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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평점 :
소설 『고독한 늑대의 피』는 화자(히오카 슈이치)가 구레하라 동부경찰서에 발령된 첫날을 시작으로 그의 인생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순간까지 전개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히오카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본 소설은, 445쪽에 달하는 두툼한 두께에도 깔끔한 문체와 군더더기 없는 스토리로 가독성이 좋다(스피디!). 저자의 간결한 문체는 스토리의 흡입력을 끌어올리는데, 이런 문체로 쓰인 일본 소설은 오랜만이어서 좀 반가웠다. 빼야 할 부분도 없었고, 더해야 할 부분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현대 일본 소설은 표현이나 구성이 정형적이고, 어딘지 여유가 지나치다 싶은 느낌이 드는데 유즈키 유코의 신작 『고독한 늑대의 피』는 그런 부분이 없다. 딱, 정량의 소설이고, 미숙함 없는 소설이다.
학창 시절,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많이 볼 시기 때 일본 학원 폭력물을 많이 봤다. 당시 유행이기도 했고(아마도 이 장르의 최고 전성기였다죠, 아마) 친오빠의 영향도 컸다. 물 건너 온 작품이라 그런지, 만화 배경은 1980년 대~1990년 대 초중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는데 이 작품들로 일본인의 스타일, 그들의 말투, 그곳의 분위기를 배웠다. 만화가에 의해 한 번 걸러진 세상이니, 내가 보고 느낀 일본과 실제 일본은 많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내 마음속에 각인된 일본과 일본 사람에 대한 느낌이 있다. 『고독한 늑대의 피』의 배경이 1988년 일본이어서, 어렸을 때 봤던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상되었고 그래서 좀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난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세상, 만나 본 적 없는 야쿠자들인데 너무나 잘 상상되어 놀람. 역시 어렸을 때 관심 있게 보고 즐긴 것은 평생 간다.)
『고독한 늑대의 피』는 1988년 ‘구레하라’라는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구레하라’는 히로시마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항구 도시다. 당시 이 지역은 야쿠자 조직 간 권력 다툼이 치열했고 때문에 치안이 불안했다. 일반 시민의 불만이 높아지자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폭력단 대책법’을 수립해 야쿠자들을 소탕한다. 이 소설은 ‘폭력단 대책법’이 수립되기 전, 살벌하게 세력 다툼을 벌이던 야쿠자들 속에서 정의와 불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던 형사에 대한 이야기다. 책의 서술은 '히오카 슈이치'라는 경찰에 의해 그려지지만 '히오카'는 화자일 뿐이고, 진짜 주인공은 늑대 무리에서 벗어난 한 마리 고독한 늑대 같던 '오가미 쇼고'라는 형사다.
그렇게 복잡한 소설은 아니지만, 낯선 일본 어휘와 등장인물들이 많아 중요한 등장인물과 야쿠자 조직을 정리해봤다. (정리하지 않으면 좀 헷갈린다. 나에게 일본 사람 이름은 다 비슷비슷하게 들려서 러시아 소설만큼이나 등장인물 정리가 필요하다. ㅠㅅㅠ)
│ 등장인물 │
- 오가미 쇼고 : 구레하라 동부경찰서 수사2과 주임이자 ‘폭력단’계(係) 반장. 44살. 16년 전 아내와 아들(당시 1세)이 의문의 뺑소니 사고로 죽음.
- 히오카 슈이치 : 25살. 히로시마 대학 졸업. 히로시마에서 3년 근무하다 구레하라 동부서로 발령. 카라데 유단자.
- 이치노세 모리타카 : 30대 중반, 오다니구미 2인자.
- 오다니 겐지 : 68세, 오다니구미 두목. 살인 교사로 돗토리 형무소 복역 중.
- 다키이 긴지 : 히로시마 현 내(內) 최대 조직인 진세이카이의 4인자. 오가미 쇼고와 학교 동창
- 사이모토 도모야 : 14년 전인 1974년, 이라코카이 조직원에게 살해당함.
- 아키코 : 요릿집 ‘시노’의 여주인. 사이모토 도모야의 아내.
- 고사카 다카후미 : 아키 신문사 보도부 차장. 오가미 쇼고의 뒤를 캠.
- 우에사와 지로 : 가코무라구미가 운용하는 ‘구레하라 금융’의 경리(男). 봄부터 행방불명 상태.
│ 야쿠자 조직 │
- 오다니구미 : 오다니 겐지가 이끄는 조직으로, 구레하라가 주 활동 무대. 조직원 50명.
- 가코무라구미 : 신생 조직으로, 구레하레에서 빠르게 세를 확장 중. 히로시마의 이라코카이의 산하 조직이기도 함. 마약, 도박, 불법 대부업 등으로 악명. 오다니구미를 궤멸시키는 것이 목표.
- 진세이카이 : 히로시마 현 내 최대 조직.
참고) ‘- 구미’, ‘- 카이’는 무리, 조직이라는 뜻. ‘오다니구미’는 '오다니'의 패거리라는 뜻으로 ‘오다니 겐지’가 이끄는 조직이라는 의미이며, ‘진세이카이’란 말 역시 ‘진세이’의 패거리라는 뜻이다.
이 소설의 동력은 '오가미 쇼고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이다. 읽다 보면 오가미 쇼고가 형사인지, 야쿠자인지 헷갈린다. 특히, 오가미가 조직의 이인자인 '이치노세 모리타카'를 '선택'했다고 말할 땐 오가미가 야쿠자의 끄나풀로 활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다.
오가미 쇼고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다. 태평양 전쟁 시 만주에서 경찰로 일했던 아버지에 영향을 받아 오가미도 경찰이 되었지만, 학창 시절부터 불량기가 꽤 있었고 언제나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경계선 위에 있었다. 늑대는 원래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인데, 경찰이나 야쿠자도 각각 하나의 무리라 볼 수 있다. 그런 무리에서 떨어져 이쪽에도 속했다가 저쪽에도 속하는, 그래서 아무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오가미 쇼고는 '고독한 늑대(lone wolf)다.
그러나 그런 오가미를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 한다. 화자인 히오카가 특히 그러한데, 하지만 오가미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아 히오카도 오가미를 이해하게 되고 그의 뒤를 잇는다.
이 소설을 읽고, 상당히 '일본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특유의 문화와 가치관이 잘 스며있다. 『고독한 늑대의 피』를 읽고 제일 많이 떠올린 건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이 정말 중시하는 건 '명예'라고 했다. 자기가 마음에 정한 것, 자신이 따르겠다고 한 것은 기꺼이 따르는 것. 오가미는 경찰이면서 불법을 자행하는 '회색' 같은 인간이지만 자신이 결심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야쿠자도 도(道)를 저버리는 야비한 야쿠자는 나쁘게 표현하고, 도(道)와 명예를 따르는 야쿠자는 좋게 표현한다.
억대의 돈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오다니의 배짱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두목들이 경의를 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다니의 절도 있는 몸가짐에 있었다. 도박에서 이기든 지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정좌를 유지했다. 무엇보다도 원칙과 소신을 중시해 상대가 아무리 큰 조직이라도 부당한 요구에는 목숨을 걸고 맞섰다. - 그자는 옛날 무사지. (- 51쪽)
노름을 해도 몸가짐에 절도가 있으면 일본 사람들은 좋게 본다;;
이게 우리나라 문화와 상당히 다른데, 우리는 유교 문화가 깊이 배어 있어서 '명예'보다는 '옳고 그름을 따져 옳음을 따르는 문화'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예가 조선의 '삼사'다. 이 새파랗게 젊은 사관들로 구성된 언론기관의 눈밖에 나면, 지위 고하 막론하고 탄핵된다. 우리 문화에서 연공서열이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바로 '옳고 그름(是非)'이다(우리가 얼마나 시비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올라오는 뉴스 댓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자신이 따르고자 한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무조건 따른다. 『고독한 늑대의 피』에도 나왔지만, 자기가 모시는 사람이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면, 아랫사람은 희다고 말해야 한다.
2과의 규칙은 야쿠자 세계의 규칙과 같아. 쉽게 말해서 운동선수들처럼 선후배 관계가 확실하다고 보면 돼. 선배의 터무니없는 설교나 기합도 묵묵히 견뎌야 하는데 거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야쿠자는 평소에도 불합리한 세계에서 살아. 두목이 희다고 하면 까마귀도 흰 거야.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싸우는 거라고. 야쿠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처럼 불합리한 세계에 살아야 하는 거야. (- 22쪽)
이것의 가장 극적인 예가 2차 세계대전이 아닐까 싶다. '가미카제' 등 결사항전을 불사하던 일본군이 천황의 '무조건 항복' 말 한마디에 속전속결, 꾸물거림도 반항도 없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저자 유즈키 유코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독한 늑대의 피』는 일본인이 중시하는 '명예'를 보여준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는 '근성'이라는 말로도 표현되었다.
오랜만에 일본 문화나 일본 사람들의 가치관을 깊이 엿볼 수 있는 책을 읽어 좋았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간결한 문체로 책이 빠르게 읽히는 것도 좋았고. 그리고 직설은 시시한데, 이 소설 속에 은유된 일본 정신을 쏙쏙 맞춰 보는 건 유익하고 재밌었다.
+ 추가) 히오카의 정체를 처음부터 밑밥을 너무 많이 뿌림. :p
+ 추가) 제목의 '피'는 아마도 후반부의 '희생'을 의미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