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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핑팡퐁
이고 지음 / 송송책방 / 2018년 8월
평점 :
차분한 시트콤 같은 그림책. 핑이, 팡이, 퐁이가 운영하는 카페를 중심으로 서로 엮이고 엮인 친구나 친척, 동창,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닮은 듯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갈등과 고민을 하고, 한편으로는 서로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꼭 시트콤 시리즈 같았다.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에, 오늘 끝나면 내일 또 같은 시간에 방영되는 시트콤처럼 나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언제나 그곳에 있어줄 것 같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다.
또 이 책에선 겨울 냄새가 많이 났다. 계절의 배경이 겨울이라 등장인물 대부분 겨울옷을 입었고, 주인공들이 운영하는 커피숍의 따뜻한 느낌 때문이기도 하고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한 인상적인 프러포즈(특별할 것 없는 프러포즈였지만, 남자의 특별한 마음이 느껴져서 참 좋았던 프러포즈였다) 그리고 이후 눈싸움 장면이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엔 각 페이지마다 따뜻한 흰 여백으로 채워져 있다. 흡사 눈 쌓인 거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곳은 내가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차갑게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소복한 눈에 스며 드는 듯 나를 따뜻하게 에워싸는 하얀 눈 같은 여백이었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몇 마디 없는 대사와 정적이면서 살짝살짝 변화가 주어진 그림들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책은, 줄거리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어떤 질감이랄까 느낌과 분위기가 먼저 와닿는 그런 그림책이다.

책의 내용은, 핑이와 팡, 퐁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벌어진 일 혹은 서로 엮이고 엮인 사람들이 일상을 살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공감 요소가 많다.
책엔 특히 고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현재 나도 하고 있는 고민들, 예전엔 했지만 이젠 더 이상 하지 않는 고민들, 나는 겪어보지 않았고 앞으로 겪을 일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왠지 이해가 되는 고민들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내가 깨닫게 된 게 있는데 내가 이제 인생의 변곡점에 들어섰나 싶기도 한 깨달음이었다. 내가 예전의 나와 좀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 예전에 나는 고민을 적극 찾아 나섰고 그래서 고민 속에 파묻혀 살았는데 이제 고민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있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즐겨 하고, 내가 무언가를 말해야 할 필요도, 욕구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나도 마음속에 뭔가 차오르면 그걸 비워내야 하는데, 그게 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없는 말이나, 일상적이지만 따뜻한 느낌이 드는 그런 대화가 좋다. 예전엔 그게 속 알맹이 없고, 위선적인 것 같아 싫었는데 이제는 좋아진 것이다. 이게 더 마음이 편해.
어쩌면, 이 책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루는 '가면' 속으로 현재 내가 깊이 들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가면을 벗고 사람을 마주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포기했다고 해야 할지, 혹은 반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다 드러냈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가면을 벗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마음이 푹 놓여서 고민과 방황을 떨쳐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위에 적었듯 이 책의 마지막은, 여자 주인공이 남자 친구로부터 프러포즈를 받는데 그 느낌이 참 묘했다. 좋으면서도 어딘지 슬프고, 가슴이 시리면서도 따뜻한 느낌. 누군가를 만나서 기쁜데, 그 사람은 내가 온전히 나 혼자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슬픔이 함께 느껴지는 것이다. 외롭지 않은데 외로움이 뒤섞인.
참 묘하고, 묘하다.
정말 묘하고도 묘한 계절, 겨울 같은 그림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