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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멸치, 제국의 멸치 - 멸치를 통해 본 조선의 어업 문화와 어장 약탈사 대우휴먼사이언스 3
김수희 지음 / 아카넷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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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부터 6장까지는 조선이 일본에게 ‘당했던’ 어장 약탈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당했던’이라는 말에 작은따옴표를 쓴 이유는, ‘당했던’이라는 말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이러한 시각이 객관적인 것만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두 가지를 언급하자면, 하나는 역사라는 것은 실증으로서의 역사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역사는 ‘실제 있었던 그대로인 사실’에 입각하여 과거를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실제 역사가 그러한 방식으로 객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역사가 특정한 입장으로 편향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잘못된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가 역사가의 시각에 따라 해석되고 기술된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의 선택에 가치를 지니게 되며, 역사가의 기술에는 그 역사가의 가치관, 역사관 등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된 역사가 어떤 가치, 이념 등을 담고 있는지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역사를 중립적이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하여서 모든 역사적 해석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한 해석 간에도 ‘어떤 관점에서 사료를 선택했으며 그러한 선택은 타당한 것인지, 사료와 해석 간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등’에 대한 담론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저는 후자의 입장이 역사를 바라보는 진지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저자가 다케우치의 ‘개발 성장론’을 비판하는 부분(195-200쪽)에서 이러한 관점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저자는 이 절의 제목을 ‘개발 성장론의 논리 비약’이라고 하였습니다. ‘비약’에는 사전적으로 ‘논리나 사고방식 따위가 그 차례나 단계를 따르지 아니하고 뛰어넘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저자는 다케우치의 논리가 어느 부분에서 근거에서 벗어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저자는 “다케우치가 현재 한국의 남획적 어업 현상을 식민지 개발 원리로 해석한 발상은 적절한 지적”(197쪽)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총독부의 개발 정책이 해방 이후 한국 어업정책에까지 반영되어 무분별한 어장 개발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어장 개발의 주체를 일제강점기 명태어업을 경영한 조선의 어민으로 지적한 다케우치의 주장에 대해 반박합니다. 다케우치는 남획의 주체가 조선인 자본가임을 주장하였으나, 저자는 일제강점기 명태어장을 개발하고 명태어업을 주도한 것이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수산정책이 ‘저임금 노동력인 조선인을 이용하여 일본 시장으로 값싼 수산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신문기사 등 여러 자료를 근거로서 제시합니다. 다케우치의 주장과 달리 저자는 ‘당시 어장을 독점한 것은 자본과 기술을 가진 일본인 자본가였으며 명태어장도 일본인 독점 어업’이었음을 책 내에서 설득력 있게 주장한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해방 이전에 남획적 어업 현상이 있었고 그러한 현상이 해방 이후 한국 어업정책에서도 나타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해방 이전의 남획은 일본인 자본가(또는 총독부)에 의해 주도된 것이며 그러한 어업현상은 여전히 ‘수탈론’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남획적 어업현상을 해방 후 한국의 개발정책에 대한 원형으로 보는 것은(또는 연장선으로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는 것이 저자의 입장입니다. 다케우치와 저자는 ‘해방 이전 어업을 주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목적으로 어업에 종사했는지’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저는 저자의 주장이 보다 더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다케우치의 ‘개발 성장론’은 ‘근대화론’의 변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케우치가 말한 ‘식민지의 잔재성’(197쪽)이라는 것은, 약탈에 의해 이미 황폐화된 어장을 통해서는 살아남기 어려웠던 해방 후 한국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개념처럼 보입니다.

저자는 책의 부제에서 ‘약탈’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원래 우리 것이었던 수산물을 억지로 빼앗겼다는 시각이 반영된 것입니다. 저자는 당시 조선의 어장이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여러 사료들을 제시하였고 그 사료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지 보여주었습니다. ‘통어(通漁)’에 대한 해석도 한 예입니다. 저는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저자는 ‘민란에서 드러나는 제주 사회의 종속성’, ‘멸치어구를 불태운 의병들’이라는 절에서 국가의 독립보다도 생계를 더 중시한 백성들의 모습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숨기고 싶은 모습인 이러한 사실을 언급한 것은, 저자의 해석이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식민어촌’, ‘통어’ 등 여러 문제들을 언급하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어장 약탈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성장 발전론’에 대한 저자의 반박을 중심으로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저자의 명확한 입장은, 그 입장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 그 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하였고 책의 내용을 보다 꼼꼼하게 보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았다면 ‘개발 성장론’의 함의 등을 이해하는 것은 다소 어려웠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처럼 무거운 문제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부록」처럼 가볍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글을 함께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독자의 긴장을 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긴장 속에서 책을 읽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책장을 넘기니,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독서에 의한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멸치에 대한 소소한 지식, 잡다한 이야기(부록), 식민시기 조선의 어업 문화, 일본이 조선의 수산물을 통제하고 이용한 방식 등에 대해 알고자 하는 분께 이 책을 권합니다.



덧.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균형을 유지하며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밝히려 한 저자의 논의가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몰랐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서도 알 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차후 다시 한 번 글을 쓰겠습니다. 그 때는 지금 놓친 부분들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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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멸치, 제국의 멸치 - 멸치를 통해 본 조선의 어업 문화와 어장 약탈사 대우휴먼사이언스 3
김수희 지음 / 아카넷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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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어렵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게 다룬 책입니다. 달리 말하면 학술적인 내용을 교양서의 취지에 맞게 잘 풀어서 쓴 책입니다. 내용이 산만하지 않아 집중하여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 총 10개의 부록, 사진 자료 등은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수탈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책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본의 수탈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어려운 개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는 내용도 없습니다. 사료에 대한 저자의 설득력 있는 설명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를 참고하는 것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사항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간명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적절한 사료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스스로 비판적 읽기를 하지 않으면 저자가 하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비판적’이라는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합니다. ‘비판적’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반대, 비난 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논의가 얼마나 타당한 지를 검토하고,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읽는 것. 이러한 독서가 ‘비판적 읽기’의 기본입니다. 단지 나와 의견이 같기 때문에 저자의 논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거나,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반대를 하는 것은 독서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입니다. 독서가 끝난 후 독자는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수용하며 독자 자신의 견해를 여전히 견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경우들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체적 독서입니다. 저자의 주장과 근거가 독자 자신의 견해에 확실성을 더 해준다거나, 자신의 견해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그러한 것들이 독서의 의의이며 이러한 독서는 비판적 읽기에 의해 가능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이 책에 대해서는 책소개에 그 전체적인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저는 같은 내용을 반복하기 보다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관련하여 저자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에 중점을 둘까 합니다.

우선,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앞의 1장과 2장은 조선에서 멸치를 다룬 방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 시대에 멸치는 ‘바다에 사는 작은 물고기’를 의미하였다고 합니다. 말린 멸치가 유통되면서 멸치에는 ‘말린 물고기’라는 의미가 더해졌습니다. 저자는 멸치 이외에도 반지(반당어)나 밴댕이에 대해서도 소개하며 조선 시대 어업의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멸치뿐만 아니라 명태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이 책은 멸치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 어업의 대략을 서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2장에서는 조선시대 어획 방식을 다루었습니다. 빛에 반응하는 멸치의 습성을 이용하기도 하고, 소리를 이용하여 일종의 ‘난타극’을 벌였다는 등의 설명은 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을 만큼 상세하였습니다. “바다 위에서 큰 소리를 지르고 발을 쿵쿵 차고 무작정 두들기지만 가락이 있고 흥이 있는”(54쪽) 등의 서술은 제가 마치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할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흥미 있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을지 고심한 저자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묘사 덕분에 “우리의 전통 어업에는 재미와 흥과 놀이가 숨어 있다”(55쪽)는 저자의 말도 설득력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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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의 미학 - 누워서 노닐다 그리며 노닐다 대우휴먼사이언스 2
조송식 지음 / 아카넷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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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5장에서 송대(宋代)를 산수화가 본격적으로 성행한 시대로 설명합니다. 이는 해당 시기의 정치, 철학, 예술의 주체인 사대부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대부들의 의식세계와 출사관(出仕觀)이 산수화에 반영되며 와유에 대한 관념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사대부는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통해 우주의 이치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 이치에 대한 앎은 사대부 개인의 삶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실천으로써 사회에 적용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앎이 되어야 합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시대 상황에 따라 세상에 나아가서 벼슬을 하거나 자연으로 물러나 은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출사관은 사대부에게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갈등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대부는 두 자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산수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그 결과 송대에는 산수화가 와유 산수화가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개인적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자연에서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과 사회로 나아가 벼슬하며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의 갈등. 사대부는 이 갈등 상황에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도리를 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자아를 충족하는 것 또한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은 산수를 그려 이를 감상함으로써 창신하고자 했습니다. 저자는 조선 초 「몽유도원도」를 사례로 제시합니다. 당시 안평대군은 자신이 직접 이룰 수 없는 꿈을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여 해소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처럼 자연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지만 궁궐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의 상황을 산수화로서 풀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화가가 다음 세 가지를 고려해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고 말합니다. 첫째, 생동감을 구현하기 위해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것. 둘째, 직접 그곳에서 ‘노닐며 지낼’ 수 있게 하는 체험 방식을 고려할 것. 셋째, 정신을 해방시켜 도(道)와 일치할 수 있게 할 것 등등. 이 세 가지는 산수화가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조화를 도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산수화는 시각적 감상물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신이 그 안에서 소요(逍遙)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저자는 이를 “감상자는 산수화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어야 한다(245쪽)”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와유는 개인적 자아의 방종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사회 규범의 틀 안에서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던 것입니다.

6장에서 저자는 동아시아 회화를 문인화(여기화)와 화원화(직업화)로 구분하는 방식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문인화는 문장가, 학자들이 취미삼아 자신의 뜻을 그림에 의탁한 결과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화가로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대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여기(餘技)로서 문장, 서예, 회화 등을 즐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사대부들은 문인화로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직업화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송대에 들어서면 회화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직업화가가 그린 ‘남을 위한 그림’과 그림을 통해 도덕적 완성을 추구한 ‘나를 위한 그림’입니다. 문인화는 ‘나를 위한 그림’에 해당합니다. ‘나를 위한 그림’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가 감상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창작자는 붓의 한 획 한 획에 자신의 뜻을 담아 펼쳐내며 그 자체로서 수양을 도모합니다. 획과 점이 모여 완성된 작품은 창작자의 뜻이 반영된 자연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3장에서 다루었던 ‘서화용필동론’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필과 더불어 용묵도 창작자의 뜻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회화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자가 3장, 4장에서 각각 용필과 용묵에 대해 논의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3장, 4장을 꼼꼼하게 읽으신 독자는 6장의 논의를 보다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석도의 예술론을 설명하며 와유 사상에 대해 다룹니다. 석도는 그림을 “우주 만물의 본체인 일획을 통해 자신 속의 일획을 활성화시켜 이를 펼치면서 필묵으로 소요유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방점은 ‘소요유’에 있습니다. ‘정신이 스스로 우주의 이치와 합일하며 자유롭게 노니는 것’으로서 산수화를 규정한 것입니다. 그에게 자연을 관찰하고 그 자연을 붓, 먹 등으로써 표현하는 일련의 실천은 곧 자아를 깨닫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산수화는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순수한 자유의 경계로 나아가는 수양이었던 것입니다. 석도가 ‘자신 속에 있는 일획으로서의 마음’과 ‘이를 펼쳐 소요유하는 실천으로서의 몸’이 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는 마음 속 일획을 깨달아 회화의 원칙으로 삼고 주체적으로 그려나간다면, 대상과 어리석음의 구속에서 벗어나 세속으로부터 초월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곧 성인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에게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 추구되는 것, 자아 완성의 수행, 성인이 되는 학문입니다. 석도에 이르러 산수화는, ‘나를 위한 그림’으로서 세상의 유한함 속에서 무한함에 이르는 공간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곧 와유 산수화의 궁극적 의미라고 결론 내립니다.

『산수화의 미학』의 대략적인 논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도 많습니다. 제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와유’에 초점을 두고 큰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반부에서 다뤄지고 있는 내용은 ‘와유’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으로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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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의 미학 - 누워서 노닐다 그리며 노닐다 대우휴먼사이언스 2
조송식 지음 / 아카넷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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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산수화의 미학』을 읽으며 생각보다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었습니다. 유, 불, 도로 대표되는 동양사상, 익숙하지 않은 용어 등과 끊임없이 마주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상, 용어들이 이 책의 주제와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책에 대한 흥미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독자들의 경우에는 이 책을 읽으며 다소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별적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기대했던 바와 책의 내용이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총 65점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개별적 작품들에 대한 소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자의 논의를 뒷받침하는 예시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산수화 작품 그 자체보다는 산수화의 예술적 의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독자 스스로 산수화를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출 수 있기를 기대했다면, 독자는 우선 저자가 산수화에 대하여 하고 있는 말에 주의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산수화의 미학』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1장부터 4장까지는 산수화의 미학적 요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학술적 배경지식에 해당합니다. 5장부터 7장까지의 후반부는 제목의 부제에 해당하는 ‘누워서 노닐다, 그리며 노닐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전반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는 것은, 전반부의 학술적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낮더라도 저자가 하는 말을 따라가기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핵심어인 ‘와유(臥遊)’에 대한 설명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전반부에서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는 독자라면 후반부부터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 글에서는 1장부터 4장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며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장의 서문에서 저자는 위진남북조시대를 동아시아에서 예술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시대로서 규정합니다. 이전 시기의 예술작품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했던 것은 그 작품 속에 형상화된 우주관, 세계관 등이었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 작품을 통해 삶에 대해 반성하거나 그 자체를 탐닉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후한 말에 이르면 사람들은 예술의 심미적 가치를 자각하게 됩니다. 예술이 그 자체로 탐닉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 다뤄지게 된 것입니다. 문자의 경우, 고대 사회에서는 문자에 자연의 이치가 담겨 있다고 여겼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쓰기 쉽게 만들어진 초서는 일반적 문자와 달리 그러한 이치를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가르침과 무관하게 초서 자체에 매료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곧 초서를 심미적으로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후한 말에서 위진 시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삶에 대한 시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혼란한 시기를 겪으며 사람들은 유한한 삶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인생 자체에 대한 반성, 그에 대한 감정 등을 그림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예술은 독립적 가치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위진시대 현학은 예술과 긴밀한 관련을 맺게 됩니다. 세속적 가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특성을 지닌 현학적 세계관은 예술에도 그들의 세계관을 적용하였습니다. 예술을 도덕적, 정치적 영역에서 분리하여 자율성을 획득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현학은 유한한 삶을 부정하며 무한으로의 초월을 추구합니다. 대표적 학자인 왕필은 세계를 일시적 현실인 유(有)와 영원불변의 세계인 무(無)의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 무(無)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유(有)에 해당하는 상(象, 이미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왕필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에 근거하여 그들은 ‘상에서 시작하여 유를 초월함으로써 무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하였지만,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육체를 통해서는 무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정신을 통해서는 무의 경지를 상상함으로써 자유롭게 현실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유에 해당하는 만물을 창작자의 정신 속에서 재구성하여 나타낸 것이 곧 작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결국 창작자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이 시기의 창작론은 ‘상상력의 작용’을 강조하게 됩니다.

2장의 서론에 따르면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산수화가 독립적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산수는 인물의 정신이나 성격을 반영하는 배경의 역할을 할 뿐 감상물 자체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종병은 『화산수서』라는 산수화 이론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삶의 유한함에 대한 두려움, 회의 등을 극복하기에 현학은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당시 새롭게 들어온 불교가 그들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습니다. 종병은 사대부였지만 불교의 이론에 매료되었고, ‘불(佛, 곧 정신)은 소멸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정신은 형체와 다르며 형체가 소멸하여도 정신은 다른 형체로 전이될 뿐 불멸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정신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체 사물이 본래 ‘공(空)’임을 깨달아 마음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마음의 작용인 인식을 제거하면 정신이 맑아져 극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종병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여 종병은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을 강조하였고, 인식을 제거하고 정신을 맑게 할 수 있는 곳으로서 산수를 강조하기에 이릅니다. 종병은 공허한 자연에서 정신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공허하다는 것은 내실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영향을 받을 일이 없다는, 긍정적 의미를 지닙니다. 저자는 종병이 산수의 공허함 속에서 부처의 형상을 볼 수 있다고 말한 것과 다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종병은 산수를 관조하거나 산수화를 그리는 방식으로나마 산수를 감상하는 것이 부처의 형상에 합치되는 방편이라고 여겼으며, 화가 자신에게 있어서는 창작이 곧 성인이 되기 위한 행위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3장에서 저자는 동아시아 산수화가 와유하며 정신의 자유를 누리고, 그림의 사회적 인식을 고양시키며, 표현 매체를 계속해서 발견해 나아가고, 와유에 대한 실천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산수화에서 와유를 실현하기 위한 매체와 기법에 해당하는 것이 곧 ‘용필(用筆, 붓을 쓰는 방법)’, ‘용묵(用墨, 묵을 쓰는 방법)’입니다. 당나라 이전에 붓을 사용하여 선을 긋는 것은 외형적 윤곽선의 의미에 해당합니다. 이에 비해 당나라 때의 용필은 화가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서예와 그림의 붓을 쓰는 방법을 동일하게 하는 ‘서화용필동법’은 기법적인 측면에서 서예의 필선을 그림에 응용한 것입니다. 내외를 구분하는 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화가의 감정을 전달하는 형식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한 학자가 서예가를 ‘도의 실천자’로 규정한 것에 동의하며 당시 서예가들의 용필에는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다고 주장합니다(143쪽). 그림에서 붓을 쓰는 것 역시 서예와 다르지 않으며, 창작자가 붓을 쓰는 과정에서 어떠한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마음이 한 획 한 획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획 속에 반영된 창작자의 기운이 완성된 작품 속에 온전하게 남아 감상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자가 설명한 용필은 결국 창작자가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는 방식에 해당합니다. 감상자는 와유하며 작품 속에서 감상자가 펼쳐 놓은 기운을 전달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가 4장의 서론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먹의 사용에 따라 표현을 다채롭게 하는 것은 중당(中唐) 이전에는 없던 기법입니다. 먹을 사용함은 자연을 작품 속에서 형상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예를 들면 취운(吹雲)법은 먹을 불어 표현하는 것으로서 우연성에 기댄 묵의 사용 방식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화육법에서 벗어난 표현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4장에서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품화풍, 육요 등이 그에 해당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에 대한 내용은 독자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전문적인 내용입니다. 책의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에 반드시 알아야 하는 부분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누워서 노닐다, 그리며 노닐다’에 있기에 그 조형 매체인 묵에 대해서는 깊게 파고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화육법, 품등론, 그 외 여러 용어들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는 이 내용을 이해하려다 정작 용묵이 어떻게 와유의 조형 매체가 된다는 것인지 그 흐름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3장과 4장의 내용이 이 책에서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제가 말씀 드린 내용에 한하여 책을 읽는다 하여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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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미래 - 반종교와 무신론을 넘어서 대우휴먼사이언스 1
이태하 지음 / 아카넷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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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을 독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좋은 방법은 그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며 읽는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주장은 무엇인지, 숨겨진 전제는 없는지, 주장에 대한 근거는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근거와 주장이 타당하게 연결되었는지 등을 검토하여 저자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동의를 표하는 것. 이것이 대략적인 비판적 읽기입니다. 저자가 하는 말이 상식처럼 보이고, 평소 당연하다고 여겼거나 자신의 가치관과 부합하는 것이더라도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예민하게 책을 읽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단어는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 쓰인 걸까?’, ‘이 주장이 내 생각하고 같긴 한데 과연 이러한 방식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등의 의문을 의도적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저자가 책에서 하고 있는 말은 저자 스스로 이미 많은 시간 고민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정당한 논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저자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게 되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종교의 미래』에도 그러한 소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가지 사항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저자는 2장의 1절에서 주커먼의 주장을 언급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주커먼은 종교가 선한 사회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56쪽 참조). 이에 대해 저자는 세 가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주커먼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기에는 조사 대상인 149명이 적은 숫자라는 것, 지금의 이상적 사회[흔히 말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건설하는데 종교[저자는 이 종교가 기독교라고 말합니다]의 역할이 있었을 것, 종교의 교리는 경건한 삶의 실천인데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이야말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니 말로만 믿는 사람들보다 더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반박에 대해서는 재반박이 가능합니다.

우선, 조사 대상이 몇 명이어야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인터뷰 방식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149명은 충분한 표본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명을 인터뷰했는가보다 어떻게 인터뷰했는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종교가 이상국가 건설에 일정한 역할을 끼쳤을 것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합니다. ‘그렇다’ 또는 ‘아니다’에서부터 ‘그렇기는 하지만 그 영향은 부정적이었다’는 답변도 가능합니다. 저자는 종교를 둘러싼 전쟁을 다룰 때면 그것이 종교 자체에는 포함되지 않는 부수적 현상인 것처럼 언급합니다. 그러나 저는 종교 간 발생하는 갈등은 종교의 본질인 배타성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국가 건설에 종교가 영향을 끼쳤는가의 문제는 역사적 자료에 대한 해석과 역사관에 따라 달리 이야기될 문제입니다.

저자는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관습과 제도가 종교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들 국가에 종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주장합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 주커먼에 따르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관습일 뿐입니다. 저는 주커먼의 이러한 해석에 동의합니다. 저자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적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지 어떤 초월적 존재는 믿고 있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 저자의 추측입니다. 그들은 초월적 존재자를 믿기에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이 선한 삶을 사는 것과 저자가 규정한 종교적 삶을 동일시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친절하거나 스스로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종교인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따르는 사회적 규약, 윤리, 제도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여야 할 당위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자는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지 묻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61쪽). 그가 보기에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은 “그저” 그들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봉사활동을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반성의 계기가 될 고난도 없었고 문명과 복지의 혜택을 누리기에 그들 대부분은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해 진지한 관심과 깊은 성찰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우선 우리가 관습에 따라 산다고 해서 그것이 반성 없는 삶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서 관습 자체에 대한 반성, 수정, 보완 등이 일어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에 고난이 없었는지,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지 등의 문제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이곳에서 저자는 주커먼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주장과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차후 다시 한 번 읽어보려 합니다.]

저자는 도킨스, 허친스, 해리스 등을 이 시대의 대표적 무신론자로 규정합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저자가 이 책을 지은 주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인간의 본능과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 같은[종교가 삶의 무의미에서 벗어나 희망을 갖게 해준다는 것과 같은] 이해가 부족”합니다. 저는 인간에게 본능이라는 것이 있는지, 그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는 본능이라는 것을 허구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현대의 인간이 스스로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한성 때문에 모든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으며, 두려움에 의해 모든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앞서 저자가 제시한 학자들은 물리주의적 입장에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 합니다. 인간의 영혼, 자아 등도 뇌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개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체계 속에서 신의 실존이 부정되는 것은 그들의 이론 체계 내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입장을 무식하다거나 유치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차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샘 해리스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그의 이론 체계 내에서는 합리적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논의의 입각점 자체가 다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을 이해했느냐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자는 이성으로써 종교를 몰아낸다면 그 자리에는 인간의 욕망이 들어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도덕이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국가가 들어설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196쪽). 이런 주장은 종교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저자는 기독교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저자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고 있으며, 종교가 국가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인 것처럼 말합니다. 저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종교의 교리는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선과 악을 나누고 금욕을 강조하는 것. 그러한 종교 자체가 사라진다면 우리의 선과 악에 대한 체계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인간의 욕망을 방종으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주장인지 의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도 일종의 ‘욕망’이라면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게 종교적으로 제재하는 것이 인간을 위해 올바른 것이기만 할지 의문입니다. 국가의 도덕성은 종교의 유무와 무관합니다. 가령,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윤리를 지지하는 것은 법의 힘이지 종교의 힘이 아닙니다. 그에 대해 종교가 긍정적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 어떤 국가에 도덕적 해이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종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다스릴만한 사회적, 정치적 합리성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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