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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 '인권 감수성'이 부재한 시대 -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안일과 농사일을 돕다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왔다. 두 살 많은 이모는 이미 상경해 청계천 방직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머니도 같은 공장에 취직해 언니와 공장 언니들과 함께 두 평 남짓 벌집방에서 살게 됐다. 공장 동료들은 거의 또래의 여자아이들이었다. 나이도, 배움도, 집안 사정도 비슷비슷했다. 어린 여공들은 직장 생활이 원래 그런 건 줄 알고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일만 했다. 방직기계가 내뿜는 열기 때문에 덥다 못해 미칠 지경이었고, 안 그래도 짧은 스커트를 최대한 걷어 올리고 일을 해도 팔꿈치와 허벅지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뿌옇게 먼지가 날려 폐병을 얻는 이들도 많았다. 잠깨는 약을 수시로 삼켜 가며 누런 얼굴로 밤낮없이 일해서 받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 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딸들은 기꺼이 남자 형제들을 뒷바라지했다.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34-35쪽.
지난 8월 17일, 격주로 진행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조남주 작가님의 소설,『82년생 김지영』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정, 학교, 사회 그 모든 곳에서,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남성과는 다른,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각이 드러난다.
‘성 불평등’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지는 임신과 출산에 따른 경력단절과 유리천장 문제만이 아니다. 저자는 김지영씨를 통해 학창시절의 출석번호에서부터 본질적 의문을 던진다. - ‘왜 남학생의 출석번호가 늘 여학생의 앞에 놓일까?’ -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남자 아이들이 먼저 줄을 서고, 먼저 이동하고, 먼저 발표하고, 먼저 숙제검사를 받는 동안 여자이이들은 조금은 지루해하면서, 가끔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을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 듯이.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46쪽.
‘가계(家系)’를 잇고, ‘제사(祭祀)’를 받든다는 명목 하에서, 남아선호사상에 이어진 일상 속의 자연스러운 차별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미 ‘관행’처럼 다가온다. 김지영 씨를 첫 손님으로 태운 택시기사님의 불평,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부모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며느리, 어느 때고 도사리는 성범죄의 위험들 – 이는 비단 70-80년대에서 국한되는 ‘과거’가 아닌, 2017년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문제이다. 특히, 작품에 소개되는 김지영 씨가 겪은 일들 중 적어도 한 가지쯤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겪기 마련이라는 점은 씁쓸함을 낳는다.
최근 여성 인권이 신장되고, 성 불평등에 대해 문제를 인식하고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여성의 고등교육(대학교육)과 사회 활동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며, 고용할당제가 도입 되는 등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답보하고 있다. 추석을 앞둔 지금, 아직도 차례 음식 준비로 걱정하는 것은 여성(가정주부) - 어머니-들의 몫이며, 가사노동과 육아 전반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여성들이다. 최근 ‘여성의 병역 의무’와 관련된 청원이 기사화되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는데, ‘의무’를 논하기에 앞서 여성들에 대한 평등이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평등’의 개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사회적 성찰과 논의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의식적으로라도 가사와 육아 전담, 임신과 출산에 따르는 고용 불안정(경력단절과 유리천장)과 피임 등 생명에 관한 문제를 ‘공동의 책임’이 아닌 ‘여성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바깥 일 하는 사람’이라는 데에 방점을 두며 일방적 권위를 가지려 했던 것은 아닌지.
“손목 많이 쓰지 말고 잘 쉬어. 어쩔 수 없지 뭐.”
“애 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손목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김지영 씨가 푸념하듯 낮게 말하자 할아버지 의사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의사는 모니터에 쓴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흝어 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148-149쪽.
결국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의 핵심은 ‘내 일이 아니라는’ 무관심과 공감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김지영 씨의 남편 정대현 씨를 통해, 그리고 소설의 결말부 정신과 의사의 언행을 통해 이 점이 분명히 재확인된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145-146쪽.
“그냥 하나 낳자. 어차피 언젠가 낳을 텐데 싫은 소리 참을 거 없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낳아서 키우자.” 정대현 씨는 마치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말했다. 적어도 김지영 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135쪽.
아내는 여전히 초등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고, 나는 아내가 그보다 더 재밌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거밖에 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 김지영 씨도 그랬으면 좋겠다.
(중략)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174-175쪽.
결말에서 보이듯 자신의 아내가 육아문제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내담자인 김지영씨의 어려움과 아픔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정작 직장 내 여성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그것이 차별인지도 모른 채 자연스레 행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의 언행은 씁쓸함을 낳는 한편 또한 작품의 현실성을 증대하는 역할을 한다. 가족, 친척, 친구 등 가까운 사람의 차별에는 문제를 인식하고 공감할지 모르지만 자신이 일상과 사회 속에서 행하고 있는 만연한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기실 ‘파편화’되고 ‘분절’된 현대 사회 안에서 타인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행동이다. 그러나 문제를 인식하는 데에서 나아가 ‘공감과 변화를 위한 실천’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근본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다는 건, 그런 짓을 용서해 줄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대표님 생각부터 고치세요. 그런 가치관으로 계속 사회생활하시다가는 이번 일 운 좋게 넘기더라도 비슷한 일 또 터집니다. 그동안 성희롱 예방 교육 제대로 안 한 건, 아시죠?”
사실 김은실 팀장도 두렵고 지쳐 있었다. 김은실 팀장도, 강혜수 씨도, 함께 고민하고 있는 피해자들 모두 일이 빨리 마무리되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라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동안 피해자들은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156쪽.
작품에서 유일하게 공감과 실천적 노력을 병행하는 이가 바로 김은실 팀장이다. 물론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당연한 권리까지도 포기하는 모습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김은실 팀장은 자신의 일이 아닌, 김지영씨의 일임에도 두려움과 피해를 감수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저항하기까지 한다.
여성/남성을 막론하고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반응하기 위해서는 ‘약자(소수자)에 대한 인권감수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인권감수성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유년시절부터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명교육’ 및 ‘공감능력’의 교육과 ‘가치관의 질서’를 확립하는 교육(인격교육)을 우선하는 교육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특히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통해 ‘발레리노’(발레를 하는 남성)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에 대해 논의하거나 <앨저넌에게 꽃을>과 같은 문학작품을 읽고 지적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 등을 떠올리는 등, 이 과정에서 좋은 문학작품과 영화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이러한 교육방법에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한다.
92년생인 내가 지금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내가 경험한 여성에 대한 차별에 고개를 끄덕이며 결혼 이후 찾아올 수 있는 육아 문제 등에 대해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것과는 달리, 2002년생, 2012년생이 20대, 30대가 되어 이 소설을 읽을 때 즈음에는 ‘이런 시대도 있었냐’며 반문하는 사회가 되기를 진실로 소망한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김지영 씨는 혼인신고를 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