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 - 읽고 쓰기에 대한 다정한 귓속말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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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과 같은 첫 문장: 소설가는 따라갈 뿐


오가와 요코 저,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을 읽고

소설에서 첫 문장은 사람의 첫인상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첫인상이 좋아도 지나고 봐야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듯, 첫 문장이 아무리 좋아도 그다음 문장들이 형편없으면 그 소설은 요란한 빈 깡통, 혹은 서두에만 잔뜩 힘이 들어간, 허세에 부푼 초보 작가의 어설프고 허술한 글이 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둘 다 일리가 있다. 사실 둘은 상반되지도 않는다. 첫인상만 좋고 본모습은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그런 유형을 경계하라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강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은 결코 첫인상만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며, 첫인상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결코 첫인상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둘은 똑같은 말을 다른 각도에서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컨대 어쨌거나 첫인상은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첫 문장 역시 중요하다는 것. 그러나 그것만이 사람이나 글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진 않는다는 것. 

쌀로 밥 하는 말일지도 모르나 첫 문장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책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장은 첫 문장에 이어서 나오게 된다. 특히, 여러 소설가의 고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소설가는 저 앞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모든 걸 미리 계획하고 설계하면서 이끌어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특정한 시공간과 그 시공간에 내던져진 등장인물을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십, 수백 혹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글 한 편의 포문을 여는 첫 문장은 빛이 있으라 하는 신의 명령에 빛이 생겨나듯 작가에 의해 새겨진 백지 위의 첫 검은 활자로써 뒤이은 모든 이야기를 꿰는 첫 단추일지도 모른다. 이는 작가도 자신이 쓴 첫 문장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며, 그 문장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문장들을 놓치지 않고 주워 담은 결과가 하나의 완성된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한 여기서 우린 한 걸음 더 나아간 독법을 다음과 같이 구사할 수도 있다. 첫 문장은 소설의 주제문이라든지 상황이나 등장인물을 압축해서 표현한, 가장 나중에 쓰이는 문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처음 쓰인 문장으로써 그 문장 때문에 소설의 주제도 생성되고 상황이나 등장인물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즉, 소설의 전개와 결말까지 첫 문장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것.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니라 따라가며 포착한다는 소설가에게 첫 문장은 바로 그들이 따르는 이야기의 선두에 위치하는 그 무엇인 것이라고.

오가와 요코의 대표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쓰이게 된 사전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을 따르며 그녀가 세 차례 강연한 내용을 담은 이 책에서 그녀가 하는 말도 내가 아는 소설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가는 따라간다는 것. 주제를 먼저 설정하고 소설을 쓰긴 어렵다는 것. 작가는 스토리를 짓지 않고 포착할 뿐이라는 것. 작가는 그저 누군가가 떨어뜨린 기억의 조각을 주워 모아 그 사람이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어쩌다 가지게 된 언어라는 수단으로 소설로 쓸 뿐이라는 것. 그러나 한 가지 내게 묵직하게 와닿은 문장 하나도 남긴다. 소설은 언어로 쓰는데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것. 여기서 나는 모순을 느끼면서도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숙명이랄까 치명적인 매력이랄까 하는 것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된다.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묘한 위안을 얻게 된다. 소설이야말로 철학, 신학, 인문학 할 것 없이, 그리고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포착하여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티라미수
#김영웅의책과일상

https://rtmodel.tistory.com/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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