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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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그림이 남는 작품


나쓰메 소세키 저, ‘풀베개’를 읽고

한 작가의 작품을 짧은 기간 다섯 편이나 읽게 되면 문체랄까 사상이랄까 하는 그 작가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충분히 감지하게 되고 익숙해지는 게 보통이다. 심지어 도스토옙스키도 이 일반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집 읽기를 시도했던 헤세, 이시구로, 루이스도 내겐 마찬가지였다. 

처음 예외를 만났다. 바로 나쓰메 소세키다. ‘풀베개’로 그를 다섯 번째 만났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섯 번째 동명이인을 만난 듯한 기분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쓰메 소세키 전집 읽기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다섯의 동명이인 중에 나는 다섯 번째 나쓰메 소세키를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새로 구입할 작정이다. 문학작품을 수백 권 읽으니 이젠 어떤 책을 소장해야 할지 나만의 기준이 생기는 것 같다. 참고로 이 기준은 단순한 독자이기보단 작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독자로서의 기준이다.  

뭐랄까. 한 편의 시화 혹은 그림 속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다. 언뜻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것보단 동적이고 스케일이 크다. 헤르만 헤세의 ‘뉘른베르크 여행’ 느낌도 나지만, 그것보단 시적이고 풍류가 넘친다. 또한 이 작품보다 사십여 년 이후에 나온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정취도 물씬 풍긴다. 주인공이 일본의 한 시골 온천에 들른다는 점과 거기서 한 여자와 만나게 된다는 점이 닮았다. 이렇다 할 줄거리 없이 서사보단 묘사 위주로 된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도 닮았다. 특히 자연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반영된 작가 내면의 투영, 그리고 관조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잘 유지되는 객관적 거리는 내가 이 책을 소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주었다.

‘풀베개’란 제목은 이 작품을 단적으로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태평하다는 인상도 풍기지만, 그것보다는 풍류의 정취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주인공은 도회지인 도쿄에서 속세를 벗어나고픈 충동에 이끌려 비인간적인 결단을 내린 뒤 ‘나코이’라는 해변에 위치한 온천장으로 발걸음을 실제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문명의 발달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차에 ‘타는’ 게 아니라 ‘실려가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여자의 얼굴에서 찾던 마지막 퍼즐조각 '연민'을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문명 속으로 들어와서야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아마도 작가는 문명과 비문명의 이분법이 아닌 둘 다를 아우르는 조화를 추구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도 하게 된다. 또한 그는 서양에 대해서도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양화를 그리는 화공이다 (주인공이 가진 내적 모순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인으로서 서양을 절대 우월하다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옹졸한 국수주의자의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듯하다. 사물과 사람, 그리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순간들을 예민하게 알아채고 그때마다 즉흥적으로 하이쿠를 짓거나 그림을 그린다. 과연 시와 그림에 능한 인물인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기승전결의 구도를 갖는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한 편의 이야기가 남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이미지가 남는다. 정유정보다는 한강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이미지가 썩 마음에 든다. 한 편의 책을 읽고 나면 한 편의 그림이 그려지고 그것이 오랫동안 은은한 잔상으로 남게 되는 작품. 나도 언젠간 이런 느낌의 작품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과연 나는 독자에게 어떤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은 걸까.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3. 산시로: https://rtmodel.tistory.com/1547
4. 태풍: https://rtmodel.tistory.com/1549
5. 풀베개: https://rtmodel.tistory.com/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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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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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 우리의 길

정여울 저, ‘헤세로 가는 길’을 읽고


개별적인 모든 상황 속에는 보편성이 숨어 있다. 우리가 낯선 타자의 이야기에도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그 무엇. 같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여울이 걸은 헤세로 가는 길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정여울이라는 고유한 개별자가 걸은 길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이 걸은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찰, 성찰, 통찰이 작가를 통과하면 글을 남긴다. 그 글은 가끔 독자를 관통하며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아주 가끔 그 생채기는 독자의 생각과 마음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기어이 독자를 움직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독자가 작가일 경우엔 또 하나의 글이 탄생하게 된다.

이 책은 독자 정여울이 읽은 헤세의 글들이 작가 정여울의 고유한 삶의 맥락을 통과하며 낳은 감상과 해석이다. 그녀는 헤세가 살았던 공간, 독일과 스위스,를 답사하며 헤세의 흔적을 좇는다. 문자만이 아닌 그 문자들이 작가 헤세를 관통하며 재배열하여 한 편의 글로 재탄생되었던 바로 그 공간에서 그녀는 그녀만의 감상과 해석을 이 책에 담아냈다. 의미야 부여하기 나름일 수 있지만, 헤세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에서, 게다가 그의 작품이 탄생된 바로 공간에서 그의 글을 다시 읽고 해석하며 나름의 글을 써냈다는 것. 헤세로 가는 나름대로의 길을 걸었던 나에겐 이 사실은 이 책을 읽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와 3부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헤세의 발자취를 좇으며 남긴 정여울의 단편적인 감상을 담고 있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은 그녀의 감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1, 3부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감성적인 에세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면, 2부는 전문가적인 서평 형식을 따르고 있다. 독일문학 전공자다운 정여울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교적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헤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네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그리고 ’싯다르타‘에 대한 정여울만의 해석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네 작품에 대한 해석의 공통적인 열쇠는 융의 정신분석학이다. 융을 읽어본 독자라면 공감과 이해에 훨씬 수월할 것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차 자료를 석영중을 통해 접하고 도스토옙스키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정여울을 통해 헤세를 재방문할 수 있었고 그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양한 해석의 만남은 언제나 독자를 더 넓은 지경으로 이끈다. 이 글을 포함한 나의 감상문이나 여러 단편적인 글들도 누군가에겐 도우미이자 길잡이가 되길 소망해 본다. 나의 길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길로 확장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 헤세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https://rtmodel.tistory.com/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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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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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앞에서 미적대는 인생


나쓰메 소세키 저, ‘태풍’을 읽고

태풍은 아무래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고,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그것이 한 장편소설의 제목으로 선정된 경우라면 독자는 그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쓰메 소세키는 왜 이 작품 제목을 태풍이라고 했을까.

거센 태풍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작품엔 충격적인 사건이나 상황이 전무하다. 소설이라는 특별한 세계에선 꽤 흔해 빠진 살인, 자살, 치정, 불치병, 혹은 출생의 비밀도 없다. 뚜렷한 위기, 절정, 해소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전체를 꿰뚫는 스토리텔링도 없다. 작품 평을 하자면 밋밋하다 못해 고요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는 소설이라는 말이다). 단, 이러한 결론은 소설 표면에 드러난 정황으로만 볼 때 그렇다.

그러므로 이 작품 속 태풍의 의미는 등장인물의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은 그들의 인생을 대변할 정도로 깊고 치열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눈도 바로 여기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은 세 명이다. 시라이 도야, 나카노 슌타이, 그리고 다카야나기 슈샤쿠. 모두 문과 출신이다. 시라이는 다카야나기가 학생일 때 이미 교사였던 적이 있을 만큼 연배가 많이 차이 난다. 나카노는 다카야나기와 동기다. 

굽힐 줄 모르는 지조를 문학이라는 학문에 온전히 적용하며 살아온 시라이 도야에게 문학은 곧 삶 그 자체다. 삶은 인간 세상이기에 인간 세상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자라고 그는 믿는다. 한적한 곳에 여유 있게 앉아 붓이나 놀리는 자를 그는 감히 문학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믿는 대로 생각, 말, 행동에 모순 없이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모순 없이 살아가는 그조차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탓일까. 가난은 그의 평생 동반자였다. 가난은 그의 모순 없는 문학에 대한 지조와 같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원적이라 할 수 있는 모순을 불러일으켰다. 먹고사는 문제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문학자는 가난해야만 하는 걸까. 둘 다 취할 순 없는 걸까.

자발적인 선택으로 흙수저의 길을 당당히 걷는 시라이 도야와는 달리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금수저의 길을 받아들이고 여유 있게 걸어가는 인물은 나카노 슌타이다. 그렇다고 나카노가 철저히 물질적이진 않다. 전형적인 재벌 2세의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작품 속에서 나카노는 셋 중 가장 세련되고 사리 분별을 잘하는 청년으로 그려진다. 그는 대학생 때 수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자발적인 비관주의자이자 스스로 외톨이가 된 다카야나기를 끝까지 챙기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비록 문학에 있어서는 별 열정이 없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열정 없음의 배경은 곧 그의 재력이라는 것을 독자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아마도 시라이 도야의 세계관으로 바라볼 때 나카노는 진정한 문학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돈에 의지하여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기득권 세력이자 문학을 그 하위에 두고 취미 정도로 삼는 사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론 시라이 도야와 같은 선상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카노 슌타이의 여유 있는 삶을 동경하며 둘 사이의 경계에 선 채 스스로를 세상에서 고립시켜 외톨이가 된 인물이 바로 다카야나기 슈사쿠다. 작품은 시라이 도야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다카야나기를 전체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작품을 이해하는 편이 이 작품을 그나마 잘 감상하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시라이 도야를 중심인물로 삼기에 그는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왼쪽 어깨엔 검은 악마가, 오른쪽 어깨엔 하얀 천사가 앉아 있는 인물의 갈등이 필수인 법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비록 나카노는 시라이 도야의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다카야나기의 눈에는 충분히 그랬을 법하다. 그의 눈에 시라이는 고고한 문학자, 나카노는 여유 있고 멋진 삶을 살아가는 재력가로 비쳤을 테니까. 비판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존재가 다카야나기에겐 나카노였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여전히 젊어서 시라이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회가 있었을 테니까.

이 작품은 문학을 넘어서 모든 학문에 적용 가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학자의 길과 재력가의 길은 결코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다. 물론 훌륭한 학자가 경제적으로 풍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풍족이 학자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아마 모든 학자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태풍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아마도 태풍은 순수한 학자의 자세를 견지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시대적 흐름, 그중에서도 자본주의 혹은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다시 말해 학문의 순수성을 오염시키고 마치 자본이 학문 위에 군림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는 시대의 조류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의 말미 시라이가 연설하는 장면에서 이는 도드라진다. 돈을 좇는 사람과 진정한 문학가를 대비시키며 그는 강조했다. 두 영역은 서로 다른 것이며, 절대 돈이 학문 위에 설 수 없다고. 태풍처럼 밀려드는 시대의 조류에 저항해야 한다고. 언젠가는 진정한 문학가의 존재가 돈보다 더 가치 있게 다루어질 날이 도래할 거라고. 

시라이는 과연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진정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고 나는 조용히 묻게 된다. 시라이의 진정한 문학자를 위한 극단적인 삶의 태도는 자신의 아내에게까지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게 만들었다는 점은 내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는다. 아내는 문학자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주부인데 말이다. 진정한 학문을 위해서는 아내와 가족이 모두 희생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 오늘날 현실을 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학자들의 등잔 밑은 상대적으로 밝지 않다. 가족들의 희생 없이 그들의 성공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늘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적대며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태풍을 감지했지만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3. 산시로: https://rtmodel.tistory.com/1547
4. 태풍: https://rtmodel.tistory.com/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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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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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성장인가


나쓰메 소세키 저, ‘산시로’를 읽고

나쓰메 소세키는 다면체의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인 것 같다. ‘마음’에서 만났던 그의 글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만나지 못했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실망감으로도 상실감으로도 다가왔다. 물론 그의 탁월한 필력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나는 ‘산시로’에서 또 다른 모습의 나쓰메 소세키를 만났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다는 '마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으나 결코 같지 않다. 만약 작가의 이름을 손으로 가려놓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읽었던 그의 세 작품이 서로 다른 세 작가로부터 쓰인 거라고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등장인물 이름이 제목으로 된 작품을 좋아한다. 이름은 강한 메시지를 표출하지 않는다. 덕분에 책을 읽기 전 선입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작가의 뜻에 영향받지 않은 채 비교적 객관적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다 읽고 나서는 작품의 내용을 제목으로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 ’산시로‘ 역시 제목이 주인공 이름이다.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읽어볼 작정을 한 이후 가장 먼저 이 책을 선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이 제목으로 된 작품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산시로라는 인물의 일상을 다룬다. 그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청년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산시로는 공부를 잘했는지 도쿄제국대학 문과생으로 입학한다. 작품은 산시로가 기차를 타고 도쿄로 오는 순간부터 기록된다. 기차에서 만난 한 여자와의 기이한 만남은 산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배짱도 없고 미성숙한 풋내기 청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산시로라는 한 미성숙한 촌놈이 상경하여 여러 사람과 사건을 만나며 성장해 가는 모습을 담고 있을까. 헤세의 작품에서 잘 드러나는, 한 마디로 성장소설에 속하는 작품일까. 작품을 다 읽고 나는 이 질문에 이렇다 할 답을 내리지 못한다. 무엇보다 소설 말미에 가서도 나는 산시로가 성숙해진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흔한 성장통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미네코라는 한 여자와의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관계의 여러 단면에서 단편적이고 상징적인 몸짓과 말로써 이게 성장통의 한 부분이구나, 하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시대와 문화의 차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읽어온 일본 문학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세 가지 요소를 나는 죽음 (이중 대부분은 자살), 성 (여성 입장에선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을 부분들이 상당수), 그리고 이념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젊은이들과 지식인들 사이의 갈등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 ‘산시로’에서는 묘하게도 첫 번째 요소인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다. 세 번째 요소인 ’이념‘도 강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두 번째 요소인 ’성‘이 전면에 드러나 있지도 않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쓰메 소세키가 주안점을 둔 산시로의 성장 과정에는 ’성‘이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나 싶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산시로가 기차를 타고 도쿄로 오는 중 생판 모르는 여자와 만나 어쩌다가 한 싸구려 모텔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 여자는 부끄러워하거나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산시로가 목욕하는 도중 슬며시 들어와 등을 밀어준다는 말도 자연스레 건넨다. 부끄러움과 어색함과 긴장은 모두 산시로의 몫이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벌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룻밤이 지나고 헤어지며 여자가 남기는 말이 가관이다. 아무래도 나쓰메 소세키가 이런 기이한 만남을 소설 앞부분에 등장시킨 이유도 바로 이 문장에 함축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

이 문장에 저자의 강한 메시지가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말을 듣은 산시로의 반응 때문이다. 여자는 히죽 웃었고, 산시로는 플랫폼 위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기차 안으로 들어서자 양쪽 귀가 더욱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는 지난 23년의 약점이 한꺼번에 드러난 듯한 심정이 된다. 부모라도 그렇게 정곡을 찌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저자의 논평과 함께. 

‘배짱이 없는 놈’.‘ 왜 저자는 산시로에게 이런 인상을 심어준 것일까. 미성숙하다는 점을 나타내기에는 이런 것들 말고도 여러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텐데 말이다. 여성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 자게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고 아무 일도 없이 잠만 잔 행동이 배짱이 없다는 말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쓰메 소세키는 산시로가 처음 만난 여자와 섹스라도 하길 기대했던 걸까. 섹스를 했다면 과연 그 여자는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라고 평을 했을까. 한국 정서에 물든 나로선 인과관계에 있어서나 정서에 있어서나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것 말고도 저자는 산시로의 성장을 또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상황을 전개해 나간다. 이번엔 미네코라는 여자다. 학교 안에 위치한 우물 옆에서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난다. 말하자면 한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산시로의 옆에서 미묘한 거리를 조절해 가며 그의 곁을 맴돈다. 어떻게 보면 미네코는 산시로에게 은연중 꼬리를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기차에서 만나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낯선 여자가 미네코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것 같은 인상도 풍긴다. 산시로는 이번에도 미네코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수줍고 어색한 모습으로만 응대하게 된다. 그러다가 책의 말미에 가서 미네코는 제3의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산시로는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마찬가지로 혼자 남게 된다.

산시로와 미네코와의 관계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과연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산시로가 배짱이 두둑하고 촌놈이 아니었다면 미네코에게 직접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산시로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일까. 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또 여전히 아닐 것이라 답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자가 나와는 상이한 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특히 청년의 성장에 있어서 성이 대표적인 도구로 쓰이는 것 같다는 사실이 나는 불편하기만 하다. 가부장적인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서도 그렇고, 여자의 인생을 남자가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져서도 그렇다. 어떻게 여자를 대하는지 여부가 한 남자의 성장을 평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성 말고도 저자는 두 지식인을 등장시켜 사상적으로 사회적으로 산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만든다. 그러나 아무래도 성의 역할보다는 미약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여줬던 나쓰메 소세키라면 철학적인 고민과 갈등에서도 충분히 산시로의 성장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 작품에서 그런 것들을 찾지 못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아무래도 나는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다는 어른이 되면서 겪는 생각의 변화에서 인간의 성장 징후를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이 책을 다 읽고도 마치 다 읽지 못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어쩌면 이런 기분이 저자가 원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3. 산시로: https://rtmodel.tistory.com/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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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84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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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과 인간세계


나쓰메 소세키 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


“나는 고양이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의 화자는 놀랍게도 고양이다. 상식적으로는 현실세계 고양이가 말을 할 리 없다. 게다가 장르가 소설이니만큼 이 고양이는 작가의 생각과 말을 전달하는 의인화된 매개체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발적인 첫 문장 (알다시피 제목도 같다)으로 운을 떼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과연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우물 안에선 우물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객관성이 결여된 판단은 신뢰도가 떨어진다. 이와 같은 시선으로 이 작품을 해석하면 어떨까. 우물을 인간세계로 대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세계 안에선 인간세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이를 조금 더 풀자면 이렇게 쓸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인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말과 글을 사용하고, 생각하고 의심하고 묻고 따지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가 인간밖에 없으므로 이 말은 결국 실행 불가능한 말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누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에겐 이성도 주어졌지만 상상력도 주어졌다. 상상력을 이용하면 불가능한 많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인간의 뇌는 잘 속고, 또 마음만 먹으면 의지적으로 속일 수도 있기 때문에 상상력을 잘만 이용하면 우린 언제든지 가능성의 무한한 세계로 나아가서 탐험하고 또 여행할 수 있다 (이는 문학, 특히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화자가 고양이라는 점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이 아닌 존재의 눈과 귀와 입으로 인간과 인간세계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말없이 녹화된 일상 속 자기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게 될 때 느껴지는 상이함 혹은 야릇한 거리감의 다른 이름은 객관성일 것이다. 이 작품엔 고양이의 눈에 담긴 인간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화자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인간은 종종 나 자신으로 환원, 수렴되기도 하기 때문에 우린 이 작품을 읽으며 스스로를 관찰, 성찰할 수 있는 의외의 기회까지 얻게 된다. 나는 바로 이 점이 나쓰메 소세키가 이 작품을 통해 의도한 바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이 가진 또 한 가지 매력은 풍자와 해학이다. 화자인 고양이는 그냥 야옹야옹 대는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다. 인간처럼, 아니 평범한 인간을 넘어선 비범한 존재로 그려진다. 사실 이 부분이 작품 속에서 사뭇 진지하게 과장되곤 하는데, 이는 독자의 폭소를 자아내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천재적인 필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고양이는 등장인물들에겐 그저 여느 고양이로 보이지만, 실은 생각하고 의심할 줄 알뿐 아니라 해박한 지식까지 탑재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물론 고양이의 역사까지 꿰찬 듯한, 웃지 못할 부분도 군데군데 등장한다. 특히 이 고양이가 기거하는 집주인 진노 구샤미 선생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고양이 화자보다 못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듯해 보인다. 몸은 고양이이지만 정신만은 인간계를 넘어 신계에 속한다 할 수 있을 만큼 이 고양이 화자는 해박하고 노련한 베테랑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풍자와 해학은 그것이 겨냥하는 것들을 충분히 이해, 통찰한 이후에나 가능하다. 이해 없는 풍자는 빈정거림일 뿐이고, 통찰 없는 해학은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에 불과하다. 이름도 없는 이 고양이 화자는 마치 산속의 도인처럼 비치기도 하고, 모든 학문에 두루 능통한 이후 일선에서 물러난 은퇴 학자로 비치기도 하며, 인간의 숨겨진 욕망, 본능, 심리를 알아채고 모든 인간사를 경험한 듯한 신적 존재로 비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자기가 고양이라는 한계를 인지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선 마치 독자인 우리 인간들이 그동안 몰랐던 고양이 세계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듯한 묘한 인상마저 받게 된다. 묘하다는 말이 이상하게도 잘 어울리는 동물 중 하나가 고양이일 텐데, 이 작품은 그 말에 신비감을 더하는 효과도 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존재이지만, 이 고양이 화자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 모두를 거뜬히 넘어서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단, 열린책들 양장본으로 500 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다, 기승전결과 같은 소설의 기본적인 형식이 존재하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긴 호흡으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이 작품을 읽고 싶다면 당연히 처음부터 읽으라고 권하겠지만, 중간중간에 집중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은 나도 한 달이 넘도록 읽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비로소 어젯밤에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작품만이 가진 독특하고 고유한 시선과 나쓰메 소세키의 탁월한 필력을 맛보고 싶다면, 그리고 인간으로서 인간을 한 번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성찰을 경험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나는 이 작품을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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