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지. 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

나는 이게 절대 내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은 너무 꽉 차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니까. (- 74쪽)


"(...) 어쨌든 절대 잊지 마세요, 폴 도련님.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꾸지람을 들은 기분이다. 수전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게 아니다. 인생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거다. (- 76쪽)


19살 대학생과 48살 주부가 만남,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각자의 가정에서 빠져나와 살림을 차렸고, 한때같이 살았으나, 어느 순간 헤어졌고, 드문드문 만나다가 결국 영원히 헤어지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 책의 화자(화가자 1인칭이 됐다가, 3인칭이 됐다가 바뀌지만)가 위에 발췌한 수전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소설이다. 19살이었던 화자는 젊었고, 어른들에 대한 청년 특유의 삐딱함이 있었고, 부모님의 정갈하고 단순한 삶을 비웃고 싫증을 냈으며,  본인은 또래 친구들과 다르다고 믿었다. 일종의 허세. 청년기의 허세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기대와 가치관을 비꼬기 위해 어머니의 권유대로 '테니스 클럽'에 가입했는데, 기쁘게도 그곳에서 부모님의 기대를 부술 만남을 가진다. 바로 부모님 또래의 여성(수전)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냥 단순히 부모님에게 반항하기 위해 수전을 만난 건 아니다. 화자는 정말 수전을 사랑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가치관을 전복하고, 친구들은 너무 무모해서 결코 하지 않을 사랑을 자기는 한다고 우쭐한 기분에 젖는다.




수전과 함께 살림을 차린 건 좋았다. 그렇게 독립을 하자, 그의 앞에 '현실'이란 무게가 툭 던져진다. '현실'은 바로 '돈'이다. '돈'에 대해 미쳐 생각지 못했던 그제야 미래(라 쓰고 직업이라 읽는)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변호사가 되기로 한다. 대학에서 법률을 선택하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전과 삐긋거리기 시작한다. 그녀가 술을, 그렇게나 증오하던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수전은 처음에 그냥 몰래몰래 마셨다. 그다음엔 조금씩 대놓고 마시기 시작한다. 그다음엔 아예 정신줄을 놓고 마신다. 화자는 학업을 이어가면서 수전의 알코올중독 증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된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조금씩 버거워진다. 환각과 환청으로 무장 강도가 침입했다고 경찰에 신고하고, 그녀의 기억력은 점차 감퇴된다. 


수전을 불쑥, 화자와 공유할 수 없는 옛날 일을 꺼낸다. 수전에게는 그녀만의 '연애의 기억', 단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화자는 수전과 만나고 함께 살면서 '연애의 기억', 역시나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수전의 알코올중독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화자는 다른 여자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나중에 해외에서 일할 땐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성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늘 어긋났다. 그 이유는, 화자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이야기(수전과 관련해서)'가 있었고, 상대방 여성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이야기(그녀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수전과 화자는 늙어갔다. 수전은 술로 인해 거의 미치광이가 된 상태에서 죽었고(수전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남편처럼 모자란 남자를 답습하게 된다. 최고의 남자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다), 화자는 비웃고, 싫어하던 부모님의 삶을 언젠가부터 만족스러워하며 그대로 답습한다. 그렇게 어른이, 기성세대가, 늙은이가 되어 간다. 화자가 젊었을 때 경멸하고 시비를 걸었던 늙은 운전자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젊었던 화자는, 그 늙은 운전자에게도 그 사람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늙은 후에야, 그때 그 사람에게도 단 하나의 이야기가 있었을 거라고 깨닫는다. 수전에게도, 조운에게도, 고든 매클라우드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고. 


수전은 처음부터 폴(화자)에게 말했었는데, 젊을 때는 그런 말이 전혀 와닿지 않지. 그 나이가 되어봐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런 면에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젊은이는 서로 닮았고, 모든 나이 든 사람들도 서로 닮았다. 



달콤쌉사름한 연애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연애를 넘어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자, 누구나에게 공통되는 지독히 사적인 이야기였다. 그래서 위에 발췌해 놓은 문구를 잠시 까먹으면, 책 속 행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쉬운 소설이다. 


저자는 언어유희를 많이 해서, 번역하신 분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우리 말에 맞춰 번역하신다고 고생하셨다. 근데 문득문득 등장하는 욕설은, 뭐랄까 평이하고 단조로운 문체에서 뭔가 단절되고 불쑥 도드라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강렬하거나, 뜬금없거나, '또 시작이냐 성난 젊은이여', 이런 느낌이 들었다. 



쉽게 읽히진 않지만, 계속 읽게 되는 그런 소설.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정말 다양하게 읽힐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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