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와 첫 챕터를 읽어 내려가며 ‘어머, 이건 사야해..‘란 생각이 드는 걸 억누를 수 없었다. 사실 ‘이기적 유전자`라든지 ‘메이팅 마인드’, ‘섹스의 진화’ 등등 여기 저기서 익히 들어왔던 내용들이어서 전혀 새로운 정보랄만 한 건 없었지만 단지 한 챕터를 읽는 와중에도 그렇게 머릿속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것들이 차분하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은혜로운 경험을 주는 책을 사지 않는건 또 일종의 죄악이 아닐까 싶어서……..일찌기 칼 포퍼는 반증 가능한 것이 과학이라 하였다. 실증적 근거 없이 오로지 내적 논리에만 의존했던 프로이트 심리학은 따라서 과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화심리학은 무엇보다 검증 가능한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지향이 지금과 같이 형성된 진화적 압력을 다루는 일종의 메타이론이다. 즉 현재의 우리가 보이는 행동의 기저에 진화를 통해 적응한 심리기제가 있다는 것. 그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단연 성과 짝짓기 문제다. 남혐/여혐 논쟁으로 온통 시끄러울 때 몇 권의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하나로 수렴했는데 그것은 ‘애초에 왜 판이 그렇게 짜였는가?’라는 것이었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통제하게 된 그 기원 말이다. 진화심리학이 제공하는 설명은 그것이 단지 완력 같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유전적 이익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남성은 왜 여성보다 폭력적인가. 여성은 미래의 배우자에 대해 소득과 지위에 집착하는 반면 남성은 왜 육체에 집착하는가. 등등.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자연주의의 오류(어쩌면 유혹)를 사뿐히 즈려밟고 넘는다면 진화심리학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과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을 읽으며 놀란건 우리는 스스로 이성으로 본능을 다스리고 있는 고고한 존재라 여기지만 우리는 기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본능의 영향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무수한 통계와 실험 결과들이 실제로 그렇게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보면 코르사코프 증후군에 걸린 환자의 일화가 나오는데 그는 기억상실과 그로 인한 공백을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서 채운다. 뇌가 합리화와 자기기만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저 끊임없이 좀 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