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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평점 :
/읽은 기간/ 2017년 1월 2일~10일
/주제 분류/ 외국 에세이 (대담록)
/읽은 동기/ 지난달에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또 읽었다.
읽어도 또 좋구나, 앞으로도 자주, 많이 반복해서 읽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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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0년 로맹 가리가 죽기 몇 달 전, 라디오-캐나다의 「말과 고백」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구술 제작했고, 2년 뒤 1982년 2월 7일에 공개했다. 이 책에는 질문자는 없고 오로지 로맹 가리의 진술로만 엮어져 있다. 한 편의 자서전을 읽는 느낌이다. 전반부는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후반부 역시 로맹 가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충 아는 내용이다. 그래도, 작가가 처음부터 글로 써서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과, 입으로 진술한 것을 글로 옮겨 공개하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인터뷰를 한 것이니, 내용은 최대한 솔직하게, 하지만 그것을 담은 말은 최대한 예의 바르고 점잖다. (입으로 하는 직접 화법은 이렇게 직설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작가들이 소설을 통해, 간접화법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나 보다)
로맹 가리의 인생은, 그야말로 부침 많고, 우여곡절 그 자체의 인생이었다. 로맹 가리라는 한 사람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이다. 그래서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새벽의 약속』을 자서전이라 하지 않고, 자전적 '소설'이라고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생각일 뿐 오해하지 마시라)
로맹 가리의 어머니는 35살, 여자로서 한창일 나이일 때 여자로서의 삶은 포기하고, 어머니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그렇게 하나 뿐인 아들의 인생을 설계를 한다. "너는 커서 위대한 작가가 될 거야, 그리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사관이 되겠지." 그리고 어머니는 작가와 대사관 못지않게, 아들이 프랑스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프랑스 장교가 되길 바란다. 로맨틱한 남자, 목숨을 걸고 악랄하고 못된 적과 싸우는 남자! 물론, 진짜 전장에서 아들이 죽기를 바랐던 건 아니다. 딱, 몸이 성한 수준만큼 싸우기를 바람 - 이 부분은, 『새벽의 약속』에 나왔던 부분으로 기억한다.)
로맹 가리는, 어머니가 설계한 대로, 그 삶을 살았다. 어렸을 땐 정말 꿈처럼, 하나의 실현 불가능한 상상일 뿐이었는데 로맹 가리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걸었던 꿈과 기대를 하나씩 이루어 간다. 물론 중년 이후엔, 어머니로서는 전혀 뜻하지 않았던 할리우드 영화계로도 로맹 가리가 진출했지만, 이건 어떻게 생각해보면 연극배우였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몇 년간 살아 보았다고 해도 될 듯하다. (로맹 가리가 배우로써 연기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미국에 살 때 배우 제의는 받았따!)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스스로 삶을 살았다기 보다, 삶에 의해 살아졌다고.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어머니에 의해서,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폴란드의, 프랑스의 역사 부침에 의해서 일 것이다.)
11쪽. 내 삶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라고 하시는데, 난 내가 삶을 산 거라는 확신이 그다지 서지 않는군요. 오히려 삶이 우리를 갖고 소유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았다는 느낌이 들면 우리는 마치 스스로 삶을 선택이라도 한 것처럼, 자기 삶인 양 기억하곤 하지요. 개인적으로 나는 살면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 했습니다. 지극히 일반적이고 사적이며 일상적인 의미의 역사가 나를 이끌었고, 어떤 면에서는 나를 속여 넘겼지요.
109쪽. 이 대담 초반부에서 나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삶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삶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분명 우리는 삶에 조종당합니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미디어를 통해. 여러분의 카메라를 통해 대중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라는 기이한 현상은 사실 인간의 실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쓰는 모든 것에서 매일 나를 보지만 나는 내가 끌고 다니는 그 이미지 속에서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 합니다. 어쨌든 작가의 창작물과 작가 자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의 최고의 것을, 자기 상상에서 끌어낸 최고의 것을 책 속에 담고 그 나머지, 앙드레 말로의 표현대로라면 "한 무더기의 보잘것없는 비밀"은 홀로 간직하지요.
이 구술록은, 로맹 가리가 한 평생 어떻게 '살아졌'는지 차분히 그리고 담담하게 담고 있다. 그의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격앙된 목소리나, 어떻게 살아야겠는지 모르는 한 아이의 목소리는 없다. 그냥 경험 많은 중년 남성이 담담하게 자기 삶을 회고하고 있다. 그중에서 자기 인생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이나 존재(어머니와 드골)를 언급하고, 어떤 직업을 가졌었고, 어떤 일을 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그리고 자기의 책들이 세간의 말 혹은 비평가들의 말과 무엇이 어긋나는지 말한다. 문체(말투)는 담담하나, 결코 그의 인생까지 담담할 수 없다. 로맹 가리는 한 평생, 자기 삶을 살았고, 치열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삶에서 최대한 자기가 할 수 있는대로, 치열하게 삶과 맞서 싸웠음을.
46쪽. 우리는 많은 대원을 잃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밤마다 글을 썼습니다. 장교 네 명이 함께 스는 방에서 첫 소설 『유럽의 교육』을 썼지요. 끔찍이도 추웠는데 잠도 거의 자지 못 했습니다. 내가 새벽 2~3시까지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무대로 한 『유럽의 교육』을 쓰는 동안 동료들은 잠을 잤고, 6시나 7시 때론 5시 반이면 일어나 임무 수행에 나서야 했습니다. 거의 잠을 자지 못 했던 셈이지요. 나는 먼저 손으로 글을 쓴 다음에 두 손가락으로 어설프게 타자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내가 아직 영국에 있는 동안 영어로 번역 출간되어 프랑스 해방 전에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영미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거죠.
전쟁 중뿐만 아니라 외교 관련 일을 하며, 바쁜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짬을 내어 계속해서 글을 쓰고, 또 썼다. 그렇게 짧은 소설을 쓸 때도 있었고, 가끔은 어떤 일에 휘말리거나 상관의 오해 때문에 오랜 기간 일을 하지 못한 기간이 있었는데, 이럴 때 아주 긴 작품이 완성하기도 했다. 가령, 1956년에 공쿠르 상을 받은 『하늘의 뿌리』 같은 두툼한 책을 말이다. 책도 두툼하고, 로맹 가리가 이 세상에 바라는 것, 그가 원하는 세상도 두툼.
사실 로맹 가리는, 20세기 현대 작가라는, 아는 사람은 알아도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그런 작가다. <공쿠르 상> 두 번 수상이라는 소동도, 사실 로맹 가리를 좋아하는 사람,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만 알고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앞의 생>을 읽어 본 사람만이 아는 것 아닐까)
그래서, 디킨스니, 빅토르 위고니, 뒤마니 이런 사람들은 알아도, 로맹 가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모두들 이런 대 문호는 그의 책들을 읽어보지 않아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우지만, 로맹 가리에게는 대단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책은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책, 내용은 알아도 읽기엔 부담되는 대문호의 책과 달라서 일까. 혹은 최근의 작가라서 아직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고, 또 사람들이 동화로 각색한 그의 소설을 접해 본 일이 없어서일까. 어쨌거나 나는 로맹 가리 역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작고한 지 삽 십 몇 년밖에 되지 않아서, 그리고 그의 화법이 에두른 화법이 아니라, 직설 화법을 즐겨 쓰고, 정신적으로도 독자가 따라가기 힘들기 때문인지, 상당히 낮게 평가되는 작가라 생각할 뿐이다.
나는 로맹 가리가 왜 위대하다고 생각하냐면, 바로 사랑을 예찬했기 때문이다. 물론, 20세기 작가, 현재의 수많은 작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 거의 모든 작가들이 사랑을 예찬하고, 사랑을 권하고, 사랑으로 이 사회의 모순이 해결되기를 꿈꾸는 그런 소설을 쓰고 또 써왔지만어딘가 그 사랑은 날조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고, 그냥 머리로 사랑을 쓴 것만 같다. 가슴이,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부딪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만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로맹 가리는, 정말 진정한 작가라고.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 어떤 평가를 받든, 나에게는 그가 정말 사랑에 헌신했고, 삭막한 세상에 사랑을 구현하기를 애쓴, 최고의 작가이다.
114쪽.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여성입니다. 주의하세요. 여자들이 아니라 여성, 여성성 말입니다. 여성들, 여성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내 삶의 큰 동기이자 큰 기쁨이었습니다.
115쪽. 그러니까 나의 모든 책, 내가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쓴 모든 것에 영감을 준 것은 여성성, 여성성에 대한 나의 열정입니다.
116쪽. 나와 여성들의 관계는 무엇보다 나를 위해 희생한 내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숭배였고, 물론 성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 여성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말입니다. 만약 내 책들이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 거의 언제나 여성성을 향한 사랑을 얘기하는 책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 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책을 쓰더라도 여성성은 그 책에 결핍으로서, 구멍으로서 자리하고 있습니다.
117쪽.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나는 - 예술적인 목적이 아니고는 교회에 발을 들여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참으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말이 여성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내게는 여성성의 구현 그 자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