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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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순정적인,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야’를 읽고

지금까지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중 가장 순정적이고, 가장 신파조에 가까울 정도로 통속적이며, 가장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답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평이한 소설이 아닌가 한다. 왜 그런고 해서 찾아보니,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1845년, 도스토옙스키가 24세가 되던 해에 대대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자신의 이름을 러시아 전역에 알리게 되는 작품 ‘가난한 사람들’이 발표되었고, 이 작품 ‘백야’는 1848년에 발표되었으니, 첫 소설 이후 3년 만에 쓰인 소설인 셈이다. 또한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시절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으니, 우리에게 알려진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으로 진화하기 전의 작품인 것이다. 약 10년간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견뎌내야 했던 시베리아 유형과 의무 군복무 기간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였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사례라 생각된다. 그가 길고도 깊은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과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비롯한, 소위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이라 일컬어지며 ‘인류의 자산’이라고까지 평가되는 대작이 탄생될 수 있었을까. 때론 원하지 않는 거대한 환란이, 비록 그것이 몸과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해도, 그것 아니면 결코 얻을 수 없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열매를 맺곤 하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환란에 마음 깊이 안타깝게 여기고, 또 이렇게 말하는 게 경솔하고 무례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넘어 그를 사랑하는 독자로서는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간질병을 얻고 평생 그것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지만, 그의 환란에 이런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게 된 독자는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리라. 그리고 이것은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때마다 겸허해지고 숙연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이 단편소설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가시적인 공통점은 가난과 사랑과 문학이고, 비가시적 공통점은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장광설 속에 숨어 있는 인간 본성과 심리에 대한 통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나’라고 소개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난한 사람들’의 남자 주인공 마까르 제부쉬낀의 캐릭터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나이 어린 한 여자를 순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이 그렇고, 그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닮았다. 나아가, 그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주인공이 비뚤어지지도 않고 끝까지 순정을 간직한다는 점도 닮았다. 이 정도면 한 가난한 남자의 순애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 가난한 남자와 한 가난한 여자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그린 이야기라면 3류 소설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류와 질적으로 다르다. 단순히 감성 팔이나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둔 하룻밤의 불꽃놀이 같은 이야기와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순애보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 이면에 흐르는, 적나라함과 통속이라는 탈을 쓴 인간의 본성 및 심리의 탁월한 묘사와 통찰에 맞춰져야 한다. 비록 가난하지만 무식하지도 무지하지도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도 가지고 있으며, 퇴폐적인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정도로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히지도 않아 자신의 현재 좌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주인공을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몽상가라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석영중 교수가 ‘작품 해설’에서 지적하듯이 그는 몽상가가 아니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약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몽상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결코 몽상가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소설 ‘분신’이나 1864년에 발표된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등장하는 주인공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작품 속 주인공은 정신병자이거나 정신병자에 가까운 인물로서 자기라는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사회와 단절된 채, 마치 지하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캐릭터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과 ‘백야’의 주인공이 긍정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라면, ‘분신’과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부정적이고 퇴폐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네 작품의 주인공의 장광설 속에 묻어나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심리는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옙스키 시선의 고유한 매력을 느낀다. 모든 인간은 이율배반적이라는 것. 그러나 아주 미세한 차이로 인해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네 인물 모두 가난을 공통점으로 가지기에 가난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은 인간 본성의 발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선행자도 될 수 있지만 범죄자도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캐릭터의 소유자의 생각과 행동에도 가볍지 않은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왜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야만 하는지를 말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짧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품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면 명백한 오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무래도 도스토옙스키의 정수는 5대 장편을 모두 아우르는 후기 작품들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여전히 도스토옙스키의 고유한 문체와 매력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그 맛을 보고 싶은 사람은 한두 시간 정도 시간을 내어 이 작품을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일부러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아껴두고 있다. 주로 단편과 중편들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이것들을 하나씩 읽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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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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