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중요하다 - 거룩하게, 가치 있게, 슬기롭게
폴 스티븐스.클라이브 림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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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인가, 하나님인가?




폴 스티븐스, 클라이브 림 공저, ‘돈은 중요하다’를 읽고




돈은 신이 아니지만 신과 같은 지위와 능력을 가진다.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대부분의 문제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돈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넘어 마치 구원자의 자리까지 꿰찬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오늘날 현실이다. 




월터 윙크는 그의 탁월한 저서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진짜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폭력’ 임을 간파해내며 사람들 인식 저변에 깔린 ‘구원하는 폭력에 대한 신화’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구원이 마치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막강한 힘 (이라 쓰고 무력, 폭력, 권력이라 읽는다)에 달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폭력의 신적인 힘을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이란 이름의 종교가 가져온 구원의 열매는 무엇인가. 전쟁 결과 나타난 표면적인 결과는 평화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폭력으로 이룩한 평화라니.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을 사용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니. 그렇다. 오늘날 초강대국이자 세계 경찰국가인 미국의 성공은 폭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룩한 세계평화로 인해 그들이 취한 이득은 다름 아닌 경제력이다. 미국의 성공은 군사력뿐만이 아닌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며, 이 두 힘은 서로가 서로를 증폭시키고 견고히 한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이 된다. 폭력과 돈은 소규모 조직폭력배에서부터 초강대국 미국에 이르기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구원하는 폭력’에 이은 ‘구원하는 돈’이라는 신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둘은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최종 심급은 자본이라고 했던가. 권력과 자본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욕망하는 궁극의 힘인 듯해 보인다.




이렇듯 신적인 자리에 오른 돈이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기독교와 만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에 대해선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함축적인 문장으로 표현 가능하다. “두 신, 돈과 하나님 중 어느 신을 섬겨야 하는가?” 이 질문은 비단 비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타의 공인을 받은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살 수는 있어도 돈의 능력을 믿지 않고는 살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셀 수 있는 돈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지만 돈은 믿지 않는다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돈을 벌고 사용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이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돈은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취급되어야 하는 걸까.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 듯한 이 책은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돈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돈은 어디서 왔는지, 기독교인이 돈과 맺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일터 신학자로 잘 알려진 폴 스티븐스와 립 인터내셔널 CEO이자 폴과 같이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에 소속된 클라이브 림이 같이 쓴 책이다. 두 저자는 각각 서양과 동양, 그리고 유복하게 자란 사람과 가난하게 자란 사람을 대변한다. 1, 2 장에서 짤막하게 소개하는 두 개인사를 읽고 나면, 상이한 문화 혹은 상이한 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돈은 인생의 목표이자 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문젯거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3장에서는 폴과 클라이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돈의 정체를 물으며 그것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돈은 물물교환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하는 인류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돈은 처음부터 중립적이기는커녕 종교적, 영적, 정치적인 맥락에서 탄생했으며 성전에서 하나님께만 드려지도록 구별된 존재였다. 돈은 원래부터 거룩한 속성을 띠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참이라면, 오늘날 돈은 에덴동산에 지어진 처음 인간이 그러했듯 과거 어느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저자는 성경에 따르면, 구약 시대에 언급되는 부는 대부분 복으로 제시되는 반면, 신약 시대의 부는 상대적으로 문젯거리로 더 많이 다루어진다고 밝힌다. 시대가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일어난 돈의 타락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돈은 이미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타락의 부작용은 성속 이원론으로 이어졌다.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난해한 이유는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돈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고 속되었으니 절대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되는 걸까. 세금만 황제에게 내고 십일조와 기타 헌금만 하나님께 드리면 되는 걸까. 저자는 이 말씀이 구약이나 그리스 철학, 혹은 동서양의 문화 차이 등에 기반한 성속 이원론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타파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앙과 삶의 철저한 통합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다. 성경은 돈이 물질적 은혜와 영적 은혜를 하나로 묶고, 물질적 영역과 영적 영역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황제는 분리되지도, 하나로 합쳐지지도 않지만, 돈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의 기원에 거룩함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4장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다.




5장에서는 돈보다 더 큰 개념인 자본을 언급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간략히 살펴보면서 그것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고찰하고, 그것의 한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오늘날 가장 큰 하나의 종교로 등극한 듯한 자본주의는 세상 모든 사람이 들이마시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좋든 싫든 우리들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잘하기 위해, 저자는 자끄 엘룰의 주장을 빌려와 개인적 성찰을 통해 돈을 늘 그에 합당한 자리에 두고, 돈을 다루는 것과 관련해서 일관성 있게 행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금은 두루뭉술한 마무리지만, 엘룰의 주장은 이 책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저자 역시 자본주의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성속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 6장에서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돈의 구속 가능성을 보여준다. 착한 주인과 불의한 청지기의 대립 구도로 흔히 알려진 이 난해한 비유에 저자는 전복적인 해석을 가한다.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 사회에서 고리대금업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악한 사람은 청지기가 아니라 오히려 남들에게 돈을 빌려준 뒤 높은 이자를 받아내며 이득을 취했던 주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되면 채무자들이 내야 할 돈을 깎아주었던 청지기는 악한 주인이 행한 불의를 바로잡은 용기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 전복적인 해석은 곧바로 이어지는 누가복음 16장 9절의 예수님의 말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를  한결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돈을 써서 우정을 사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돈을 써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 백성들이 어떻게 돈을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힌트가 된다.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에 천착하고 그것을 숭배하게 되면 모든 것이 물질화, 상품화, 비인격화되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돈을 소유하고자 했던 욕망의 끝엔 돈의 소유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다. 저자는 7장에서 이러한 돈의 사회적 가치와, 돈이 각기 다른 맥락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8장에서 다시 청지기 개념을 주목한다. 6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8장의 소제목 “결국 누구의 돈인가?”는 저자의 결론과 맞닿아 있다. 그 결론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주인이시다. 즉, 돈의 주인도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청지기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맡김 받은 존재다. 셋째,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인은 돈을 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웃을 돕기 위해 돈을 사용해야 한다. 의무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감사에 의해서. 그리고 저자는 청지기 역할은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제자도의 온도계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의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며, 어려운 이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이분법으로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나눔과 구제와 기부 등 일련의 행위로 구성되는 사랑의 실질적 표현일 것이다.




9장에서 저자는 번영신학의 기원과 폐단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번영신학은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짐은 물론이며, 물욕과 자기애를 거짓 거룩함과 거짓 사랑으로 포장하여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열망을 낙관주의, 출세, 물질주의, 웰빙과 결합시켜 만들어낸 빛살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거기엔 돈만 있을 뿐 예수님은 없다. 구원하는 돈의 신화만 있을 뿐 구원자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없다. 그리고 ‘나’만 있을 뿐 타자는 없다. 이 시대 기독교의 위태로운 입지 역시 번영신학의 여파라고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이고, 어쩌면 이는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번영신학에 천착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돈을 신으로 받드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여기서 해방받아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10장에서 저자는 이 책의 결론에 다다른다. 예수님은 영원히 지속되는 부를 묘사하면서 두 가지 수수께끼 같은 표현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 그리고 ‘하늘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두는 것.’ 예수님이 조금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며 저자는 하늘에 투자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우리의 양심, 즉 통일된 시각을 갖는 것. 이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전부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써, 즉 우리 육신의 삶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림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도를 든다. 둘째, 하나님 나라 세계관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방식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융합시키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즉, 성속 이원론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하늘에 투자하기 위해 행할 수 있는 네 가지 구속적 행동을 언급한다. 첫째, 돈을 관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즉, 나눔이다. 둘째, 가난한 이들을 도움으로써. 즉, 자선과 구제다. 셋째, 주님을 위해 주님 안에서 행한 일을 통해. 이는 성속 구분을 떠나 행하는 모든 돕는 일과 관리하는 일을 지칭한다. 넷째, 이 생애에서 그리고 다음 생애에는 더욱, 우리의 궁극적인 보물은 그리스도다. 바울도 고백했듯 우리의 가장 큰 재산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누리라는 말이다. 책의 마지막 단락에서 저자는 “나는 여러분의 삶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투자하라고 여러분을 초대한다”라고 말하면서 책을 마친다. 




저자도 책에서 썼듯이, 돈에 관련된 이야기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목장이나 구역 모임, 혹은 개인 간에서도) 들어보기 힘들다. 책에 써진 바에 따르면, 서양의 경우 서로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어도 수입과 지출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돈에 관련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비밀스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밀스러움은 돈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책의 제목은 ‘돈은 중요하다’이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인 이 문장이 제목으로 충분히 채택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러한 암묵적인 비밀스러움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중요하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라고 말해야 할지 순간 갈등을 거치게 되는 그리스도인이 많으리라 예상한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암암리에 돈을 섬기고 있진 않은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때다. 그리고 저자의 바람대로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돈을 포함하여 우리 모든 것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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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녕 - 눈물 나고 실수 많은 날들에게
김주련 지음 / 선율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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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처럼 다가온 위로와 격려

김주련 저, ‘안녕, 안녕’을 읽고

“안녕”으로 시작해서 “같이 밥 먹어요, 우리”로 끝나는 책. ‘어서 와, 여기 네 자리가 있어’라고 말하는가 하면, ‘말없이 들어주는 말들’로 읽는 이를 가만히 안아주는 책. 아무 걱정 없다며 허세 부리지 않고 ‘걱정이 있지만, 지낼만해’라고 말하면서 읽는 이가 주눅 들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책. 이밖에도 제목만 읽어도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는 열다섯 꼭지의 짧은 이야기가 그림책만이 할 수 있는 여백의 힘을 빌려 가볍고도 묵직하게 독자의 마음에 가 닿는다. 특히 시와 에세이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한 글을 좀처럼 당해내지 못하는 나에게 이 책은 습기를 많이 먹어 무거워진 마음 빨래를 보송보송하게 말려주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미풍처럼 다가왔다. 한국 와서 처음으로 동네서점에서 구입한 책이라 그런 걸까. 출판사와 서점 주인장뿐 아니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저자의 마음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고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열매 가운데에는 지식과 정보도 있지만 위로와 격려도 큰 몫을 차지한다. 지식과 정보는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위로와 격려는 다르다. 전문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일방적으로 전달될 수도 없다. 위로와 격려는 대화와 공감이라는 깊은 우물로부터 길어 올린 소중한 열매이며, 오직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자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귀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받은 선물도 바로 ‘위로와 격려’였다. 가깝게는 이 책 저자로부터, 멀게는 이 책에 소개되는 여러 그림책 저자들로부터, 그리고 모든 거리와 시간을 감싸며 초월하시는 그분으로부터 나는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성서유니온 대표이자 이 책의 저자 김주련은 자칫 텍스트가 가질 수 있는 폭력성과 빡빡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책이 가지는 위압감을 잘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슴에 한 아름 안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림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도구로 다른 저자들의 글을 활용하는데, 그 글은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어른들의 책이 아니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진 그림책이다. 글이 아닌 그림, 텍스트 사이의 여백이 아닌 그림 안에 깃든 풍성한 여백이 이 책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다. 지식과 정보가 아닌 상상력과 경이감이 함께 어우러진 그림책만의 여백이 뜻밖의 위로와 격려를 전달한다. 여러 그림책의 메시지들이 모여 저자만의 묵상, 사유, 경험, 기도를 통과하며 비로소 숙성된 글 모음집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 책에 소개된 그림책 리스트가 나와있다. 세어 보니 마흔넷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마흔네 권의 그림책을 도서관에 가서 하나씩 다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바쁘고 피곤한 현대인의 일상 속에 미풍처럼 스며든 이 책이 모든 독자들 마음에 가 닿아 평안의 통로가 되면 좋겠다.

#선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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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만세! -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읽기 석학인문강좌 86
석영중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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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석영중 저, ‘인간 만세’를 읽고


일부러 읽지 않았다. 비록 어설프고 부족할지라도 내 방식대로 해석한 작가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내 책에 그대로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도스토옙스키 전문가로 공인된 석영중 교수의 밀도 높은 해석 (바로 이 책, ‘인간 만세’를 말한다)을 미리 읽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내 책을 쓸 때 그 해석을 그대로 흉내 내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나는 내 책을 영원히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안도와 함께 그때의 결정이 잘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마추어인 나의 해석이 프로 중 프로인 석영중 교수의 해석과 비교해서 덜 자세하고 덜 풍성할 뿐, 커다란 줄기와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석영중 교수가 나 같은 한낱 무명작가가 쓴 책에 선뜻 추천사를 써주겠다고 하신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주지 않을까 한다. 나는 그때의 심정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메일로 추천서를 보내시기 직전, 석영중 교수는 먼저 출판사에 직접 전화해서 저자가 한국에 있다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하셨고, 어려운 작업을 거쳐 의미 있는 책을 내주셔서 고맙다고 하셨다. 마침 우리의 책이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에 맞추어 출간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마침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출간했던 열린책들을 통해 200주년을 기념하여 두 권의 해설집을 출간한 장본인이 바로 석영중 교수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직접 경험한 대가의 겸손함 앞에서 나와 출판사 대표는 깊은 감동을 느꼈고 더욱 겸손한 자신감을 갖고 책 출간에 임할 수 있었다. 참고로, 석영중 교수의 추천사를 다시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책 ‘닮은 듯 다른 우리’가 출간되어 기쁘고 반갑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세포생물학, 분자생물학, 유전학의 코드로 읽는 동시에 대문호의 인문학적 깊이로 생물학의 본질을 천착하는 신선하고 도전적인 책이다. 친절한 설명 덕분에 술술 읽히지만 인간다움의 심연을 응시하는 저자의 혜안이 예사롭지 않다. 문학과 생물학의 융합이라는 개척지에서 저자가 던지는 질문이 새삼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 

- 석영중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나의 두 번째 저서, ‘닮은 듯 다른 우리’는 교양서적으로써 기본적으로는 생물학 (주로 분자생물학, 세포생물학, 그리고 유전학)을 고등학생 이상의 독자에게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대중 과학서다. 이미 시중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책들이 많다. 아쉽게도 그것들은 모두 교과서 방식을 따른다. 겉으론 비록 다양한 모습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결국 ‘쉬운 교과서’ 형태를 띤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에 반해 ‘닮은 듯 다른 우리’는 스토리텔링 방식을 따른다. 그리고 그 스토리텔링 방식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혈연관계에 깃든 유전적인 의미를 문학적인 의미와 함께 고찰하는 형태를 띤다. 교과서를 재미있게, 그것도 소설 읽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닮은 듯 다른 우리’는 생물학과 문학의 의외의 콜라보를 만끽하며 흥미진진하게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 아닌가 한다. 저자로서도 나는 2021년 세종 도서로 선정된 나의 첫 번째 저서 (‘과학자의 신앙공부’)보다 이 두 번째 저서 (‘닮은 듯 다른 우리’)에 애착이 많이 간다. 코로나로 인해 상대적으로 홍보가 잘 되지 않아 출간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 기회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알려지고 읽히면 좋겠다. 


‘닮은 듯 다른 우리’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책을 읽고 싶어 지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책이다. 혹시라도 저 유명한 도스토옙스키의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으려는 계획을 가슴 한 편에 여전히 갖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주저 없이 ‘닮은 듯 다른 우리’를 먼저 읽으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대작을 읽기 위한 워밍업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끝까지 낙오하지 않고 읽어내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리라 확신한다. 참고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끝까지 읽기 위한 꿀팁은 등장인물들의 개성과 그들의 세계관, 그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카라마조프 가에 흐르는 공통된 그 무엇 (결국 인간 전체로 해석될)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점을 ‘닮은 듯 다른 우리’가 생물학적인 의미와 더불어 더욱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인간 만세’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한 해제다. 해제만으로 약 250 페이지에 해당하는 한 권의 책이 되었으니 이 책이 가진 성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책은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장편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책이다. 이 책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읽기”라는 부제가 말해 주듯 소설을 구성하는 12개의 장과 에필로그를 차례차례, 차근차근 읽고 대문호가 생각했던 인간의 본질,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가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있다. |

석영중 저, ‘인간 만세’ 9페이지에서 선택 발췌


위에 발췌한 두 문장에서 강조점을 두어야 할 단어는 ‘꼼꼼하게’, ‘차례차례’, ‘차근차근’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 이 책은 친절하면서도 농밀한 해설서인 것이다. 즉, 이 책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기 전에 읽는 책이라기보다는 읽고 난 이후에 읽으며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을 전문가의 세세한 도움으로 뒤늦게나마 이해하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두 번 읽은 나에게는 이 책이 가진 의미와 무게가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워낙 대작이다 보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주제로 한 전문가들의 논문이 이 세상엔 즐비한 줄 안다. 하지만 나 같은 일반인이 읽을 만한 글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의 진가는 더욱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나서 곧바로 집어 들어야 할 책으로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닮은 듯 다른 우리’를 애피타이저로 가장 먼저 읽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앙뜨레로 읽은 후, ‘인간 만세’를 디저트로 마무리 지으면 완벽하지 않을까 싶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한 나의 해석을 석영중 교수의 해석에 비한다면 살을 거의 다 발려낸 뼈다귀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 문학, 그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전문가로 수십 년 학계에서 연구, 강의, 집필, 번역 활동을 해오신 석영중 교수의 해석을 나 같은 아마추어 문학도의 주먹구구식 해석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내 해석이 오롯이 들어간 책을 출간했던 저자로서 나는 아무리 살이 많이 발려져 있어도 내 해석이 적어도 같은 개체의 뼈라는 사실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책을 단시간에 읽어내며 나는 역시 대가의 해석은 다르구나, 역시 깊고 풍성하구나, 하면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한 번 더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었고, 또 한 번 더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기도 했다. 현재 계획하고 있는 ‘재독 프로젝트’에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아마도 가장 먼저 테이프를 끊지 않을까 한다. 아들의 겨울방학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나도 그때 휴가를 내어 다시금 대작의 깊이와 풍성함을 조금은 더 깊고 풍성한 눈으로 맛볼 수 있길 기대한다.

#세창출판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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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배경린 옮김, 조혜령 감수 / 펜연필독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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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과 정원, 일상과 그리움




카렐 차페크 저,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읽고




저는 과학자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과학자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생물학자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무슨 연구를 하냐고 물어온다. 정확한 질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듯 엉뚱한 질문을 해오곤 한다. 경험상 그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뉜다. 첫째, 내가 의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질병이나 암 치료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 (전 사람이 아니라 생쥐로 실험한답니다! 수술하다가 실수해도 고소당하는 일은 없어용). 둘째, 내가 수의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자신이 기르는 애완동물의 건강관리에 대해 묻는 사람들 (개 품종과 이름에 대해서 내가 당연히 다 안다는 전제 하에 질문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저는 그쪽에 대해선 하나도 몰라용). 셋째, 내가 곤충채집가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고는 이 곤충 저 곤충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 (그래도 해충에 대해서 묻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마지막으로, 내가 정원가와 비슷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여러 식물에 대해 묻는 사람들 (어려운 학명에 대해 묻는 사람도 있었다! 저는 식물학자도 분류학자도 식물채집가도 아니랍니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나는 그들에게 다시 대답한다. “저는 동물모델로 생쥐를 이용하고 유전자 조작 기법을 동원해서 기초 생물학을 연구하는 실험 생물학자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아, 그러시군요, 라며 말꼬리를 흐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끝나곤 했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생물학자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였다. 지인들과 함께 길거리를 지나가다 여러 나무와 꽃들이 즐비할 상황이 주어지면 꼭 나에게 그것들의 이름을 묻는 이가 한 명 정도 있다. 그들은 마치 내가 당연히 모든 식물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나는 조금 피곤해지기도 하는데, 이번에 그들에게 권할 좋은 추천 자료를 알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다. 바로 이 작품이다. 그런 질문들은 생물학자가 아니라 정원가에게 해야 정확한 답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식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는 오로지 저자 때문이었다. 몇 달 전,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인상이 깊었고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었는데, 한 달 전 즈음 중고책으로 구입이 가능했던 것이다. 특별한 사건을 겪어내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보다 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차렐 차페크는 바로 그런 삶을 노래하는 작가다. 




나는 텃밭 철학자를 한 명 알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6년 동안 항상 곁에 있었던, 이제는 가족 같은 분이다. 캘리포니아를 떠나며 가장 아쉬웠던 부분 중 하나도 그분과의 이별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그분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토양의 중요성이 강조된 부분을 읽을 때, 그리고 가끔 아침 점심 저녁 남아도는 채소만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정원가의 일상을 읽을 때도 나는 그분으로부터 수차례 들었던 비슷한 맥락의 얘기가 떠올라 문득 그리운 마음이 일었다. 그 텃밭에서 난 온갖 신선한 채소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던 그때가 그립다. 생각보다 수확량이 많아 가족들이 다 못 먹으니 나눠먹자며 직접 상자와 비닐봉지에 넣어 그 채소들을 갖다 주시던 그분이 그립다. 텃밭을 일구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시고 그것을 승화시켜 이웃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주신 그분이 그립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에서는 정원가의 열두 달이 1월부터 12월 순으로 소개된다. 저자인 카렐 차페크는 정원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빠져들어가게 할 만큼 필력이 뛰어난 작가임이 틀림없다. 유머가 깃든 문장은 익살스러운 삽화와 함께  책을 읽는 내내 입가에 웃음을 짓게 만든다. 또한 이 작품은 정원 에세이라기보다는 인문 에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분류가 아닐까 싶다. 단순한 정원가의 삶만이 아닌 그 가운데 스며든 인문학적 혹은 철학적 관점이 작품의 곳곳에 빛나는 문장으로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나처럼 평범한 정원가의 일상을 읽으며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정원가의 일상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보편적인 속성을 많이 띠는 것 같다. 20세기 초 체코의 정원가와 한 세기 뒤인 현재 캘리포니아의 텃밭 철학자가 상당히 많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나는 캘리포니아 텃밭 철학자에게 이 체코의 정원가이자 소설가의 백 년 전 작품을 선물하고 싶다. 몇 달 전이었다면 당장 차를 몰고 가 읽어보라고 이 책을 덥석 주고 왔을 텐데… 아쉽다. 지나온 모든 순간들이 아쉽고 그리운 오늘이다.


#펜열필독약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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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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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시간과 공간을 만남으로 채우는

마쓰시에 마사시 저,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을 읽고

혼자 사는 삶이 우아하다고 말하는 사람 중 십중팔구는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지 않을까. 아무리 많이 가져도 언제나 갖지 못한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혼자일 때의 자유를 잘 알고 그것을 동경하는 마음을 여전히 가슴 한 편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 가운데서도 혼자 있는 시간을 반드시 찾아내고 또 사수하려고 애쓴다. 물론 혼자 사는 삶과 혼자 있는 시간은 엄연히 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삶은 내게 있어 더 이상 고려 대상이 아니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 나는 이 시간이 좋고, 이 시간이 주는 유익을 사랑한다. 읽고 쓰는 일도 모두 이 시간에 이뤄진다. 그러나 이런 내 삶이 우아한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작품 제목처럼 말이다.

주인공 오카다 다다시는 사십 대 남성이다. 최근에 이혼했고 대학생 아들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산다. 요컨대 오카다는 돌싱이다. 이 작품은 갑자기 비어버린 시간, 턱 하니 주어진, 그래서 감당하기 벅찬 자유 앞에서 주인공이 어떤 삶을 개척해 나가는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겠다.

시간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은 항상 함께 고려해야 한다. 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둘로 나누었을 뿐, 어쩌면 둘은 원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 있는 어떤 특정한 시간을 떠올려보라.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시간인가, 공간인가. 공간일 것이다. 공간이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자신만의 특정한 시간에 구속된 공간일 것이다. 

이 자명한 이치는 이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카다가 혼자 살 집을 구하게 되는 과정, 그 집을 리모델링하는 과정, 그리고 다시 그 집을 나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집 짓는 계획을 세우는 과정 순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주인공 오카다의 돌싱 1년차 삶을 이 작품은 공간의 변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공간의 이동 가운데 ‘가나’라는 옛 애인과의 재회가 주어지고, 그녀와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독자의 시선을 가로채지만, 그 과정 또한 공간 이동의 플롯을 충실히 따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오카다가 얻은 집에서 자전거로 십 분 거리에 우연찮게 가나가 살고 있었고, 작품의 마지막에서 오카다가 새로 지을 집 위치도 가나의 집 바로 옆에 위치한다. 새로운 시간의 흐름이 새로운 공간의 이동으로, 그리고 그 시공간은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가 볼 땐 우아하게 보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의 눈에는 그렇지 않게 보일 수 있는 삶.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 만남을 채워넣는 우리네 삶은 본래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삶이지 않겠는가.

저자인 마쓰이에 마사시의 작품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단번에 매혹되었던 나는 그의 모든 작품이 읽고 싶어졌고 곧장 실행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내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의 마쓰이에 마사시를 기대했던 건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그러나 보기 좋게 나는 같지만 다른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상대적인 분량이 짧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만난 마쓰이에 마사시는 조금 더 간결했고, 조금 더 절제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조금 더 유머스러웠다. 굳이 두 작품 사이의 공통점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여전히 식상한 주제, 혹은 뻔한 일상 이야기로 독자를 사로잡아 마지막 책장까지 끌고 가는 그의 힘이라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전작 읽기 작가로 마쓰이에 마사시를 정한 건 아무래도 잘한 선택 같다. 꼭 배우고 싶은 글쓰기를 그로부터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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