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철학자와 함께한 산책길 -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노학자 6인의 인생 수업
정구학 지음 / 헤이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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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으면 왠지 결연한 자세로 삶을 다시 바로보기해야 할 것 같은 마음가짐이 된다. 흘려보냈던 시간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면서 뭔가 제대로 살고 싶은 의욕도 살아나는 것 같다. TV에서도 새해에 희망을 걸며 명사를 모시고 신년대담 프로그램을 방영하듯 <인생철학자와 함께한 산책길>도 어쩐지 새해에 어울린다. 노학자들이 긴 세월 자신의 분야에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터득한 통찰력있는 인생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본다.

 

이 책은 정규학 기자가 6명의 노학자들과 산책하며 나눈 인터뷰집이다. 이시우 천문학자, 강신익 의철학자, 조장희 뇌과학자, 백종현 칸트철학자, 윤석철 경영과학자, 이어령 문학평론가 등 일평생 각자 다른 전문 분야에서 학문에 정진해 뜻을 펼친 학자들이 각자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삶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어떤 가치와 지혜가 필요한지 각자의 언어로 설명해준다. 짧은 산책길이지만 질문하는 인터뷰어에게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이해시키고자 힘주어 말하는 그들의 이야기에서는 공통적으로 열정이 느껴진다.

 

천문학 연구에 매진하다가 은퇴를 하고 불교 교리를 독학으로 공부한다는 이시우 천문학자는 불교사상의 관점으로 별의 생사를 이해하면서 항상 변하며 순응하고 또 비워내는 삶,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모든 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평상심을 지키며 가치있게 사는 삶을 이야기한다. 그는 만물을 생명체로 보아야하고 인간이 죽어 생기는 한줌의 생명체도 역시 다른 생물의 자양분이 되는 순환을 일으킨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인터뷰어가 불교의 윤회설이냐며 언급하자 그와는 다른 생명의 순환임을 바로 잡아 이해시킨다. 부처는 오히려 당시 힌두교의 윤회설을 부인했던 사실도 이 대화를 통해 새롭게 알게 돼 흥미로웠다.

 

의사로 일하다 철학을 공부하며 의학을 철학적 관점으로 연구한 강신익 의철학자는 우리 몸을 미생물과 함께 살아가는 병이 있는 상태을 디폴트로 이해하자 말한다. 그리고 협동이 진화에 도움을 주었던 것을 예로 들며 경쟁을 강조하기 보다는 소득불평등을 줄이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며 인류가 고루 삶의 질과 평균수명을 올리는 것에 대한 과제를 이야기한다.

 

살아있는 사람의 뇌기능을 볼 수 있는 PET를 개발한 조장희 뇌과학자는 운동과 명상을 통한 건강한 뇌 만들기를 강조하며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표절하고 양으로 논문 표절 양산을 허용하는 사회풍조를 비판한다. 또한 자신의 분야에서 대체 불가능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성공이며 인공지능을 활용한 기술이 개발되는 밀 사회에서도 인간이 스스로 대뇌를 성숙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철학과 교수를 지낸 백종현 칸트 철학자는 분수를 지키고 자신에게 충실하며 자연에 경외감을 가졌던 칸트 정신을 풀어 설명한다. 아는 것을 실천하고 가치를 실현하는 지행일치의 학자로서의 삶을 강조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가치를 우선에 둔 행복 추구가 더불어 사는 이 사회에서 의미있음을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게 주어진 것들에 정의를 논하는 대신 타인을 향한 사랑과 배려를 나누는 것이 인문정신임을 설명한다.

 

물리학을 공부하다 전기공학, 경영과학을 연구한 윤석철 경영과학자는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기업의 생존 노력으로 감수성과 상상력, 탐색 시행 등을 예로 들며 성공한 경영자의 필수 조건을 설명한다. 국가로서는 물질적 차원의 선진국을 넘어 정신적 차원의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도덕성 같은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고 공생과 상생의 가치를 중시할 것 등을 강조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했던 인터뷰에 응했던 이어령 문학평론가는 더불어 사는 공생의 가치, 공감, 사랑하고 배려하며 생명 존중의 마음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생명의 경제학을 이야기한다. 또한 인간의 보편적 질서와 생명의 관계를 놓치는 자본주의 중심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서는 예술을 통해 생명 자본주의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말한다.

 

책을 읽으며 이들의 산책길을 뒤따라가며 대화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얻은 귀중한 삶의 지혜를 나누어 받을 수 있어 좋았다. 이어령 박사만 아는 채로 읽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다른 박사들의 인터뷰에서 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여섯 학자의 이야기가 같은 방향으로 가기도 하지만 약간 다른 관점을 보여주기도 해서 이들이 모두 한 테이블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해봤는데 합의에 이르지 못한 주제도 있었겠다 싶다. 여러 명사와 다양한 주제로 나눈 대화를 한 권에 다루다보니 더 깊은 이야기를 듣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관심있는 학자의 심도있는 이야기는 개별 저서를 더 찾아보면 될 것 같다. 남성 노학자 6명만 인터뷰한 책이라 추후 여성 노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책이 나와도 좋을 듯하다.

 

☆ 출판사를 통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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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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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한국 SF소설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나타난 김초엽 작가 열풍을 기억한다. 새 책 출간 때마다 주목을 받는 이 작가의 책을 나 역시 몇 번 읽기 시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읽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수과학에 담쌓고 살아도 사는 데 지장없던 문과형인 내게 과학 배경 지식의 이해를 깔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SF소설은 좀 낯설고 어려운 장르였기 때문이다. SF소설을 접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문과형 소설가들이 과학 지식을 두루뭉실 살짝 차용한 듯한 좀 만만한 SF소설과 달리 화학자가 꿈이었다는 이과형 작가의 SF소설은 좀더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드러내는 듯해 지레 겁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알고 싶었으나 다소 문턱 높게 느껴졌던 김초엽 작가의 읽고 쓰는 이야기, 그녀의 작품 세계가 탄생하는 과정을 좀더 들여다볼 수 있는 이번 에세이 출간이 더 반가웠다.

 

 

저자는 십대시절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보고 반해 이런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가슴 가득한 글쓰기 열망을 갖게 된 사실을 고백한다. 습작의 시간과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증명받고 싶었던 공모전을 거치며 작가가 되었고, 자신이 좋아하던 다양한 과학 소설과 지식서, 논문, 과학지를 읽으며 자신이 원하고 쓰고 싶은 것들을 구체화하며 작품을 완성한다. SF를 즐기긴 했어도 마니아까지는 아니었지만 막상 SF소설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후 부족함을 느끼며 본격적으로 SF고전들을 읽고 배우고, 또 주변의 소외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도 볼 수 있었다. SF소설 계보에 들어선 작가가 된 후 외부 인터뷰의 질문을 감당하면서 과연 SF 소설이 무엇인지 천착하며 본인 또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며 독자들에게 SF소설 장르가 어떤 것인지, 또 어떤 매력때문에 SF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밝힌다. 

 

 

작가는 어떻게 작품들을 구상하고 자료 조사하며 뼈대를 세우고 이야기를 전개하는지, 또 주기적으로 작법서를 읽고, 관련 신간 도서와 서평들을 따라잡으며 성실하게 공부하고 자극받으며 글쓰는 내공을 채우는 과정도 가감없이 소개한다. 어느날 번개를 맞은듯 갑자기 술술 써내리는 게 소설이 아니고 작가의 자료분석과 영감, 고뇌의 시간을 거쳐 편집자 독자, 다른 저자들의 세계를 탐구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이렇게 맛집 비법을 공개해도 괜찮은건가 싶을 정도로 그녀가 내놓은 작품의 밑거름이 된 수많은 SF소설과 과학서 등도 숨기지 않고 다 실어 독자들에게 더 많은 읽을꺼리를 제공한다. 글을 쓰며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어떻게 방법을 모색하고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 작품을 완성했는지도 소개한다. 

 

 

책을 읽으며 김초엽 작가의 진정성에 태도에 반했고 그래서 그녀의 소설들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먹게 되었다. 낯설고 어려운 과학 지식의 덤불에 또 갇히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궁금한 것들은 더 알아가려는 의지를 갖고 찾아가면서 결국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믿고 계속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주변과 세상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소설만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도 연결지어 해법을 모색할 수 있는 이라서, 진지한 태도로 읽고 배우고 쓰며 목소리를 내는 이라는 사실이 작가를 신뢰하게 만들었다. 김초엽 작가에게 반하게 될 영업서이자 SF소설로 가는 책들을 추천받을 수 있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우연은 그냥 지나쳐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 중 하나가 되고 말지만 그것을 알아보고 잡고 따라간다면 운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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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중에서>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사실은 유토피아가 없다는 것을 안다. 차가운 우주는 유토피아를 허용하지 않는다. 냉혹한 물리법칙도 인간의 진부한 규칙들도 이 우주에 유토피아를 위한 자리를 남겨놓지 않는다. 그곳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그리운 세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차가운 우주의 유토피아를, 그곳으로 가는 길을 상상한다. 어쩌면 그 모순에 맞서며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상상하는 것이, 소설의 일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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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서평을 쓰는 일아야말로 실패를 무릅써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읽기를 시도하고 읽기에 실패하면사, 오독이 이따금 확장의 가능상으로 변모하는 우연의 순간을 기대하면서. 오해와 이해 사이를 서성이며 책 위에 무수한 의미를 덧칠해가는 그 작업들을, 나는 기쁘게 찾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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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해의 한계까지도 직면하면서 세계를 알아가려는 SF의 인물들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미지의 영역은 끝까지 남아있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결코 낯선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 나는 그것을 SF로부터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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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나는 여전히 이 학문의 가장 근본에 놓인 마음,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경이에 이끌린다. 인간이 바깥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불완전한 이해과정을 통해 재해석한 자연과 우주는 매력적이다. 불완전한 뇌를 지닌 인간은 일반화와 분류와 데이터해석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그 점진적인 접근이 앎의 영역을 약간씩 넓혀간다는 것, 그리고 그만큼의 미지를 더한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특히 나는 그 인류 지식의 경계선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지렁이와 선충과 따개비 따위에 온 마음을 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무한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의심을 품고 앎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그 태도를 평생에 걸쳐서라도 조금씩 닮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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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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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현실에 갇혀 괴로움을 호소하는 이들에게는 잠시 숨 쉴 수 있는 탈출구가 간절하다. 하지만 사방이 꽉 막혀 암울할 때는 바늘 틈 같은 숨구멍도 찾기가 어렵다. 한 줄기의 바람, 마음을 어루만지는 음악, 쓰다듬기를 허락하는 작은 햄스터의 털, 아니면 달콤한 크림빵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살아갈 수 있다.



명성있는 <위저드 베이커리>를 이제야 나도 읽었다. 청소년 권장도서이므로 아이에게는 일찌기 권해 읽혔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어른인 나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번 얼쩡거린 이 책을 이제야 읽고보니 못만나고 지나쳤으면 아쉬웠을 것 같다. 어른들도 자주 마법이 필요한 순간을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불행한 결혼생활로 끝내 아들을 버리고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한 엄마와 아들의 이 아픔을 방관하는 아버지, 소년의 이 상처를 헤아리기 보다는 자신과 자신의 딸을 방어하느라 가시가 돋은 새엄마, 그저 나약할 뿐인 어린 배다른 여동생. 그들 사이에서 공감받지 못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소년은 집에서 도망나와 빵집으로 피신한다.



끼니를 빵으로 때워 온 시간 덕에 베이커리의 단골로서 소년은 베이커리 주인의 도움으로 몸을 숨기고 그곳에 머물 수 있는 허락을 받는다. 그곳에서 밤이면 파랑새로 변하는 여조수와 신비한 마법의 효능을 지닌 빵과 쿠키를 굽고 파는 마법사 파티쉐 옆에서 몸을 숨긴다.



하지만 모든 마법이 행복이라는 귀결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마법 쿠키와 빵으로 행복에 닿은 이들은 위저드베이커리에 다시 AS를 요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사연을 모른다. 하지만 선택한 마법으로 인해 오히려 이그러진 삶을 살게되어 베이커리에 찾아와 항의하는 이들을 소년은 목격하게 된다. 마법의 빵을 먹고 한 사람만 바라보던 사람은 스토커가 돼 상대를 죽일정도로 압박할 지경에 이르고, 누군가를 잠시 골탕먹이려던 장난은 누군가에게 모욕감을 주고 자살에 이르게 만든다. 어떤 선택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으며 우리 모두는 이 선택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명제를 보여준다.



그래도 소년을 거두고 보살핀 마법사와 조수 덕분에 소년은 세상에서 믿음을 찾고 문제를 피하지 않고 문제를 바로 보고 정면승부할 용기를 얻는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더이상 숨지말고 문제에 뛰어들어 해결하라 떠미는 세상은 괜찮은가. 정말 이것이 안전한 화해고 해피엔딩일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정상가족의 신화를 따르며 화해를 위해 찾아간 부모가 오히려 자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상황을 뉴스를 통해 종종 목격하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부모를 벗어나 영영 떠나사는 게 혹시 더 나은 선택은 아닐까. 하지만 이들을 책임지고 나은 삶을 살도록 이끌어줄 공공안전 보호망은 갖춰져있나.



시간을 돌리는 마법 머랭이 작동한 미래에서는 새엄마와 파렴치한이 될 아버지의 만남 전으로 돌아가 그 둘이 부부가 되지 않는다. 물론 아버지는 결국 새엄마와 결혼하지 않고도 파렴치한 짓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말지만 최소한 새엄마와 여동생의 피해는 막았다.



하지만 소년은 더 과거로 돌아가 친엄마를 살릴 수는 없었을까. 머랭을 먹고 엄마가 아빠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엄마는 그런 남자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며 행복했을 수도 있다. 물론 그 경우에 소년은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수 있겠지만. 하지만 아빠가 엄마가 아닌 제 2의, 제3의 피해자를 만들 가능성을 방관하는 것은 괜찮은가. 세상에 범죄자는 아빠 한 명이 아닌데 그럼 대체 언제로 다시 돌아가 리셋해야 가능한 한 다수가 행복할 수 있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마법을 실행했지만 결국 살아난 부랑자가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게 돼 상처만 안은 마법사의 기억도 아프다.



책에는 마법 리와인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Y의 경우와 실패한 N의 경우 2가지 케이스가 게임처럼 제시된다. Y의 경우 즉, 과거를 뒤바꾼 경우 소년은 아픈 만남을 비껴가고 과거의 인연을 만났을 때 어렴풋이 미묘한 기분만 느끼고 기억을 못한 채 지나간다. 하지만 N의 경우, 과거를 되돌리지 못해 그냥 힘들지만 현재를 살아내다 위저드베이커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에 다시 마법의 세계를 조우할 가능성으로 기대감을 준다.



내가 이 둘의 경우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정말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었다면 기억을 돌리는 머랭을 먹고 원하지 않는 과거를 앞질러 다시 살 것 같다. 사실 지우고 싶은 아픈 과거를 안고도 그걸 견디고 이겨내며 꿋꿋이 살아내는 게 삶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이 마법의 효과를 누리는 달콤한 상상을 책에서라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첫 출간된 14년 전 책에서 묘사된 나쁜 파렴치한인 소년의 아버지 같은 혐오스러운 인간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아동성범죄를 포함 기본 성범죄에 대한 처벌수위 역시 타국가에 비교해 현저히 낮고 술 마셔서 심신미약이라고 초범이라고 유망 분야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등등 여러 이유를 들어 성범죄자에 관대하다. 이에 대한 법 형량 강화 의지를 왜 보이지 않는지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책을 청소년권장도서로 굳이 분류한다면 이런 범죄를 허용케하는 사회악을 줄이기 위한 정책의 허술함을 알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위치의 어떤 직업을 찾을 것을 권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런 사회적 문제에 무심하게 눈돌리지 말고 항상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데 동참할 것을 권하는 메시지로도 이해하고 싶다. 그래서 동시에 이런 가족과 사회 문제 등에 세심한 관심을 갖고 정책 개선에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어른들이 읽고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공무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기본적인 정서가 작가 자신도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한줄기 기대를 갖고 버티려는 소년을 위로하는 마음이 전달됐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욕망을 투영시킨 마법쿠키로 사람을 살리고 달래고 세상의 균형을 가져오려 애쓰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마법사에 소설가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것도 같았다. 15년전 첫 책을 낼 때와 달리 지금은 흥행작가가 되었으니 작가가 좀더 여유로운 마음, 세상과 화해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을지 궁금하다. 인근에 베이커리가 다시 나타났다는 얘기에 반갑고 기쁜 마음에 달려가는 소년처럼 독자들은 작가의 신작 소식을 기대하며 달려갈 것 같다. 



살면서 도망가고 싶은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때로 도무지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고 느껴질 때가 없을 수 없다. 삶에 지친 모두가 이런 위저드베이커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위로하고 한숨 돌리게 만드는 어떤 소소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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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출간 15주년 기념 백일홍 에디션)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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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그린 엄마는 꽃들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다.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호미>의 표지에는 맏딸 호원숙 작가가 그린 박완서 작가의 모습은 행복해 보인다. 이런 엄마를 그린 딸의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을 것 같다. 2007년 초판이 출간되고 2011년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2014년 개정판 발간 후 2022년 재출간된 책이다. 글을 읽다보면 작가가 여전히 어디선가 이 평범해보이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글로 쓰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작가의 글은 아직도 옆에 살아있는 듯하다.


박완서 작가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사실 작가의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릴 때는 귀기울여 듣지 않게 되던 이야기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매력을 느끼게 되고 작가 명성의 이유를 공감하게 되었다.


이 책은 작가가 60대 후반 서울을 떠나 마당이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해 정원의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자연의 변화에서 발견한 삶의 통찰을 담은 이야기, 딸로 손녀로 사랑받으며 자라고 공부했던 시절과 또 자신이 부모와 조부모가 되어 자녀와 손자손녀를 키우며 겪은 이야기, 일제 식민시대와 한국 전쟁 등 자신의 일화로 기억되는 한국의 역사적 사실 , 서울대 박사학위를 받으며 했던 감사인사, 잊지못할 추억의 음식과 그 맛에 대한 기억, 중국이나 네팔 등 해외 여행에서 보고 느낀 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찾은 개성공단 방문 이야기, 돈독했던 시어머니와 엄마에 대한 기억, 이이화 선생, 이문구 작가, 김상옥 작가, 박수근 화가, 조각가 이영학 등의 별세 후 인연이 있던 그들과의 일화와 소회, 그리고 특별히 맏딸 호원숙 작가에게 남긴 사랑과 신뢰의 당부 등이 담겨있다.


책 제목이 <호미>라 작가가 어린시절부터 호미를 갖고 하는 밭일에 경험이 많거나 자연물에 대한 추억이 많은가 싶었지만 저자가 흙을 만지며 식물을 키워낸 경험은 서울에서 이사온 10여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도구로 쓰는 호미는 요란하고 전문적인 농기구로서가 아니라 흙을 솎아 부드럽게 하고 소소하게 텃밭을 가꾸며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소박한 노년을 실현하게 해준 친구처럼 보인다.


작가는 매일 달라지는 마당의 꽃이나 나무의 변화를 알아차리며 말을 걸고 지나쳤던 소중한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으며 기억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며 또 천주교와 함께하는 장례식의 모습을 상상하며 신앙을 통해 성숙한 삶의 방식을 찾아가면서 노년의 삶을 안정감있게 꾸려가는 법을 안내하는 듯하다.


하지만 경지에 오른 작가로서 이상적이고 평온한 모습만 보여주려 애쓰지 않는다. 작가는 팔 골절로 고생하면서도 잘 버텨내고, 처마에 생긴 말벌집 애벌레를 센 물살로 제거하며 통쾌함과 미안함을 느끼기도 하고, 중국 산지 여행에서 지게꾼에게 업힐 수 밖에 없어 눈치보면서도 팁 주는 문제로 이런저런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작가는 때로 소소한 일에 번민하고 분노하기도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기에서 또 나름의 지혜를 찾는다.


정치혐오에 대한 대목이나 연장자에 대한 인정을 바라는 부분 등 조금은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인생관을 모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할테니 내게 와닿은 부분에서 따스한 위로를 얻고 배울 점을 찾는다. 주변의 모든 것들에 마음을 주고 말을 건네며 마음 열어 이해하고자 했던 작가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삶의 태도, 그리고 그것이 드러났던 솔직하고 겸허한 태도의 글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의 노년의 삶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도 좋았다.


그러나 가장귀를 끌어당겨만 놓고 차마 잘라내지 못했다. 나무의 체온이랄까, 살아있다는 유연함, 피돌기 같은 수액의 움직임, 그런 게 생생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가지마다 다닥다닥 붙은 돌기는 내년 봄에 떠뜨릴 꽃망울의 시작이 아닌가. 살구꽃도 벚꽃도 매화도 우리 눈엔 어느 날 갑자기 활짝 피어나는 것 같지만 이렇게 미리미리 준비를 하는구나. 꽃망울이 얼어죽지도 말라죽지도 않게 보호하고 견디어내야 하는 겨울은 나무들에게 얼마나 혹독할까. 숙연해지는 한편 내년에도 살구꽃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칠십 고개를 넘고 나서는 오늘 밤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아도 여한이 없도록 그저 오늘 하루를 미련 없이 살자고 다짐해 왔느데 그게 아닌가. 내년 봄의 기쁨을 꿈꾸다니...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는 기능이 남아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만한 것이로구나.

※ 이 책은 출판사를 통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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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독서평설 2022.5 독서평설 2022년 5월호
지학사 편집부 지음 / 지학사(잡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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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대, 입시, 비문학, 문학 등 다양한 주제의 수준높은 읽을꺼리와 수능비문학 독해 준비 문제와 개념, 지문분석으로 실력 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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