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우화
류시화 지음, 블라디미르 루바로프 그림 / 연금술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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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 않고 류시화 님 이름만 보고 읽은 책. (시화 님, 요즘 잘 지내시는가예?!)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난 후 인내심을 가지고 인간이 삶의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길 바랐다. 신은 인간이 삶의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마을과 도시를 세우고, 예술을 창조하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보고 기뻤다.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신은 기대했다. 하지만 인간은 점점 신의 기대와 어긋나게, 삶의 기쁨을 잊고, 삶에서 배우지 못하며, 지혜로워지기보다는 어리석어지는 인간들이 자꾸만 늘어났다. 

신은 한 천사에게 지혜로운 인간 영혼을 모아, 여러 도시들에 골고루 흩어져 살도록 시켰다. 또 다른 천사에겐 어리석은 영혼을 모두 자루에 담아 신의 앞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지혜로운 영혼을 모으는 일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세상에 어리석은 영혼은 너무나 많아 그만 그 영혼을 담은 자루가 찢어지고 말았다. 그 자루 속에 담긴 어리석은 영혼들은 땅으로 떨어졌고 그들이 덜어진 곳은 폴란드의 '헤움'이라는 마을이었다. 

신은 이미 어찌할 수 없다며, 어리석은 영혼들이 모여 무슨 일을 할지 지켜보자고 한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바보들이 '헤움'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을 행복한 곳으로 만들었고, 각기 비슷한 지혜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을, '헤움'을 <현자들의  마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책은 현자들의 마을인 '헤움'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을 적고 있다. 

 



'헤움'에 관한 전설(?)은 19세기 폴란드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읽다 보면 '탈무드'의 바보 버전의 책 같다. 탈무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쓰이고 있는 책으로서 '헤움'의 바보들의 이야기 역시 19세기 탄생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쓰이고 있다. 류시화 씨도 한몫하심. 지인(레나타 체칼스카)이 보내준 '헤움'의 이야기를 한 편, 한 편씩 읽다 보니 빠져들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모아 번역해서 책으로 내셨다. 번역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류시화 씨가 직접 만든 이야기도 있다. 일단, '헤움'이 배경이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적는다면 누구나 이 『인생 우화』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이 책은 우화다. 우화(寓話)인데, 이 우화를 '어리석음의 이야기'라는 뜻인 우화(愚話)로 바꿔 쓸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헤움' 사람들을 바보라 여기고, 웃고 비웃는다. 


그러데 '헤움' 사람들이 정말로 바보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볼 땐 전혀 바보스럽지 않았다. 마을에 무슨 변고가 생기면 헤움 사람들은 아무런 해결도 하지 않은 채 이름만 바꿔 부르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됐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이 종종 있다. 일견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지.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전혀 어리석지 않다.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렇게 이름이라도 바꿔서 근심 걱정을 덜어내고 스트레스받지 않는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겠냐 싶어서. (햐, 나도 바보에다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책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도, 어리석은 가난뱅이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 부자들 이야기이고, 우리가 익히 아는 가난뱅이들의 이야기다.  


또한 '헤움' 사람들이 정의를 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사기꾼에게 당해 큰돈을 주고 사온 썩은 생선 이야기가 있다. 멀리까지 가서 정의를 아주 비싸게 사 왔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고약한 생선 썩은 내가 난다. 그러므로 헤움 사람들은 정의란 썩은 내가 나는 것으로 정의한다. 나도 동의한다.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움'에 시인이 한 명도 없자, 다른 도시들처럼 시인이 있어야 한다며 모두 시를 적어 제출하는데 이를 보고 그들은 결론을 내린다. 알고 봤더니 '헤움'에 시인이 없었던 게 아니라 모두가 시인이었다고. 이런 사고방식도 좋다. 


'헤움'은 유대인들의 마을인데, 그래서 랍비도 있다. 또 의회도 있다. '헤움'에 무슨 자그마한 일만 있어도 사람들이 의회로 몰려들어 토론한다. 7일 동안 토론한 끝에 결론을 내리고 혹은 결론이 나지 않으면 또 토론을 해서 기어코 결론을 낸다. 이런 식으로 마을의 모든 일을 해결해 낸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이고, 어찌 보면 어리석은 일 같지만 유대인들이기에 인정!


예전에 리처드 파인만이 어느 엘리베이터에서 유대인과 했던 대화가 생각난다.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온 버튼을 보고, 전기는 불인가 불이 아닌가를 두고 갑론을박했다던 이야기. 리처드 파이만이 보기에 그들은 정말로 어리석은 '헤움' 사람들이었을 거다. 


'헤움' 사람들을 바보라고, 어리석다고 생각하기엔 지금 우리 세상도 별반 나을 게 없다. 반대로 '헤움'이 여기보다 더 아늑하고, 조용하며, 살기 좋은 곳이 아닐까 싶다. 학살과 전쟁, 다툼, 질투, 온갖 범죄들이 있는 곳보다 헤움의 어리석음이 훨씬 평화롭고,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나의 생각이 류시화 씨의 의도와 맞는지 어긋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잔인함과 몰인정보다는 차라리 어리석음이 낫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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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핑팡퐁
이고 지음 / 송송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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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시트콤 같은 그림책. 핑이, 팡이, 퐁이가 운영하는 카페를 중심으로 서로 엮이고 엮인 친구나 친척, 동창,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닮은 듯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갈등과 고민을 하고, 한편으로는 서로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꼭 시트콤 시리즈 같았다.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에, 오늘 끝나면 내일 또 같은 시간에 방영되는 시트콤처럼 나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언제나 그곳에 있어줄 것 같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다. 

또 이 책에선 겨울 냄새가 많이 났다. 계절의 배경이 겨울이라 등장인물 대부분 겨울옷을 입었고, 주인공들이 운영하는 커피숍의 따뜻한 느낌 때문이기도 하고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한 인상적인 프러포즈(특별할 것 없는 프러포즈였지만, 남자의 특별한 마음이 느껴져서 참 좋았던 프러포즈였다) 그리고 이후 눈싸움 장면이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엔 각 페이지마다 따뜻한 흰 여백으로 채워져 있다. 흡사 눈 쌓인 거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곳은 내가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차갑게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소복한 눈에 스며 드는 듯 나를 따뜻하게 에워싸는 하얀 눈 같은 여백이었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몇 마디 없는 대사와 정적이면서 살짝살짝 변화가 주어진 그림들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책은, 줄거리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어떤 질감이랄까 느낌과 분위기가 먼저 와닿는 그런 그림책이다. 




책의 내용은, 핑이와 팡, 퐁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벌어진 일 혹은 서로 엮이고 엮인 사람들이 일상을 살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공감 요소가 많다. 

책엔 특히 고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현재 나도 하고 있는 고민들, 예전엔 했지만 이젠 더 이상 하지 않는 고민들, 나는 겪어보지 않았고 앞으로 겪을 일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왠지 이해가 되는 고민들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내가 깨닫게 된 게 있는데 내가 이제 인생의 변곡점에 들어섰나 싶기도 한 깨달음이었다. 내가 예전의 나와 좀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 예전에 나는 고민을 적극 찾아 나섰고 그래서 고민 속에 파묻혀 살았는데 이제 고민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있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즐겨 하고, 내가 무언가를 말해야 할 필요도, 욕구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나도 마음속에 뭔가 차오르면 그걸 비워내야 하는데, 그게 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없는 말이나, 일상적이지만 따뜻한 느낌이 드는 그런 대화가 좋다. 예전엔 그게 속 알맹이 없고, 위선적인 것 같아 싫었는데 이제는 좋아진 것이다. 이게 더 마음이 편해. 

어쩌면, 이 책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루는 '가면' 속으로 현재 내가 깊이 들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가면을 벗고 사람을 마주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포기했다고 해야 할지, 혹은 반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다 드러냈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가면을 벗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마음이 푹 놓여서 고민과 방황을 떨쳐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위에 적었듯 이 책의 마지막은, 여자 주인공이 남자 친구로부터 프러포즈를 받는데 그 느낌이 참 묘했다. 좋으면서도 어딘지 슬프고, 가슴이 시리면서도 따뜻한 느낌. 누군가를 만나서 기쁜데, 그 사람은 내가 온전히 나 혼자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슬픔이 함께 느껴지는 것이다. 외롭지 않은데 외로움이 뒤섞인. 

참 묘하고, 묘하다. 
정말 묘하고도 묘한 계절, 겨울 같은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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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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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고독한 늑대의 피』는 화자(히오카 슈이치)가 구레하라 동부경찰서에 발령된 첫날을 시작으로 그의 인생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순간까지 전개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히오카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본 소설은, 445쪽에 달하는 두툼한 두께에도 깔끔한 문체와 군더더기 없는 스토리로 가독성이 좋다(스피디!). 저자의 간결한 문체는 스토리의 흡입력을 끌어올리는데, 이런 문체로 쓰인 일본 소설은 오랜만이어서 좀 반가웠다. 빼야 할 부분도 없었고, 더해야 할 부분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현대 일본 소설은 표현이나 구성이 정형적이고, 어딘지 여유가 지나치다 싶은 느낌이 드는데 유즈키 유코의 신작 『고독한 늑대의 피』는 그런 부분이 없다. 딱, 정량의 소설이고, 미숙함 없는 소설이다. 


학창 시절,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많이 볼 시기 때 일본 학원 폭력물을 많이 봤다. 당시 유행이기도 했고(아마도 이 장르의 최고 전성기였다죠, 아마) 친오빠의 영향도 컸다. 물 건너 온 작품이라 그런지, 만화 배경은 1980년 대~1990년 대 초중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는데 이 작품들로 일본인의 스타일, 그들의 말투, 그곳의 분위기를 배웠다. 만화가에 의해 한 번 걸러진 세상이니, 내가 보고 느낀 일본과 실제 일본은 많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내 마음속에 각인된 일본과 일본 사람에 대한 느낌이 있다. 『고독한 늑대의 피』의 배경이 1988년 일본이어서, 어렸을 때 봤던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상되었고 그래서 좀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난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세상, 만나 본 적 없는 야쿠자들인데 너무나 잘 상상되어 놀람. 역시 어렸을 때 관심 있게 보고 즐긴 것은 평생 간다.)



『고독한 늑대의 피』는 1988년 ‘구레하라’라는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구레하라’는 히로시마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항구 도시다. 당시 이 지역은 야쿠자 조직 간 권력 다툼이 치열했고 때문에 치안이 불안했다. 일반 시민의 불만이 높아지자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폭력단 대책법’을 수립해 야쿠자들을 소탕한다. 이 소설은 ‘폭력단 대책법’이 수립되기 전, 살벌하게 세력 다툼을 벌이던 야쿠자들 속에서 정의와 불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던 형사에 대한 이야기다. 책의 서술은 '히오카 슈이치'라는 경찰에 의해 그려지지만 '히오카'는 화자일 뿐이고, 진짜 주인공은 늑대 무리에서 벗어난 한 마리 고독한 늑대 같던 '오가미 쇼고'라는 형사다.  

그렇게 복잡한 소설은 아니지만, 낯선 일본 어휘와 등장인물들이 많아 중요한 등장인물과 야쿠자 조직을 정리해봤다. (정리하지 않으면 좀 헷갈린다. 나에게 일본 사람 이름은 다 비슷비슷하게 들려서 러시아 소설만큼이나 등장인물 정리가 필요하다. ㅠㅅㅠ)

│ 등장인물 │

- 오가미 쇼고 : 구레하라 동부경찰서 수사2과 주임이자 ‘폭력단’계(係) 반장. 44살. 16년 전 아내와 아들(당시 1세)이 의문의 뺑소니 사고로 죽음. 
- 히오카 슈이치 : 25살. 히로시마 대학 졸업. 히로시마에서 3년 근무하다 구레하라 동부서로 발령. 카라데 유단자. 
- 치노세 모리타카 : 30대 중반, 오다니구미 2인자.
- 오다니 겐지 : 68세, 오다니구미 두목. 살인 교사로 돗토리 형무소 복역 중.
- 다키이 긴지 : 히로시마 현 내(內) 최대 조직인 진세이카이의 4인자. 오가미 쇼고와 학교 동창
- 사이모토 도모야 : 14년 전인 1974년, 이라코카이 조직원에게 살해당함.
- 아키코 : 요릿집 ‘시노’의 여주인. 사이모토 도모야의 아내.
- 고사카 다카후미 : 아키 신문사 보도부 차장. 오가미 쇼고의 뒤를 캠. 
- 우에사와 지로 : 가코무라구미가 운용하는 ‘구레하라 금융’의 경리(男). 봄부터 행방불명 상태.
│ 야쿠자 조직 │

- 오다니구미 : 오다니 겐지가 이끄는 조직으로, 구레하라가 주 활동 무대. 조직원 50명. 
- 가코무라구미 : 신생 조직으로, 구레하레에서 빠르게 세를 확장 중. 히로시마의 이라코카이의 산하 조직이기도 함. 마약, 도박, 불법 대부업 등으로 악명. 오다니구미를 궤멸시키는 것이 목표. 
- 진세이카이 : 히로시마 현 내 최대 조직. 
  
 참고) ‘- 구미’, ‘- 카이’는 무리, 조직이라는 뜻. ‘오다니구미’는 '오다니'의 패거리라는 뜻으로 ‘오다니 겐지’가 이끄는 조직이라는 의미이며,  ‘진세이카이’란 말 역시 ‘진세이’의 패거리라는 뜻이다. 

이 소설의 동력은 '오가미 쇼고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이다. 읽다 보면 오가미 쇼고가 형사인지, 야쿠자인지 헷갈린다. 특히, 오가미가 조직의 이인자인 '이치노세 모리타카'를 '선택'했다고 말할 땐 오가미가 야쿠자의 끄나풀로 활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다. 

오가미 쇼고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다. 태평양 전쟁 시 만주에서 경찰로 일했던 아버지에 영향을 받아 오가미도 경찰이 되었지만, 학창 시절부터 불량기가 꽤 있었고 언제나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경계선 위에 있었다. 늑대는 원래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인데, 경찰이나 야쿠자도 각각 하나의 무리라 볼 수 있다. 그런 무리에서 떨어져 이쪽에도 속했다가 저쪽에도 속하는, 그래서 아무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오가미 쇼고는 '고독한 늑대(lone wolf)다. 

그러나 그런 오가미를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 한다. 화자인 히오카가 특히 그러한데, 하지만 오가미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아 히오카도 오가미를 이해하게 되고 그의 뒤를 잇는다. 
이 소설을 읽고, 상당히 '일본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특유의 문화와 가치관이 잘 스며있다. 『고독한 늑대의 피』를 읽고 제일 많이 떠올린 건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이 정말 중시하는 건 '명예'라고 했다. 자기가 마음에 정한 것, 자신이 따르겠다고 한 것은 기꺼이 따르는 것. 오가미는 경찰이면서 불법을 자행하는 '회색' 같은 인간이지만 자신이 결심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야쿠자도 도(道)를 저버리는 야비한 야쿠자는 나쁘게 표현하고, 도(道)와 명예를 따르는 야쿠자는 좋게 표현한다.

억대의 돈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오다니의 배짱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두목들이 경의를 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다니의 절도 있는 몸가짐에 있었다. 도박에서 이기든 지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정좌를 유지했다. 무엇보다도 원칙과 소신을 중시해 상대가 아무리 큰 조직이라도 부당한 요구에는 목숨을 걸고 맞섰다. - 그자는 옛날 무사지. (- 51쪽)

노름을 해도 몸가짐에 절도가 있으면 일본 사람들은 좋게 본다;;


이게 우리나라 문화와 상당히 다른데, 우리는 유교 문화가 깊이 배어 있어서 '명예'보다는 '옳고 그름을 따져 옳음을 따르는 문화'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예가 조선의 '삼사'다. 이 새파랗게 젊은 사관들로 구성된 언론기관의 눈밖에 나면, 지위 고하 막론하고 탄핵된다. 우리 문화에서 연공서열이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바로 '옳고 그름(是非)'이다(우리가 얼마나 시비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올라오는 뉴스 댓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자신이 따르고자 한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무조건 따른다. 『고독한 늑대의 피』에도 나왔지만, 자기가 모시는 사람이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면, 아랫사람은 희다고 말해야 한다.


2과의 규칙은 야쿠자 세계의 규칙과 같아. 쉽게 말해서 운동선수들처럼 선후배 관계가 확실하다고 보면 돼. 선배의 터무니없는 설교나 기합도 묵묵히 견뎌야 하는데 거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야쿠자는 평소에도 불합리한 세계에서 살아. 두목이 희다고 하면 까마귀도 흰 거야.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싸우는 거라고. 야쿠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처럼 불합리한 세계에 살아야 하는 거야. (- 22쪽)

이것의 가장 극적인 예가 2차 세계대전이 아닐까 싶다. '가미카제' 등 결사항전을 불사하던 일본군이 천황의 '무조건 항복' 말 한마디에 속전속결, 꾸물거림도 반항도 없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저자 유즈키 유코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독한 늑대의 피』는 일본인이 중시하는 '명예'를 보여준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는 '근성'이라는 말로도 표현되었다. 


오랜만에 일본 문화나 일본 사람들의 가치관을 깊이 엿볼 수 있는 책을 읽어 좋았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간결한 문체로 책이 빠르게 읽히는 것도 좋았고. 그리고 직설은 시시한데, 이 소설 속에 은유된 일본 정신을 쏙쏙 맞춰 보는 건 유익하고 재밌었다. 




+ 추가) 히오카의 정체를 처음부터 밑밥을 너무 많이 뿌림. :p  

+ 추가) 제목의 '피'는 아마도 후반부의 '희생'을 의미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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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낙관주의자 - 심플하고 유능하게 사는 법에 대하여
옌스 바이드너 지음, 이지윤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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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멋있어서 읽은 책. 특히 '낙관주의자'보다 '지적인'이란 말이 더 마음에 들었다. 


독일어의 a도 몰라서 구글 번역기랑 네이버 파파고를 돌려보니 이 책의 원제(Optimismus warum manche weiter kommen als andere)의 뜻이 '지적인 낙관주의자'는 아닌 게 확실하다. 원제의 뜻은 '낙관주의자들은 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나'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것 같다(몰라몰라, 대충 그런 듯하다). 책의 구성은 원제에 충실한데 이 말인즉슨, '지적인 낙관주의자'가 이 책의 중심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책의 구성│

먼저 낙관주의자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chapter1)하고, 여러 종류의 낙관주의자들을 고찰(chapter2)한다. 그다음 낙관주의자에 대해 좀 더 깊은 설명(chapter3)을 하고, 이상 비관론자들이 왜 자신은 낙관론자로 태어나지 않았는지 비관할까 봐(아마도...) 낙관주의자들도 태어날 때부터 낙관주의자였던 건 아니라는 설명을 한다(chapter4 ; 3단계의 사회화).  이후 낙관주의자가 되기 위한 학습 방법과 태도,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일러준다(chapter 5, 6, 7).



│느낀 점│
이 세상은 현재 76억 명으로 채워져 있고, 이 76억 명을 성격별로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눈다면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낙관주의자들을 몇 개의 소그룹으로 잘게 쪼갤 수 있는데 가령, 이 책의 저자처럼 목적 낙관주의자(비참한 상황에서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는 낙관론자) / 순진한 낙관주의자(대체적으로 항상 세상이 아름다운 낙관론자) / 숨은 낙관주의자(최악을 가정하고 작은 행복에 안주하는 낙관론자) / 이타적 낙관주의자(모두의 안녕과 공동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낙관론자) / 지적인 낙관주의자(기회와 한계를 알고 최상의 미래를 그리며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는 낙관론자)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는 이렇게 나누려고 하면 얼마든지 분류하고 나눌 수 있겠지만, 인간은 너무나 다채로운 존재라서 항상 정해 놓은 설명과 개념을 벗어나기 일쑤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도 잠깐 언급하는 윈스턴 처칠의 경우, 처칠은 낙관적인 면도 충분히 많이 있었지만 다른 누군가가 볼 때 처칠은 고집불통이면서 능구렁이 같은 면도 있었고, 자기가 영국 총리를 맡지 않으면 영국은 곧장 쇠퇴할 거란 염세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처칠은 어떻게 보면 자신감 넘치는 낙관주의자인데, 어떻게 보면 지독한 염세주의자였던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했다가 다시 위축되는 존재다. 저자가 설명한 것과 달리, 인간은 3차 사회화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은 갱년기 이후 변화되는 점은 고려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 특히 노년기로 접어들면 눈물도 많아지고, 개인차가 있긴 하나 세상을 보수적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비관적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위에 예로든 처칠이 가장 적합한 예. 많아지는 걱정, 곧잘 느끼는 위기감, 자주 쏟아지는 눈물. 

그래도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인지 이해가 된다. 비관주의자. 특히 투덜이꾼에,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을 할퀴고 짓밟는 자들, 험담하는 자들, 꼬투리 잡고 물고 늘어지는 자들... 사회생활하면서 정말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스트레스받아 이들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믿고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내 인생인데, 그들에게 내 마음과 신경이 붙들려 머물 순 없는 것이다. 타고난 낙관주의자로 태어났다면 좋았겠지만, 보통은 여러 번에 걸친 부정적인 기억(1~3차 사회화 기간 동안) 때문에 소심한 비관론자가 되기 싶다. 어쨌거나 더 나은 삶, 더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이 책에 소개한 대로 노력해서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이 좋다(chapter 5~7에서 소개). 

이 책을 읽고 떠오른 한 인물, 사르트르. 그가 쓴 한 구절을 옮겨 본다. 

나는 내 생애가 행복하게 끝나리라고 미리 단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뜻밖의 일이란 기껏해야 하나의 덫에 불과하며, 새로운 일이라는 것도 외관에 지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의 요구가 나를 이 세상에 탄생케 함으로써 모든 것을 작정해 놓았으니 말이다. (...) 다시 말하면, 나는 어떤 사태에도, 또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종말의 질서를 간직해 나갔다. 나는 나의 죽음을 통해서 내 삶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 하나 더는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꽉 닫힌 기억뿐이었다. 
- 사르트르, 『말』, 민음사 / p.249

사르트르야말로, 이 책의 저자 '옌스 바이드너'가 말하는 '지적인 낙관주의자'의 대표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는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가 있고, 그 속에서도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어쨌거나 선택은 각자의 몫. 각자의 노력 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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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는 독서 -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고 싶은 인생의 책들 쏜살 문고
클라이브 제임스 지음, 김민수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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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좋은데, 민음사 제목이 구리다. <시한부 환자의 독서 편력기>가 얼추 책 내용과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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