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그린 뉴딜 - 2028년 화석연료 문명의 종말, 그리고 지구 생명체를 구하기 위한 대담한 경제 계획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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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등으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의 신작, 『글로벌 그린 뉴딜』




미래에 대한 이야기, 특히 미래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거고, 예측하는 바도 다를 거다. 또한 에너지 문제는 다른 분야보다 다루기가 더 까다로운데 왜냐하면 수많은 정치/경제 집단의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투기성 자본도 어마어마하게 몰려 있고, 그만큼 판돈(?)이 크다. 그리고 어떤 에너지를 쓰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존망이 좌우되기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마다 제일 많이 신경 쓰는 분야가 바로 '에너지'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여러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핵심은 하나다.


<화석 에너지에서 그린 에너지로 변경하자는 것>


지구온난화, 화석연료 고갈 문제 등으로 인류가 그린 에너지로 전향해야 하는 이유는 많지만, 내가 이 책에서 느끼기에 제러미 리프킨이 정말 지구 환경을 염려하거나, 화석연료의 고갈이 두려워서 이 책을 쓴 것 같지는 않았다. 성장주의적 관점이라고 할까, 이런 관점이 책 곳곳에 엿보였다. <앞으로의 먹거리는 화석연료가 아니라 '그린 에너지'>라고 천명했달까. 환경운동가처럼 에너지 문제에 '당위', '정의'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경제의 논리'로 접근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차 산업혁명, 2차 산업혁명. 두 산업혁명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19세기, 20세기 초만 해도 실업자에, 노숙자에, 거지들이 어느 대도시에서나 넘쳐났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사회가 산업혁명에 적응하고 사람들 인식도 바뀌고, 사회구조적으로 체계를 잡으면서 실업자들은 공장에 취직 했고 돈을 벌었다. 변화된 산업, 변화된 사회 구조에 맞춰 인간들은 그에 알맞은 에너지(1차 산업혁명 때는 석탄, 2차 산업혁명 때는 석유, 가스 등등)를 생산했고, 사회 인프라를 새로 깔았다. 이 인프라 조성에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고용되었고, 사회 전반적으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이제 화석 고갈과 지구온난화 문제가 우리 발등에 떨어졌다. 세계 경제는 저성장을 넘어 마이너스 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제러미 리프킨은 '그린 뉴딜'을 제안한다.


새 에너지를 사용하는 인프라를 새로 깔아야하므로 여기에 새로운 거대 고용시장이 창출된다는 것, 또 인프라를 새로 깔 때 사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원재료도 필요하다. 한 나라 안에서 모든 재료가 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필요한 원자재 유통이 활발해지고 무역이 활성화되어 다시 세계경제가 성장할 거라고 제러미 리프킨은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가 굴러가는 판(사회 인프라, 무역, 에너지 생산 모두)을 싹 바꾸자는 말. 경제를 위해, 발전을 위해, 새로운 고용 시장 창출을 위해...


1차 산업혁명 때와 2차 산업혁명 때처럼, 인간은 기존의 에너지와 사회 구조를 버리고 새롭게 그린 에너지 시대로 들어갈 수 있을까?


석탄에서 석유, 석유에서 그린에너지로의 변화와 이행은 있지만, 그 근본은 매번 똑같은 것 같다. 사용하는 에너지를 바꿔, 이 에너지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회를 바꿈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하고, 노동자를 고용을 하고, 그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자들이 소비자로서 소비를 하게끔 하자고. 어떻게 보면, 늘 똑같은 반복인 것 같다. 인간은 새로운 산업혁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기존에 사용하던 에너지와 인프라를 바꿔야만 모두 풍족하게 살 수 있을까.


내가 이 책을 오독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러미 리프킨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얼핏 보기에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이면에 있는 이유는 전혀 다른 것 같다.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어느 정도는 그린 에너지로의 이행은 불가피해 보인다. 어느 수준으로까지 이행할 수 있을지, 과연 제러미 리프킨의 주장대로 새로운 직업교육과 새로운 인프라 건설을 위해 대규모 고용이 일어날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제러미 리프킨은 세계적인 미래학자이고, 이 책에 자주 언급됐듯 유럽이나 중국은 제러미 리프킨의 생각이나 그의 미래 비전을 상당히 존중하며, 가급적 그가 생각해 낸 모델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렇게 여러 나라가 조금씩 참여하다 보면, 다른 나라들도 어쩔 수 없이 이 물결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책도 제러미 리프킨이 미국 정부에 '유럽과 중국 정부는 이렇게 친환경 에너지 분야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 미국도 어서 빨리 이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읽혔다)


일개 개인인 내가 이 책을 읽고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없지만, 아무튼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에너지 분야에 관심 가져야 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제러미 리프킨의 주장이 맞고/그르고를 논하기는 이르며 또 사실 불가능하다. 그가 말하는 세상은 언제나 '도래하지 않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다만, 새로운 통찰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이 책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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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 히가시노 게이고 에세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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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에세이집.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인기 있는 일본 작가가 아닐까 싶은데, 나는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무서울까 봐. >ㅁ< (살인, 시체 등등 이런 소재들 넘 무서워 ㅠ) 그래도 유명한 작가이니, 읽기는 읽어야 할 테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의 에세이집이다. 에세이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 성격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에세이가 따뜻하다면 그의 소설도 추리 소설이지만 따뜻하지 않을까 기대해 볼 수 있으니까.

전체적으로 재밌게 잘 읽었다. 책 제목이 『사이언스?』 이고, 책 띠지에 '과학책이 아닙니다. 그냥 재미로 읽어주세요.라고 되어 있듯이 이 말이 이 책을 관통한다. 이 책은 과학책이 아니다. 말랑말랑하고 재밌는 에세이집이다. (사실 에세이집을 내겠다고 낸 책이 아니고, 2000년 대 잡지에 연재한 글을 옮긴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취미로 글을 적다가 작가로 등단했다. 젊었을 때 자신만만한 성격이었는지, 자신이 전업작가로서 먹고 살 수 있을 가능성을 보고 직장을 그만두고 이과적 삶에서 문과적 삶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이과는 이과다. 이 책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 히가시노 게이고가 모 소설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작품 속 인물이 교통사고를 당해 전선 있는 데까지 붕 날아올랐다가 떨어졌다는 부분을 읽고 발끈한다. 이는 물리학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고, 그래서 이 작품을 뽑는 건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문과 출신인 다른 심사위원들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이런 부분에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그런 사소한(?!!) 부분은 그냥 넘긴다. 이 작품은 결국 떨어졌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적한 물리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설정 때문이 아니라, 작품성이 밀려서 떨어진 것이다. 문과 출신들에게는, 사람이 차에 부딪혀 하늘로 붕 뜨는 건 실제로 그러하든 말든 아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나온다. 혈액형 관련 이야기도 재밌었다. 요즘에는 유행이 좀 지나간 것 같지만, 혈액형으로 나누는 성격 이야기가 주기적으로 인기를 끄는데, 이과 출신인 히가시노 게이고는 혈액형에 따른 성격은 정말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본인의 친누나는 혈액형으로 나누는 성격의 신봉자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런 누나를 설득하기 위해 누나와 매형 혈액형을 예로들며 조카의 성격을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더 누나는 요즘 자기 아이를 이해 못 했던 게 혈액형이 달라서 였구나라고 받아들인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히가시노 게이고 아버지는 오래도록 안경사를 하셨다. 직접 렌즈를 깎아서 안경을 제작하셨는데, 단골손님이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안과 분야도 그동안 비약적으로 발달해서, 눈을 기계에 갖다 대면 바로 시력이 측정되고 그걸로 바로 안경 렌즈를 맞출 수 있다. 하지만 기계로 시력을 측정하고 새로 안경을 맞춘 사람들이 써보니 자기 눈에 맞지 않더라며 다시 히가시노 게이고 아버지가 손수 깎은 안경알을 사러 찾아왔다고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신기해서 아버지에게 물어보는데, 아버지는 그들이 '기분 탓'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연 기분 탓일까. 한평생 안경을 제작하신 아버지, 아버지는 안경을 맞추러 온 손님들의 사소한 습관과 물건을 볼 때 어떻게 보는지 잘 관찰하고, 그에 맞춰서 안경렌즈를 제작하셨단다. 그래서 기계로 일률적으로 매끈하게 깎은 것보다 그의 아버지가 만든 안경이 사람들에게 더 잘 맞는 것처럼 느껴진 것. 그리고 아버지는 이 일을 오래 하셔서 신통방통한 능력도 갖고 계셨다. 사람을 보면 시력 검사를 하지 않아도 그 사람 시력을 안다고. 어떻게 아냐고 물으면, 그냥 안다고.... 아무래도 '감'은 아직 인간이나 의학, 과학 분야가 밝히지 못한 뇌의 능력 같은데 어쨌든 신기하다(이것도 언젠가 과학으로 밝혀질 날이 오겠지?!).

─​

일본 추리 소설의 최강자,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과적 생각을 말랑말랑한 에세이로 읽고 싶은 분께 추천한다. 글을 읽으면 정말 추리 소설가(항상 살인을 생각하는 작가)인가 싶을 만큼 따뜻하고 인간미 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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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와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 Wow 그래픽노블
케이티 오닐 지음, 심연희 옮김 / 보물창고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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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 오닐의 문제작, 『공주와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



제목과 표지 그림에서 감이 오듯이 이 작품은 성소수자 및 유색인을 소재로 한 동화다. 유색인이 주인공인 건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도 많이 나오니까, 유색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건 이제 자연스럽고 전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공주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놀라움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작가가 이야기를 어떻게 풀었는지 정말 궁금해서 읽어보았다. 요즘 성소수자의 결혼이나 인권 문제가 중요한 사회 이슈이고, 사람들의 의견이 여전히 뜨거우니까.


읽어본 소감은, 이 작품은 아이들보다 먼저 어른이 읽고 담론화해야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어른이 읽어도 혼란스럽다. 개인적으로 성소수자를 다룬 작품은 몇몇 영화를 제외하곤 문학작품으론 거의 접하지 못했다. 일부러 찾아볼 만큼 관심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내가 주로 읽었던 작품은 해외 고전 소설들로, 해외 고전 소설들은 아무리 깨인 작가라 하더라도 기독교적 영향 아래 있었고 따라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유부녀의 사랑 이야기, 『보바리 부인』이나 『안나 카레니나』 등도 오래도록 파격적이라 평가받아 왔으니까.


나는 성소수자들을 싫어하지 않고, 그들이 탄압받기는 더더욱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뭐랄까, 무관심한 편이랄까.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이 주로 읽는 그림책 형태로 접하니, 뭔가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진다. 내가 성소수자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체감했다고 할까.



이야기 자체는 경쾌하다. 중간중간 유머 요소도 있어서 웃으며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린이 책 속에서 성 역할의 변화는 낯섦과 동시에 혼란스러움을 준다. 성소수자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기에 혼란스러운 걸까 등등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다 읽고 난 소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파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성의 인권 신장, 고착화되고 고정된 성 역할 깨부수기는 다 좋다. 하지만, 동성 간의 사랑은 반대하지는 않지만 또 지지하는 것도 아니기에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이 작품의 백미는 사회 편견을 비트는 것이지만, 그건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에 한해서만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세상은 본디부터 옳고 그름 자체는 없다. 그냥 사회 구조에 따라 사람들의 가치관, 사회적 합의가 달라지는 것뿐이다. 사실 남녀의 사랑도, 유럽 낭만주의 영향을 받고 근래 만들어진 것이다(특히 20세기 자본주의와 만나 고도로 상품화되었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남녀의 결혼은 대체로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 노동력과 대를 잇기 위한 '당연한 의무'였을 뿐이었고, 춘향과 이도령 같은 남녀 간 '사랑 이야기'는 극히 드문고 희귀한 사례였다.


시대와 가치관은 계속 변하고, 지금은 누구나 느낄 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내가 낯설고 불편하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순 없다. 어쩌면 이 작품은 어린이보다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어른들에게 추천하는 그림책이다. 담론의 장을 열어줄지도 모를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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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절대로 안 그래? I LOVE 그림책
다비드 칼리 지음, 벵자맹 쇼 그림,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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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지적하고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실상 어른들도 아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일침을 놓는 책, 『어른들은 절대로 안 그래?』




다비드 칼리, 벵자맹 쇼, 보물창고, 2020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못된 짓 하지 마'

'이기적으로 굴지 마'

'울지 마라'

'욕 같은 나쁜 말은 쓰는 게 아니야'

'친구 약 올리지 말거라''

'화내지 마'

'게임하다가 속임수 쓰면 안 돼'

'삐치면 못 써'

'남 탓하지 마'


하지만 아이들은 알고 있다.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른도 알고 보면 아이들과 똑같이 '나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이 책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한 지적한 행동을 어른도 똑같이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탐정놀이하듯 증거를 수집한다는 게 큰 줄거리인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러니까 너는 반드시 그들(어른들)처럼 되어야만 해, 알았지?'라고 끝을 맺는데, 여기서 아이들의 생각, 결정, 결심을 이끌어 낸다.


골 서늘


이 작품의 좋은 점은,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고 '선택권'을 준다는 것이다. 어른들도 일상적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짓'을 하는데,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아이들에게 '어른들도 이렇게 행동하니까 너희도 똑같이 따라 할 거니? 아니면 다르게 행동할 거니?'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 질문은 곧 선택을 유도한다. 아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이들마다 내놓는 대답은 가지각색일 테지만, 분명 어른들의 이런 행동은 잘못이라는 걸 느낄 테고, 나아가 본인은 그러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어른처럼 굴기 싫다고. 이렇게 한 번 생각하고, '나는 안 그래야지!'라고 결심한 아이들은 최대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노력할 가능성이 높다.


좋은 작품이란 어떤 작품일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무엇을 선택하고 행동할지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이끄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일방적 가르침은 아이들에게도 설득력 낮으니까.


그리고 나아가 '이해'를 유도하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아이들은 아직 세상이 낯설고, 어른도 낯설다. 또 아이들은 어른이 자기에게 가르치는 말과 어른 스스로 하는 행동이 다를 때 인식의 불일치가 생겨 혼란스럽다. 이때 많은 어른들이 자기 잘못은 무시한 채, 아이들에게만 잘못했다고 윽박지르고 강압적으로 가르치려 하는데 이는 정말 잘못된 행동이다. 몰이해와 몰이해의 충돌. 아이들은 이때부터 '이해'보다는 어른과 자기 자신을 '분리'해, 방어막을 쌓거나 피해 의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나아가 어른의 행동과 자신의 행동을 일치시켜보고 '이해'하는 사고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준다. 너는 어떤 행동을 하겠느냐고. 이런 질문을 받은 아이들은 사려 싶고 책임감 있는 아이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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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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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기를 쓴다. 몇 년째 쓰고 있으면서도 매일 의문이 든다. 내가 보낸 오늘 하루는 단 하루였지만, ‘내가 쓸 수 있는 일기’는 한 가지가 아니라 무한일 수 있다고. 일기를 100번 쓴다면 그 백 번의 내용은 모두 다를 것이다. 혹, 내용은 같더라도 문장이나 글의 흐름은 100번 쓰는 대로 100번 다 다를 것이다. 처음엔 거칠고 조잡하던 일기가 회를 거듭할수록 부드럽고 매끄러운 글이 된다. 나의 하루가 좀 더 드라마틱 하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또 내가 느꼈던 감정이 아닌데도 새롭게 추가되는 감정도 있고 반대로 삭제되거나, 다른 표현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일기를 쓰면서 과연 지금 쓰는 이 일기가 오늘 있었던 일, 오늘 내가 실제 느꼈던 감정인지 의문이 든다. 실은 내가 지어내는 것은 아니냐고. 나의 육신은 끊임없이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 속에 있지만, 나의 의식은 단편적이고, 단절적으로 부서져 있다.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지워나간다. 오늘이란 짧은 시간도 밤이 되면 변형되어 떠오르는 재현(再現) 일뿐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나의 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하나의 창작물이다. 일기만 그러할까.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이야기도 실제 했으되, 그 사람의 오롯한 창작물이 된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이 소설이 바로 그러한 소설이다. 소설, 에세이, 자서전, 일기, 시. 그 무엇으로도 읽힐 수 있다. 우리 의식이 그러하듯이. 실재(實在) 하는 현실 속에서 명멸하는 나의 생각과 느낌들은 내가 가장 적합하다고 느끼는 표현들로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은 민주화 운동을 하신 아버지 밑에서 자란 1980년대 어느 해에 태어난 한 소녀의,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아니, 어폐가 있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란 한 소녀의,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부재 자체가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것. 소녀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컸다. 아버지의 부재가 그녀의 유년 시절을 정의하는 그 무엇이리라. 아래 발췌 글은 화자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출소한 아버지로부터 공집합을 배울 때의 일화다.


  이제 중학교에 들어갈 텐데 공집합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 아무 원소도 없는 것이 어떻게 집합이 될 수 있습니까. 


  (...)


  기원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딸에게 결코 공집합을 이해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존재하되 보이지 않으며 결코 발음될 수 없는 것. 우리는 공집합이고 그것은 모든 것입니다. 딸은 울면서 수학 문제를 풀고 당신은 애써 화를 누그러뜨리며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 침착하게 말합니다. 다시 풀어보렴. 지금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배울 수 없단다. 


장혜령, 『진주』, 12-13쪽 


끝까지 민주화 운동을 하신 아버지, 그래서 늘 쫓겨 다녔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딸은 세상에서 공집합 같은 존재였다.


이 소설은 분절적이고, 단편적으로 이어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엮여 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시점과 화자, 표현은 다르더라도 주체는 언제나 ‘나’이기 때문이다. 관찰자 시점으로 쓰였다고 해도 관찰자 목소리를 내는 '나'이다. 소설 속 화자는 ‘소녀’가 되었다가, ‘성인 여성’이 되었다가, 한 명의 ‘어머니’로, 한 명의 ‘아버지’로, 한 명의 ‘아는 어떤 아저씨’로 끊임없이 변환되지만 모두 동질적이다.


저자는 에세이를 쓴 걸까, 소설을 쓴 걸까, 일기를 쓴 걸까, 호접지몽의 꿈 이야기를 쓴 걸까. 나는 다라고 본다. 모두가 그 소녀이며, 그녀였으며, 그녀의 생각, 그녀의 느낌이었다.



나는 저자와 서로 같지만, 서로 상반된 유년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으로 언제나 정부로부터 쫓기는 사람이었다. 숨어서 다니고, 도망을 가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집에 거의 있지 않았다. 집에 왔다 하더라도 그녀 기억 속에는 아버지의 앞모습보다 떠나는 뒷모습이 더 익숙하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도 그러하다. 언제나 한집에 살았지만, 아버지는 낮과 밤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하러 가는 사람. 밤에는 집에 없었고, 낮에는 몸은 집에 있더라도 잠을 주무시느라 나에게는 언제나 부재한 사람이었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늘 잠자던 사람, 새벽에 언제 왔는지 모르게 집에 오던 사람, 늘 저녁 늦게 출근하던 사람. 나는 늘 아버지를 현관에서 배웅할 뿐이었다. 내 기억 속에도 아버지는 뒷모습으로 남아있다. 저자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다른 점은 우리 아버지는 고문 받은 일이 없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우리 아버지를 보고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란 존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자식이라면 누구나 뛰어넘어야 하는 대상이다. 부재가 너무 커서 아이러니하게 존재감이 너무 큰 우리들의 아버지. 불합리한 사회를 변혁시키고,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사회의 핵심 일꾼이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래서 가정에선 소외되고 아내라는 통역자가 없으면 자기 자식과 대화도 못 나누는 존재. 한껏 초라한 존재...


책 속에서 화자가 깜빡하고 놔두고 간 개미집(과제물)을 아버지가 파란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허겁지겁 학교로 들고 왔을 때 저자가 느꼈던 부끄러움, 친구들의 물음에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정할 때의 그 마음을 나는 십분 잘 이해한다. 교실에 들어오지 않고 돌아서 가던 아버지가 느꼈을 마음도.


나는 궁금하다. 저자의 아버지가 이 소설을 읽으셨는지. 그리고 저자의 어머니가 이 소설을 읽으셨는지. 읽으셨다면 어떻게 읽으셨는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마주 보고 앉았지만, 너무나 멀고도 먼 존재가 바로 아버지가 아닐까. 그 아버지가 민주화 운동을 하신 분이든 그렇지 않은 분이든 누구나 자신의 아버지는...



파편화된 기억들 속에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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