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느낌의 도판-
어디서 봤는고 하니 초현실적 세계를 나타낸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의 작품에서였다. 몇몇의 그림에선 정말 에셔의 느낌이 난다. 하지만 위의 도판들은 에셔가 태어나기 300여 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 만든 작품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고스티노 라벨리. 태어난 곳은 북부 이탈리아, 생몰 연대는 불확실 하나 1531년에 태어나 1610년에 죽은 것으로 추측한다.
에셔의 작품은 세밀하고 섬세한 작업으로 비현실적 모습을 현실적 모습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라벨리의 작품은 실제 기계와 기구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라벨리가 살았던 시대는 르네상스 후반기로 하느님이 계신 하늘을 상상하던 시대는 종지부를 찍고 지상의 것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실적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법인 '원근법, 조감도, 투시도' 등이 르네상스 시대에 개발되고 발전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정신과 맞물린다.
라벨리의 시대 땐 '기계들의 극장'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자크 베송이라는 사람이, 1572년에 다양한 기계와 도구들에 대한 도판과 설명을 담은 책을 냈고 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유사한 책을 출간했다. 라멜리 역시 이 흐름에 따라서 『다양하고 창의적인 기계들(Le diverse et arificiouse machine, 1588)』을 만들었다.
라멜리의 책은 이전의 책들에 비해 매우 사실적이고 공학의 기본 원리를 충실히 따랐다고 하는데, 위의 도판에서 보듯 뭔가 사실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어딘지 복잡해 보인다. 라멜리의 그림대로 실제 기계를 만들면 제대로 작동할까?
르네상스 이후 17세기까지의 기술사에 대한 여러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라멜리의 기계들은 실제로 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기계공학적 재능과 독창성을 뽐내기 위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 책에 실린 간단한 기계들을 라멜리가 만들었거나 당시 작동하던 기계들을 모델로 한 것일 수 있지만, 많은 기계들은 당시 기술로 구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라멜리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그린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들이 설명한 대로 작동 가능하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재능과 후견인의 권능을 뽐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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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서의 공학'의 전통은 초기 르네상스 시기부터 유행이었고, 라멜리 역시 이 전통을 계승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런 전통에 위치했던 사람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잠수함이나 프로펠러 헬리콥터가 실제 제작되지 않았듯이, 라멜리의 기계들 대부분도 실제로 제작되어 작동되던 것들은 아니었다. 이것들은 공학적 상상력의 결실이었다.
아고스티노 라벨리, 『다양하고 창의적인 기계들』, 그림씨, 2018 (p. 8~9)
르네상스 사람들은 대단한 실력을 가졌지만, 그에 못지않게 허세도 많았던 것 같다(허세는 나의 힘!).
어쨌거나 라멜리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기계들』은 당시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공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도판 한두 개만 봐도 그랬을 것 같다. 지금 시대의 내가 봐도, 어딘가 상상력을 자극하고, 실제로 만들어서 구현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이 책에는 흐르는 강물이나 깊은 수조에 있는 물을 퍼내는 기계를 그린 그림이 많다. 왜 그럴까? 마을 사람들이 쉽게 물을 긷도록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 물 긷는 기계들의 그림이 많은 건, 귀족 정원에 물을 대거나 분수를 만들 때 참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때도 밀이 주식이다 보니 수력, 풍력, 인력을 이용해 곡식을 빻고 가는 제분 기계의 도판도 있고, 전쟁 때 적의 성에 들어가기 위해 해자 위에 임시로 놓는 다리나, 쇠창살을 절단하거나 늘리는 기계, 무거운 문을 들어 올리는 기계, 화살이나 돌, 쇠공을 먼 곳으로 날려보내는 활이나 투석 기기의 도판도 있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기계들』를 펴낸 라멜리는 이탈리아의 메디치 아래 군인 생활을 했고, 군사 목적으로 수학과 기계 공학을 익혔으며 군사 공학 전문가로 유명해진 후엔 부르봉 왕가인 앙리 3세 밑에서 활동했기 때문인데, 이 책에 실려 있는 군사 관련 도판을 보면 재밌기도 하고, 흥미롭다.
당시의 수륙양용 차. 다리도 되고 마차도 되고 배도 된다(배 안에 탄 사람 닻 내리고 있음ㅋㅋ).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서유럽도 종교 전쟁으로 시대가 불안하고 일상이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무기 관련 공학 지식이 중요해졌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의미 있었을 듯하다. 현실에서 작동되지 않는 '종이 위에서의 공학'이라도 말이다.
책의 해설과 도판 설명을 홍성욱 교수님이 하셨다. 대학 때부터 교수님 에세이를 꼭꼭 찾아 읽었고, 이 책처럼 도판이 많이 실렸던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도 재미나게 읽었다. (사실 『다양하고 창의적인 기계들』 도판을 보고 에셔의 작품보다,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가 먼저 생각났다)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 항상 교수님의 배경 지식에 놀라곤 한다.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를 읽으면서 정말 열심히 자료 수집하고, 시대와 맥락 속에 사료를 놓고 의미를 읽으시려는 노력이 느껴지는데 이 책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또 몇 페이지 남짓한 해설일 뿐이지만, 짧은 해설 속에서 르네상스 시대와 미술계, 과학, 공학, 출판 흐름에 대한 지식의 탄탄함도 느껴진다.
그리고 여전히 글을 잘 쓰신다. 쉽게 읽히게 쓰신다. 다만, 그림을 설명한 부분에선, 내가 '기어'나 '크랭크', '패들 구조물' 등등 이 어휘가 지칭하는 실제 사물을 몰라서 검색해야 했다. 다 들어 본 단어인데, 기계에 대해선 완전 젬병, 무식쟁이라 해설과 도판을 서로 연결해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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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하고 창의적인 기계들』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공학자의 상상물이 담뿍 담겨 있고, 흥미롭고 재미난 도판도 많아 르네상스나 그 당시의 공학, 군사기기에 관심 있는 분들이나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