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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 높아진 자아, 하나님을 거부하다
팀 켈러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19년 1월
평점 :
팀켈러의 ‘방탕한 선지자’를
읽고
박정원
얼마 전 우리 가정은 이사를 했다. 2년마다 이사하는 것을 6년째 계속하고 있는데 이삿짐 센터에서도 놀라고 사실은 우리가 더 놀라는 것은 어디서 이 많은 짐들이 쏟아져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작은 공간에 칸칸이 들어있는 우리 가족들의 짐은 놀랍기 그지 없다.
물론,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다. 바로 흔히 소선지서라 불리는 예언서들이
품고 있는 진리와 은혜들이다. 단지 분량이 적어 소선지서라 불리우지만 그 작은 분량의 책들이 품고 있는
놀라운 지혜와 은혜 그리고 영적 도전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별히
그 중, 나에게는 요나서가 더욱 그러한 책이다. 요나서가
주는 감동과 도전, 그리고 수많은 교훈들은 우리가 그저 ‘큰
물고기 이야기’라고 오해하며 그 진리를 놓치기에는 더욱 아까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요나서를
특별히 편애(?)하는 나에게 팀 켈러의 신간 ‘방탕한 선지자’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책이 아닐 수 없었다. 올 해 중3되는 큰 딸이 책상 위에 놓인 이 책을 보고는 “아빠는 진짜 팀 켈러의
책을 좋아하시나봐요..”라고 한마디 건넨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들어 가장 많이 읽은 책이, 그리고 서재를 장악한 그의 책들이 팀 켈러의 책을 향한 나의 열정을
보여준다. 그래, 이 책은 바로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요나서를
그토록 신뢰하는 저자의 통찰과 묵상으로 쓰여진 책인 것이다!
책은
총 네 개의 파트로 되어 있다.
Part1.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다.
1. 성난 사명자(‘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절망했다)에서는 타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기에 결국 하나님을 피할 수 밖에 없었던 선지자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바울의 냉철한 지적을 놓치지 않은 저자의 통찰 덕에 종교적 방탕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종교적 열심으로도 하나님을 피해 도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큰 도전이 되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순종한다며
오히려 적극적인 불순종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되었다.
Part2.
폭풍 속에서 내 신앙의 실체를 마주하다. 에서는 2. 하나님의
막으심(세상의 폭풍에 갇히다), 3. 세상의 꾸짖음(나만의 성벽을 세운 눈먼 신앙이었다), 4. 얄팍한 영적 정체성(하나님보다 더 큰 내 안의 우상이 드러나다) 5. 희생 없는 편한
믿음(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안일함을 바다에 던지시다.) 6. 바닥에서
드린 기도(하나님밖에 남지 않을 때 은혜 앞에 항복하다) 라는
주제로 요나서의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멈춤을 통해 “다른식으로는 생겨날 수 없는 믿음, 소망, 사랑, 인내, 겸손 절제가
우리안에 생겨날 수 있다(p.43)”고 말하고 있다. 3장
‘세상이 교회를 꾸짖음’에서는 이교들에게서 오히려 교훈을
받아야 하는 요나를 통해 이 세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알량한 종교적 자존심으로, 종교적, 정치적 가치관의 오류로 공공선에 무뎌진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4장은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세가지 요소를 제시해 주고 있다. 바로 ‘사명, 장소, 민족’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그들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p.72)”라는 저자의 지적처럼 과연 나 자신은 무엇에 가치를 느끼며, 무엇으로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근거와 이유, 해답이
바로 하나님이 되서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얄팍한 정체성은 또한 우리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막는다.” “베드로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이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은혜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그의 헌신과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나에게도 폐부를 찌르는 성찰이 되었다.
참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는가! (나를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보다 헌신과 율법을 강조함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오히려 부추이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비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교도들이나 니느웨 백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요나 자신이었고,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그리고
“5장 희생 없는 편안한 믿음”에 이르러서 드디어 저자는
요나가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한다. 결국 요나를 어떻게 평가할 지와
관계 없이, 요나서와 요나는 우리를 위해 어떠한 죄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원형적인 사랑과 대속의
희생을 십자가에서 이루셨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요나가 이해할 수도, 그래서 순종할 수도 없었던 이유는 하님을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엄청난 사랑과 희생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바로 우리 모두가 겪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수님
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는 예수님만 있으면 되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자기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것이다(p.99).”는 저자의 명언이 빛나는 6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은혜, 그것은
우리가 철저히 무능한 죄인(죄인이며 무능함)이며 이를 위해서
값비싼 대가가 치러졌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 “은혜가 은혜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큰물고기 이슈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요나서가
이 물고기에 대해 주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큰물고기에 빼앗긴 시선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되찾아와야 한다!
Part3 순종하지만, 다시
넘어지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듯 하지만 여전히 그 정수를 경험하지 못하고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선지자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요나는 여전히 자기의가 있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있음을 날카로운 저자의 시선이
놓칠 리 없다. 독선과 비교된 선, 상대적 의가 늘 많은
문제를 야기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이러한 율법적인 순종과 열심이 야기하는
문제들은 늘 우리의 기도거리다.
그러나
9장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심 가운데 은혜에 붙들려 다시 사명자로 서는 요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그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경험했지만
정작 니느웨에 주어진 구원과 자비하심은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저자는 꼬집고 있다. 책의 중반을 넘어가니
갑자기 이 책의 정체성이 궁금해 진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 이것은 과연 주석인가 설교인가?”
그렇다. 이 책은 주석책과 설교집의 중간형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목회자에게도 평신도에게도 폭넓은 교훈과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요나의 자기연민, 그 애착을 저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철저한 무지”의 발로라고 저자는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과연 무엇에 긍휼을 느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요나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요나와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반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자비)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진노(심판)의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 요나서와 이 책은 이것을 우리에게 묵상케 한다.
“그분은
너무나 거룩하시고 너무나 사랑이 많으시기에 요나를 죽이거나 지금 모습 그대로 남아 있게 두실 수 없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 모습 이대로 두실 수 없다(p.172)”
나는 저자의 이 놀라운 성찰이 요나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요약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Part1-3이 강해/주해를
바탕으로 하는 관찰이 주를 이루었다면 Part4는 묵상에 대한 적용과 저자의 메시지가 더욱 도드라지는
파트이다. 마치 부록내지는 전시장의 도록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저자는
이 네번째 파트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땅한 세계관, 공공선에 대한 관심(헌신), 포용, 그리고
순종,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 깊은 묵상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지금까지 잘 알고, 또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자비와 심판, 그로 인한 우리의 결단과 헌신에 대해 비로소 성경적인
이해를 갖게 되었다. 그것을 잘 이해하고 깨닫고 있다고 믿고 있던 ‘요나서의
주제’ 그리고 요나서의 교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요나서의
핵심,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깨닫고 누리게 된 많은 유익 중 으뜸은 바로 위의 깨달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목회자라면 꼭,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자비와 진노, 그 사랑과 공의에 대한 균형과 정의에 대한 성경적
시각 등을 필요로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책은 필독서가 되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은 저자의 주옥 같은 명문장 중 몇 가지를 마음에 새겨본다.
“무엇이건
우리가 사는 목적이 실제로 우리를 소유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배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목적과 가장 사랑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를 지배한다(p.275).”
“그 차이를 보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랑의 대상인지 아니면
우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p.279).”
“하나님께 받은 정체성은 우리의 교만을 치우고 겸손하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가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을 대가로 주어진 부요한 은혜의 선물이라면 어느 누구에게 우월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p.279)?”
“나는 너를 노예삼고 조중하고 지배하는 것들로부터 너를 해방시키려
한다. 네가 다른 무엇보다 나를 최고로 사랑하면 참으로 자유로울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네 모든 것을 내 안에서 찾아라(p.282)!”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긍휼의 마음 없이 바라 볼
수 있느냐 물으신다(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