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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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짧은 책은 우리를 1세기 로마로 데려간다. 푸블리우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하여 우리는 브리스가 아굴라의 가정 교회를 방문하게 되고 그들의 삶의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아굴라를 인습에 매이지 않는 유대인으로 소개받은 푸블리우스는 아굴라가 자신이 알고 있던 유대인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아굴라의 과거 삶의 경험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동행했던 글레멘드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의미 있는 대답을 듣게 된다. 아굴라가 그 동안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인 이유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유는 글레멘드와 유오디아가 고린도에서부터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와 함께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새로운 관점은 예수 복음을 의미했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삶의 예배에 마침내 푸블리우스도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넘어 그것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좀 더 실제적이고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방인인 현재의 우리보다 유일신 하나님을 익히 알고, 로마에 속국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 중 하나였던 아굴라가 세계관의 변화를 겪고 이를 삶에서 반영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진정한 전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무릎이 탁 쳐졌다. 그 모습이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며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가며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평신도 전도자의 모습이라는 생각까지 진행이 되자 난 한동안 책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푸블리우스 일행이 브리스가 아굴라 집에 도착하여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즐기고 있는데, 아굴라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식사 준비를 하러 식당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푸블리우스는 이 분위기 전환을 예배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글레멘드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번에도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실제로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형식만 남은 가식적인 제사와 예배를 겨냥한 듯했다. 일상적인 삶 속에 스며들어 그것이 예배인지 삶인지 분간이 잘 안될 정도로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된 모습,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 할, 그리고 보여져야 마땅한 모습일 것이다.


한편, 이해하지 못해 브리스가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그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한 푸블리우스는 식탁에서 보통 최고 귀빈을 위한 자리에 앉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식사와 친교를 나누면서 그는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을 여러 번 포착한다.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가 신분상 차이가 분명히 나는 사람들을 맞이할 때 차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분상 식탁에서 그의 자리에 앉아야 할 아리스도불로와 그의 종 루시아와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모임의 모든 참석자들이 동일한 발언권을 가지고 열띤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광경에서도 푸블리우스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경험하게 된다.


식사와 교제 가운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던 성 만찬에서 푸블리우스는 예수 복음을 듣게 된다. 몸이 살려면 빵이 필요하듯 참 생명을 경험하려면 신의 독생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굴라는 이어서 그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얘기했고, 그분은 지금 모임에 함께 하신다고 기도했다. 푸블리우스는 아굴라의 기도 중 그 내용도 처음 듣는다는 이유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든 일이 바로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또 평범한 목소리로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하고 실제적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여태껏 생각하던 신에 대한 방식을 포함한 그 자신의 세계관과의 충돌을 한번 더 경험하게 된다.


아리스도불로의 종 루시아의 신분 해방에 대한 토론이 뾰족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무렵,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이 예전에 보낸 편지 속에 적힌 내용을 기억해낸다. 주인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종들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실제로 자유인임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였다. 덕분에 토론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대화가 바울의 판단 근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또한 푸블리우스조차 자신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이후에 진행되었던 순서에서도 푸블리우스는 자신이 짐작했던 종교적인 내용이라곤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친구 글레멘드 역시 아굴라처럼 자기 신이 마치 같은 방 안에 가까운 친구인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말투를 쓰며 기도하는 모습이나, 그 기도의 내용 중 '세상은 우리에게 온 신의 선물'이라는 말에서 또 한번 충격을 받게 된다. 너무나 당연시했던 것들이 모두 신의 손길에서 온다는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이 책은 푸블리우스의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처음 만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단지 첫 만남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세계관과의 첫 만남이며, 그로 인해 아무런 압력 없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변화의 기운이 싹트는 모습을 그리는 책이다. 푸블리우스는 책의 끝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상하게도 그들 (이미 예수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게 되고 삶에서 교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를 포함한 그 일행)에게는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들의 행동에는 틀림없이 실제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초청받은 다음 주 모임에 갈지 안 갈지 결정은 아직 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가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삶에 녹아 든 복음, 일상과 일치된 하나님나라,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현재 우리들의 예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가상의 이야기로 보여주며 이 책의 저자가 현재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난 제 2의 푸블리우스가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 아니 교회인 나 자신으로부터도 같은 메시지를 받길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것은 객체지향적인 전도 방법을 연구하거나,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커다란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열심을 내거나, 언제나 새신자 환영 코스프레하듯 가식적인 스마일을 지으려고 노력하거나, 마치 아무런 근심이 없는 척하며 가짜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신앙을 살아내는 것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말이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4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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