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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난 사람들에 관하여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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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서평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맥스 디킨스(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1. 발행 / 453쪽


💡외로움은 남성을 조용히 죽인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근심을 털어놓는 일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나약하다고 습득해 온 남성들은 점점 친구를 잃어가며 고립된다. 이런 남성문화는 남성들의 압도적인 자살률과 고독사로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남성에게 부여된 책임감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함에서 오는 외로움은 결국 남성을 죽인다. 이 책은 남성우정에 대한 문화적 사회학적 분석과 함께 잃어버린 우정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스탠드업 코미디의 형식으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읽으면서 재치 있는 생각들과 (번역으로 많이 순화되었겠지만) 자조적인 성적 유머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어 예상치 못하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구간이 많았다. 하지만 웃으며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종종 슬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익살맞은 블랙코미디는 슬픔을 동반하니까.


“권위 있는 사마리아인 자살 보고서는 남성 자살의 가장 큰 위험요인 중 하나로 친밀한 사회관계와 가족관계의 부족을 꼽았다. (…) 같은 사마리아인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은 친구, 친지 또는 광범위한 커뮤니티 등으로부터 받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지원에 대한 접근성이 낮다. 이 점이 남성 자살 사례에서 ‘대형 잠복(big build, 고통을 다루지 못한 채 한계점에 이를 때까지 방치됨을 의미-옮긴이)효과가 관찰되는 이유다. 남성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위기 지점에 이를 때까지 도움 없이 방치된다.”(37쪽)


“여기서 즐거움은 ‘남자다움’이 아니라 향수이며, 우리에게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는 상실된 남성다움이 아니라 우리의 젊음에 대한 향수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원했던 게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소년이 되는 것’이라는 진실을 깨달았다.”(266쪽)


““함께 무언가를 만들고 수선하는 것은 서로를 만들고 수선하는 것과 같아요.” 크리스의 시적 표현이 놀라웠다. 남성우정에 대한 정의로 이보다 더 좋은 말을 들어본 적 없다.”(290쪽)


제목과 표지가 참 인상적이다.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선명한 색감으로 이목을 사로잡는 표지이지만 나는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조금은 슬픈 마음으로 채워졌다. 내 친구들의 곁에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함께할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많을 필요 없이 단 한 사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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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회의론자 - 신경과학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 희망의 과학
자밀 자키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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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문제에 대응하고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다는 분별 있는 믿음이다.”


그동안 나는 냉소주의와 회의주의를 혼동하고 낙관주의와 희망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과학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희망을 믿어볼 수 있게 되었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처, 편견을 가지고 ‘선제공격’을 하며 자신을 방어한다. 사람들 역시 ‘냉소적인 천재의 환영illusion’에 자주 사로잡히곤 한다. 행복하지만 잘 속는 바보와 현명하지만 신랄한 인류 혐오주의자라는 고정관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을 항상 신뢰하는 것 역시 현명하지 않다. 자밀 자키는 “사회적 지혜는 모든 사람을 무턱대고 믿거나 아예 아무도 믿지 않는 게” 아니고 “과학자처럼 생각하면서 증거를 믿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냉소주의와 극단적인 신뢰가 아닌 회의주의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건강한 방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의론자는 “새로운 정보를 기반으로 자신의 믿음을 갱신하면서 복잡한 세상에 적응”하고 음모론에 빠질 가능성이 작아 이와 같은 인지적 오류에 덜 빠진다.


“자신의 냉소주의를 회의적인 눈으로 보라. 어떤 사람, 일반인 또는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냉소적 사고를 한 가지 골라보자. 이 믿음은 어떤 정보에 기반하는가? 특히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식의 일반적인 믿음일 경우, 자신에게 있는 증거로 이 주장을 실제로 입증할 수 있는지 자문해보자. 증거가 없다면 이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증거가 필요할까?”(349쪽)


냉소주의는 결국 탄탄한 증거가 부족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냉소주의는 사람에 대한 신뢰의 결핍인 반면 회의주의는 추정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다. 냉소론자는 인간이 끔찍하다고 상상하는 반면 회의론자는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고 말한다. 신뢰도는 고통을 당한 누군가의 마음을 여닫는 데 크게 기여한다.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저자의 친구 에밀은 고통의 순간에도 신뢰와 희망으로 나아가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희망찬 회의론자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신경과학자로서 나는 우리 뇌가 세상을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을 해석한다고 배웠어. 그러니까 내 몸이 없어진다고 그게 정말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당신에게 나라는 사람은 실제로는 당신 마음이 투영된 모습이지. 나는 현재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고 항상 당신 안에 있어.”(21~22쪽)


신뢰와 희망은 냉소주의 못지않게 전염성이 있다. 에밀 역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유방임적인 태도로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아버지 덕분에 희망찬 회의론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자신 역시 럭비팀의의 코치가 되었을 때 팀원들에게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덕분에 뇌종양 진단을 받은 이후에도 에밀의 아내와 자녀들은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트라우마로만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신뢰는 타인에게 자신을 기꺼이 노출하는 마음으로 타인이 무언가를 제대로 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책을 읽으면서 타인의 이야기는 귀담아들어 왔지만, 나의 고통과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꺼내는 순간 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라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저 자기방어적인 태도라 생각했지만 이 역시 냉소주의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에밀 자키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직접 증거를 찾아보라고 제시한다. 냉소적 이론을 팩트 체크하고 직접 부딪혀보고 수치로 예측한 다음 실제 수치를 비교해 보라고 한다. 사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앞으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혹여 털어놓게 되더라도 이전만큼 후회하거나 괴로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들은 쉽게 누군가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부록도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해 내세운 많은 주장들을 동료 케이트와 함께 검토하며 평점을 매기고 3점 이하의 점수가 나오면 반박하는 이유도 수록했다. 책을 읽을 때 부록은 정독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책은 부록까지도 흥미로워 책을 덮는 순간까지 얻어가는 게 많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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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아시스
김채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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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까지고 이렇지만은 않을거야.”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은 함께 갈 수 없는 배타적인 관념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소설집은 대답한다. 삶에는 여전히 존재하는 부재의 자리가 있고, 죽음 역시 삶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완전히 마르고 부스러져도 빛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으며 서울에도 오아시스가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표제작은 「서울 오아시스」 가 될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상실을 겪고 무기력해져도 비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희망찬 낙관을 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격정적으로 슬픔을 토해낼 힘조차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떠난 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 뿐이다. 끊임 없이 걷고 공허한 마음으로 착실히 할 일을 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 무엇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인의 얼굴 위로 무언가 물러나듯 햇빛이 드리웠다. 기분이 좋았다. 몸이 비교적 따뜻했다. 이대로 햇볕에 반쯤 바랜 자신이 죽음을 몰아내지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주차장 바닥에 여러 차례 으깨져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온 사방이 순식간에 눈부시게 환해져, 그와 동시에 교각 아래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며 바람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또한 상상했다.” 

「빛 가운데 걷기」 47p


“구원은 바깥에 있지 않다. 상실—부재의 장소는 오히려 오아시스일 수 있고, 형벌 같은 삶에도 한 조각의 윤슬은 감추어져 있다. (…) 생과 죽음이라고 구획된 것들은, 명사형의 존재가 아니라 동사형의 생성들이다. 

「공백과 무한」 김미정 문학평론가 해설 250-251p


“병정들은 물줄기를 쫓아다니며 그 주위로 점점이 흩어지는 시원한 물방울을 맞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얄밉고 마음에 안 들어 자영은 병정들에게 직접 물을 쏘았다. 병정들은 곧바로 넘어지거나 발이 엉켜 물웅덩이로 떠밀렸다. “아파, 아파!” 자영은 쏜 자리에 한 번 더 물을 쏘았다. “그만해. 너는 우리보다 크잖아, 비겁하게. 괴롭히지 마.” 괴로운 듯이 찡그리고 있었지만 병정들의 물기 어린 얼굴에는 분명한 생기가 돌았고, 자영은 그것을 보았다. 병정들이 자영에게 보여주었다. 번성하는 여러 개의 생명력을.”

「럭키 클로버」 166p


김채원은 화자가 발견하고 떠올린 것들을 나열하며 서술한다. 이를테면 엄마가 자신에게 알려준 것들을 “올바른 젓가락질, 시계 보기, 우비 입기, 모르는 사람의 날씨 이야기를 들어주기, 밤 까기, 친구를 기다리기, 손을 뻗기, 물 없이도 알약을 삼키기.”(82p)라고 나열하는 식이다. 다른 소설들 속에서도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자주 등장한다. 목격하거나 회상한 무언가로부터 파생된 단어와 문장이 생략되는 법 없이 줄줄이 기록된다. 화자의 생각과 시선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계속 퍼져나가기를 바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착하고 기억하는 것만이 부재의 자리를 살아있게 하니까. 살아야 한다며 보이지 않는 희망을 무작정 강요하지 않는 작가를 알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앞으로도 계속 그의 세계에 함께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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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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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의 소설 「알레프」는 가장 환상적인 측면을 중점적으로 두고 다중 우주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우주라는 아직 다 발견되지 못한 세계를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인지 상당히 추상적이며 난해하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중에서도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장소인 알레프를 다루고 있다. 알레프에 대한 개념은 이번 기회에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랍 문자와 히브리 문자의 첫 번째 글자이고 이 글자를 형상화하는 문자의 기원은 페니키아 문자의 첫 문자로 이름도 이 문자의 이름인 알레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과 인간이 손을 맞대고 있는 모양'을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알레프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유대교의 금기 때문에 히브리어에서는 신을 상징하는 기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원과 맥락을 보면 ‘알레프’라는 단어를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문학과 결합시키면 매우 흥미로워서 예술 장르의 모티브로서 활용하면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는 사람의 집에 찾아갔다가 지하실에서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빛나는 형상의 물체인 알레프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2~3cm에 불과한 크기지만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형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그 집이 허물어지면서 알레프도 사라지고 만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풍경이 집중된 단 한 점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남기는 이 작품은 작가가 주장하는 시간의 대한 생각, 계속해서 흘러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우주에서는 과거가 반복될 수 있고, 미래가 현재에 개입할 수 있고, 현재가 과거의 영향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가변성을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공간 또한 고정되어있지 않다. “모든 지점에서 알레프를 보았고, 알레프 안에서 지구와 또다시 지구 안에 있는 알레프와 알레프 안에 있는 지구를 보았으며, 내 얼굴과 내장을 보았고, 너의 얼굴을 보았으며, 현기증을 느꼈고, 눈물을 흘렸다. 내 눈이 그 비밀스럽고 단지 추정적인 대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사람들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만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 그러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였다. 나는 무한한 존경과 무한한 연민을 느꼈다.” 이 문장을 보면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시간의 불변성과 부동의 공간이라는 관념을 깨뜨리며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미지의 우주가 손에 잡히는 형태로 내 옆에 있을 수도 있고 평행 세계처럼 존재할 수도 있는 여러 상상력을 제시하며 우리 곁을 파고드는 환상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본 것을 부분적으로라도 열거하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눈으로 본 것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시간에 따라 나열하는 것이 곧 언어의 한계이고 언어의 관념들은 관념으로만 남을 뿐 그 무엇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음을 말한다.


  주인공은 “견디기 어려운 광채를 지닌 무지갯빛의 작은 구체”를 보았고, 그는 그것에서 사람이 붐비는 바다와 여명과 석양, 아메리카 대륙의 군중, 검은색 피라미드의 한가운데에 있는 은색 거미줄을 보았다. 하지만 공사로 인해 단숨에 허물어진 집처럼 알레프 또한 꿈결처럼 사라지고 만다. 보르헤스가 주장하는 변하는 시간과 확정되지 않는 공간처럼 알레프도 언제든지 내 곁에 찾아왔다고 금방 떠나고 마는 그러다 또다시 내 손 안에 잡힐 수도 있는 그런 가변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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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72
임승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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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의 첫 번째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는 조용히 행동하는 화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시인 박상수는 “시를 쓰면서 혹은 쓰고 난 뒤 우리는 불행 가운데 존재하는 삶의 작은 기척 하나를 손에 쥐게” 된다고, 시의 힘은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 시집에서는 어린 화자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은 성장과 반성장의 경계에서 기묘하게 발화하며 움직인다. 가령 「꿈속에 선생님이 나왔어요」에서는 선생님의 입속으로 들어갔다가 “문을 열고 지루해서” 말했다는 아이가 나온다. 아이는 우리들의 사물함과 침실, 무덤을 언급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늘 한 박자씩 늦었으니까 선생님만 늙는다고 억울해”말라고 말한다. 분명 제목은 꿈속에 선생님이 나왔다는 것으로 보아 아이의 시점에서 타자인 선생님을 회상하는 듯해 보이지만 “우리들의 무덤”이라는 부분과 교실이라는 공간에 고여있는 듯한 아이의 이미지 때문에 죽은 아이가 선생님의 꿈속에 등장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이 시에서의 아이는 멈춰있는 자기들보다 “늘 한 박자씩 늦는” 선생님을 비웃는다. 그들은 성장을 멈췄음에도 여진히 선생님보다 성장해 있다. 


여기 스스로 성장을 거부한 소년도 있다. 「밖에다 화초를 내놓고 기르는 여자들은 안에선 무얼 기르는 걸까?」에서는 어제 잠 속으로 들어가 오늘 나오지 않은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늘어나는 팔다리”를 가졌고, “육신의 발달은 잠 속에서 그늘을 도왔다.” 육신은 소년이 원하든 원하지 않는 자연스럽게 성장해 간다. 하지만 소년의 정신은 성장을 거부한다. 도망치지 그랬냐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 소년은 “안쪽으로만 자라는 등에서 피리”를 꺼내며 그들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육체의 중심인 척추뼈마저 스스로 꺼내 육신마저 성장을 중지시키는 듯 하다. 반성장을 갈망하는 소년에게 ‘비성년’이라는 또다른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신해욱은 “성년(成年)이라는 말에는 움직임이 내포되어 있다”며 “움직여서 인간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여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하게 된 이들을 성년이라 부른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으되 이제 그렇게 될 이들을 미성년이라 부르고, ‘이미’ 그렇게 되지 않은 이들은, 그러니 비성년이라 부르기로 하자”고 새롭게 정의했다. 한 마디로 “미성년은 대기 중이고 비성년은 열외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잠에 든 소년을 끌어내려 한다. 그러나 ‘이미’ 소년은 이불 밖으로 발이 먼저 나와 있었다. 스스로 열외에 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장과 반성장은 아이들에게 미성년과 성년, 비성년의 자리를 선택하게 하는 기로이다. 그렇다고 성장은 곧 체제에 대한 굴복이자 반성장은 체제에 대한 혁신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밀지도 않는다. 그저 아이들은 누군가의 꿈에 등장하고, 낯선 곳을 걸으며 ‘작은 기척’을 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을 “열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나타나는 질문”(「결석」)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내 되짚어본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건 반칙”이라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에 자신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을 결석이라 말하고, 자신이 결석한 곳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는 것은 반칙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물음에 대답할 내가 없으니까. 그들은 알고 있다. 어떤 곳에 있든 어떤 기로에 서 있든 그곳에 자신이 들어있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의 기척은 그들의 존재를 지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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