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객 을유세계문학전집 20
헤르만 헤세 지음, 김현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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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이 아닌 화음.

헤르만 헤세 저, ‘요양객’을 읽고.

저자인 헤세 스스로가 ‘가장 개인적이고 진지한 책’이라고 평가한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닌 그의 자전적 수기다. 또한 이 작품은 대대로 한국에서 헤세 전집 (선집 혹은 콜렉션)을 출판했던 성창 출판사, 선영사, 민음사, 현대문학 모두 그들의 전집 목록에서 제외시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헤세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연이 아닌 이상 아마도 처음 듣는 제목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나도 작년 현대문학판으로 헤세 선집을 다 읽고난 이후, 헤세를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읽고 싶은 미련과 갈증이 남아 일부러 그의 연대기를 추적하여 모든 작품 목록을 조사한 뒤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나 전집 목록에서 제외된 작품들을 모아 틈이 날 때마다 읽어오고 있었다. ‘요양객’도 그 중 하나다. 

누구의 입도 빌리지 않고 직접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일기처럼 혹은 회고록처럼 기록한 수기이기 때문에 그가 이 작품을 가장 개인적이고 진지한 책이라고 평가했던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금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이 책에서 일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헤세의 목소리에서 ‘유리알 유희’의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황야의 늑대’에 등장한 하리 할러의 고뇌가 느껴지는 듯 했으며, ‘싯다르타’에서의 싯다르타의 번뇌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모든 피조물에는 조물주의 흔적이 남는 것일까.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그렇게 듣고 느꼈던 것은 그들 모두가 헤세가 창조해낸 그의 분신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헤세는 조물주로서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또 고유한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을 창조해내고, 분열된 자아를 대입시킨 뒤 서로를 대립시켜서 갈등을 유도해내곤 했지만, 그것의 목적은 결코 분열 자체나 분열로 인한 혼돈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분열을 넘어선 합일이었다. 성장을 통한 실현이었다. 헤세는 모든 작품에서 각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분열된 자아의 변증법적 성장을 통하여 합일을 추구하면서 우리에게는 다양하지만 결국 하나인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합일성. 이 단어는 헤세의 사상을 한 번에 정리해주는 단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헤세는 서양 철학과 심리학은 물론이며 동양의 여러 종교와 사상까지도 흡수했던 작가였다. 그는 전업 작가였지만,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으며, 방랑자이자 은둔자이기도 했고, 또한 구도자였다.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 인도의 '우파니샤드'에도 몰두했었으며, 중국의 '논어'와 '맹자'는 물론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서평을 쓸 만큼 도가 사상에 대해서도 심취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불교의 열반과 노자의 도가 결국엔 같은 것이라고 여겼으며,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도가 사상이 한데 잘 어우러진 그의 정신세계는 '싯다르타'에서 특히 잘 표현되어있다. 그는 힌두교의 아트만과 기독교의 은총을 동일시하기도 했으며, 자아의 의미와 본질은 자아를 도외시한 채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 내면으로 향하는 도정에서부터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든 만유를 조화롭게 일치시켜 합일성을 지향하는 것만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일견에는 양극으로 분열된 것처럼 혼돈으로 보이나, 그것들은 결국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며 조화로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거대한 실체로 보았던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다양한 종교와 사상도 아마 헤세에게 있어서는 합일성이라는 단어로 이해되고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헤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는 특징인 ‘자아의 분열과 대립을 통한 성장’의 목적지는 바로 합일성을 추구하는 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었으며, 그때서야 비로소 자아의 실현도 가능한 것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헤세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작품에서보다 헤세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시민적 삶과 예술가적 삶의 양극 사이에 놓인 긴장 가운데 부유하며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십 대 중반,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헤세는 신경통과 통풍에 시달리며 스위스 바덴이라는 도시로 요양을 가게 된다. 그곳은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작가가 아닌 환자로서 수동적인 일과를 따르며 살게 되는데, 육신의 고통과 더불어 그에게는 정신적인 퇴행을 경험한 순간으로 기록될 뻔하기도 했던 기간이었다. 특히나 고독한 은둔자 스타일이었던 그가 도처에서  치료와 요양을 위해 찾아온 다양한 환자들과 집단 생활을 하며 정해진 일과표를 지켜가며 하루를 살아내는 것은 그에게는 예술가적인 삶에서 벗어나 시민적 삶을 맛보는 일방적이고도 낯선 경험이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헤세는 예술가적인 정신을 고수하려고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혼자 한적한 곳을 찾아 사색에 잠기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움직일 때마다 쑤셔오는 허리와 다리를 붙잡으며 온천욕을 해야 했고,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다녀야 했으며, 기름진 음식을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먹어야 했고, 유쾌하지도 않은 쇼를 함께 보거나 도박과 게임을 하며 사람들과 부대껴야 했다. 그의 옆방에서 거주했던 어느 네덜란드 사람에 대한 그의 기록을 보면, 헤세 역시 여느 평범한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하고 고뇌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어떤 인간미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나중에 그는 그런 시민적인 삶에 길들여져갔고, 그 삶에서 흥도 느끼는 등 본래의 그가 추구했던 것들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아내면서 그는 끊임없이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요양소에 머무는 기간이 끝나갈 무렵, 양극으로 분열된 두 가지의 삶을 완전히 단절시키거나 대립시키지 않고, ‘합일성’의 개념으로 정리를 하며, 그러한 긴장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자신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직접 요양소에서 겪은 경험 속에서도 양극으로 분열된 두 가지의 모습을 조화롭게 하나로 일치시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작가란 언제나 그러한 도정 가운데 있는 구도자임을 시인하게 된 것이었다. 다음은 그의 정리된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선율과 반대 선율이 항상 들리고, 그래서 모든 다채로움에는 항상 합일성이 병존하고, 모든 익살에는 항상 진지함이 병존하는 단원과 문장을 쓰고 싶다.”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작가 헤세. 그의 깊은 사색과 통찰은 언제 만나도 내게 영감을 준다. 다시 만나 반가웠다. 언젠간 그의 모든 작품을 읽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1. 수레바퀴 밑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43022562409185

2. 싯다르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50722494972525

3. 게르트루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4071523637622

4. 페터 카멘친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9595666418541

5. 황야의 늑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93746594003448 

6. 크눌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04866382891469

7. 로스할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44402088937898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906654982712608

9. 데미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71433049568136

10. 유리알 유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61378043906966

11. 요양객: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13336575377776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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