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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록 - 조선군 사령관 신류의 흑룡강원정 참전기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2
신류 지음, 계승범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9월
평점 :
흑룡강원정과 『북정록』
2018년 올해로부터 정확히 380년 전, 2차 흑룡강원정(나선정벌)이 있었다. 청나라가 러시아와 싸우는데 조선군 출병을 요구한 것이다. 인조의 '삼전도 굴욕'이 있은 지 21년 후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불벌 운동의 절정기였는데, 하지만 조선이 청을 아무리 미워하고 이를 갈아도 약했던 조선은 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654년에 1차 흑룡강원정, 뒤이어 4년 후인 1658년에 2차 흑룡강원정을 하게 된다.
사실 '흑룡강원정'보다 '나선정벌'이란 말이 더 익숙하다. 학교 다닐 때 기계적으로 외운 말인데, 이번에 『북정록』 읽다가 정확한 뜻을 몰라 검색해 보니, '나선'은 17세기 부동항과 모피를 찾아서 동쪽으로 이동해 온 러시아인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이 와중에 '나제동맹'은 왜 떠올랐지? >ㅁ<ㅋㅋ). 그래서 나선정벌(흑룡강원정)은 동남진하던 러시아인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던 전쟁을 일컫는다.
이번에 읽은 『북정록』은, 1658년에 청의 요구에 따라 흑룡강 원정에 나섰던 조선군 사령관, 신류가 원정 중에 남긴 일기다.
『북정록』은 『징비록』이나 『난중일기』에 비하면 상당히 생소하고 낯설다. 사실 『북정록』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1980년이 되어서야 민간에 알려졌다고 한다. 오랫동안 신류 집안에서 내려오다가 고서 수집가의 소장서로, 그다음 역사학자 박태근 선생의 손에 건너간 후에야 번역, 출간됐단다. 현재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2차 흑룡강원정의 1차 사료다.
오래된책방, 『북정록』
『북정록』은 조선군 사령관 신류가 출병을 나간 4월 6일부터, 조선으로 돌아오는 8월 27일까지 그 매일매일이 기록되어 있다. 『북정록』은 군사 일지로서만이 아니라, 청과 조선의 역학적 관계의, 부패한 청 사령관, 조선의 탐관오리(아픈 자를 굳이 징병해 보냄)에 대한 기록이고, 당시 청과 러시아의 배와 무기에 대한 설명과 묘사도 꼼꼼하다.
어느 시대고 전쟁이라는 것은 비참하고 비극적이며 어느 면에서는 희극적인 블랙 코미디의 느낌도 난다. 사회 모순과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은 적나라하여 정말 웃프고, 인간성의 민낯은 분노와 연민을 자아낸다. 예를 들어 청 사령관이 러시아 배 안에 있는 모피가 탐 나서 불을 지르지 않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 청 사령관도 놀란 나머지 자신의 명령을 번복하는 그 모습이란. 그리고 같은 청나라 사람이긴 하나 북경(베이징)에서 온 부원수가 바른말을 하고, 청 사령관을 꾸짖을 땐 일견 통쾌하기도 했다. - 아마 신류도 부원수의 말에 통쾌함을 느껴서 그의 말을 상당히 자세히(영화로 치면 클로즈업해서) 남겼을 것이다.
신류의 『북정록』은 1980년 이전엔 가문 대대로 내려왔을 뿐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었다고 한다. 조선 때 배시황이 남긴 《북정일록》이 있었다고 한데, 배시황이란 이름은 원정 관련 어떤 자료에도 없단다.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이 책을 위서라 보고, 국문학계에서는 소설로 본다. 조선 후기 사람들은, 객관적인 역사 자료로 흑룡강원정을 접한 게 아니라, 《북정일록》 등 역사 소설을 통해 접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소설도 역사 사료로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만, 또 그에 못지않게 사람의 입맛에 맞춰 쓴 부분도 있다. 그런 면에서 신류의 『북정록』은 날것 그대로의 역사다. 그 당시 전투 방식과 무기, 청과 조선의 역학 관계, 당시 생활상 및 그 일대 토착민에 대해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생생한 기록, 『북정록』
『북정록』은 아주 얇고, 짧은 군중일기지만 다시 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출정 당시 기록, 청군과의 엇박자, 청군과의 만남, 이동, 포로였다가 풀려난 사람들의 말, 갖가지 다양한 소문과 믿지 못할 소문, 그로 인한 신류의 갈등, 청과 러시아의 무기와 그들의 배에 대한 자세한 기록, 청 사령관의 탐욕, 북만주 일대의 지세와 지리, 그곳 사람들의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전쟁사와 문화사, 지리, 이 지역 역사 등 유익한 내용이 많다.
『북정록』은 사실 청에 대한 반감이 제일 절정일 때 청을 위해 출정한 기록이라 위에 적은 기록 못지않게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머리말에서 계승범 교수님이 적으셨듯, 청에 대한 조선 사령관 신류의 감정이 녹아들어있다. 신류의 감정적인 부분은, 후반부로 갈수록 많이 드러나는데 당시 상황을 생생히 알 수 있어 흥미로우면서도, 청의 쓸데없는 딴지와 늑장 대처에 나도 많이 답답하고 분통이 터졌다.
『북정록』을 읽으면, 정벌의 대상이었던 러시아인에 대한 반감보다 청에 대한 반감이 커진다. 처음 출병할 때 청과 삐걱거린다. 연락이 어긋나는 건 다반사, 청군은 계속 조선군에 재촉한다. 그래서 빨리 도착하면 청군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청은 항상 조선군을 탓한다. 힘 있는 자의 핑계는, 다른 무엇도 아니고 언제나 힘없는 자이다.
그리고 요구하는 것도 많다. 청의 성주는 신류에게 '고두례'를 올리도록 한다. 고두례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댄 다음, 땅에 이마를 세 번 조아리는 인사법이다. 보통 중국 황제나 황제의 칙서에 고두례를 하는데, 일개 성주에게 고두례를 요구하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한다. 당시 청 황제의 권세가 막강하다 보니, 지방 성주도 기고만장하다.
러시아와의 전투
출병한 지 2달이 지나 드디어 흑룡강에서 만난 러시아군. 러시아군은 당시 총 11척의 배를 갖고 있었다. 전투를 시작 후 먼저 승세를 잡은 연합군이 러시아 배를 불태워 가라앉히려 했다. 그런데 청 사령관은 그 배를 태우지 말라고 명한다. 배에 실린 모피 같은 재물이 탐났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이 반격을 가하자, 조선군과 청군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아차 싶었던 청 사령관은 뒤늦게 러시아 배를 태우라 명한다. 그렇게 7척은 불타고, 3척은 부서진다.
이때도 우여곡절 많았다. 연합군이 공격하기 위해 배를 비운 사이 러시아군이 연합군의 배를 탈취해 도망가고, 잡으러 가고 난리였다. 어쨌든 초기에 단번에 끝내지 못했던 전투의 결과는 정말 참혹했다.
그 나머지 적의 무리들은 배 속에서 불에 타 죽거나 강가 언덕에 뛰어내렸지만, 총탄과 화살에 맞아 죽은 시체들이 서로서로 베고 누워 있거나 엎드려 있었다. (- 56쪽, 6월 10일 일기)
조선군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우리 풍속을 모르던 청 사령관은 러시아 배를 줄 테니 그 나무를 태워 조선군 시신을 화장시키라 명한다. 신류는 조선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풍속이 없고, 또 시신을 조선으로 거둬 갈 수도 없으니 고향 사람들끼리 모아 언덕 위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멀리 이역까지 왔는데, 모래나 자갈밭에 해골을 내버려 두려니 애처롭고 가엾기만 하다.
(- 57쪽, 6월 11일 일기)
이 구절을 읽고 좀 눈물이 났다. 집 근처에 동래읍성이 있어서, 예전부터 종종 왜란 때 왜군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을 옛 동래 사람들을 상상해 보곤 했는데 그 상상이 떠올라 좀 울컥했다.
탐관오리, 청 사령관
사상자가 많이 났지만 어쨌든 전투는 끝났고, 신류는 어서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청 사령관은 차일피일 미뤘고 계속 조선군을 잡아둔다. 신류가 추측하기로, 청 사령관이 러시아 재물이 탐나 배를 태우지 않았고, 또 이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보낼 군량미가 탐나 조선군을 귀국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라고.
또 군량미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신류는 일기에 여러 날에 걸쳐 군량미를 걱정했다. 드디어 군량미가 부족해지자 신류는 청 사령관에게 군량미를 꿀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름인지라, 쌀이 썩었다. 아예 먹지도 못할 지경이라 신류가 통관에게 여러 번 간청해 사령관한테 알려달라고 해도 조선인 출신 통관들은 들은 척도 안 한다.
신류가 하다못해 다른 사람을 통해 청 사령관에게 뇌물을 주고 군량을 변통한다. 뇌물을 받고서야 청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과연 썩어 문드러져 먹기 힘든 쌀이라면, 어떻게 만 리 먼 길을 온 사람들에게 억지로 참고 먹으라고 할 수 있겠소? 이런 뜻을 대통관에게 전달해 이야기하고 나에게 말을 전했다면, 마땅히 변통해 주었을 것이오. (- 80쪽, 7월 16일 일기, 청 사령관의 말)
어이없음! 이렇게 재물만 탐내는 탐관오리, 그리고 그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통관들. 예나 지금이나 이런 병폐는 여전하다 싶었다. 통관은 모두 조선인 출신이었는데 이렇게 조선군에게 농간을 부리는지! 조선인이라 해도 통관은 경계선에 있는 직업인인지라 통관들이 조선인에게 어떤 억하심정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북정록』을 읽으면서 많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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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아시아의 아마존, 아무르강>이라는 KBS 글로벌 다큐멘터리를 봤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아무르 강, 즉 흑룡강은 너무나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이 다큐를 보면서 '신류가 저토록 아름다운 저 길을, 저 숲을, 저 강을 건넜을까?', '일찍 찾아오는 그곳의 추위와 험난한 지형에 많은 조선인들이 고통받으며 죽었겠구나' 싶었다.
한반도 바로 위에 있는 흑룡강과 그곳에서 싸우고 죽은 조선군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지. 오히려 지구 반대편인 유럽과 미국은 왜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는지. 반성하게 된다. 역사에 대한 무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북정록』을 읽고, 우리 역사와 나라 간 힘의 역학, 인간 탐욕의 민낯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본다.
역사가나 작가가 쓴 정제된 역사 책도 좋지만,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옛 원서를 역주한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 유익하다. 예전에 『징비록』을 읽었을 때도 그랬고, 이번에 『북정록』을 읽을 때도 느낀 점인데 이런 책들은 어려울 것 같지만 막상 읽으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역주하시는 분이 요즘 사람의 어휘와 역사 지식에 맞게 풀어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계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갈 때 신류의 『북정록』을 읽어 감회가 좀 남다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북한, 중국, 러시아와 육로로 직접 교류하게 된다면 그때 나선정벌이 벌어졌던 흑룡강에 가보고 싶다. 중국에는 헤이룽강, 러시아에게 아무르강 그리고 우리에게 흑룡강인 바로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