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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박태원 지음, 이상 그림 / 소전서가 / 2023년 10월
평점 :
[도서협찬] 전차는 덜컹거리고,
한 남자가 아무 목적 없이 도시를 걷는다.
90년 전 경성.
그는 대단한 일을 구하려 애쓰지도 않고,
거창한 인생의 결심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무심한 사람들을 스치고, 끝없는 생각에 잠길 뿐이다.
사실 읽는 내내 조금 답답했다.
왜 이렇게 망설이기만 할까.
왜 이렇게 머릿속만 복잡할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흑백의 문장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박태원의 집요한 문장은 구보의 예민한 자의식을 쫓고,
이상의 파격적인 삽화는 그 도시의 공기를 낯설고 날카롭게 비틀어 놓는다.
패션 잡지에 실어도 손색없을 만큼 현대적인 이상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이토록 무력한 구보의 하루가 실은 얼마나 치열한 예술적 투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흑백의 선 위로 이상의 천재성이 강렬한 칼라처럼 번뜩이는 기분이다.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끝내 섞이지 못하는 마음.
생각은 넘치는데 행동은 멈춰 있는 상태.
1930년대 지식인의 초상은 어쩐지 지금 우리의 하루와도 너무 닮아 있다.
이 소설은 거창한 메시지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툭, 묻는 것 같다.
“사건이 없으면, 성과가 없으면, 그 하루는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
책 뒤편의 대담을 읽고 나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하루였지만, 적어도 그는 방 안에만 머물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 고독을 견디며 한 발짝씩 내디딘 기록이 결국 이 눈부신 고전이 되었다는 것을.
시대를 앞서간 두 천재의 우정은 시릴 만큼 아름답다.
아쉬움은 남지만, 덕분에 나는 오늘 나의 고독을 조금 더 사랑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답답했고,
그래서 나는 더 많이 부러웠다.
도서를 지원해 주신 소전소가 출판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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