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양품 문방구
GB 편집부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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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인양품에서 개발해 파는 문구류 중 스테디셀러 20종을 선별해 소개하는 책이다. 뒤에는 디자이너나 작가가 무인양품 문구류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소개하고, 무인양품 문구 개발과정이나 어떤 소재를 사용해 만드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겉으로 보면 눈요기 목적의 책이나 다이어리 꾸미기(다꾸~) 참고용 책처럼 보이는데, 찬찬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이렇게 읽고 말 책이 아니다. 그동안 몰랐던 무인양품의 세계를 한 꺼풀 벗겨주는 책이었다. 이미 무인양품에 대해 많은 걸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 이래서 일본 사람들 집집마다 무인양품 제품이 몇 개씩은 다 있구나 싶었다. 무인양품의 저력이 느껴진 책이었다. (물론 내가 이런 시각으로 이 책을 봤기 때문에 나에게만 이렇게 느껴졌을 수 있다. 문구류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무인양품 문구를 친절히 소개하는 책일 테고, 다이어리나 작업 노트 꾸미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이것과 관련한 부분이 눈에 잘 들어올 것이다.)




무인양품 제품은 군더더기 없는 심플함과 기능주의가 특징이다. 뺄 것은 빼고,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디자인을 멈춘 듯한 느낌이다. 디자인이 상당히 심플해서 자칫 차가울 수 있으나, 무인양품은 친환경적인 소재와 톤 다운된 색감을 사용해 따뜻한 느낌을 자아낸다. 직선과 곡선의 사용도 절묘하다. 이렇게 심플하면서도 인간, 자연친화적인 느낌 때문에 유행을 타지 않고 세련미가 느껴진다.

무인양품은 생산하는 제품군이 상당히 다양한데도 무인양품만의 디자인이 있다는 것은 이 기업만의 철학과 가치관이 있는 것이다. 철학 없는 기업에서 그 기업만의 정체성과 제품의 통일성은 있을 수 없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인상적으로 본 제품은 아크릴 자다. 학교 다닐 때 늘 필통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바로 그 자. 우리는 별생각 없이 쓰는 자인데, 이 책에 소개된 자의 설명을 보면, 자 하나 생산하는 데도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일단 자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인 눈금과 숫자. 숫자가 아주 눈에 잘 띈다. 가독성이 아주 좋은 서체다. 이 서체는 무인양품에서 자체 개발한 '무지 헬베티카'라는 서체다. 서체는 사실 아주 중요한 요소지만 보통 간과되기 쉬운데, 작은 차이지만, 큰 차이를 낳는 것이 서체라고 본다. 무인양품은 자체 서체를 개발해 사용하는 것이, 본사의 홍보도 되고 브랜드도 정립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나라 몇몇 기업들도 자체 폰트를 개발해 사용한다.)

그리고 사진 우측 하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수자를 배려하는 요소가 많다. 보통 오른손잡이들은 자로 줄을 그을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는다. 그래서 자의 숫자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름차순 배열이다. 하지만 왼손잡이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줄을 긋는 것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오른쪽에서 왼쪽 오름차순 배열된 자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오른손잡이들의 세상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므로, 지금껏 자든 손에 쥐고 사용하는 도구는 오른손잡이에 맞춰 디자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인양품의 제품은 소수자이지만 왼손잡이들도 배려한다.

이건 자뿐만 아니라 다른 제품들도 그렇다. 예를 들면 커터 칼. 우리가 사용하는 커터 칼은 오른손잡이가 쥐기에 편하다. 커터 날을 부러트릴 때도 오른손잡이가 부러트리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하지만 무인양품의 커터 칼은 양손잡이 모두 편하게 날을 부러트릴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우리 오른손잡이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왼손잡이들은 거의 매 순간 맞부닥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왼손잡이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생각 자체를 안 한다. 하지만 무인양품은 왼손잡이도 편하도록 제품을 개발하고 디자인한다. 어떻게 보면 미미하고 사소한 부분이지만, 세상의 평등, 권리 신장에 힘쓴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왼손잡이들을 블루오션으로 보고 접근했을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에서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무인양품에 놀랐던 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당히 디테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이건 무인양품만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정신문화라 생각한다. 쇼군을 섬기면서 자기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다. 겸손하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이나 자신의 태도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딱 이런 느낌을 이 책을 읽고 무인양품에서도 느꼈다.

무인양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색을, 자신들의 브랜드 정체성을 구축하며 시류나 유행에 타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인양품은 일본 정신을 그대로 담아냈다고 느껴졌다. 재밌는 것이 북유럽 디자인 제품과 비교해보면 된다. 북유럽 제품도 심플하고 인간과 자연친화적인 디자인이다. 무인양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은, 북유럽 제품은 디자이너의 계보가 있고, 디자이너 제품이 상당히 비싸다는 것. 반면에 무인양품 문구를 비롯해서 그들의 제품은 결코 디자이너를 내세우지 않는다. 무인양품만 남는다. 이게 무인양품이 스테디셀러 브랜드로서 성공한 이유 같았다.

///​

문구류를 다룬 책이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많다. 이 책에서 무엇을 볼지는 독자의 몫. 나는 무인양품이 지금 대로 꾸준하다면 계속 잘 나가는 브랜드일 것이라 읽었다. 우리도 우리 색을 가진 브랜드가 이처럼 스테디셀러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으면 좋겠다. 배울 건 배우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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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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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해답에 목말라 있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조언을 듣고 때로는 직접 부딪쳐가면서 답을 구합니다. 저는 김육이 '한 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일생으로 답했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분이죠.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나에게는 삶을 던져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가?'를 고민해보는 거예요. 그리고 '삶이 뭐 다 그렇지'라는 말 대신 '삶은 이런 거지'라는 말로 바꿔봤으면 합니다. 그런 귀중한 목표를 찾아가는 과정만으로도 우리의 하루는 이전보다 더욱 충만하게 채워질 테니까요.

190-191쪽


역사 강사로 유명한 최태성 선생님의 신간 『역사의 쓸모』


최태성 선생님이 역사를 공부하며 만난 사람의 이야기로 역사를 통해 오늘의 '나'가 무엇을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는지 서술한 책이다. 사실 역사는 시간이란 것을 바탕으로 하여 사람과 역사적 사건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다양한 무늬를 수놓은 직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짜인 역사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대상은 다양하다.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역사에서 사건이 보일 수 있고, 흐름이나 발달과정이나 전개 과정일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역사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다. 최태성 선생님은 이 여러 것 중에서 '사람'을 꼽는다.


어떤 사람은 역사가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것은 착각이고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예요. 역사를 공부했음에도 살아가는 데 어떠한 영감도 받지 못했다면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7쪽




이 책은 최태성 선생님이 역사를 통해 만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거의 대부분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인데, 하지만 이 책에 실린 그들의 이야기는 살짝 그동안 몰랐던 그들의 이야기이다. 가령 대동법의 전도사(?) 김육을 들 수 있다. 아마 잘 기억은 안 날 테지만, 그래도 국사 시간에 대동법을 배운 기억이 있는 사람은 '김육'도 살짝 기억이 날 거다. 김육은 오랜 우여곡절 끝에 관직에 나아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대동법의 전국 실행을 위해 헌신을 다한 사람이다. 대부분 '대동법-김육' 이렇게만 기억하고, 김육이 왜 대동법 확대에 애썼는지 그 이면의 이야기는 잘 모를 것이다(나도 배운 기억이 없음). 이 책에 그 이야기가 적혀 있다. 김육은 12살이던 때 임진왜란이 터져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얼마 안 돼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지만, 김육은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성균관 유생들이 처벌을 받았고 김육 또한 대과 응시 자격을 잃고 높은 관직에 나갈 길을 잃는다. 조정은 연일 시끄러웠고 김육은 귀농한다. 김육의 일가는 가난하게 살았는데, 집 지을 돈이 없어 움막 생활을 하고, 숯 장사를 한다. 가평에서 숯을 만들어 한양에 가 숯을 팔았다. 이렇게 가평에서 서울을 오가며, 힘든 생활을 하면서 바닥에서 김육은 백성들이 얼마나 피폐한 생활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임금이 바뀌었고, 김육은 관직에 나갈 기회를 얻는다. 말단 관료로서는 세상을 바꿀 힘이 약해 다시 과거를 보았고 장원 급제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50대가 되어서야 관직에 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대동법 이야기를 꺼낸다. 반발이 심상치 않았다. 대동법은 땅을 많은 가진 사람에게 불리해서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육은 본인의 인생을 대동법에 걸었고, 틈만 나면 대동법을 주장했다. 그래도 대동법의 전국 확대는 요원해 보였는데, 나이 70에 새로운 효종이 김육을 조정에 붙잡아 두기 위해 충청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해 준다. 그리고 79세가 되어 김육은 임금에게 유언 상소를 올리는데, 바로 호남 지역의 대동법 시행이었다. 한 평생을 다 바쳐 대동법 시행에 앞장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교과서만 보고 '대동법-김육'으로 외우면, 대동법 시행 이면에 있었던 사람 '김육'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대동법 옆에 있는 김육이란 사람을 만나면, 곧 또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내 생을 다 바쳐 무엇을 이룰 것인가 하는.



또 이 책을 통해서, 나혜석을 만났다. '나혜석'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냥 단순히 그 당시에 파격적인 행보를 한 신여성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나혜석의 글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중략)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그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리라.

그러니 소녀들이여 깨어나 내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라


255쪽, (「이혼고백서」 재인용)



상당히 시대를 앞서는 글이다. 한이 서릴 수 있는 인생을 살다간 나혜석. 말년이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글이나 그림으로나마 그녀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조차 여성으로서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를 읽고 나만의 역사에서 만난 사람이 떠오른다. 실존 인물은 아니고, 조선 초기 김시습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에서 만난 인물이다. 금오신화에는 귀신이 나온다. 대부분 한 맺혀 죽은 귀신들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한 맺힌 귀신이 아니다. 한이 맺힌 건 같지만, 한의 이유가 완전히 다른다. 그냥 결혼을 못 해보고 죽어서 한이란다. 그래서 똑똑한 남자를 유인해서 서로 멋진 시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통하고, 그날 밤 탁! 몸도 통한다. 귀신은 며칠 더 정을 통하다가, 이승에 대한 미련일랑 탁 털어버리고 쏘 쿨~하게 저승으로 올라간다. '배우자를 못 만난 게 한이었는데, 내 일생의 배우자를 만난 것으로 치고 더 이상 미련 두지 않고 저승으로 올라가련다' 귀신은 이런 마음이었던 거다.


조선 전기여서 나올 수 있었던 내용인 것 같은데, 어쨌거나 참 멋졌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하고, 배우자 선택도 부모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남자나 여자나 본인 스스로 선택한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은 쏘 쿨하게 지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향은 똑부러지게 표현한다. 조선 중기 몇 차례의 전쟁으로 세상이 보수적으로 변했지만, 조선 전기만 해도 이렇게 사람들이 멋지게 살았구나 싶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금오신화라는 책으로, 나는 조선 전기 때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나도 이렇게 멋지게 살겠다고 결심했었고. 물론 결심대로 잘 안되지만.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엮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를 읽고, 내가 만난 역사 속 인물들이 떠오른다. 그 사람들이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건다.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너는 어떻게 살래?'라고. 왠지 손을 뻗으면 가닿을 수 있는 멋진 세계가 펼쳐질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나 자신아. 나는 어떻게 살래?' 『역사의 쓸모』를 덮으니, 이 질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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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부의 지각변동 - 미래가 보내온 7가지 시그널! 무너질 것인가, 기회를 만들 것인가
박종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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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보도본부 경제부장 '박종훈'의 신간이다. 기자 출신답게 복잡하고 어려운 경제를 상당히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다. 지금까지 박종훈 기자가 낸 책은 다 읽어 봤는데, 책 내용의 맞고 그름을 떠나서 모든 저서를 만족스럽게 읽었다. 이번 신간도 이전 책들과 마찬가지로 유익하고, 흥미롭게 잘 읽었다. 미리 말하자면, 경제에 관심 있는 분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얼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하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해 놓은 점이 추천하는 부분.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가. 성공은 복잡해 보이는 것을 단순하게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고. 고로 이 책은 정리가 잘된 책으로, 경제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면 좋겠다. 뭔가 뿌옇고 복잡해 보이던 것이, 좀 명확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경제에 관심은 있으나 경제가 어렵다는 분들께 좋을 듯 싶다.


이제 책 이야기로 고-




제목이 상당히 세기말적이다. 표지까지!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들이 이동하는 것 같은 이미지로, 뭔가 2020년 부의 이동을 예언해 놓은 책 같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는 바로 6개월도 안 남은 우리 경제(세계 경제 포함) 이야기임! (WHAT!! 그래요, 2020년도 이제 6개월도 채 안 남았어요) 책 제목이나 표지 느낌이 뭔가 SF적인 느낌인데, 제목과 달리 상당히 현실적이고 지금에 대한 이야기다. 내 생각에는 책 제목이 책 내용과 좀 안 맞는 것 같다. 차라리 『2020년 경제를 읽기 위한 시그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이 책의 요지는 이렇다.

현재 세계 여러 경제 석학들이 2020년에 경제 위기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미 연준은 초저금리 기조와 양적 완화를 너무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값싼 이자로 시중에 풀린 돈은 눈먼 돈이 되어서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한 번도 겪지 않은 것처럼 다시 부동산 가격을 끌어 올렸고, 주식도 가파르게 올렸다. 경제 석학들은 여러 신빙성 있는 데이터를 보여주면서 이것은 분명 버블이고, 그것도 상당히 심각한 버블이라고. 버블이 발생하면 필히 버블이 터지고 조정되는 시기가 찾아오는데 그 때가 바로 2020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석학들의 말이 과연 맞는지 되짚어 본다. 경제 석학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순 없지만, 상당히 신빙성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는 꼭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어떤 조짐이 보이고, 이 조짐을 눈치챈 사람들이 곧바로 전략을 달리하기 때문에 경제는 결코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는단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은, 누구의 말이 옳다고 믿는 것보다 스스로 유의미한 경제 시그널을 포착하고, 이 시그널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단다. 그래야 앞으로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뉴스, 미디어, 전문가의 말을 맹신하지 않기!
스스로 시그널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기!!

일반 사람들은 경제 변화(위기) 신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어디서 오는 신호를 읽고, 어떻게 이 신호를 읽어서 앞으로의 경제 흐름을 추측할 수 있는지 소개한다. 경제 변화를 읽기 위한 시그널로 저자는 총 7가지 분야를 든다

1. 금리
2. 부채
3. 버블
4. 환율
5. 중국
6. 인구
7. 쏠림

전부 익숙한 분야인가요?! 하나씩 설명해보자.

 <<  금리  >>

금리가 보내오는 신호를 잘 포착해야 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미국이 금리를 올렸을 때 꼭 세계 어디에선가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고 한다. 일본의 버블 붕괴, 아시아의 경제 위기, 북유럽 부동산 폭락 등등. 미국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금리를 올리면 어디선가 타격을 받는 것을 알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 경제 상황에 맞게 금리를 올렸다. 그러나 이게 문제가 된 것이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였다. 원래 미 연준은 금리를 올리겠다고 생각하면, 빠르게 올리곤 했는데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금리를 급격하게 올릴 시 자기들도 위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부동산과 주식에 부글부글 거품이 끓어 올라도 금리를 제대로 인상할 수 없었고, 아주 천천히 인상했다. 문제는, 현재 경기 침체 조짐이 보이고, 더이상 금리를 올리는 게 힘들어 졌다는 것. 그래서 저자는 미 연준이 금리인상을 멈추는 시기를 포착하라고 한다. 호황이 끝났다는 의미로 말이다.

<<  부채  >>

부채는 바로 금리와 연관된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미국이나 유럽, 세계 각국은 저금리 기조로 사람들에게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었고, 시중에 돈이 넘쳐나게 된다. 저자는, 부채는 규모보다 속도가 중요하다고 한다. 부채가 보내는 신호 중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부채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때보다 부채 증가가 둔화되거나 줄어드는 때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 때가 바로 돈을 빌린 사람들이 돈을 갚기가 어려워진 시기라고. 이런 부채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예는 바로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  버블  >>

금리 이야기와 연관된다. 초저금리로 시중이 풀려난 돈은 자산 가격을 밀어 올렸고,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산 가격이 오르면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 이게 과연 이만한 가치가 있는가 라고 의심하고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기 전에 너도나도 시장에 내다팔면 그 순간 버블은 터지게 된다. 현재 세계 여러나라의 부동산이 너무 올랐다. 주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가도 액면가 그대로 읽지 말고, 주가의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는 식으로 계산한 후 주가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주식은 상당히 능동적이고 빠른 시장인데, 그래서 실물 경제보다 한 박자 앞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주가가 폭락하면 대체로 6~12개월 뒤에 실물 경제가 악화되거나, 6~24개월 뒤에 부동산 시장이 불황으로 접어들었다고. 따라서 이와 관련한 시그널을 잘 읽으라고 한다.

<<  환율 >>

돈의 흐름을 한박자 앞서 판단할 수 있는 게 환율이라고 설명한다. 환율과 관련해서 중국 위안화의 설명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트럼트는 위안화가 저평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독일 은행은 위안화가 고평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저자도 위안화가 고평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지난 15년 동안 위안화는 달러 대비 23%나 올랐다. 신흥국 통화 가치가 미국보다 오른 경우는 이례적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수출 경쟁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많은 중국 기업들이 수출에 애먹고 있는데, 그래도 그 기업들이 망하지 않는 건 중국 정부가 보조금을 줘서 그렇단다. 만약 중국의 외환 보유고가 계속 낮아지게 된다면 중국 경제에 상당히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현재 중국 당국은 해외 투자를 규제하고 있고,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단다. 중국 당국의 환율 정책과 자국민의 해외 투자를 어떻게 규제하는지는 앞으로의 경제를 읽는 데 아주 중요한 신호라고 한다.

<<  중국  >>

2008년 글로벌 세계 위기로 크게 덕을 본 것은 중국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앞으로 중국 경제에 먹구름이 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초저금리를 선택했고, 그렇게 남아도는 돈은 중국으로 밀려들었다. 저렴한 이자의 외화가 물밀듯이 들어오자, 중국은 그 돈으로 과도한 투자를 했는데, 그것의 결과는 과잉 생산이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시장이라면 비효율적인 기업은 퇴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이 중국이라는 점이다. 망해야 할 기업을 망하지 않도록 보조금을 주어 계속 연명시키고 있다. 좀비기업과 그림자 금융, 중국 정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만의 경제 생태계가 그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떻게 손 쓸 수가 없어서 '회색 코뿔소'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경제가 중국과 너무나 긴밀하다는 점이 우리에게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 중국이 휘청거리면, 그 옆의 우리는 고꾸라 넘어질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나오는 경제 신호도 필히 눈 여겨 봐야 한다.

<<  인구  >>

일본도 그렇고, 이탈리아나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랬듯이 생산연령인구가 줄어들면 경제 활력이 줄어들고, 저성장 혹은 불황의 나락을 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속도가 너무 빨라서 큰일이다. 어쨌든 인구가 보내는 시그널도 잘 포착하고 이해해야 한다. 또한 중국을 비롯해 세계 인구 변화도 눈여겨 봐야 한다.

<< 쏠림 >>

우리의 쏠림 문화. 반도체에 쏠려 있고, 중국에 쏠려 있고, 부동산에 쏠려 있는 것이 문제. 여기서 보내는 신호를 잘 읽어야 한다.

///

저자는 이렇게 2020년에 정말 위기가 올 것인지 어떤지 알기 위해서는 위에 언급한 7가지에서 보내는 신호를 잘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뒤에는 앞으로 세계 경제가 어떤 시나리오로 전개 될 수 있을지 시나리오 3가지를 소개하며, 달라지는 시대에 우리가어떻게 투자해야 하는지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맨 처음 말했듯, 뉴스나 전문가의 말이라고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처럼, 이 책 역시 무조건 믿으면 안 된다. (저자는 본인의 책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서 준 게 아니라, 낚시대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 속에서 본인에게 유익한 내용은 잘 받아들이고, 경제 공부의 수단으로 삼아서 경제 변화를 읽는데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유익하고 재밌게 잘 읽었다.

앞으로의 경제 변화에 관심 있는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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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조문영 엮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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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연세대에 '빈곤의 인류학'이라는 수업의 일부로, 수강 학생들이 철거민, 장애인, 홈리스, 저소득층 밀집 주민과 함께 해온 활동가 10명과의 인터뷰를 담은 책이다. 그리고 인터뷰 앞, 뒤로 학생들이 추리고 정리한 우리 사회의 병폐와 문제점도 적혀 있다. 개인적으로는 본문에 해당하는 학생들 파트보다, '빈곤의 인류학'이란 수업을 강의하고 인터뷰를 기획한 조문영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머리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우선 문장이 상당히 좋다. 그리고 빈곤을 생각하는 마음이 연구자의 마음이라기보다 동병상련이랄지, 안타까움이랄지 잘 녹아 있으면서도 이 시대의 문제의식이 균형 잡혀 있다. 실제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서문으로 느낀 교수님은 상당히 멋진 생각을 하는 멋진 분 같았다. 또 빈곤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고민과 문제의식도 많은 듯했다. 왜냐하면 요즘 학생들이 생각하는 '빈곤'은 우리가 생각하는 빈곤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폐강이 될까 염려하며 개설한 '빈곤의 인류학' 수업은 의외로 인기가 많았다. '어떤' 빈곤을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나와 학생들의 의견이 다소 달랐을 뿐이다. 이 수업을 찾은 학생들은 대개 두 종류의 빈곤에 관심을 내비쳤다. 하나는 '글로벌 빈곤'이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대한민국이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의 전환을 당당히 선포한 시기에 태어나 구세군 냄비보다 아프리카 아동 후원 광고를 더 많이 보며 성장했다. 특히 인터넷과 영어 몰입 교육, 교환학생, 해외여행 등으로 일찌감치 세계시민으로서의 감각을 익히 많은 대학생들은 글로벌 빈곤 퇴치를 자신의 책무로 자임했다. '밀레니엄 개발'이든 '지속 가능 개발'이든, 정부와 기업, 대학, 비영리단체가 유엔의 각종 목표를 따라 조직한 거대한 반빈곤 산업은 젊은 국제 개발 자원활동가들의 '열정' 덕분에 전 지구적 퍼포먼스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 '열정'이 보상 없이 소비되고 착취된다고 느끼는 순간, 청년들은 또 다른 빈곤을 불러낸다. 자기 자신의 빈곤, 실존의 빈곤, 아니 그냥 마음의 빈곤이라 불러도 좋겠다. 부모 세대가 습관처럼 강조해온 안정된 정규직과 성공 신화를 버릴 수도, 현실화시킬 수도 없는 21세기 저성장 한국 사회에서 제 처지의 비참함을 호소한다. (...) 온갖 공모전을 기웃거리며 과잉 접속 상태에서 살다가도, 어느 순간 관계를 절연하고 '잠수'를 타기 일쑤다. 정체불명의 불안은 미세먼지를 타고 각자의 몸 깊숙이 파고든다. 일상에선 모임을 최소화하고, 얼굴을 맞대지 않는 사이버공간에선 극단적인 방법을 상대를 조롱하고 압살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모두가 피곤하고, 힘들고, 억울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신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는 빈곤은 학생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8-9쪽)

이 책은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빈곤, 공간에서 소외된 빈곤을 다루고 있다. 주로 철거민이다. 제일 첫 장은 용산참사를 다루고 있다. 용산참사뿐만 아니라 서울의 다른 철거 지역도 다루며, 그 지역에서 왕성하게 시민 활동을 한 활동가분의 인터뷰를 실었다. 또 노숙자, 요즘은 영어로 많이 말하던데 '홈리스'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고, 장애인과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이 책을 읽고 새삼 가난은 무엇이고 빈곤은 무엇인지 가물가물해진다. 이 책에서는 가난과 빈곤은 사회 구조적 문제이며, 폭력적인 국가 권력에 의해 피해가 양상 된다고 한다. 민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도시 설계 그리고 강제 철거, 촘촘하게 짜인 수급자 요건으로 삶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그래, 국가가 잘못했네.' '역시 국가는 가진 자들을 보호해 주는 기관인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가난이 과연 국가나 사회 구조적 문제 때문이기만 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아주 예전에 동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동사무소에 있으면 정기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뭐, 꽤 많은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중 정말로 달갑지 않은 사람이 수금(?!) 하러 오는 사람들이다. 술 마시고 나타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시비를 걸고 동사무소 집기를 던지고 부숴서 난동을 부린다. 정상적인 업무를 전혀 볼 수 없게 만들어 돈을 뜯어 내려는 속셈이다. 정말 돈을 받아 가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있을 때는 경찰이 출동해 그 사람을 데려갔다. 이렇게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사람은 반드시 며칠 후에 다시 왔다. 건장하고, 힘도 센 사람이었는데 알코올 중독자로 기초생활수급자였다. 나라 세금으로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수급자로 받은 돈이 떨어지면 이렇게 관공서를 돌며 수금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에는, 가난이나 약자에 대해 어느 정도 낭만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이 아르바이트를 한 후 그런 생각은 산산이 조각났다.

가난의 문제는 단순히 누구의 문제(개인이나 국가, 사회)라던가,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단정 짓기엔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하다. 삶의 태도나 심리적인 문제도 상당히 깃들어 있는 것이다. 가령 이 책에서 많이 나오는 철거민과 홈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 사회의 구조,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개발을 의심쩍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밀어붙이지만 않았다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곧장 빈곤이나 가난 문제가 국가나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원인도 반드시 함께 존재한다.

나는 이미 고도화된 자본주의와 도시화로 인간이 소외되고 파편화된 이후에 태어나서 가난과 빈곤을 대하는 태도가 삭막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 문제를 다룸에 있어 제일 견제해야 하는 것이 낭만주의로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현장에서 고군분투하시는 활동가님들과 '빈곤의 인류학'을 이끄신 교수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난의 원인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달라 나는 좀 마음이 불편했다. 또 어쩌면 나의 가정사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직접 겪고 보아온 가난은, 한 가정의 가장이 며칠 만에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을 탕진해 와도 자식에게 주는 용돈은 천 원 한 장도 아까워 안 주는 그런 가난이었기 때문에 사회 구조적 가난은 나에게 너무나 먼 이야기다. 어쨌든 가난이나 빈곤을 개인에게서만 찾거나 사회에서만 찾는 건 한계가 있다. 또, 쉽게 바뀌지 않는 게 사회고 국가이며, 그에 못지않게 한 명의 개인도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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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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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으앙, 책 제목보다도 표지 그림이 더 무섭다잉. >ㅁ<)


구라치 준의 본격 미스터리터리한 책이다. 저자의 책 두 권이 이미 국내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구라치 준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당연한 소리를 심각하게 하고 있는 나님). 나는 구라치 준을 몰랐던 사람에 속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의 존재감을 인식하게 되었다. 매력적인 작가인데,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그건 내가 책을 잘 안 읽기 때문이지. >ㅁ<).


구라치 준! 우선은 저자의 이름이 혀에 착 감긴다. (구라치 준~ 준짱! 입에 착착 달라붙는 이름)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같은 일상 미스터리물을 좋아하는데, 구라치 준의 글을 보니 일상 미스터리물을 상당히 잘 쓸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일상 미스터리물은 제한된 몇몇의 인물들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미스터리한 일을 가벼우면서도 재밌게 그리는 장르다. 이에 반해서 본격 미스터리물은 살인이나 심각한 사건, 사고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독자들은 글을 읽기 전에 어느 정도 마음의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읽는 자극적인 이야기(특히 살인)는 내 스트레스를 상승시키기 때문에 예측하기 힘든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가볍지만 흥미 돋는 일상 미스터리가 좋다(그래도 밤에 몰래몰래 보던 김전일 시리즈는 무섭지만 재미는 꿀이었다). 또 일상 미스터리는 흐름이 짧은 장르 특성상 글보다는 만화가 더 좋은데, 그런 면에서 구라치 준은 만화 스토리 작가도 참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본업은 소설가, 부업은 만화 스토리 작가.... 어떻습니까, 구라치 준 씨. 하지만 그의 게으름(?!) 혹은 느긋함(?!) 때문에 협업을 해야 하는 작화가는 힘들랑가요.




이번에 읽은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이란 책은 단편집으로 단편 미스터리가 총 6편 실려 있다.



│첫 번째 이야기 : ABC 살인│


와, 이 이야기... 읽자마자 겁난다.

시작 문장이 이렇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

누구든 상관없다.

이유도 딱히 없다.

그냥 죽이고 싶다. 

속이 후련해질지도 모르니까. 그게 다다.


(- 9쪽, 「ABC 살인」 중에서)



아오, 다시 읽어도 겁나네.


「ABC 살인」은 짧은 소설이지만 이 소설 안에서도 이야기는 몇 개의 장으로 나뉜다. 각 장은 모두 1인칭 주인공 독백 시점인데, 문제는 이게 과연 한 사람의 독백인지 잘 모르겠다. 한 사람의 독백 같으면서, 살인 충동을 느끼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독백 같기도 하다. 물론 이름 때문에 한 사람의 독백이 맞는 건 확실하지만, 뒤에 일어나는 일을 보면 화자와 같은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 등장해서 독백의 주체가 모호하다. 이건 저자가 노린 효과일 테지?! 묻지마 살인, 묻지마 살인으로 위장한 계획살인... 평상시엔 꾹 눌러 참고 있었지만, 누군가 물꼬를 틀면 기다렸단 듯이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야만성과 폭력성,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 범행 동기는 다양하겠으나 특정 대상이 없고, 피해자만 억울한 그런 범죄. 나는 이 책에 실린 6개의 이야기 중 이 이야기를 제일 무서웠고 제일 부정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제일 현실성 있는 이야기. 그래서 더 오싹하다.



│사내 편애│


미스터리가 최첨단 IT와 결함할 수도 있구나. 아니, SF라고 해야 하나. 인공지능 관련 미스터리물인데(아니, 미스터리물이라고 하기에 좀 애매하지만) 이제 인공지능도 인간의 기술로 구현 가능해졌기 때문에 옛날에는 인공지능이 나오면 무조건 SF 물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기기가 발달하니, 문학 장르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이 이야기는 사내 인공지능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화자가 인공지능 때문에 곤란을 겪고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프로그램화하여 인공지능에 심었는데, 인간의 불완전성 중 '집착'이 인공지능에 탑재되었고 엉뚱한 방향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괴롭힌다. 인공지능의 편애 때문에 곤란을 겪은 화자. 그런데 만약 내가 화자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흠. 나라면 편애를 마음껏 누리지 않았을까. @ㅅ@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이 책에 실린 이야기 중 제일 전형적인 미스터리 이야기였다. 햐, 제목도 제일 미스터리물 같아. 스포 하면 곤란하니까 줄거리 이야기 안 하는 걸로~ (그래도 간략히 말하자면, 제곧내. 제목이 곧 내용이다)



│밤을 보는 고양이│


이 책에서 제일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의 이야기이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가 제일 좋았다. 또 이 단편을 읽고 구라치 준이 '일상 미스터리물'을 잘 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아, 구라치 준 씨! 진짜 일상 미스터리물 스토리 작가가 될 생각은 없니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삼아 연작 시리즈 만들면 재밌을 것 같아요.)


일상에 지쳐 휴식이 필요했던 화자는 시골에 계신 할머니 집에 놀러 간다. 화자는 할머니 집에서 자고 싶을 때 자고, 걷고 싶을 때 걸으며, 할머니가 해주시는 밥도 맛있게 먹는다. 또 할머니와 함께 사는 老 고양이'미코'와 평온하지만 소소한 즐거움을 함께 느낀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었을 때 고양이 미코가 잠은 자지 않고 오도카니 앉아서 앞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허공을 응시한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은 고양이 미코. 그 모습이 하도 기이해서 화자는 깊은 인상을 받는다. 문제는 다음날 밤에도 미코는 어제와 같은 자세로 허공을 바라본다.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화자가 시골에 내려오기 전날 밤에도 이랬단다. 여기에서 화자의 추리는 시작된다. 과연 미코는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는 밤을 보았을지! 이야기가 궁금하지용?! ㅋㅋ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이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이야기!


때는 바야흐로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패망의 기색이 짙어지던 때로 일본 군부는 절박함 때문에 광기 어린 짓도 서슴지 않던 시기다. 말도 안 되는 비밀 실험이 여러 곳에서 자행되었다. 이 이야기는 일본 군부가 비밀 실험을 하던 곳에서 발생한 미스터리한 살인을 다룬다. 살인 현장은 이랬다. 비밀 실험의 참여자인 한 이등병이 뾰족한 모서리에 후두부를 강타 당한 채 죽어 있다. 피해자가 있던 실험실 방에는 흉기가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범행 도구라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박살이 난 두부! 과연, 두부 모서리로 사람 머리를 쳐서 살인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광기 어린 실험이 살인을 실드(?) 해 주는 이야기.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이렇게 과거를 배경으로 SF적 요소를 집어넣고, 장르는 미스터리로 설정. 독특하고 재밌는 설정이다. 게다가 일본의 관용표현까지 이야기에 적절히 잘 녹였다('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죽어라'는 일본의 관용 표현으로,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이야기를 읽고 확실히 일본은 미스터리 장르의 강국이란 생각을 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뭔가 너무 쓸데없이 느긋하고 여유로운데 생긴 것과 달리(?) 때때로 날카로운 분석으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우리의 네코마루 센빠이! 이번에는 산업 스파이닷.


한 기업이 엄청난 노력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신기술을 빼돌리려고 한 산업 스파이를 네코마루 선배의 냉철하고 날카로운 추리로 잡아낸다. 근데 심각할 수 있는 추리를 네코마루 선배는 우스꽝스러운 멜론 모양의 인형 탈을 쓰고 한다. 뭐, 미스터리를 푸는데 옷이 문제냐, 분석과 추리력이 중요하지.


이 단편집에는 네코마루 선배 이야기가 단 한 편 실렸지만, 네코마루 선배 이야기는 시리즈물로 저자가 이 시리즈물로 정식 소설가로 데뷔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코지 미스터리로 봐도 될까. 자극적이고 무서운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사건(조금 비일상적이기도 하지만)의 전말을 가볍게 추리해 보는 장르다.




아마도 미스터리 장르물은 몇 년 전에 읽은, 뒤렌마트의 『판사와 형리』일 것이다. 그전에 읽은 책은 셜록 홈스 시리즈?! 아무튼 두 책 모두 미스터리 장르의 조상 격 같은 책인데, 이번에 읽은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미스터리 장르가 고전만이 아니라 SF와도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 이건 「그대로 마을은 돌아간다」를 읽을 때 생각하긴 했는데 크게 와닿지는 못했었음) 장르물은 시대에 발맞춰 융통성 있고 변하고 발전하는 것 같다. 왠지 나만 뒤처진 듯한 느낌은 뭘까. 옛날 책도 재밌지만, 너무 옛날 것만 찾아 읽은 건 아닌지(한 세기 전이나 반세기 전의 책을 주로 읽음;;). 앞으로의 독서는 좀 더 시대 균형을 잡아서 하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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