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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 -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모든 순간을 나답게 사는 법
브레네 브라운 지음, 이은경 옮김 / 북라이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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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할 용기: 이웃사랑을 위한 선작업.

브레네 브라운 저,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를 읽고.

다음은 시인 안젤루의 시 ‘그래도 나는 일어서리라’의 일부다.

“어디에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깨달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그럴 때 어디에나 속한다고 느끼죠. 비싼 값을 치러야 하지만 커다란 보상을 얻게 됩니다.”

저자 브레네 브라운은 대학생 시절 이 시를 처음 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소속감, 그 중에서도 ‘진정한 소속감 (True Belonging)’에 대해 깨달아가는 저자의 여정을 그린다. 저자는 어릴 적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가족’에조차 속할 수 없었던 마음의 상처를 지닌 아이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사람 (아이)이 아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황야’로 나아갔으며, ‘진정한 나’와 마주했고, ‘나’와 ‘타자’를 신뢰할 줄 알게 되었으며, ‘진정한 공감’과 ‘진정한 유대감’을 맛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노를 느낄 정도로 거부감이 심했던 안젤루의 시는 결국 살아나 그녀의 역사가 되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어릴 적 상처는 그녀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왔다. 그때 각인된 상처는 고통의 근원이었다. 가족에까지 소속되지 못했던 감정은 마음과 영혼과 자존감을 충분히 파괴하고도 남는 상처였다. 급기야 그녀는 부모 간의 불화로 인해 수치감까지 느꼈고, 그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한 채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남편이기도 한 스티브를 만나게 되면서 그녀는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한다. 말없이 수치스럽게 여기며 괴로워하는 대신, 용기 내어 마음 속 두려움과 상처를 털어놓으며 스티브로부터 진정어린 공감과 이해를 받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빛이었다. 사랑이었다. 어둡고 외로운 숲을 지나는 동안에 받은 단 한 사람으로부터의 진심어린 공감, 그 유대감. 이는 구원이란 단어를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진정한 소속감’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답을 내지 못했던 그녀는 어느날 남편과의 대화에서 유레카를 외친다. 

“당신이 당신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자기 자신과 일을 진실하게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속할 거야.”

Second Round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그녀는 조금씩 더 ‘진정한 소속감’에 대해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혼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는 양극단의 공존 가능성을 보게 된 것이었다. 안젤루의 시가 그녀의 삶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서서히 역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진정한 소속감은 불완전한 진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때만 생긴다”고. 이 글귀를 읽고 나는 한 방 맞은 듯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자신의 취약함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줄 아는 건 용기다. 취약함은 나약함이 아니란 저자의 고백에서 나 역시 용기를 얻는다. 홀로 설 용기, 완전히 홀로 설 수 있는 용기. 이는 곧 ‘나다움’이다.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해져야 할 과정은 ‘내가 나에게 속하는 것’이다. 이때의 ‘홀로’는 결코 외로움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자유다. 나 자신은 물론 타자와도 함께 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함께 하는 현재, 지금 여기’를 누릴 수 있는 힘.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이 신비로운 힘. 이 자유는 진정한 소속감으로부터 나오며, 진정한 소속감은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 취약한 모습마저도 담담히 드러낼 줄 아는 솔직함이 깃든 진정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자신이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여기는 안방, 즉 안전지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진정한 소속감을 원하는 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이미 많고 많은 예언자와 체제 저항자, 모험가가 거쳐가며 힘을 얻고 답을 얻은 ‘황야’로 담대히 나아가야만 한다. 

황야는 기꺼이 홀로 설 만큼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소속감이 깃든 곳이자 우리가 발 디딜 가장 용감하고 성스러운 곳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리고 진정한 소속감을 체험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용기는 황야에 용감히 ‘맞서는’ 용기일 뿐만 아니라 황야가 ‘되는’ 용기라고 덧붙인다. 또한, 나와 타자를 신뢰하는 과정은 자기 자신을 어딘가에 맞춰 적응시키려는 헛된 노력이 아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여정, 즉 ‘내가 나에게 속하는 여정’에 필수라고 역설한다. “Just be yourself!”, “This is me. All is fine!”, and  “I am fully allowed to enjoy this moment!” 곧 황야에서 일어나는 역사다. 

황야에서 마주할 수 있는 진정한 소속감과 진정한 자유함은 홀로 설 줄 아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건 결코 홀로 이룰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실제 경험과 자신의 연구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하여 타자와의 진정한 유대감이야말로 진정한 소속감을 얻기 위한 척도임을 간파해낸다. 우리는 살면서 모두 외로움을 느낀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단순히 철학자의 현학에 그치지 않는다. 요즘은 어린 아이도 충분히 느낄 정도로 우리 모두가 실제로 맛보는 현실이다. 편 가르기가 팽배하고 비인간화가 낭자한 세상에는 결코 소속감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린 아군이 아니면 적군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하며, 사람들의 개소리에도 관대하고 예의를 갖추어 진실을 말할 줄 알아야 하며,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 수만 있다면, 진정한 소속감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닐 거라는 저자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아멘으로 화답할 뻔했다. 저자가 바라마지 않는 세상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면 나타날 모습과도 닮았기 때문이다.

책에서 한 가지 재미났던 부분은 가짜 유대감에 대한 내용이었다. 우리가 흔히 맺곤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의외로 비난으로 맺어진다는 말에서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비난으로 맺어진 유대감은 비난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나누고 공감해야 할 것은 어떤 공동의 적이 아닌 기쁨과 고통이다. 순수한 사랑이다. 그것이 ‘진짜’ 유대감일 것이다. 아, 나는 이런 유대감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을까!

살면서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를 보려고 하며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 우리 인간은 소속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얻으려 한다. 이는 거의 본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속감의 시작은 진정한 ‘나’의 발견에 있다. 진정한 나를 대면하여 찾아내고 그 모습으로 살아갈 용기를 가지고서, 나 자신을 너머 타자까지도 신뢰할 수 있는 자세로 서로의 기쁨과 고통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다면, 진정한 유대감은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있는 열매이지 않을까 싶다. 다만, 그러기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 거치기만 하면 언제나 꿀보다 단 열매가 기다릴) 황야로 나아갈 용기를 우린 가져야 한다. 타자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기 전에 ‘나’를 먼저 사랑할 줄 아는 것도 바로 이 용기와 흐름을 같이 할 것이다.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선작업. 곧 나를 사랑하는 용기. 이런 용기가 궁금하다면 난 이 책을 자신있게 권한다. 잔잔한 감동과 함께 무언가 가슴 속에서 꽉 쥐어지는 용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며, ‘홀로’의 진정한 의미와 ‘유대감’과 ‘소속감’, 그리고 ‘자유’의 의미까지도 서로가 모순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63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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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 - 젠더로 읽는 기독교 2000년
하희정 지음 / 선율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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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기억: 조금 더 온전한 역사를 기록하다.


하희정 저,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을 읽고.

흔히 하는 말처럼 역사는 승자, 강자, 혹은 살아남은 (혹은 죽인) 자들의 과거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기록에는 늘 배제되거나 잊혀진 나머지 절반 (어쩌면 다수), 즉 패자, 약자, 혹은 죽은 (죽임 당한) 자들의 이야기 (혹은 진실)가 누락된 셈이다. ‘온전한 역사’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부재의 기억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온전한 역사’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는 기독교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가 간파한 것처럼, 2000년 역사를 통틀어 기독교 역시 ‘권좌를 위한 종교’, ‘종교 위의 종교’로 군림했던 시기가 더 길기 때문이다. ‘우는 자를 위한 종교’로 출발했지만, 기독교 내부에서는 약육강식이나 승자독식과 같은 힘의 논리가 여전히 유효했다. 예수의 사상과 정반대 되는 논리였다.

가부장적 위계질서는 이를 초월한 예수가 그 시작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유대인들의 문화는 남성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다시피 여성과 아이들은 사람 수를 셀 때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질서는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질서였으며, 불행하게도 시대를 초월하며 고질적인 문제로 남았다. 

이 책은 기록에서 배제되거나 기억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되살려 기독교 역사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저자의 표현대로 ‘역사 속 여성은 남성의 반대말이 아니라 배제된 자의 대명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제목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의 의미는 생물학적 여성을 넘어 잊혀진 모든 약자와 소수자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 순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진 대표적 여성들을 소환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역사관을 뒤흔드는 작업을 착실히 진행한다. 특히, 고대 편을 다루는 PART 1은 도입부부터 마치 탐정소설을 읽는 듯한 스릴까지 느낄 수 있으며,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실화로 교회가 일찍이 봉인해버린 내용 중 일부를 파헤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내게도 그랬던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 실수 때문에 창녀라는 누명까지 뒤집어 썼던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여러 나그함마디 문서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50년 이전에 먼저 발견되었던 ‘마리아 복음서’에서도 버젓이 제자로, 사도로 기록되어 있었다.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그리고 가장 뛰어났던 제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라 마리아였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성서 밖의 성서’들은 불행하게도 정경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외경으로 취급받아온 덕에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혹은 불경하게 여기거나 이단시하는 경향도 강하지만), 적어도 현대교회가 그리도 돌아가고 싶어하는 초대교회 시절 그리스도인들에겐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지위를 가지고 읽혔다. 정경와 외경을 구분하고, 정통과 이단을 구별한 역사의 배후엔 성령의 역사가 아닌 정치사회적인 힘의 논리가 은밀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절대 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찬가’에서 비춰지듯,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는 권력의 폭력성을 당당히 고발하며 종교의 본질적 가치를 성실히 살아낸 강직하고 신실했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마리아의 이미지는 육체적 순결함을 끝까지 지킨 정숙한 여인, 혹은 교회의 권위에 순종으로 응답한 믿음의 여인으로 탈바꿈되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찬미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 교묘한 술수는, 저자가 간파한대로, 힘 있는 자들 (주로 남성)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도 여성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에의 의지는 사악하고 간교한 프레임을 이용한 기만의 대가리를 먼저 움켜잡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당하는 쪽은 약자들이다. 

두 마리아 이야기를 뒤로 하고 저자는 다른 ‘성서 밖의 성서’에 기록된 몇몇 여성들을 더 소환하며 우리가 알고 있던 불완전한 기독교 역사의 퍼즐 조각을 몇 개 더 맞춰나간다. 생소한 이름들을 접하며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다가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장에서 독자들은 나처럼 조용한 분노와 함께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박해에 맞서 싸운 여성 순교자들의 신앙적 열정과 용기를 후대에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여전히 그들의 역할을 ‘여성성’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고 단순히 그들의 신앙을 교회의 모범으로 세우고 교육하고자 했던 교회 남성 지도자들의 비뚤어진 의도를 목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암흑 시대라고 알려진 중세는 그야말로 기독교 제국시대였다.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종 이전에 가졌던 가부장적 가치관은 성서에 의해 정당화되기 시작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기독교의 겉으로 보이는 위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했다. 여자를 죄의 본성으로 보았던 터툴리안,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했던 암브로스,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된 건 맞지만 그 도움은 출산일 뿐이라고 못박았던 어거스틴. 이들 모두는 여성이 남성 아래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창세기 2-3장, 그리고 베드로 서신과 바울 서신에서 찾았다.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신에게로 가는 길에 초대된 존재라며 안드로포스 (온전한 사람)를 이루는데 힘쓸 것을 권면했던 예수, 그 안드로포스가 되는 구원의 여정은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다고 가르쳤던 예수, 그 예수의 혁명적 정신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이었을까. 세속적 욕망과 공허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본질을 지켜내고자 했던 여성들을 이단으로 고발하고 마녀로 낙인 찍고 살해까지 감행한 교회의 남성 지도자들에게 과연 예수는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정경 선정자들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을 중요한 제자요 사도로 기록한 성서들을 왜 외경으로 분류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성이 강조되고 시민 사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근대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여성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시대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인간의 한계였을까. 종교개혁을 주도했고 ‘만인 사제설’의 ‘만인’에 여성을 포함시키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루터는 물론, 장로교의 시작인 칼빈마저도 남녀평등사상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씁쓸함을 던져주는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역사에는 의외로 짙은 그림자가 많이 드리워져있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또한, 그러한 시대와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수에 의해 이름도 빛도 없이 진행되었던 여성 운동의 존재는 칠흙같이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빛나는 등잔불이었다. 어쩌면 성령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기독교 역사에 더 많이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전해진 기독교의 정착사를 짧게 다룬다. 서구 기독교의 해외 선교는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근본을 바꾸어놓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엔 어두운 면도 존재했다. 식민주의 페미니즘이라고 알려진 개념 속엔 계몽이라는 명목 하에 감춰진 서구 우월주의에 대한 각인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잘 드러나있듯, 동양에 대한 서구인들의 정복주의적 상상력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만들어 낸 악마의 프레임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또 다시 묻는다. 안드로포스를 향한 여정에 있어서의 평등한 인권을 외친 예수의 정신은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피라미드 시스템 안에 과연 예수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존재할 수 있겠냐고.

학교과 병원 시스템 구축을 통해 효과적으로 들어온 기독교의 전파가 세계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내몰았던 영국과 미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은 과연 동아시아 해외 선교의 동력이 예수의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서구 열강들의 땅 따먹기의 일환이었는지 되짚어보게 만든다. 저자가 표현한대로, 과연 그 당시 기독교를 처음 접한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은 정말 기쁜 소식이었을까. 제국주의에 묻어 간 기독교 선교 역사의 어두운 면을 우리는 더 이상 덮으려하지 말고, 액면 그대로 바라보며 반성과 더불어 예수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닫는 말’에서 밝히듯, 이 책은 ‘무엇이 이단이냐’보다 ‘누가 이단을 말하느냐’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 전 역사에서 여성 (이때 여성은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하는 의미일 것이다)의 역사와 이단논쟁의 역사는 분리가 불가능할 만큼 그 역사적 궤를 같이 한다고 한다. 너무나 공감 가는 말이기에 나는 이에 할 말을 잃는다. 역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 역사의 불완전성, 그 불완전성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기만, 그리고 그 기만 배후에 있는 인간의 교만을 생각해본다. 저자가 왜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안치민의 말을 택했는지 알 것만 같다. 그렇다. 이 세상엔 유일한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성은 풍성한 조화로움의 뼈대다. 획일성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며, 이는 곧 살인자의 속성일 뿐이다. 살아갈 동안 얼마나 더 온전한 역사를 대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기대한다. 이런 책이 계속해서 나와 약자와 소수자의 억울함이 해소되고, 그와 더불어 비뚤어진 우리들의 역사관이 점점 바르게 잡혀가길.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61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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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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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예감: 책임과 혼란.

줄리언 반스 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이 책의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이다. 저자의 뛰어난 필력, 그리고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짜임새 있는 작품의 전개 덕에 숨가쁘게 책을 다 읽고, 쉴 시간도 없이 다시 책장을 앞뒤로 뒤적거리다가, 순간적인 전율과 함께 내용을 파악하고 나서야 난 비로소 한국어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원제를 직역했거나 – 이를테면, ‘끝의 예감’ 정도로 – 번역을 아예 하지 않았더라면, 책을 읽기 전 이 책에 대한 나의 인상은 분명 달랐을 테고, 저자의 의도는 물론 작품 속 복선 같은 여러 상징적인 메시지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을 것 같다.

한국어 제목은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효과를 내는 반면, 영어 원제는 끝이 열려 있다. 예감에 대한 결론을 함부로 내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을 영화화한 작품 역시 한국어 제목과 같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좀 실망스럽다. 작은 뉘앙스의 차이지만 내겐 원작을 전달하는 차원에 있어서, 비록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제목에 붙은 마침표의 유무가 의외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뭐랄까, 보이지 않는 마침표가 처음부터 상상력을 제한시킨다고 할까.

어쨌거나 그렇게 난 한국어 번역본으로, 그래서 사뭇 강제로 제한된 상상력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250 페이지 정도 되는 두께를 약 두 시간에 걸쳐 몽땅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저자 줄리언 반스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치밀하게 설계라도 한듯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말, 그러나 이미 그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 작품 여러 군데 깔려 있었음을 뒤늦게서야 ‘아..이럴수가.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하며 깨닫게 되는 책. 이런 소름 돋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난 이 책을 주저없이 권한다. 고전소설이 가져다주는 고유하고 묵직한 매력은 없지만, 현대소설만이 가지는 참신함과 순발력 (그러나 상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가벼운) 등으로 반나절 즐거운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복선은 아무래도 소설 속 화자인 토니의 고등학교 역사 수업 중에 등장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를 정의하는 조 헌트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들이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는 장면이다. 토니는 “역사란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며 거의 본능적인 대답을 했다. 이에 선생님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듯, “역사는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고 첨언했다. 반면, 이 소설의 비극적이면서도 신비로움을 머금은 인물 에이드리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에이드리언은 토니와 늘 함께 하던 패거리에 뒤늦게 합류했었지만, 어느새 조용히 우월한 입지를 선점하는 독특한 이미지의 인물이었다. 생각하는 수준이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았으며, 함께 있어도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동시에, 그는 언제나 암묵적인 리더였다. 또한 그는 학업에서도 남달랐는데, 그의 월등한 성적은 케임브리지에 입학할 정도였다. 토니의 어머니 말씀을 빌자면, 에이드리언은 “너무” 똑똑했다.

베로니카. 주인공 토니가 대학 시절 잠시, 하지만 의미 있게, 사귀었던 여자 친구 이름이자 노년의 토니와 재회하게 되는 인물이다. 사귈 땐 그녀의 집에 초대 받아 그녀의 가족과 함께 한 달 간 머물기도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속마음을 언제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토니는 결국 그녀와 헤어진다. 그리고 뜻밖에도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기 시작한다. 비극의 불씨였다.

당연히 탐탁치 않았지만 토니는 자신이 둘에게 쓴 편지에서 쿨하게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둘의 행복을 빌어주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 눈치 챘겠지만, 이 책은 예순이 넘은 토니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기억, 즉 그의 역사다. 비극적인 건, 그 역사가 고등학생 시절 자신이 역사 수업에서 대답했던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는 점이다. 그가 둘에게 썼던 편지 내용은 전혀 쿨하지 않았다. 4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자신이 쓴 편지를 읽게 되었을 때, 그는 곧장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스럽기 그지없고 추잡스럽고 악의가 가득한 저주의 말들이었다.

토니는 자신이 썼던 그 편지를 다시 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자신에게 남긴 유산에 관한 편지 한 통이 수면 아래 있던 그 기억의 문을 열어버렸다. 기대 밖에도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토니에게 남긴 건, 짧은 편지, 500달러,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었다. 토니는 앞의 두 항목은 그런대로 이해할 만했지만, 마지막 항목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베로니카가 아닌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도저히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일기장은 현재 베로니카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베로니카의 이메일을 알아내서 연락을 취하는 토니. 그녀를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그는 이십대 시절에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낀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반응은 그때와 같이 쌀쌀맞다. “넌 여전히 감을 못 잡는구나.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느지막한 나이에 그녀와 재회한 첫 날, 토니가 그녀로부터 받은 게 바로 자신이 이십대 때 썼던 그 편지다. 추악한 그 편지의 정점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미래를 저주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저주는 혹시라도 둘 사이에서 생겨날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여전히 베로니카가 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대신 그 편지를 주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녀를 세 번재 만나던 날, 그녀는 갑자기 토니를 데리고 어떤 자택 요양 간호 대상자를 만나러 간다. 그 대상자는 나이가 젊었다. 베로니카의 아들이 있다면 아마도 저 나이겠다 싶었다. 그 이후 토니는 베로니카의 의중을 알고 싶었는지 계속해서 그 곳을 찾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간호 대상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는 그가 에이드리언의 아들임을 확신하게 된다. 너무나 똑같이 생겼고 행동거지가 닮았기 때문이었다.

토니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저주가 현실이 되어있음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로니카에게 사죄의 편지를 쓰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토니는 자신의 기억이 그렇게나 부정확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의 역사는 결국 에이드리언의 대답처럼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임도 증명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게 결말이 아니다. 토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이드리언의 아들이 있는 곳을 또 찾아간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되는 충격적인 사실. 그건 에이드리언의 아들의 보호자로부터 들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베로니카는 엄마가 아니라 누나라는 것이었다!

이럴수가. 그제서야 나 역시 토니가 젊었을 적 한 달 간 머물었던 베로니카의 집에서 토니가 느꼈던 베로니카의 어머니에 대한 묘한 감정과, 그가 베로니카와 헤어진 뒤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친필로 작성해서 보냈던 위로 편지의 숨은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또한 베로니카가 의도적으로 토니를 자신의 어머니와 단 둘이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고, 그 이후 토니에게 좀 더 애정을 준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베로니카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라 경쟁자였음을 말이다. 어쩌면 토니가 베로니카의 집에서 에이드리언에 앞서 베로니카 어머니의 유혹에 넘어갔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토니 어머니 말씀대로 토니는 좀 덜 똑똑해서 (덜 민감해서) 그 유혹을 몰랐을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에이드리언. 토니는 40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싸늘하게 대했던 베로니카의 얼굴표정과 태도도 모두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책임감을 느꼈다. 죄책감을 느꼈다. 토니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어찌 보면 이 책은 싸구리 3류 영화 같은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작가의 뛰어난 필력과 스토리 전개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토리 전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인간의 심리와 본성 등을 탁월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에 대해서, 나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나의 역사는 나라는 승자의 거짓말로 도배되고 있는지, 아니면 나라는 패배자의 자기기만으로 가득차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부정확한 나의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나의 확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눈을 뜨고 나도 토니처럼 책임과 혼란을 느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6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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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 과학 시대 창조 신앙
김정형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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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창조 신앙으로.

김정형 저, ‘창조론’을 읽고.

하나님을 문자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하면서도 스스로 기독교 정통임을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이나, 고작 반지성/반과학적인 주장 (이름하여 유사과학)에 머무르면서도 감히 과학이란 단어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주관적 해석을 진리인듯 자신있게 강요하는 동시에, 자칭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창조과학자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공통된 입장을 가진다. 영어로 ‘Creationism’이라 명명된 이 입장은 우리말로 넘어올 때 ‘창조론’으로 오역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다. 저자 김정형은 책의 서두에서 이 오역을 먼저 바로 잡는다. 근본주의자들이나 창조과학자들의 반지성적인 창조에 관한 입장은 ‘창조설’로, 이에 반해 ‘창조론’은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창조에 관한 교리’라고 정의한다. 이 책의 주제이자 제목이 ‘창조설’이 아닌 ‘창조론’임을 주목할 때, 우린 저자가 창조과학의 오래된 논쟁적인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바른 이해를 추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우리의 창조 신앙이 창조설에서 창조론으로 나아가길 염원한다. 더불어, 과학 시대를 맞이한 지 이미 오래인 현대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현대 과학을 배척하지 않고 품는 창조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에 따라 이 책의 부제는 ‘과학 시대, 창조 신앙’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이 책의 기본 구조는 ‘소박한 창조 신앙’에서 ‘성숙한 창조 신앙’으로의 진화 과정이다. ‘첫 번째 순진성’이라고 본인이 명명한 ‘기독교 전통의 창조론’에서 출발하여, 자신과 전통이라는 한계를 넘어, 더욱 풍성해진 창조론, 즉 ‘두 번째 순진성’에 다다르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여정에서 험준한 산과 깊은 골짜기를 지나야만 했다. 이는 아마 나를 포함하여 8,9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겪은 비슷한 여정일 것이다. 가치관과 믿음의 혼란을 불러오는 그 어두운 나날들. 하지만,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사탄의 유혹이 아닌 연단의 과정이다. 두렵고 힘들지만 그 여정을 통과하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지고, 개인의 협소한 구원론 위주의 사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그 경계를 넘어 더욱 풍성한 다양성과 함께 성숙한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성숙한 창조 신앙도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겪어낸 열매일 것이다.

에세이 형식까지 겸하고 있어 이 책의 앞부분은 읽어나가기가 어렵지 않다. 반면, 중간 부분을 읽어나갈 땐 상대적으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 저자의 치열한 고민과 연구, 성숙한 신앙과 믿음을 가능하게 했던 피와 땀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비록 신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저자의 학문적인 이야기를 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곧이어 뒷부분에 등장할 저자의 성숙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천천히 시간을 내어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성숙한 창조 신앙 편에서는 과학 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의 창조 신앙의 현 위치를 검토할 수 있으며, 창조에 관련된 오래된 논쟁을 넘어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창조 신앙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할지 가늠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구원론이 지나치게 강조된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건강한 창조론이 한국 교회에서 함께 강조되길 소망한다. 그러면 나를 구원하신 예수만 감사할 게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아가 나뿐만이 아니라 타자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더욱 풍성한 감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창조과학을 포함한 여러 창조설로 인해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통해 하나의 방향과 답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부디 이 책이 창조과학 논쟁이 자취를 감추고 건강한 창조론이 회복되는 데에 있어 하나의 작은 등불이 되길 기원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5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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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 고통과 기억의 위로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이문원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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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찾아서.

프레드릭 뷰크너 저,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를 읽고.

어렸을 적 경험한 아버지의 자살. 뷰크너의 거의 모든 글에 망령처럼 따라붙는 이 사건은 그의 시간을 두 세계로 나눈다. 그는 이를 각각 ‘시간 이전 (Once Below a Time)’과 ‘시간 이후 (Once Upon a Time)’라는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구분한 뒤, ‘시간 너머 (Beyond Time)’로부터 구원의 어떤 비밀이 우연하고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시간 속으로 침투해온다고 믿는다. 시간 너머의 어떤 능력이 우리 모두의 인생과 모든 시간을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세계의 구분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시절로 대표되는 첫 번째 세계로부터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여정의 시작인 두 번째 세계로의 진입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두 세계 모두가 어떤 초월적인 존재와 힘의 주관 하에 놓여있다고 보는 건 물론 개인의 믿음에 달린 문제다. 하지만 뷰크너는 솔직담백한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그의 정제된 신학적 성찰을 지극히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쉽게 풀어내면서 그 초월적 존재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러므로 뷰크너를 읽는다는 건, 두 세계를 통과하는 모든 인간의 삶이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한 여정’임을 발견해내고 내 삶도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이 책 역시 그의 ‘하나님을 향한 여정’의 일부다. 한국어로 ‘하나님을 향한 여정’이라고 번역된 그의 작품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 이 책은 그 작품의 일부를 포함하기도 한다 – 다소 혼란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이 표현을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번에 세 번째로 만난 그의 글을 읽으며 앞선 두 책을 읽을 때와 동일한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뷰크너뿐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향한 여정’도 다시 멈춰 서서 귀 기울이고 조용히 바라보면서 묵상할 수 있었으며, 거기서 공명되는 어떤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 습관이 될 만큼 충분히 경험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영향 아래 놓여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혹은, 철저히 어둠 속에서 혼자인 것만 같았으나, 뒤돌아보니 정말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안도감과 평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전율의 순간이다. 제한된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시간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는 순간이다. 이런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의 순간들은 살면서 종종 예기치 않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며, 당면한 문제와 다급한 욕망에 묶여있던 우리의 눈을 조금은 더 편안하게 먼 곳을 향하게 한다. 해방과 자유의 순간인 것이다.

뷰크너는 이 책에서 고통은 물론 치유하는 기억의 힘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은 기존에 출간된 그의 여러 작품에서 ‘고통과 기억의 치유력’에 관련된 글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다). 그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아버지의 자살 사건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되는 고통의 상실은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가 명명한 ‘마법왕국’이란 기억의 방을 통해 이미 죽은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과 친구까지도 기억해내고는 그들이 남긴, 혹은 그들과 함께 겪은, 고통의 순간들을 일부러 방문하여, 그때 그곳에도 어김없이 임재했던 하나님을 소환한다. 그리곤 과거와 현재의 고통에 대한 치유를 경험한다. 뜬 눈으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얼굴과 열린 귀로도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을 그는 기억이란 마법을 통해 보고 들으며, 마침내 기억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낸 아이처럼 기쁨을 회복하고 온전한 퍼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이 있다. 그냥 묻어둔 기억들,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기억들, 여전히 날카로운 송곳처럼 언제든 우리를 찌를 준비가 되어 있는 기억들 가운데 분명 우리가 놓치고 있는 기억의 조각이 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받는 여러 방법 중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뷰크너의 기억 방법 (그리스도인에게 이 방법은 곧 기도와 같다)을 사용한다면, 우리 역시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의 순간을 통해 고통의 끝인 기쁨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 기쁨을 되찾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의도적으로 기억의 방으로 들어가는 일은 곧 고통을 재방문하여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밭길을 걷는 위험이나 죽음의 깊은 협곡 위를 평온하게 덮고 있는 크레바스 위를 걷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을 향한 신뢰는 의심의 어두운 숲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확연한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움의 심연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거기 바로 그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조각. 하나님의 임재. 궁극의 답. 결국엔 하나님을 찾고 그를 찬양하고 감사하게 되는 인간의 여정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만 국한된 피날레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5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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