 있는 수년의 세월을 아우른다. 정원사로서 정원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연한 언어가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귀에 들려지고 이해될 수 있게 글을 써낸다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개별적인 한 사람, 혹은 개별적인 한 직업의 언어에 갇히지 않고 그 아래에 뿌리처럼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과하지 않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며, 이는 곧 그 글을 쓴 저자가 성령께 잡힌 바 된 사람이라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신만의 언어로 노래하며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아 전달하는 이 아름다운 과업을 저자는 훌륭히 해 내고 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자만심에 가득한 건축도, 단단하게 막혀 있는 건축도 넉넉하게 다 담아내는 자연주의 정원, 그 환대의 정원에서 나는 자연을 닮은 정원이 갖는 강력한 포용과 조화의 힘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화려한 꽃 잔치가 끝난 6월의 어느 날, 아젤리아 가든에 서서 나도 저자처럼 수수한 수국의 매력을 마음껏 그러나 조용히 느껴보고 싶어졌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빛나는 나의 내면을 비춰보고 싶어졌다. 식물원 방문객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는 9월 말부터 열리는 국화 축제에도 참여해 보고 싶어졌다. 소유하기보다 공유하고 나누는 정원에 앉아 그 일상의 시공간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과거의 기억을 머금고 있는 어떤 것을 기념하는 정원에도 가 보고 싶어졌다. 그곳을 디자인한 정원사의 의도를 이해하고 타자와 세상을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워지는 정원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담아내고 싶어졌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정원의 식물을 통해 느껴보고 싶어졌다. 한 포기 국화에서 천 송이 꽃이 나오게 하는 예술의 극치도 보고 싶고, 숨 가쁘게 이어지는 꽃 잔치의 절정인 6월의 장미를 땡볕에서 마주해 보고도 싶지만, 그것보다 나는 몸을 숙이고 자세를 낮추어 경건한 마음으로 흙을 덮고 바위를 덮은 이끼들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그곳에서 예수의 마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이끼와 고사리가 낀 숲 정원에서 사람들이 오래 머물게 되는 이유를 나는 왠지 알 것만 같다.


덧붙여 나는 저자가 계획한 프로젝트 R을 마음 담아 응원하게 된다. 황폐한 땅을 회복하여 아름다운 숲으로 복원하는 그 계획은 황폐한 이 땅을 복음으로 회복시키는 선교와 닮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흥 Revival, 회복 Restoration, 견고함 Resilience, 화해 Reconciliation가 저자와 저자가 몸담은 정원을 통해서 일어나길 소망한다.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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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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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 그리고 상실


파스칼 키냐르 저,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고


10월의 첫 아침을 맞이하며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날씨는 흐리고 곧 비가 올 것만 같다. 나는 밑줄 그은 문장을 노트에 옮겼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p112)"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문득 지금 이 순간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하루의 시작에 늘 아침이 있었건만, 그 반복되는 무수한 아침 가운데 똑같은 아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마치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감동에 젖는다. 영원한 것도 없지만 똑같은 것도 없다. 


이 책은 내게 두 가지 숙제를 남겼다. 하나는 '예술가의 삶에 대한 숙고'이고, 다른 하나는 '상실에 대한 사색'이다. 두 가지 다 잘해 낼 자신이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장에 꽂아 두기엔 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조금이라도 끄적거려볼까 한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본업인 과학도 어떤 면에서는 예술과 연결이 된다고 믿는다.


첫 번째 숙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한 적이 있다. 의외로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 (특히 소설가들)이 예술 작품에 일가견이 있거나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모든 예술은 결국 통한다'는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글, 그림, 곡은 각각 문학, 미술, 음악의 언어로써 예술가가 관찰한 것, 성찰한 것, 혹은 통찰한 것을 표현해 낸다. 언어만 다를 뿐 결국 예술가의 내면과 그 내면을 통과하고 정제된 비가시적인 것들을 우리가 읽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감각적인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과업이 바로 예술가의 삶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표현만으로 예술가의 삶은 만족되지 않는다. '깊이'라는, 쉽게 말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하지만 모든 예술가들이 궁극적으로 천착하게 되는, 그 무엇이 반드시 맞닥뜨리고 혹은 극복해야만 하는, 그러나 영원히 도달할 수 없고 항상 미끄러질 뿐인 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가들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도 한다. 또 어떤 예술가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모든 것에서 단절시키고 소외시키기도 한다. 극단적인 노력 끝에 '깊이'라는 그 무엇에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업은 영원히 불가능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깊이'의 심연은 아무도 가본 적도 닿은 적도 없기 때문이며, 깊이는 더한 깊이를 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미끄러짐을 예술가의 숙명으로 본다. 정도만 다를 뿐 예술가라면 누구나 이 도상에 서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네 인물, 즉 생트 콜롱브, 마랭 마레, 마들렌, 투아네트는 모두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한다. 마들렌과 투아네트는 생트 콜롱브의 두 딸이자 제자로 등장하며, 마랭 마레는 생트 콜롱브의 제자였는데 사회적인 성공을 위해 속세로 돌아갔다가 나이가 들어 음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다시 스승을 찾아오는 인물로 그려진다. 생트 콜롱브는 은둔형 음악가다. 비올라 다 감바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이나 그는 화려한 궁정이 아닌 자신의 보잘것없는 시골집에 기거하며 음악에 몰두한다. 그에게 돈과 명예는 음악가에게 외계어 같은 것이었다. 마랭 마레가 자기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를 다시 받아준 이유가 담긴 대화의 일부에서 그가 남달리 정의하는 음악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p118)"


음악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대화를 하다가 생트 콜롱브를 흡족하게 만든 마랭 마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p120)"


그리고 생트 콜롱브는 마지막으로 마랭 마레에게 그동안 가르쳐주지 않았던 '눈물들'과 '카론의 배', '회한의 무덤' 전체를 들려주기로 한다. 마침내 마랭 마레가 그 곡들을 들을 만한 귀를 가진 자로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생트 콜롱브가 까칠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예술가 중에서도 부와 명예를 위해 예술을 했던 중간 단계의 마랭 마레 같은 사람들에게도 생트 콜롱브는 까칠하고 극단적인 음악가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언어를 빌려 생트 콜롱브를 표현하고 싶다. 그는 '백치'와 같은 예술가 (음악가)였다고. 


상실에 대한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첫 문장을 가져올 필요가 있다.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이 죽었다."


상실을 공연히 선포하는 저 문장은 '백치'와 같은 음악가 생트 콜롱브를 정의하는 상자 역할도 충실히 해낸다. 그는 아내의 죽음이 사무쳤고, 집 안에 틀어박혔으며, 음악에만 몰두했다. 아내가 죽고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연습할 정도로 말이다. 생트 콜롱브는 비올라 다 감바를 양 무릎 사이에 놓고 연주하는 방식을 찾아냈고, 훨씬 더 무게감 있고 훨씬 더 우울한 톤을 만들기 위해 악기에 저음의 현을 하나 덧붙이기도 했으며, 손의 무게감을 덜어주고 검지와 중지만 사용해 말총 활 위에 살짝만 힘을 실어주는 활 기법도 고안해 냈다. 그가 비로소 젊은 여인의 탄식에서부터 중년 남성의 오열까지, 전장에서의 외침부터 그림 그리는 데 열중하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숨소리까지,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거친 헐떡임부터 기도에 몰입한 한 남자의 장식음 거의 없는, 무음에 가까운 저음까지, 인간 목소리의 모든 굴곡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그 발단에 아내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실이 만들어낸 창조. 바로 생트 콜롱브가 이루어낸 과업이었다.


그는 매일 상실을 맞이했다.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그의 삶은 그 위에 세워지고 있었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도, 환각으로 찾아오는 아내를 대면하는 것도 그에겐 상실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바로 그 상실 속에서 그는 음악을 했고 음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재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세로부터 스스로를 더 단절시키고 소외시켰다. 


상실은 힘이 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겐 분노가, 누군가에겐 성공욕이, 또 누군가에겐 상실이 목표를 이루게 하는 동력이 된다. 물론 생트 콜롱브의 목표는 부와 명예 혹은 권력 같은 사회적인 성공과는 반대 방향에 있었다. 음악의 본질, 음악의 근원을 찾아 그는 평생을 헤맸던 것 같다. 오로지 상실의 힘을 의지해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건 생트 콜롱브에게도 진실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한 번의 상실이 그에게는 매일 새로운 상실로 갱신되었다.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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