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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의 미학 - 누워서 노닐다 그리며 노닐다 ㅣ 대우휴먼사이언스 2
조송식 지음 / 아카넷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저는 『산수화의 미학』을 읽으며 생각보다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었습니다. 유, 불, 도로 대표되는 동양사상, 익숙하지 않은 용어 등과 끊임없이 마주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상, 용어들이 이 책의 주제와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책에 대한 흥미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독자들의 경우에는 이 책을 읽으며 다소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별적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기대했던 바와 책의 내용이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총 65점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개별적 작품들에 대한 소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자의 논의를 뒷받침하는 예시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산수화 작품 그 자체보다는 산수화의 예술적 의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독자 스스로 산수화를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출 수 있기를 기대했다면, 독자는 우선 저자가 산수화에 대하여 하고 있는 말에 주의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산수화의 미학』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1장부터 4장까지는 산수화의 미학적 요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학술적 배경지식에 해당합니다. 5장부터 7장까지의 후반부는 제목의 부제에 해당하는 ‘누워서 노닐다, 그리며 노닐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전반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는 것은, 전반부의 학술적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낮더라도 저자가 하는 말을 따라가기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핵심어인 ‘와유(臥遊)’에 대한 설명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전반부에서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는 독자라면 후반부부터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 글에서는 1장부터 4장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며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장의 서문에서 저자는 위진남북조시대를 동아시아에서 예술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시대로서 규정합니다. 이전 시기의 예술작품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했던 것은 그 작품 속에 형상화된 우주관, 세계관 등이었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 작품을 통해 삶에 대해 반성하거나 그 자체를 탐닉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후한 말에 이르면 사람들은 예술의 심미적 가치를 자각하게 됩니다. 예술이 그 자체로 탐닉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 다뤄지게 된 것입니다. 문자의 경우, 고대 사회에서는 문자에 자연의 이치가 담겨 있다고 여겼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쓰기 쉽게 만들어진 초서는 일반적 문자와 달리 그러한 이치를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가르침과 무관하게 초서 자체에 매료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곧 초서를 심미적으로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후한 말에서 위진 시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삶에 대한 시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혼란한 시기를 겪으며 사람들은 유한한 삶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인생 자체에 대한 반성, 그에 대한 감정 등을 그림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예술은 독립적 가치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위진시대 현학은 예술과 긴밀한 관련을 맺게 됩니다. 세속적 가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특성을 지닌 현학적 세계관은 예술에도 그들의 세계관을 적용하였습니다. 예술을 도덕적, 정치적 영역에서 분리하여 자율성을 획득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현학은 유한한 삶을 부정하며 무한으로의 초월을 추구합니다. 대표적 학자인 왕필은 세계를 일시적 현실인 유(有)와 영원불변의 세계인 무(無)의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 무(無)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유(有)에 해당하는 상(象, 이미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왕필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에 근거하여 그들은 ‘상에서 시작하여 유를 초월함으로써 무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하였지만,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육체를 통해서는 무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정신을 통해서는 무의 경지를 상상함으로써 자유롭게 현실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유에 해당하는 만물을 창작자의 정신 속에서 재구성하여 나타낸 것이 곧 작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결국 창작자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이 시기의 창작론은 ‘상상력의 작용’을 강조하게 됩니다.
2장의 서론에 따르면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산수화가 독립적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산수는 인물의 정신이나 성격을 반영하는 배경의 역할을 할 뿐 감상물 자체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종병은 『화산수서』라는 산수화 이론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삶의 유한함에 대한 두려움, 회의 등을 극복하기에 현학은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당시 새롭게 들어온 불교가 그들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습니다. 종병은 사대부였지만 불교의 이론에 매료되었고, ‘불(佛, 곧 정신)은 소멸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정신은 형체와 다르며 형체가 소멸하여도 정신은 다른 형체로 전이될 뿐 불멸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정신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체 사물이 본래 ‘공(空)’임을 깨달아 마음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마음의 작용인 인식을 제거하면 정신이 맑아져 극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종병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여 종병은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을 강조하였고, 인식을 제거하고 정신을 맑게 할 수 있는 곳으로서 산수를 강조하기에 이릅니다. 종병은 공허한 자연에서 정신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공허하다는 것은 내실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영향을 받을 일이 없다는, 긍정적 의미를 지닙니다. 저자는 종병이 산수의 공허함 속에서 부처의 형상을 볼 수 있다고 말한 것과 다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종병은 산수를 관조하거나 산수화를 그리는 방식으로나마 산수를 감상하는 것이 부처의 형상에 합치되는 방편이라고 여겼으며, 화가 자신에게 있어서는 창작이 곧 성인이 되기 위한 행위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3장에서 저자는 동아시아 산수화가 와유하며 정신의 자유를 누리고, 그림의 사회적 인식을 고양시키며, 표현 매체를 계속해서 발견해 나아가고, 와유에 대한 실천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산수화에서 와유를 실현하기 위한 매체와 기법에 해당하는 것이 곧 ‘용필(用筆, 붓을 쓰는 방법)’, ‘용묵(用墨, 묵을 쓰는 방법)’입니다. 당나라 이전에 붓을 사용하여 선을 긋는 것은 외형적 윤곽선의 의미에 해당합니다. 이에 비해 당나라 때의 용필은 화가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서예와 그림의 붓을 쓰는 방법을 동일하게 하는 ‘서화용필동법’은 기법적인 측면에서 서예의 필선을 그림에 응용한 것입니다. 내외를 구분하는 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화가의 감정을 전달하는 형식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한 학자가 서예가를 ‘도의 실천자’로 규정한 것에 동의하며 당시 서예가들의 용필에는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다고 주장합니다(143쪽). 그림에서 붓을 쓰는 것 역시 서예와 다르지 않으며, 창작자가 붓을 쓰는 과정에서 어떠한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마음이 한 획 한 획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획 속에 반영된 창작자의 기운이 완성된 작품 속에 온전하게 남아 감상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자가 설명한 용필은 결국 창작자가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는 방식에 해당합니다. 감상자는 와유하며 작품 속에서 감상자가 펼쳐 놓은 기운을 전달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가 4장의 서론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먹의 사용에 따라 표현을 다채롭게 하는 것은 중당(中唐) 이전에는 없던 기법입니다. 먹을 사용함은 자연을 작품 속에서 형상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예를 들면 취운(吹雲)법은 먹을 불어 표현하는 것으로서 우연성에 기댄 묵의 사용 방식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화육법에서 벗어난 표현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4장에서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품화풍, 육요 등이 그에 해당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에 대한 내용은 독자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전문적인 내용입니다. 책의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에 반드시 알아야 하는 부분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누워서 노닐다, 그리며 노닐다’에 있기에 그 조형 매체인 묵에 대해서는 깊게 파고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화육법, 품등론, 그 외 여러 용어들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는 이 내용을 이해하려다 정작 용묵이 어떻게 와유의 조형 매체가 된다는 것인지 그 흐름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3장과 4장의 내용이 이 책에서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제가 말씀 드린 내용에 한하여 책을 읽는다 하여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