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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조금 추운 극장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43
김승일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평점 :
김승일의 『항상 조금 추운 극장』에서는 유독 반어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감상문에서 다룰 「자살하고 싶은 마음」과 「행복」이 특히 그러하다. 기대와 좌절을 반복한 끝에 결국에는 자신의 마음과 정반대의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부정하는 마음이 화자를 갉아먹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부정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저 내려놓고 받아들이게 하는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유치원에서 나는 늘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남자애들이 내 팔을 끌고 놀자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여자애들이 내 다른 팔을 잡고 끌었다. 우리랑 놀 거야. 팔이 아플 정도로 양쪽에서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 거야. 우리 거야. 곧 유치원의 모든 아이들이 몰려들어서 줄다리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고만 있었다. 평생 이렇게 서로가 날 가지겠다며 끌어당기기만 했으면 좋겠다. 이 중간에서 이렇게 팔이 아팠으면 좋겠다. 나는 탐험가이자 시인이 되었으며, 내가 사교 모임에 나타나면 모두가 내 주위로 모였다. 내가 오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설명하면,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혹은 내가 겪은 일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나와 대화하기를 간곡히도 원하였다. 나는 언제나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내 여행기와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국적, 무성별, 무인간이라는 데 있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작품을 좋아하였는데, 거기서 특히 한여름 밤이라는 무대를 좋아하였다. 한여름 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여름은 본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 뜨겁고, 축축한 것이 아니며.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가끔 바람이 불고, 종종 달콤한 것이 아니다. 안개도, 구름도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다. 자기 자신조차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한여름 밤의 꿈속에서, 사람들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사람에게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한여름 밤은 눈을 뜨지도 감지도 않는다. 한여름 밤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오랫동안 공간 이 내 시의 화자가 되기를 바라였으나, 항상 실패하고 말았다. 어떤 부족의 남자들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모습으로 자신을 꾸미고, 구애의 춤을 추었다. 그들은 한여름 밤이 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어떤 학술회에서 만난 저명한 시인은 사물에는 원래 의미가 없으며, 모든 존재는 잉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럴듯한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여름 밤이 되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날도 나는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나는 미소 짓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사랑 받는 것이 정말 좋다.
-「자살하려는 마음」 전문
화자는 사랑받는 삶을 간절히 원한다. 유치원의 아이들이 몰려들어 화자의 팔을 붙잡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을 보며 화자는 “평생 이렇게 서로가 날 가지겠다며 끌어당기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삶을 갈망했던 화자는 탐험이자 시인이 되었고, 화자가 원했던대로 사람들은 화자의 주위에 모여든다.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시에 무국적, 무성별, 무인간이라는 화자를 공통적으로 내세운다. 화자는 오랫동안 ‘공간’이 자신의 시의 화자가 되길 바라는데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는 ‘한여름 밤’이라는 무대가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여름 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화자는 자기 자신조차도 미워하지 않는 한여름 밤을 보며 놀라워 한다. 하지만 한여름 밤은 눈을 뜨지도 감지도 않으므로 사랑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화자는, 공간이 시의 화자가 되는 것을 실패했던 화자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다. 화자가 원했던 것을 이룰 수는 없지만 이것을 실패함으로써 화자는 사랑을 지속하게 되고 아마도 계속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한여름 밤이 되고자 하는” 저명한 시인을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화자는 미소 짓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사랑 받는 것이 정말 좋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자살하려는 마음’이라는 이 시의 제목은 화자가 원했던 사랑 받는 삶에서 어긋나는 ‘한여름 밤의 방식’을 시 쓰기에 적용하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결국은 본인이 줄곧 해왔던 사랑 받는 방식을 긍정하게 되는 것을 표현한 제목이 아닐까 싶었다. 화자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품었지만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미소 짓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지옥으로 가는 버스의 승객들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여기가 지옥이라고 생각하며 낙담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지옥으로 가는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다. 최원석은 버스의 맨 뒷좌석에 앉아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버스는 계속 흔들리고, 최원석의 머리는 유리창에 자꾸 부딪힌다. 다와줘마는 지옥으로 가는 버스에서 태어났다. 다와줘마는 일곱 살이다. 지옥으로 가는 버스는 82년 하고도 7개월을 더 달려서 지옥에 도착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엄마가 그러는데요. 이 뒤에 따라오는 버스가 있대요. 거기 내 친구들이 타고 있대요. 다와줘마는 원석의 옆자리에 와서 버스 뒷유리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지만 다와줘마는 뒤따라오는 버스를 찾으려고 매일 최원석의 옆자리로 온다. 원석과 다와줘마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다와줘마는 버스를 불결한 화장실 같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불결한 화장실에 가본 적이 없으니까. 둘 중에 누가 더 불쌍한지를 따지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직업이나 존재에게는 누가 더 불쌍한지를 판단하는 일이 놀이거나 의무일 것이다. 놀고 싶거나 의무를 다하고 싶은 어떤 존재가 이 버스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존재야, 그만 놀고 어서 잠자리에 들거 라. 어떤 존재야, 뭐라도 된 것처럼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누가 누가 불쌍하나 쳐다보지 말고, 울거나 웃지 말고, 세수하고, 눈을 감고, 여기 누워라. 이불을 폭 덮어줄게. 잠깐만요. 최원석이 조금 행복해지고 있어요. 다와줘마가 뒤따라오는 친구들을 상상하며, 부끄럽게 미소 짓는 것을 보면서. 그렇구나. 어떤 존재야. 그렇구나…….
-「행복」 전문
우리의 존재는 지옥을 향해 살아가는 것일까, 천국을 향해 살아가는 것일까. 이 시에서는 지옥으로 가는 버스의 승객들이 등장한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어쩌면 이 지옥을 향해 가는 길은 우리의 인생과 닮아있다. 불투명한 불확실성은 삶을 지옥처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최원석이라는 인물은 일곱 살 아이 다와줘마를 만나게 된다. 이 버스는 82년 하고도 7개월을 더 달려서 지옥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시간은 인간의 수명과도 유사하다. 다와줘마는 “이 뒤에 따라오는 버스”가 있다며 그 버스를 찾으려고 매일 원석의 옆자리로 온다. 지옥행 버스는 한 대로만 운행되는 것이 아닌 순환되는 버스인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운행 방식은 마치 불교의 윤회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불결한 화장실”에 가보지 못한 다와줘마는 원석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온 삶이 전혀 다르고 교집합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이렇게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한 버스에 타게 되었을까. 인생 역시 그렇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삶이라는 것에 내던져져 어떻게든 공존하고 있지 않은가. 이때 화자는 존재의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를 호명하며 말을 건다. 어떤 존재는 신인 것일까. 어떤 존재는 마치 인형 놀이를 하듯 자신이 만든 버스에서 사람들을 가지고 논다. 이 버스를 만들고 때로는 우리를 동정하고 인간처럼 웃고 울고 세수하고 눈을 감는다. 그러다 갑자기 화자는 “최원석이 조금 행복해지고 있”다고 말하며 어떤 존재에 대한 생각을 중지한다. 그런데 원석이 조금 행복해지고 있는 이유가 놀랍다. 바로 “다와줘마가 뒤따라오는 친구들을 상상하며, 부끄럽게 미소 짓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 모습을 보며 어떤 존재가 만들어 놓은 이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를 읽어보면 짐작했던 것처럼 지옥행 버스는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와줘마가 뒤따라오는 친구들을 기다리고 상상하는 것은 앞질러 가야한다고 서두르는 인생에서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며 소중한 존재들을 기다리고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장면이라고 느꼈다. 다와줘마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지는 최원석은 자신도 사실은 그렇게 살고 싶었다고, 나만 혼자 외롭게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를 돌아보고 멈추기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자 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시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세계를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그 순간에도 행복을 느끼고야 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며 부정을 긍정하는 사랑스러운 시다. 김승일은 시집 뒤편에 실린 ‘취소’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신의 부탁은 선과 악을 정의하는 일을 하지 말자는 요청인 것 같다”고 이야기 한다. 아마도 신의 요청은 선을 자처하여 무언가를 악이라고 정의고 파괴하려 들지 말아달라는 부탁인 것 같다고 말이다. 김승일은 “취소와 철회는 파괴와 다르다”며 “뭔가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일은 뭔가를 죽이거나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언어는 끊임없이 구분하는 일에서 탄생하는 것이지만 시는 구분을 철회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쓰어진다는” 말 역시 인상적이었다. 김승일은 이번 시집을 통해 무언가를 부정함으로써 세계를 긍정하게 되는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자살하려는 마음을 품었지만 실패하고, 지옥에서도 행복을 발견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삶과 죽음의 명확한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그 구분을 결국 철회한다. 결국 그의 시에서 두려움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