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사 챈스의 외출
저지 코진스키 지음, 이재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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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단절된 채 오직 저택의 정원만 가꾸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저택 정원에 갇혀서 한평생 꽃과 나무들만 보살폈다.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친구도 없다. 부모도 없다. 그의 출생 서류도, 사회보장번호도 아무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사회화 과정을 겪지 않았고, 그래서 청소년기도, 아동기도 없었다.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그는 그냥 까마득히 어렸을 때부터 정원사였던 것이다. 인생에서 거의 모든 기회(chance)를 박탈당했던 이 사람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챈스(chance)였다. 

챈스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상당히 능력 있고 부유한 변호사 집에서 살게 된다. 어르신은 챈스에게 정원을 돌보도록 시켰다. 그리고 사회와 단절 시킨 채 정원에서만 일하게 한다. 어르신은 자기가 이끌던 로펌도 있었던 만큼 법에 정통한 사람인데 챈스에게 임금을 준 일도 없고, 고용 계약서를 작성한 일도 없다. 그는 어떤 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챈스를 증명할 만한 서류는 단 한 장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서류로만 따지자면, 챈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변호사가 한 사람의 정상적인 사회화를 가로막고,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인원 유린과 노동 착취를 한 것이다. 




하지만 챈스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어르신이 시키는 일만 묵묵히 했다. 그는, 자신이 가꾸는 식물들처럼 식물화된 인간이었다. 자극이 있으면 반응은 하지만,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깊은 호기심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러다 노환이 온 어르신이 죽었다. 저택에 고용되었다는 아무런 서류 흔적이 없었던 만큼,  챈스는 무일푼으로 강제퇴거를 당하게 된다.

사람들이란 보는 이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TV 속 인물들처럼, 사람들도 누군가 그들에게 눈길을 던질 때에야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제야 누군가의 마음에 자리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이미지들에 밀려 지워질 때까지만. 챈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봐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야 분명해지고, 열리고, 펴졌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흐릿하게 번지다가 사라지는 것을 뜻했다. 챈스는 사람들을 TV로 보기만 할 뿐 그들이 그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어쩌면 그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 어르신이 죽었으니 이제 그는, 이제껏 그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게 됐다. 그는 이 생각에 흐뭇했다. (- 24쪽)
챈스는 길을 걷다가 고급 승용차에 부딪혀 다리를 다친다. 승용차 주인은 챈스에게 의사들이 상주해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제안하고, 마침 갈 곳 없었던 챈스는 그녀의 제안에 응한다. 이때부터 챈스의 본격적인 세상 나들이가 시작한다. 

챈스가 가게 된 집은 대통령까지 이 집에 들러 인사를 하고 갈 정도로 거물급 금융인이다. 집주인과 대통령의 심각한 경제 토론에, 챈스는 단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식물의 생장과 사멸, 부활의 순리를 이야기한다. 챈스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연 현상을 말한 것뿐인데, 대통령과 집주인은 경제에 관한 은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챈스를 대단한 사람으로 인식한다. 

챈스가 이 자리에서 했던 은유를, 대통령이 모 연설에서 인용해 말한다. 그때부터 챈스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제인 및 대통령 고문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티비에 출연해 미국이 당면한 경제 상황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고, 세계 각국 외교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결코 의도하지 않았지만, 교양이고 지적이며 깊은 통찰력 있는 사람으로 모두 받아들이게 된다. 게다가 챈스는 무척 잘생겼는데, 그래서 그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은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까지도 있었다. 

하지만 챈스는 자신이 어떤 입장에 놓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냥 정원일 외의 시간에 봤던 TV 속 사람들이 행동하던 대로 따라 할 뿐이다. 그는 신비에 싸인 거물급 인사가 되고,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끌어들이려는 하고 급기야 부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면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은 1970년에 출간되었는데, 읽었을 때 느낌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쓰인 소설 같았다. 소설 속에서 TV 이야기만 없었다면 그렇게 믿을 것이다, 나는. 책의 전체적인 느낌은 상당히 클래식한데, 너새니얼 호손과 허먼 멜빌이 떠올랐다. 

이야기의 흐름은 우화처럼 단순하고 극적이며, 문체는 간결하고 깔끔하다. 주인공이나 주변의 인물들이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이어서 더욱 그렇게 느낀 듯하다. 

어렸을 때부터 사회와 단절된 채 살며 TV만 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으로 걸어 나오면 어떻게 될까.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알 수 없지. 그 당사자가 되지 않는 한. 

저자, 저지 코진스키는 이 소설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사람들은 챈스의 말은 제대로 듣지 않고, 추측과 단정으로 챈스를 이상화한다. 이렇게 피상적으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현대인을 비판한 게 아닐까. 현대인의 깊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의 형이상학적인 몇 마디에 열광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넘어가는 모습 말이다. 챈스는 어리석지 않다. 오히려 챈스의 겉만 보고 지레짐작과 단정으로 챈스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어리석다. 코진스키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비판하려 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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