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조문영 엮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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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연세대에 '빈곤의 인류학'이라는 수업의 일부로, 수강 학생들이 철거민, 장애인, 홈리스, 저소득층 밀집 주민과 함께 해온 활동가 10명과의 인터뷰를 담은 책이다. 그리고 인터뷰 앞, 뒤로 학생들이 추리고 정리한 우리 사회의 병폐와 문제점도 적혀 있다. 개인적으로는 본문에 해당하는 학생들 파트보다, '빈곤의 인류학'이란 수업을 강의하고 인터뷰를 기획한 조문영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머리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우선 문장이 상당히 좋다. 그리고 빈곤을 생각하는 마음이 연구자의 마음이라기보다 동병상련이랄지, 안타까움이랄지 잘 녹아 있으면서도 이 시대의 문제의식이 균형 잡혀 있다. 실제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서문으로 느낀 교수님은 상당히 멋진 생각을 하는 멋진 분 같았다. 또 빈곤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고민과 문제의식도 많은 듯했다. 왜냐하면 요즘 학생들이 생각하는 '빈곤'은 우리가 생각하는 빈곤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폐강이 될까 염려하며 개설한 '빈곤의 인류학' 수업은 의외로 인기가 많았다. '어떤' 빈곤을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나와 학생들의 의견이 다소 달랐을 뿐이다. 이 수업을 찾은 학생들은 대개 두 종류의 빈곤에 관심을 내비쳤다. 하나는 '글로벌 빈곤'이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대한민국이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의 전환을 당당히 선포한 시기에 태어나 구세군 냄비보다 아프리카 아동 후원 광고를 더 많이 보며 성장했다. 특히 인터넷과 영어 몰입 교육, 교환학생, 해외여행 등으로 일찌감치 세계시민으로서의 감각을 익히 많은 대학생들은 글로벌 빈곤 퇴치를 자신의 책무로 자임했다. '밀레니엄 개발'이든 '지속 가능 개발'이든, 정부와 기업, 대학, 비영리단체가 유엔의 각종 목표를 따라 조직한 거대한 반빈곤 산업은 젊은 국제 개발 자원활동가들의 '열정' 덕분에 전 지구적 퍼포먼스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 '열정'이 보상 없이 소비되고 착취된다고 느끼는 순간, 청년들은 또 다른 빈곤을 불러낸다. 자기 자신의 빈곤, 실존의 빈곤, 아니 그냥 마음의 빈곤이라 불러도 좋겠다. 부모 세대가 습관처럼 강조해온 안정된 정규직과 성공 신화를 버릴 수도, 현실화시킬 수도 없는 21세기 저성장 한국 사회에서 제 처지의 비참함을 호소한다. (...) 온갖 공모전을 기웃거리며 과잉 접속 상태에서 살다가도, 어느 순간 관계를 절연하고 '잠수'를 타기 일쑤다. 정체불명의 불안은 미세먼지를 타고 각자의 몸 깊숙이 파고든다. 일상에선 모임을 최소화하고, 얼굴을 맞대지 않는 사이버공간에선 극단적인 방법을 상대를 조롱하고 압살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모두가 피곤하고, 힘들고, 억울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신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는 빈곤은 학생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8-9쪽)

이 책은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빈곤, 공간에서 소외된 빈곤을 다루고 있다. 주로 철거민이다. 제일 첫 장은 용산참사를 다루고 있다. 용산참사뿐만 아니라 서울의 다른 철거 지역도 다루며, 그 지역에서 왕성하게 시민 활동을 한 활동가분의 인터뷰를 실었다. 또 노숙자, 요즘은 영어로 많이 말하던데 '홈리스'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고, 장애인과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이 책을 읽고 새삼 가난은 무엇이고 빈곤은 무엇인지 가물가물해진다. 이 책에서는 가난과 빈곤은 사회 구조적 문제이며, 폭력적인 국가 권력에 의해 피해가 양상 된다고 한다. 민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도시 설계 그리고 강제 철거, 촘촘하게 짜인 수급자 요건으로 삶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그래, 국가가 잘못했네.' '역시 국가는 가진 자들을 보호해 주는 기관인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가난이 과연 국가나 사회 구조적 문제 때문이기만 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아주 예전에 동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동사무소에 있으면 정기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뭐, 꽤 많은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중 정말로 달갑지 않은 사람이 수금(?!) 하러 오는 사람들이다. 술 마시고 나타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시비를 걸고 동사무소 집기를 던지고 부숴서 난동을 부린다. 정상적인 업무를 전혀 볼 수 없게 만들어 돈을 뜯어 내려는 속셈이다. 정말 돈을 받아 가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있을 때는 경찰이 출동해 그 사람을 데려갔다. 이렇게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사람은 반드시 며칠 후에 다시 왔다. 건장하고, 힘도 센 사람이었는데 알코올 중독자로 기초생활수급자였다. 나라 세금으로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수급자로 받은 돈이 떨어지면 이렇게 관공서를 돌며 수금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에는, 가난이나 약자에 대해 어느 정도 낭만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이 아르바이트를 한 후 그런 생각은 산산이 조각났다.

가난의 문제는 단순히 누구의 문제(개인이나 국가, 사회)라던가,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단정 짓기엔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하다. 삶의 태도나 심리적인 문제도 상당히 깃들어 있는 것이다. 가령 이 책에서 많이 나오는 철거민과 홈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 사회의 구조,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개발을 의심쩍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밀어붙이지만 않았다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곧장 빈곤이나 가난 문제가 국가나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원인도 반드시 함께 존재한다.

나는 이미 고도화된 자본주의와 도시화로 인간이 소외되고 파편화된 이후에 태어나서 가난과 빈곤을 대하는 태도가 삭막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 문제를 다룸에 있어 제일 견제해야 하는 것이 낭만주의로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현장에서 고군분투하시는 활동가님들과 '빈곤의 인류학'을 이끄신 교수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난의 원인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달라 나는 좀 마음이 불편했다. 또 어쩌면 나의 가정사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직접 겪고 보아온 가난은, 한 가정의 가장이 며칠 만에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을 탕진해 와도 자식에게 주는 용돈은 천 원 한 장도 아까워 안 주는 그런 가난이었기 때문에 사회 구조적 가난은 나에게 너무나 먼 이야기다. 어쨌든 가난이나 빈곤을 개인에게서만 찾거나 사회에서만 찾는 건 한계가 있다. 또, 쉽게 바뀌지 않는 게 사회고 국가이며, 그에 못지않게 한 명의 개인도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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