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양품 문방구
GB 편집부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무인양품에서 개발해 파는 문구류 중 스테디셀러 20종을 선별해 소개하는 책이다. 뒤에는 디자이너나 작가가 무인양품 문구류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소개하고, 무인양품 문구 개발과정이나 어떤 소재를 사용해 만드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겉으로 보면 눈요기 목적의 책이나 다이어리 꾸미기(다꾸~) 참고용 책처럼 보이는데, 찬찬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이렇게 읽고 말 책이 아니다. 그동안 몰랐던 무인양품의 세계를 한 꺼풀 벗겨주는 책이었다. 이미 무인양품에 대해 많은 걸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 이래서 일본 사람들 집집마다 무인양품 제품이 몇 개씩은 다 있구나 싶었다. 무인양품의 저력이 느껴진 책이었다. (물론 내가 이런 시각으로 이 책을 봤기 때문에 나에게만 이렇게 느껴졌을 수 있다. 문구류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무인양품 문구를 친절히 소개하는 책일 테고, 다이어리나 작업 노트 꾸미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이것과 관련한 부분이 눈에 잘 들어올 것이다.)




무인양품 제품은 군더더기 없는 심플함과 기능주의가 특징이다. 뺄 것은 빼고,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디자인을 멈춘 듯한 느낌이다. 디자인이 상당히 심플해서 자칫 차가울 수 있으나, 무인양품은 친환경적인 소재와 톤 다운된 색감을 사용해 따뜻한 느낌을 자아낸다. 직선과 곡선의 사용도 절묘하다. 이렇게 심플하면서도 인간, 자연친화적인 느낌 때문에 유행을 타지 않고 세련미가 느껴진다.

무인양품은 생산하는 제품군이 상당히 다양한데도 무인양품만의 디자인이 있다는 것은 이 기업만의 철학과 가치관이 있는 것이다. 철학 없는 기업에서 그 기업만의 정체성과 제품의 통일성은 있을 수 없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인상적으로 본 제품은 아크릴 자다. 학교 다닐 때 늘 필통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바로 그 자. 우리는 별생각 없이 쓰는 자인데, 이 책에 소개된 자의 설명을 보면, 자 하나 생산하는 데도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일단 자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인 눈금과 숫자. 숫자가 아주 눈에 잘 띈다. 가독성이 아주 좋은 서체다. 이 서체는 무인양품에서 자체 개발한 '무지 헬베티카'라는 서체다. 서체는 사실 아주 중요한 요소지만 보통 간과되기 쉬운데, 작은 차이지만, 큰 차이를 낳는 것이 서체라고 본다. 무인양품은 자체 서체를 개발해 사용하는 것이, 본사의 홍보도 되고 브랜드도 정립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나라 몇몇 기업들도 자체 폰트를 개발해 사용한다.)

그리고 사진 우측 하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수자를 배려하는 요소가 많다. 보통 오른손잡이들은 자로 줄을 그을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는다. 그래서 자의 숫자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름차순 배열이다. 하지만 왼손잡이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줄을 긋는 것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오른쪽에서 왼쪽 오름차순 배열된 자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오른손잡이들의 세상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므로, 지금껏 자든 손에 쥐고 사용하는 도구는 오른손잡이에 맞춰 디자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인양품의 제품은 소수자이지만 왼손잡이들도 배려한다.

이건 자뿐만 아니라 다른 제품들도 그렇다. 예를 들면 커터 칼. 우리가 사용하는 커터 칼은 오른손잡이가 쥐기에 편하다. 커터 날을 부러트릴 때도 오른손잡이가 부러트리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하지만 무인양품의 커터 칼은 양손잡이 모두 편하게 날을 부러트릴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우리 오른손잡이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왼손잡이들은 거의 매 순간 맞부닥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왼손잡이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생각 자체를 안 한다. 하지만 무인양품은 왼손잡이도 편하도록 제품을 개발하고 디자인한다. 어떻게 보면 미미하고 사소한 부분이지만, 세상의 평등, 권리 신장에 힘쓴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왼손잡이들을 블루오션으로 보고 접근했을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에서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무인양품에 놀랐던 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당히 디테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이건 무인양품만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정신문화라 생각한다. 쇼군을 섬기면서 자기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다. 겸손하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이나 자신의 태도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딱 이런 느낌을 이 책을 읽고 무인양품에서도 느꼈다.

무인양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색을, 자신들의 브랜드 정체성을 구축하며 시류나 유행에 타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인양품은 일본 정신을 그대로 담아냈다고 느껴졌다. 재밌는 것이 북유럽 디자인 제품과 비교해보면 된다. 북유럽 제품도 심플하고 인간과 자연친화적인 디자인이다. 무인양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은, 북유럽 제품은 디자이너의 계보가 있고, 디자이너 제품이 상당히 비싸다는 것. 반면에 무인양품 문구를 비롯해서 그들의 제품은 결코 디자이너를 내세우지 않는다. 무인양품만 남는다. 이게 무인양품이 스테디셀러 브랜드로서 성공한 이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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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류를 다룬 책이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많다. 이 책에서 무엇을 볼지는 독자의 몫. 나는 무인양품이 지금 대로 꾸준하다면 계속 잘 나가는 브랜드일 것이라 읽었다. 우리도 우리 색을 가진 브랜드가 이처럼 스테디셀러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으면 좋겠다. 배울 건 배우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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