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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인생 질문 - 예수를 만나야만 알 수 있는 진리!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9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팀켈러의 인생질문을 읽고
박정원
몇 해 전 “대통령의 글쓰기”로
유명한 한 작가분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기대를 가지고 찾았던 강연인 만큼 참 많은 유익이 있었는데
유익 못지 않게 잊혀지지 않는 강연자의 이야기는 ‘질문’에
관한 것이었다. 요는 한국사람들은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문하고
묻고 의심하는 사고가 익숙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작가의 고교시절 에피소드와 함께 재밌게 이야기 한 부분이 지금도 잔잔한 울림과 마치 도전처럼
기억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서, 또 개인적인 삶에서도 질문은 “금기의
영역”처럼 느껴질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라서 한국사람은 ‘덮어놓고 믿는 믿음’에 익숙하다. 신앙에 대한 질문이 많을 수 밖에 없음에도 질문을 여간해서는
잘 하지 않는다. 이유야 모두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요즘 특히나 너무 흠모하는(?) 팀 켈러의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목이 “인생질문”이다. 물론 원제목은 “Encounters
with Jesus(예수님과의 조우)”인데, 나는
한국판 제목이 더 와 닿는다.
요즘은 인생**이란 말이 유행이다.
인생사진, 인생맛집, 인생여행 등… 일생에 기억될 의미 있는 무언가에 대한 표현쯤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질문’이란 제목은 조금도 가장되지도 그저 한낱
유행에 편승하지도 않은 “인생제목”이다.
예수님을 향한 질문… 그분에 대한 질문보다 우리의 인생에 더 중요한
제목이 있을까?
저자는 자신도 한때는 이러한 질문, 사실 회의를 품고 살았던 적이
있음을 고백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크리스천이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분의
구주되심에 대한 회의와 질문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Part I. 의 제목이 “예수와의 조우, 인생의 답을 얻다.”이다. 인생의 모든 방황과 질문은 예수님을 만날 때 해결된다. 물론 다
아는 이야기인데 사실 예수님을 만나기까지가 모두에게 그리 쉽지 않다. 특히 요즘과 같은 시대에 기독교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에게 그리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며, 별로 마음 열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면에서 특별하고 유의미하다. 일단 흥미롭고 또한 실제적이며, 아주 논리적이면서도 무엇보다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고 실제적이라 함은 이 책이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칫 딱딱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나 복음적 문구들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성, 한 여인과 같이 우리 일상에 우리와 같은 인물의 등장과 그들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독자와 청중에게 매우 흥미롭고도
실질적인 접근과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화려한 언변과 특유의 혜안과 전개는 이러한
흥미와 실제를 배가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설화적(내러티브적) 접근이 자칫 복음의 핵심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거나, 한 낱 누군가의
이야기 정도로 끝날 공산이 클 수 있지만, 저자가, 화자가
팀 켈러라면 이야기는 완전 달라진다.
단순히 등장인물의 이야기나 대화를 서술하는 것을 넘어서 누구도 쉽게 찾아 낼 수 없는 본문의 정수와 설화체 본문을
마치 강화체 본문인양 풀어가는 저자의 능력은 놀람을 넘어 존경을 금치 못할 정도이다.
책은 모두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Part I. 예수와의 조우, 인생의 답을 얻다. Part II. 영원한 삶을 위해 당신의
구주 예수를 만나라. 이다. 이 두 파트는 논리나 책의 전개상의 구분이기도 하겠지만 저자가 ‘감사의
말’에서 밝히는 대로, 첫 번째 파트는 옥스퍼드 타운홀에서
진행했던 강의를 바탕으로, 두 번째 파트는 하버드클럽에서 기업인 조찬 모임을 통해 이루어진 강의를 기초한
것으로 나누어진 것 같다.
Part 1은 1. 회의론자:나다나엘, 2.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3. 슬퍼하는 자매들: 마르다와 마리아, 4. 혼인잔치:
예수의 어머니, 5. 최초의 그리스도인: 막달라
마리아 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1장을 통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라는 나다나엘을 태도를 인류의 본성이라 규정하며 기독교를 이런 편견과
조롱 섞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 책이 존재함을 오히려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런
멸시와 조소는 언제나 해로우며, 기독교는 그러한 회의론자들 조차 동의하고 품고 있는 많은 핵심 가치의
원뿌리임을 강조한다.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나 사상 체계와 구별되는 차이점의 정수는
바로 ‘복음’이다. (중략) 그런데 기독교는 이와는 정반대로 말한다. 타종교와 철학은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하셨다고 말한다. 또 타종교와 철학은 중요한 의문들의 답을 찾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이 그 모든 것의 ‘답’이라고 말한다(p.37).”
이어 저자는 알래스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이라는 책에 나온 내용을 인용한다.
“사물의 목적을 모르고는 그것의 좋고 나쁨을 결코 분간할 수 없다. 인간이 지어진 목적이 없다고 믿으면서, “저 사람은 바르게 살지
않는다. 행실이 틀렸다.”라고 말하면 자가당착, 자기모순이다(p.44).”
저자의 명언이 이어진다. “그분은 우리를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시면서도
온유하게 대하신다(p.45).”
2장은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별개로 봐서는 안되며 이들의 공통점을 통해 성경적 진리를
도출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과 이에 부합되는 전개는 매우 인상적이고 유익하다.
우리의 행복은 다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좌우되지만 저자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떤 외부 조건도 내면의 깊은 갈증을 채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p.57).”라고 명쾌히 선언한다.
“먼저 우리는 대부분 영혼의 갈증을 재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만족이 없는 이유를 그저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한 탓이라 생각한다(p.58).”
그렇다. 팀 켈러 특유의 간결하지만 깊고 풍성한 통찰력이 이 책에는
넘쳐난다. 지금까지 우리가 팀 켈러의 풍성한 강해설교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면, 이번에는 그의 명쾌한 주제 설교, 혹은 원포인트 설교의 풍성함을
누릴 기회이다. 물론, 전자든 후자든 철저히 본문(성경) 중심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1,2장의 예에서 보듯이 억지로 논리를 끄집어 내거나 견강부회 하지
않고,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본질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저자는 우리를 돕고 있다. 참으로 탁월하다. 성경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도 또 공존하게
하며 길을 잃는 법이 없다.
“죄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데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다. 마치 자신이 구주와 주님인 양 하나님 나라에 서있는 것이다(p.67).”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나 진리가 아닌데 새롭고, 단순한 듯 한데 심오하다.
저자는 2장의 두 등장 인물을 비교하며 결국, 우리가 보기에 도덕적인 사람, 비도덕적인 사람, 내부인과 외부인, 이런 기준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함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임을 결론 내리고 있다.
이 책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흥미로운 책이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 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컸지만, 그 마음을 억누리고 정말이지 행간을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며 마라톤의 자세로 이 책을 읽었다. 저자의 한 문장 한 단어,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예수님은 단지 좋은 랍비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다. 사상가나 혁명가가 아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 존재라 천명하셨고,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4장에서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시는가?” 질문을 던진다.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 어떻게 하시는가? 자신의 기쁨을 모두 잃으신다. 아버지와 함께 사시던 하늘을 떠나신다. 일생을 오해 받으며 외롭게 사신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다(p.110).”
그렇다. 혼인잔치는 지금의 기쁨과 축제에 초점 맞춰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대속, 그 용서의 역사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영원한 천국 잔치, 그 천국의 희열, 그리고 그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그 날”에 초점 맞추어 진 것이다.
우리가 주의 나라에 거할 그날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현재의 축제도 우리에게 무의미 할 것이고, 현재의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5장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녀를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라 명명한 저자의 위트가 또 한번 큰 깨달음으로 울림을 준다. 저자는
5장을 통해 부활의 생소함 그리고 진리, 오직 은혜와 전적인
은혜, 그리고 왜 그것이 우리에게 선물과 같은 은혜의 영역인지를 이야기 해 주고 있다.
책의 두 번째 파트는 카메라의 초점을 더욱 예수님께 맞추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수님은 누군가의 인생 모델이 되기 위해서나 인생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구주로
오셨고, 해답 자체이심을 저자는 다시 강조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 전체의 모든 주옥 같은 그래서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명 문장들 중에 저자의 이 표현이
가장 크게 와 닿았다.
“그분은 무한히 지혜로우셔서 처음부터 끝을 내다보시며 우리를 향한
선한 목적을 광야 저편에 숨겨 두셨다. 고난을 인내로 견딘 욥은 지금까지도 수없이 많은 사람을 돕는
귀감이 되었고, 예수님도 이 시험에 통과하여 마침내 역사를 바꾸어 놓고 세상을 구원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신다면 이는 분명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다(p. 153).”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그리고 당연히 동의하는) 기독교는 일원론적이거나 이원론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사탄은 끊임
없이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발견 하지 못하도록 애쓰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다. 승리의 열쇠는 결국 “성경
말씀”이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사명을 위임 받고
능력을 입으셨기 때문에 시험하려 했던 것처럼, 그분은 우리에게 성경만 주신 것이 아니라, 승리하신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 때문이었다. 시험 받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능히 이 모든 고난을 헤쳐갈 수 있다.
7장은 정말 큰 깨달음과 그 이상의 은혜와 용기를 나에게 주었던 장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혜사, 대언자의 의미를 풀어가며 두분의 대언자, 즉, 그리스도와 성령을 조명하는 탁월한 내용이 이 장에 등장한다.
“예수님이 대언자라는 성경 말씀속에는 정의의 기준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 앞에 서서 심판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p.181).”
“그 단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로 도덕적 행실의 본보기나 사랑의
지지자가 아님이 암시되어 있다(p.182).”
이미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인된 우리에게 그분의 죽으심으로 베풀어진 자비가 있으므로
즉,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이미 용서 받았기에 우리는 그 “설득력
있는” 대언자를 통해 온전히 그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음을 저자는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대로, 법대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그분, 그 대속의
의미를 우리가 분명히 깨달을 때 그리스도, 그 대언자와의 연합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께서도 대언자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성령은
손만 잡아 주거나 에너지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시는 분이심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사랑으로 이루신 일과 그 결과에 합당하게 살도록
우리를 설득하고 훈계하고 권고하고 간청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비로소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신다(요.14:21).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를 보고 그 사랑의 임재를 알게 될 것이다(P.189).”
“예수님의 평안은 생각을 떨치고 실체를 무시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생각하며 실재에 주목할 때 찾아온다(p.193)”는
저자의 통찰은 우리에게 계시는 대언자가 어떤 분이시며 왜 예수님께서 “또 따른 보혜사”가 오심을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 첫째 대언자를 구주이심을 깨닫고 누리도록 하는 분이 바로 두 번째 대언자 이신 것이다.
9장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루고 있다.
주님의 승천사건이 이토록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부끄럽게도 나는 생각해 보지 못했고, 사실
이렇게까지 알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9장과 두분의 대언자를
소개하는 8장은 내게 개인적으로도 큰 힘과 위로, 확신을
경험하게 되는 매우 은혜롭고 의미 심장한 장이었다.
예수님의 승천은 단순히 ‘하늘로 올라간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하늘이 아니라 천국으로, 그 놀랍고 위대하며 영광스런 대관식을 치르신 것이라는 저자의 통찰이 가슴에 와 닿았다.
“승천하신 주님은 사람들의 심령에 역사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시는 한편 역사의 모든 사건을 영광스러운 종말 쪽으로 이끌어 가신다(p.230).”
예수님은 승천하셨기에 이제 우리와 성령 안에 함께 계신다. 예수님의
임재를 지금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이유이다. 또한,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의미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께서 권능자이시며, 만물의 머리가 되시고, 또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천국에 계실 뿐 아니라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러 오시고, 우리의 영광이 되시며 우리를 위해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 한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기 때문임을 9장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는 다는 것은 나의 죄가 사함 받고 대속의 피로 그분의 중보와 은혜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분의 다스림 가운데 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케 됨을 의미 한다.
마지막 10장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 즉, 수태고지에 대한 묵상이다. 마리아와
요셉, 둘은 모두 어려운 가운데, 아니, 불가능한 가운데 결국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방식, 기대, 흐름과 정반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시기에 약한 데서 강하여 지는
주님의 역설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저자의 도전을 이렇게 정리해보고 싶다.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실 것인가, 탁월한 자문위원으로 모실 것인가?
참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책이다. 머리와 가슴이 이렇게 동시에
뜨거워지는 책이 또 있었던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 호기심을 위해 한번에 내려 읽어 갈 수 있는 책이 아니라 그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
보며 다시 고민하며 또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며 삶에서 적용하며 누려야 하는 보물창고 같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벌써 교회의 리더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가
먼저 인생질문에 대한 바른 해답과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 분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책이다. 최대한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이 궁금해할 내용들과 그들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을 잘 간파하고 저자는 그러한 지뢰밭을 안전하게 피해 예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독자를 노련하게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 벅찬 감동이 지금도 가시지 않는다. 나도 더욱 말씀의 진리에
충만하고, 더 배우고 연구하고 성령의 조명을 통해 말씀의 진리를 깨달아 가는 말씀의 종이 되기를 결단하는
귀한 계기가 되었음에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