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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매일 일기를 쓴다. 몇 년째 쓰고 있으면서도 매일 의문이 든다. 내가 보낸 오늘 하루는 단 하루였지만, ‘내가 쓸 수 있는 일기’는 한 가지가 아니라 무한일 수 있다고. 일기를 100번 쓴다면 그 백 번의 내용은 모두 다를 것이다. 혹, 내용은 같더라도 문장이나 글의 흐름은 100번 쓰는 대로 100번 다 다를 것이다. 처음엔 거칠고 조잡하던 일기가 회를 거듭할수록 부드럽고 매끄러운 글이 된다. 나의 하루가 좀 더 드라마틱 하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또 내가 느꼈던 감정이 아닌데도 새롭게 추가되는 감정도 있고 반대로 삭제되거나, 다른 표현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일기를 쓰면서 과연 지금 쓰는 이 일기가 오늘 있었던 일, 오늘 내가 실제 느꼈던 감정인지 의문이 든다. 실은 내가 지어내는 것은 아니냐고. 나의 육신은 끊임없이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 속에 있지만, 나의 의식은 단편적이고, 단절적으로 부서져 있다.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지워나간다. 오늘이란 짧은 시간도 밤이 되면 변형되어 떠오르는 재현(再現) 일뿐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나의 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하나의 창작물이다. 일기만 그러할까.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이야기도 실제 했으되, 그 사람의 오롯한 창작물이 된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이 소설이 바로 그러한 소설이다. 소설, 에세이, 자서전, 일기, 시. 그 무엇으로도 읽힐 수 있다. 우리 의식이 그러하듯이. 실재(實在) 하는 현실 속에서 명멸하는 나의 생각과 느낌들은 내가 가장 적합하다고 느끼는 표현들로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은 민주화 운동을 하신 아버지 밑에서 자란 1980년대 어느 해에 태어난 한 소녀의,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아니, 어폐가 있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란 한 소녀의,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부재 자체가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것. 소녀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컸다. 아버지의 부재가 그녀의 유년 시절을 정의하는 그 무엇이리라. 아래 발췌 글은 화자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출소한 아버지로부터 공집합을 배울 때의 일화다.
이제 중학교에 들어갈 텐데 공집합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 아무 원소도 없는 것이 어떻게 집합이 될 수 있습니까.
(...)
기원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딸에게 결코 공집합을 이해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존재하되 보이지 않으며 결코 발음될 수 없는 것. 우리는 공집합이고 그것은 모든 것입니다. 딸은 울면서 수학 문제를 풀고 당신은 애써 화를 누그러뜨리며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 침착하게 말합니다. 다시 풀어보렴. 지금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배울 수 없단다.
장혜령, 『진주』, 12-13쪽
끝까지 민주화 운동을 하신 아버지, 그래서 늘 쫓겨 다녔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딸은 세상에서 공집합 같은 존재였다.
이 소설은 분절적이고, 단편적으로 이어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엮여 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시점과 화자, 표현은 다르더라도 주체는 언제나 ‘나’이기 때문이다. 관찰자 시점으로 쓰였다고 해도 관찰자 목소리를 내는 '나'이다. 소설 속 화자는 ‘소녀’가 되었다가, ‘성인 여성’이 되었다가, 한 명의 ‘어머니’로, 한 명의 ‘아버지’로, 한 명의 ‘아는 어떤 아저씨’로 끊임없이 변환되지만 모두 동질적이다.
저자는 에세이를 쓴 걸까, 소설을 쓴 걸까, 일기를 쓴 걸까, 호접지몽의 꿈 이야기를 쓴 걸까. 나는 다라고 본다. 모두가 그 소녀이며, 그녀였으며, 그녀의 생각, 그녀의 느낌이었다.
나는 저자와 서로 같지만, 서로 상반된 유년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으로 언제나 정부로부터 쫓기는 사람이었다. 숨어서 다니고, 도망을 가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집에 거의 있지 않았다. 집에 왔다 하더라도 그녀 기억 속에는 아버지의 앞모습보다 떠나는 뒷모습이 더 익숙하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도 그러하다. 언제나 한집에 살았지만, 아버지는 낮과 밤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하러 가는 사람. 밤에는 집에 없었고, 낮에는 몸은 집에 있더라도 잠을 주무시느라 나에게는 언제나 부재한 사람이었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늘 잠자던 사람, 새벽에 언제 왔는지 모르게 집에 오던 사람, 늘 저녁 늦게 출근하던 사람. 나는 늘 아버지를 현관에서 배웅할 뿐이었다. 내 기억 속에도 아버지는 뒷모습으로 남아있다. 저자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다른 점은 우리 아버지는 고문 받은 일이 없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우리 아버지를 보고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란 존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자식이라면 누구나 뛰어넘어야 하는 대상이다. 부재가 너무 커서 아이러니하게 존재감이 너무 큰 우리들의 아버지. 불합리한 사회를 변혁시키고,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사회의 핵심 일꾼이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래서 가정에선 소외되고 아내라는 통역자가 없으면 자기 자식과 대화도 못 나누는 존재. 한껏 초라한 존재...
책 속에서 화자가 깜빡하고 놔두고 간 개미집(과제물)을 아버지가 파란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허겁지겁 학교로 들고 왔을 때 저자가 느꼈던 부끄러움, 친구들의 물음에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정할 때의 그 마음을 나는 십분 잘 이해한다. 교실에 들어오지 않고 돌아서 가던 아버지가 느꼈을 마음도.
나는 궁금하다. 저자의 아버지가 이 소설을 읽으셨는지. 그리고 저자의 어머니가 이 소설을 읽으셨는지. 읽으셨다면 어떻게 읽으셨는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마주 보고 앉았지만, 너무나 멀고도 먼 존재가 바로 아버지가 아닐까. 그 아버지가 민주화 운동을 하신 분이든 그렇지 않은 분이든 누구나 자신의 아버지는...
파편화된 기억들 속에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