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오아시스
김채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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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까지고 이렇지만은 않을거야.”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은 함께 갈 수 없는 배타적인 관념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소설집은 대답한다. 삶에는 여전히 존재하는 부재의 자리가 있고, 죽음 역시 삶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완전히 마르고 부스러져도 빛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으며 서울에도 오아시스가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표제작은 「서울 오아시스」 가 될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상실을 겪고 무기력해져도 비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희망찬 낙관을 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격정적으로 슬픔을 토해낼 힘조차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떠난 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 뿐이다. 끊임 없이 걷고 공허한 마음으로 착실히 할 일을 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 무엇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인의 얼굴 위로 무언가 물러나듯 햇빛이 드리웠다. 기분이 좋았다. 몸이 비교적 따뜻했다. 이대로 햇볕에 반쯤 바랜 자신이 죽음을 몰아내지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주차장 바닥에 여러 차례 으깨져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온 사방이 순식간에 눈부시게 환해져, 그와 동시에 교각 아래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며 바람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또한 상상했다.” 

「빛 가운데 걷기」 47p


“구원은 바깥에 있지 않다. 상실—부재의 장소는 오히려 오아시스일 수 있고, 형벌 같은 삶에도 한 조각의 윤슬은 감추어져 있다. (…) 생과 죽음이라고 구획된 것들은, 명사형의 존재가 아니라 동사형의 생성들이다. 

「공백과 무한」 김미정 문학평론가 해설 250-251p


“병정들은 물줄기를 쫓아다니며 그 주위로 점점이 흩어지는 시원한 물방울을 맞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얄밉고 마음에 안 들어 자영은 병정들에게 직접 물을 쏘았다. 병정들은 곧바로 넘어지거나 발이 엉켜 물웅덩이로 떠밀렸다. “아파, 아파!” 자영은 쏜 자리에 한 번 더 물을 쏘았다. “그만해. 너는 우리보다 크잖아, 비겁하게. 괴롭히지 마.” 괴로운 듯이 찡그리고 있었지만 병정들의 물기 어린 얼굴에는 분명한 생기가 돌았고, 자영은 그것을 보았다. 병정들이 자영에게 보여주었다. 번성하는 여러 개의 생명력을.”

「럭키 클로버」 166p


김채원은 화자가 발견하고 떠올린 것들을 나열하며 서술한다. 이를테면 엄마가 자신에게 알려준 것들을 “올바른 젓가락질, 시계 보기, 우비 입기, 모르는 사람의 날씨 이야기를 들어주기, 밤 까기, 친구를 기다리기, 손을 뻗기, 물 없이도 알약을 삼키기.”(82p)라고 나열하는 식이다. 다른 소설들 속에서도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자주 등장한다. 목격하거나 회상한 무언가로부터 파생된 단어와 문장이 생략되는 법 없이 줄줄이 기록된다. 화자의 생각과 시선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계속 퍼져나가기를 바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착하고 기억하는 것만이 부재의 자리를 살아있게 하니까. 살아야 한다며 보이지 않는 희망을 무작정 강요하지 않는 작가를 알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앞으로도 계속 그의 세계에 함께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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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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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의 소설 「알레프」는 가장 환상적인 측면을 중점적으로 두고 다중 우주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우주라는 아직 다 발견되지 못한 세계를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인지 상당히 추상적이며 난해하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중에서도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장소인 알레프를 다루고 있다. 알레프에 대한 개념은 이번 기회에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랍 문자와 히브리 문자의 첫 번째 글자이고 이 글자를 형상화하는 문자의 기원은 페니키아 문자의 첫 문자로 이름도 이 문자의 이름인 알레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과 인간이 손을 맞대고 있는 모양'을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알레프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유대교의 금기 때문에 히브리어에서는 신을 상징하는 기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원과 맥락을 보면 ‘알레프’라는 단어를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문학과 결합시키면 매우 흥미로워서 예술 장르의 모티브로서 활용하면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는 사람의 집에 찾아갔다가 지하실에서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빛나는 형상의 물체인 알레프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2~3cm에 불과한 크기지만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형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그 집이 허물어지면서 알레프도 사라지고 만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풍경이 집중된 단 한 점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남기는 이 작품은 작가가 주장하는 시간의 대한 생각, 계속해서 흘러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우주에서는 과거가 반복될 수 있고, 미래가 현재에 개입할 수 있고, 현재가 과거의 영향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가변성을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공간 또한 고정되어있지 않다. “모든 지점에서 알레프를 보았고, 알레프 안에서 지구와 또다시 지구 안에 있는 알레프와 알레프 안에 있는 지구를 보았으며, 내 얼굴과 내장을 보았고, 너의 얼굴을 보았으며, 현기증을 느꼈고, 눈물을 흘렸다. 내 눈이 그 비밀스럽고 단지 추정적인 대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사람들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만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 그러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였다. 나는 무한한 존경과 무한한 연민을 느꼈다.” 이 문장을 보면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시간의 불변성과 부동의 공간이라는 관념을 깨뜨리며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미지의 우주가 손에 잡히는 형태로 내 옆에 있을 수도 있고 평행 세계처럼 존재할 수도 있는 여러 상상력을 제시하며 우리 곁을 파고드는 환상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본 것을 부분적으로라도 열거하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눈으로 본 것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시간에 따라 나열하는 것이 곧 언어의 한계이고 언어의 관념들은 관념으로만 남을 뿐 그 무엇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음을 말한다.


  주인공은 “견디기 어려운 광채를 지닌 무지갯빛의 작은 구체”를 보았고, 그는 그것에서 사람이 붐비는 바다와 여명과 석양, 아메리카 대륙의 군중, 검은색 피라미드의 한가운데에 있는 은색 거미줄을 보았다. 하지만 공사로 인해 단숨에 허물어진 집처럼 알레프 또한 꿈결처럼 사라지고 만다. 보르헤스가 주장하는 변하는 시간과 확정되지 않는 공간처럼 알레프도 언제든지 내 곁에 찾아왔다고 금방 떠나고 마는 그러다 또다시 내 손 안에 잡힐 수도 있는 그런 가변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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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지성 시인선 472
임승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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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의 첫 번째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는 조용히 행동하는 화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시인 박상수는 “시를 쓰면서 혹은 쓰고 난 뒤 우리는 불행 가운데 존재하는 삶의 작은 기척 하나를 손에 쥐게” 된다고, 시의 힘은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 시집에서는 어린 화자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은 성장과 반성장의 경계에서 기묘하게 발화하며 움직인다. 가령 「꿈속에 선생님이 나왔어요」에서는 선생님의 입속으로 들어갔다가 “문을 열고 지루해서” 말했다는 아이가 나온다. 아이는 우리들의 사물함과 침실, 무덤을 언급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늘 한 박자씩 늦었으니까 선생님만 늙는다고 억울해”말라고 말한다. 분명 제목은 꿈속에 선생님이 나왔다는 것으로 보아 아이의 시점에서 타자인 선생님을 회상하는 듯해 보이지만 “우리들의 무덤”이라는 부분과 교실이라는 공간에 고여있는 듯한 아이의 이미지 때문에 죽은 아이가 선생님의 꿈속에 등장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이 시에서의 아이는 멈춰있는 자기들보다 “늘 한 박자씩 늦는” 선생님을 비웃는다. 그들은 성장을 멈췄음에도 여진히 선생님보다 성장해 있다. 


여기 스스로 성장을 거부한 소년도 있다. 「밖에다 화초를 내놓고 기르는 여자들은 안에선 무얼 기르는 걸까?」에서는 어제 잠 속으로 들어가 오늘 나오지 않은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늘어나는 팔다리”를 가졌고, “육신의 발달은 잠 속에서 그늘을 도왔다.” 육신은 소년이 원하든 원하지 않는 자연스럽게 성장해 간다. 하지만 소년의 정신은 성장을 거부한다. 도망치지 그랬냐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 소년은 “안쪽으로만 자라는 등에서 피리”를 꺼내며 그들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육체의 중심인 척추뼈마저 스스로 꺼내 육신마저 성장을 중지시키는 듯 하다. 반성장을 갈망하는 소년에게 ‘비성년’이라는 또다른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신해욱은 “성년(成年)이라는 말에는 움직임이 내포되어 있다”며 “움직여서 인간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여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하게 된 이들을 성년이라 부른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으되 이제 그렇게 될 이들을 미성년이라 부르고, ‘이미’ 그렇게 되지 않은 이들은, 그러니 비성년이라 부르기로 하자”고 새롭게 정의했다. 한 마디로 “미성년은 대기 중이고 비성년은 열외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잠에 든 소년을 끌어내려 한다. 그러나 ‘이미’ 소년은 이불 밖으로 발이 먼저 나와 있었다. 스스로 열외에 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장과 반성장은 아이들에게 미성년과 성년, 비성년의 자리를 선택하게 하는 기로이다. 그렇다고 성장은 곧 체제에 대한 굴복이자 반성장은 체제에 대한 혁신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밀지도 않는다. 그저 아이들은 누군가의 꿈에 등장하고, 낯선 곳을 걸으며 ‘작은 기척’을 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을 “열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나타나는 질문”(「결석」)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내 되짚어본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건 반칙”이라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에 자신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을 결석이라 말하고, 자신이 결석한 곳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는 것은 반칙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물음에 대답할 내가 없으니까. 그들은 알고 있다. 어떤 곳에 있든 어떤 기로에 서 있든 그곳에 자신이 들어있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의 기척은 그들의 존재를 지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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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리얼 - 복원본
실비아 플라스 지음, 진은영 옮김 / 엘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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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아 플라스의 마지막 시집 『에어리얼』의 복원본은 진은영의 음악적인 번역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1965년 『에어리얼』 첫 출간 당시, 그의 남편이었던 테드 휴스는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 따라 시의 배치를 바꾸어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시집을 만들어냈다. 이 시집은 실비아 플라스의 책상 위에 놓인 검은색 스프링 바인더 공책에 놓인 원고 그대로 번역된 완연한 시집이다. 딸인 프리다 휴스는 "'사랑Love'이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봄Spring'이라는 단어로 끝나게 만든" 어머니의 의도를 따라 이 시집을 읽을 것을 권했다.


아빠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더 이상은, 검은 구두

그 속에서 나는 발처럼 살아왔어요

삼십 년이나. 초라하고 창백하게 ,

숨 쉬거나 재채기할 엄두도 못 내면서.


아빠, 난 당신을 죽여야만 했어요. 

그러기도 전에 당신은 돌아가셨죠

대리석처럼 무겁고, 신神으로 가득 찬 자루, 

샌프란시스코 물개처럼 커다란

회색 발가락 하나를 가진 무시무시한 조각상


그리고 변덕스러운 대서양에 있는 머리 같죠 

거기서 머리는 풋콩의 초록을

아름다운 너셋Nauset 앞바다의 청색 위로 쏟아붓고 있어요. 

나는 당신을 되찾으려고 기도하곤 했어요.

아아, 당신Ach, du.


독일어를 쓰고, 폴란드 마을에 살았죠 

전쟁, 전쟁, 전쟁의

롤러로 납작하게 짓이겨진.

하지만 그 마을 이름은 흔해요.


내 폴란드인 친구는


그런 마을이 한두 다스는 된다고 해요.

그래서 나는 결코 말할 수 없었어요. 당신이 

당신의 발, 당신의 뿌리를 어디에 두었는지,

당신에게 결코 말할 수 없었어요. 

혀가 내 턱 안에 갇혔어요.


그게 가시 철조망에 걸렸어요. 

나는, 나는, 나는, 나는Ich, ich, ich, ich.

도저히 말할 수 없었어요.

나는 독일인은 다 당신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언어


기관차, 기관차가

칙칙폭폭 나를 유대인처럼 싣고 가요.

다하우, 아우슈비츠. 벨젠으로 가는 유대인.

나는 유대인처럼 말하기 시작했어요.

난 아마도 유대인일 거라 생각해요.


티롤의 눈雪, 비엔나의 깨끗한 맥주는

그다지 순수한 것도 진짜도 아니에요.


집시 혈통의 내 할머니들과 내 기괴한 운명을

그리고 내 타로카드 팩, 내 타로카드 팩을 보건대

나도 약간은 유대인일지 몰랑.


나는 당신이 늘 무서웠어요.

당신의 루프트바페, 알아듣기 힘든 당신의 우회적 표현들.

그리고 당신의 단정한 콧수염

그리고 당신의 밝고 푸른 아리안족 눈 말이에요.

장갑차 인간, 장갑차 인간, 오 당신


신神이 아닌 갈고리 십자卍字가

너무 새카매 하늘도 뚫고 나올 수 없었죠.

여자들은 다 파시스트를 숭배해요.

얼굴을 짓누르는 장화를, 짐승을

당신 같은 짐승의 짐승같은 심장을,


아빠, 당신은 검은 칠판 앞에 서 있어요,

내가 가진 당신 사진 속에서요.

당신을 발 대신 턱이 갈라져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악마가 아닌 건 아니죠, 아니

암흑의 인간이 아닌 건 아니죠


내 예쁜 붉은 심장을 물어뜯어 두 동강 냈잖아요.

그들이 당신을 물었을 때 나는 열 살이었어요.

스무 살 때 나는 죽으려 했지요

그리고 당신에게 돌아가려, 돌아가려, 돌아가려 했어요

뼈라도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나를 포대 자루에서 끄집어내

아교로 이어 붙였어요.

그리고 그때 나는 뭘 해야 할지 알았죠.

당신을 본보기로 삼았어요.

나의 투쟁Meinkampf 같은 표정을 한 검은 옷 입은 남자


그리고 고문대와 나사못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나는 한다고, 한다고 말했죠.

그래서 아빠, 나는 완전히 끝났어요.

검은 전화기가 뿌리째 뽑혔어요,

목소리들이 더는 기어나올 수 없죠.


내가 한 사람을 죽였다면, 그건 두 사람을 죽인 셈이에요

흡혈귀, 자기가 곧 당신이라고 말하고는

일 년 동안 내 피를 빨아먹었죠,

사실을 알고 싶다면, 칠 년이예요.


아빠. 이제 반듯이 누워도 돼요.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혀 있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결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죠.

그들은 춤읓 추면서 당신을 마구 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게 당신이라는 걸 늘 알고 있었죠.

아빠, 아빠, 이 개자식아, 나는 끝났어.


-「아빠」 전문


 실비아 플러스는 이 시를 통해 당대의 여성 시인이 직면해야만 했던 자아의 상태를 보여준다. 화자는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아버지로 나타나는 거대한 힘으로부터 소외와 억압을 느끼고 분노하면서도 그 힘에 대해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한다. 플라스는 이 화자를 통해 남성 중심의 문화에 갇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의 상실, 자기 분열적인 분로를 표현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아빠는 그녀가 8살 때 죽었는데 그녀는 그 후로 자살 충동에 휩싸였다고 한다. 시의 첫 부분은 아빠에게 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화자는 수십 년 동안 검은 구두 속에서 발처럼 살아왔다고 말한다. 화자의 삶은 통풍이 잘 되지 않는 캄캄한 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환기 없는 그녀의 삶은 무한한 어둠만이 그녀를 여전히 살아있음을 인식하게 하며 도리어 화자를 초라하고 창백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곳은 감옥과 다름 없다. 화자는 아빠에게 난 당신을 죽여야만 했다고 고백한다. 아빠는 화자가 그러기도 전에 죽었다. 화자의 삶에서 아빠의 존재는 “대리석처럼 무겁고, 신神으로 가득 찬 자루, 샌프란시스코 물개처럼 커다란 회색 발가락 하나를 가진 무시무시한 조각상”과 같이 묵직하게 자화자를 짓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화자는 독일인은 다 아빠라고 생각했고 자신은 유대인처럼 말하기 시작했다며 자신은 아마도 유대인일 거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아빠는 독일인, 화자는 유대인으로 설정되는 구조가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하고 관계의 폭력성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그녀에게서 언어를 빼앗아간 독일인 같은 아빠가 화자에게 행했던 억압과 폭력을 화자는 여러 층위의 비유를 통해 폭로한다. “내 예쁜 붉은 심장을 물어뜯어 두 동강 냈”다는 표현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빠는 화자가 아빠에게 무언가를 따져 묻기도 전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 시는 화자의 아빠뿐만이 아니라 화자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존재도 등장한다. 죽이기 전에 먼저 죽어버린 아빠(아버지)와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칠 년 동안 빨아 마신 흡혈귀인 또 다른 아빠(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 지점이다.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라고 시적 화자는 말하고 있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이 말은 이미 죽은 아빠를 죽일 방법은 없으니까, 그와 닮은 누군가를 대신 죽이는 것일 것이다. 마지막 연, 마지막 행에서 “이 개자식, 나는 끝났어.”라고 외치는 부분은 지금까지 자신을 억압해 왔던 관계와 그 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오랜 강박을 이제는 끊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으로 읽어낼 수 있다. 



지금은 편안한 시간이다. 일이 하나도 없다. 

나는 산파의 흡입 분만기를 빙빙 돌렸다. 

나에겐 꿀이 있다.

여섯 개의 꿀단지.

와인 저장실에는 여섯 마리 고양이의 눈,


창 없는 어두운 곳에서 겨울나기 

집의 중심에서

지난번 세입자가 두고 간 맛이 간 잼

그리고 텅 빈 반짝거림으로 채워진 빈 병들 옆에서

아무개 선생의 독한 진.


이곳은 내가 들어가본 적 없는 방이다. 

이곳은 내가 숨을 절대 들이쉴 수 없는 방이다. 

암흑이 박쥐처럼 저기 무리지어 있다. 

빛도 없이

그러나 횃불과 그 희미한


중국풍 노란색이 드리워진 오싹한 물건들

검은 고집스러움. 퇴락. 

사로 잡힘.

나를 차지한 것은 그들이다.


그들은 잔인하지도 않고 무심하지도 않다. 


단지 무지할 뿐.

벌들에게 지금은 버티는 시간- 벌들은

너무 느려서 나는 그들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들은 군인처럼 줄지어 행진한다

시럽 깡통을 향해


내가 가져간 꿀을 보충하기 위해.

테이트앤라일사社의 설탕이 그들을 계속 살아가게 한다.

정제된 눈雪.

꽃 대신, 그들이 먹고 사는 건 테이트앤라일이다.

그들은 그것을 먹는다. 추위가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한 덩어리의 공 모양으로 뭉치고

검은

정신은 저 모든 흰색에 대항한다. 

눈의 미소는 희다.

그것은 펼쳐져 있다, 마이센 도자기의 1마일 길이나 되는 몸체처럼,


따뜻한 날


벌들이 그들의 시신을 옮길 수 있는 데까지. 

벌들은 모두 암컷이다,

하녀들과 기다란 왕족 여인. 

그들은 수컷들을 없애버렸다,


무디고 서툴러서 비틀대는 것들, 그 촌뜨기들을. 

겨울은 여자들을 위한 것-

그 여자는, 가만히 뜨개질을 하고 있다,

스페인산 호두나무 요람에서,

그녀의 몸은 추위 속 한 개 의 구근이고 너무 멍해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벌통은 살아남으려나, 글라디올러스 꽃들은 

또 다른 해를 시작하기 위해

자기의 불을 묻어두는 데 성공하려나? 

그들은 무엇을 맛볼까, 크리스마스 로즈?

벌들이 날고 있다. 그들은 봄을 맛본다.


-「겨울나기」 전문


“아빠, 아빠, 이 개자식아, 나는 끝났어.”

이 문장을 지나면 이 시집의 막바지에 배치된 네 편의 시, 「양봉 모임」, 「벌 상자의 도착」, 「벌침」, 「겨울나기」에 이른게 된다. 실비아 플라스의 아버지가 땅벌 연구의 권위자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벌에 대한 애착이 아이러니로 느껴지기도 한다. 3연을 보면 공간을 설명할 때 이곳은 화자가 들어가 본 적 없는 방이고 숨을 절대 들이쉴 수 없는 방이라고 말한다. 이 방은 마치 앞선 시 「아빠」에서 검은 구두에서 숨 쉬거나 재채기할 엄두도 못 내면서 발처럼 살아왔다고 묘사한 문장을 떠오르게 하는 공간이다. 즉 이곳은 그녀의 내부 깊숙이 존재하는 잠재의식의 세계이다. 이곳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을 기억의 뒤편에 감춰두었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검은 고집스러움. 퇴락. 사로 잡힘.” 화자를 차지한 것을 이러한 것들이다. 화자를 괴롭게 한 것들은 잔인하지도 않고 무심하지도 않고 단지 무지할 뿐이다. 무지는 무섭다. 무지가 가지는 유해성은 폭력적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안다고 해도 안 것이 아닐 것이다. 시인은 하얀 설탕 시럽을 먹고 살아남은 벌과 자신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 벌이 겨울을 살아남듯, 플라스도 자기 삶을 강인하게 견디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벌들을 생존하게 하는 설탕 시럽이 “정제된 눈”과 같다면, 벌들에게 닥치는 시련도 또한 겨울의 눈이다. 살아남은 벌들은 모두 암벌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암벌들은 수벌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다. “무디고 서툴러서 비틀대는 것들, 그 촌뜨기들을.” 즉 겨울은 여자들을 위한 것이다. 벌통과 글라디올러스 꽃은 겨울을 살아남아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여자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빛을 볼 수 있을까. 실비아 플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벌들이 날고 있다. 그들은 봄을 맛본다.”

벌들이 날고 있다. 그들은 봄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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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조금 추운 극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43
김승일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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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일의 『항상 조금 추운 극장』에서는 유독 반어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감상문에서 다룰 「자살하고 싶은 마음」과 「행복」이 특히 그러하다. 기대와 좌절을 반복한 끝에 결국에는 자신의 마음과 정반대의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부정하는 마음이 화자를 갉아먹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부정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저 내려놓고 받아들이게 하는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유치원에서 나는 늘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남자애들이 내 팔을 끌고 놀자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여자애들이 내 다른 팔을 잡고 끌었다. 우리랑 놀 거야. 팔이 아플 정도로 양쪽에서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 거야. 우리 거야. 곧 유치원의 모든 아이들이 몰려들어서 줄다리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고만 있었다. 평생 이렇게 서로가 날 가지겠다며 끌어당기기만 했으면 좋겠다. 이 중간에서 이렇게 팔이 아팠으면 좋겠다. 나는 탐험가이자 시인이 되었으며, 내가 사교 모임에 나타나면 모두가 내 주위로 모였다. 내가 오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설명하면,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혹은 내가 겪은 일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나와 대화하기를 간곡히도 원하였다. 나는 언제나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내 여행기와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국적, 무성별, 무인간이라는 데 있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작품을 좋아하였는데, 거기서 특히 한여름 밤이라는 무대를 좋아하였다. 한여름 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여름은 본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 뜨겁고, 축축한 것이 아니며.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가끔 바람이 불고, 종종 달콤한 것이 아니다. 안개도, 구름도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다. 자기 자신조차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한여름 밤의 꿈속에서, 사람들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사람에게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한여름 밤은 눈을 뜨지도 감지도 않는다. 한여름 밤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오랫동안 공간 이 내 시의 화자가 되기를 바라였으나, 항상 실패하고 말았다. 어떤 부족의 남자들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모습으로 자신을 꾸미고, 구애의 춤을 추었다. 그들은 한여름 밤이 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어떤 학술회에서 만난 저명한 시인은 사물에는 원래 의미가 없으며, 모든 존재는 잉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럴듯한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여름 밤이 되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날도 나는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나는 미소 짓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사랑 받는 것이 정말 좋다.


-「자살하려는 마음」 전문


  화자는 사랑받는 삶을 간절히 원한다. 유치원의 아이들이 몰려들어 화자의 팔을 붙잡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을 보며 화자는 “평생 이렇게 서로가 날 가지겠다며 끌어당기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삶을 갈망했던 화자는 탐험이자 시인이 되었고, 화자가 원했던대로 사람들은 화자의 주위에 모여든다.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시에 무국적, 무성별, 무인간이라는 화자를 공통적으로 내세운다. 화자는 오랫동안 ‘공간’이 자신의 시의 화자가 되길 바라는데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는 ‘한여름 밤’이라는 무대가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여름 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화자는 자기 자신조차도 미워하지 않는 한여름 밤을 보며 놀라워 한다. 하지만 한여름 밤은 눈을 뜨지도 감지도 않으므로 사랑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화자는, 공간이 시의 화자가 되는 것을 실패했던 화자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다. 화자가 원했던 것을 이룰 수는 없지만 이것을 실패함으로써 화자는 사랑을 지속하게 되고 아마도 계속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한여름 밤이 되고자 하는” 저명한 시인을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화자는 미소 짓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사랑 받는 것이 정말 좋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자살하려는 마음’이라는 이 시의 제목은 화자가 원했던 사랑 받는 삶에서 어긋나는 ‘한여름 밤의 방식’을 시 쓰기에 적용하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결국은 본인이 줄곧 해왔던 사랑 받는 방식을 긍정하게 되는 것을 표현한 제목이 아닐까 싶었다. 화자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품었지만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미소 짓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지옥으로 가는 버스의 승객들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여기가 지옥이라고 생각하며 낙담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지옥으로 가는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다. 최원석은 버스의 맨 뒷좌석에 앉아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버스는 계속 흔들리고, 최원석의 머리는 유리창에 자꾸 부딪힌다. 다와줘마는 지옥으로 가는 버스에서 태어났다. 다와줘마는 일곱 살이다. 지옥으로 가는 버스는 82년 하고도 7개월을 더 달려서 지옥에 도착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엄마가 그러는데요. 이 뒤에 따라오는 버스가 있대요. 거기 내 친구들이 타고 있대요. 다와줘마는 원석의 옆자리에 와서 버스 뒷유리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지만 다와줘마는 뒤따라오는 버스를 찾으려고 매일 최원석의 옆자리로 온다. 원석과 다와줘마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다와줘마는 버스를 불결한 화장실 같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불결한 화장실에 가본 적이 없으니까. 둘 중에 누가 더 불쌍한지를 따지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직업이나 존재에게는 누가 더 불쌍한지를 판단하는 일이 놀이거나 의무일 것이다. 놀고 싶거나 의무를 다하고 싶은 어떤 존재가 이 버스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존재야, 그만 놀고 어서 잠자리에 들거 라. 어떤 존재야, 뭐라도 된 것처럼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누가 누가 불쌍하나 쳐다보지 말고, 울거나 웃지 말고, 세수하고, 눈을 감고, 여기 누워라. 이불을 폭 덮어줄게. 잠깐만요. 최원석이 조금 행복해지고 있어요. 다와줘마가 뒤따라오는 친구들을 상상하며, 부끄럽게 미소 짓는 것을 보면서. 그렇구나. 어떤 존재야. 그렇구나…….


-「행복」 전문


  우리의 존재는 지옥을 향해 살아가는 것일까, 천국을 향해 살아가는 것일까. 이 시에서는 지옥으로 가는 버스의 승객들이 등장한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어쩌면 이 지옥을 향해 가는 길은 우리의 인생과 닮아있다. 불투명한 불확실성은 삶을 지옥처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최원석이라는 인물은 일곱 살 아이 다와줘마를 만나게 된다. 이 버스는 82년 하고도 7개월을 더 달려서 지옥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시간은 인간의 수명과도 유사하다. 다와줘마는 “이 뒤에 따라오는 버스”가 있다며 그 버스를 찾으려고 매일 원석의 옆자리로 온다. 지옥행 버스는 한 대로만 운행되는 것이 아닌 순환되는 버스인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운행 방식은 마치 불교의 윤회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불결한 화장실”에 가보지 못한 다와줘마는 원석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온 삶이 전혀 다르고 교집합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이렇게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한 버스에 타게 되었을까. 인생 역시 그렇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삶이라는 것에 내던져져 어떻게든 공존하고 있지 않은가. 이때 화자는 존재의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를 호명하며 말을 건다. 어떤 존재는 신인 것일까. 어떤 존재는 마치 인형 놀이를 하듯 자신이 만든 버스에서 사람들을 가지고 논다. 이 버스를 만들고 때로는 우리를 동정하고 인간처럼 웃고 울고 세수하고 눈을 감는다. 그러다 갑자기 화자는 “최원석이 조금 행복해지고 있”다고 말하며 어떤 존재에 대한 생각을 중지한다. 그런데 원석이 조금 행복해지고 있는 이유가 놀랍다. 바로 “다와줘마가 뒤따라오는 친구들을 상상하며, 부끄럽게 미소 짓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 모습을 보며 어떤 존재가 만들어 놓은 이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를 읽어보면 짐작했던 것처럼 지옥행 버스는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와줘마가 뒤따라오는 친구들을 기다리고 상상하는 것은 앞질러 가야한다고 서두르는 인생에서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며 소중한 존재들을 기다리고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장면이라고 느꼈다. 다와줘마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지는 최원석은 자신도 사실은 그렇게 살고 싶었다고, 나만 혼자 외롭게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를 돌아보고 멈추기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자 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시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세계를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그 순간에도 행복을 느끼고야 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며 부정을 긍정하는 사랑스러운 시다. 김승일은 시집 뒤편에 실린 ‘취소’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신의 부탁은 선과 악을 정의하는 일을 하지 말자는 요청인 것 같다”고 이야기 한다. 아마도 신의 요청은 선을 자처하여 무언가를 악이라고 정의고 파괴하려 들지 말아달라는 부탁인 것 같다고 말이다. 김승일은 “취소와 철회는 파괴와 다르다”며 “뭔가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일은 뭔가를 죽이거나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언어는 끊임없이 구분하는 일에서 탄생하는 것이지만 시는 구분을 철회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쓰어진다는” 말 역시 인상적이었다. 김승일은 이번 시집을 통해 무언가를 부정함으로써 세계를 긍정하게 되는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자살하려는 마음을 품었지만 실패하고, 지옥에서도 행복을 발견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삶과 죽음의 명확한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그 구분을 결국 철회한다. 결국 그의 시에서 두려움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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