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면 문학가 일반에 대해 다룰 것 같지만, 사실 전시 제국대학 독문학부에 대한 세밀화라 할 수 있는 글이다. 저자 본인이 졸업한 학교에 대한 이야기라서일까,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디테일에 너무 집착한다. 핵심적인 내용만 추려 보다 간소하게 만들었으면 보다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소한 문제다. 이 책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서술이 너무나 지리멸렬하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본래 이들의 문제는 다카하시 겐지나 하가 마유미가 진정 괴테, 헤세, 릴케 또는 나치 문학 작가들에게 기울어져 있었고, 히틀러든 천황이든 진심으로 신봉했다고 가정할 때 표면으로 떠오르는 '문학'의 문제다. 그렇지만 그들이 과연 그렇게까지 '문학'이라는 독소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지(물론 그럴 필요는 전혀 없지만) 아닌지는 대단히 의문스럽다는 견해가 이 책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이런 입장으로 하가 마유미나 다카하시 겐지의 수미일관성에 주목해 보면, 이는 역시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부'의 문제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31쪽)


"물론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문학'이 자기편이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서두에 인용한 모 독일어 교사의 감상처럼 '문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자각을 강조하는 일조차 현대에 와서는 자칫하면 꼴사나울 만큼 범용한 표현이 되어 버린다." (55쪽) 


인용한 문장들은 작은 따옴표를 사용하여 '문학'이란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책의 어디에서도 이처럼 '문학'이란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작은 따옴표를 사용한 강조는 해당 표현을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 자신이 '문학'이라는 단어를 통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일본의 교양 독자들 또는 문학자들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저자는 판단했을 것이다. 일본인은 아니지만 일본인 저자들이 쓴 책을 나름 읽었기에 나도 일상적으로 이해되는 문학과는 다른 것을 가리키기 위해 따옴표를 친 '문학'이란 단어를 적잖이 접해 왔다. 대개 기존의 문학에 대한 이해를 비판하는 논의들이 그러한 표현법을 사용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문학'' 같은 표현의 의미가 모호한 이유는 이 책은 문학에 대한 통념을 비판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문학'' 같은 표현을 쓰는지 알 수 없다. 


문체의 조야함은 단어 선택에 국한되지 않는다. 책 전체의 주제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1장에서 가져 온 첫 인용문을 보자. 이 인용문에서 말하는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전후 맥락을 알고 읽어도 알 수가 없다. '이들의 문제'가 가리키는 것이 다카하시 겐지 같은 독문학자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인지, 아니면 다카하시 겐지 같은 독문학자들에게 존재하는 문제인지 모호하다. 책 전체의 내용에 비추어 판단해 보면, 후자, 즉, 다카하시 겐지 같은 제국대학 문학부 출신의 이류 엘리트이기에 갖게 되는 문제를 가리키는 듯 하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가 본래 문학의 문제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왜 이들의 문제는 본래 문학의 문제인가? 이들이 문학자들이기 때문인가? 문학자만이 하는 고민, 문학자만이 던지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문제가 본래 문학의 문제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엔 '문제'가 전자의 의미로 쓰이게 된다. 그게 아니면 문학자라는 존재가 고유하게 갖는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대체 그런 문제는  무엇인가?  


저자가 평론가나 언론인이라면 문체의 조야함 또는 꼼꼼한 사고의 부족을 이해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학자이다. 학자라면 사고를 명료히 표현하는 데 보다 더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문학가에게 병이 있다면, 이렇게 불명료한 문장을 쓰는사람이 문학자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아닐까. 



교양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본래 학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고, 학자들의 언론 활동이 활발하다. 전시 제국대학 독문학부에 대한 세밀화라 할 수 있는 마이너한 주제를 가진 책이 출판될 수 있는 것은 이런 배경 하에 가능한 일이리라. 하지만 그 때문인지 학자의 글이 학자의 글에 기대되는 지적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를 적잖이 보게 되는 것 같다. 저자 다카다 리에코는 연구 주제가 재밌어 번역되어 소개되지 않은 다른 책들도 읽어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니 다른 책도 이 책 만큼이나 서술이 지리멸렬할 것 같아 걱정스럽다. 



번역자도 저자의 어색하고 불분명한 문장들의 가독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은 것 같다. 수식구가 무엇을 수식하는지 두 번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아주 많이 있다. 일본어가 한국어와 매우 비슷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번역하지 않으면 원문의 문제가 고스란히 번역문의 문제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 책의 번역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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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 지음, 서의윤 옮김 / 좁쌀한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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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론타이의 책을 번역 소개하면서 호프 소머스도 같이 하다니 출판사의 안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일관성 어디 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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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이 죄 2019-06-21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니까 콜론타이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니까? 아닐뿐더러 페미니즘에 반대했다니까?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겉보기에 아무리 급진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계급적 입장에서 보아 페미니스트들이 현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인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여성의 해방 역시 완결되지 못한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승리란 이전에 남성들이 독점적으로 누렸던 특권이 ‘공정한 성‘에게 허용될 때를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다르다. 그들은 남성을 적이나 억압자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남성들을 일상의 고역을 나누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로 생각한다.˝ <-- 이게 콜론타이가 한 소리라니까? 의심나면 콜론타이를 직접 읽어보라니까?

아시누스 2019-07-15 22:18   좋아요 0 | URL
콜론타이의 주장은 맑스주의 페미니즘과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대결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콜론타이의 자기 규정을 근거로 콜론타이가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텍스트가 쓰인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무식한 짓이죠.
 
서울은 어떻게 계획되었는가 살림지식총서 156
염복규 지음 / 살림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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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확고한 역사의식과 꼼꼼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알찬 책이다. 저자의 더 규모가 큰 저서를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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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넘어서
힐러리 퍼트넘 지음, 노양진 옮김 / 서광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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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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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 내가 있다 - CNN 앵커, 앤더슨 쿠퍼의 전쟁, 재난, 그리고 생존의 기억
앤더슨 쿠퍼 지음, 채인택.중앙일보 국제부 옮김 / 고려원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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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독자들에게는 꽤 흥미있는 책일 수 있다. 비범한 출신 성분, CNN의 간판 기자, 그리고 그리 나쁘지 않은 기자의 글솜씨.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한국독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의 가문에 대해 알지도, CNN 을 통해 그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도 없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이 미국의 부와 권력의 간접체험 이상의 것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는다. 아니면 막대한 재산이 있는데도 모험적인 길을 걸을 수 있는 미국인의 과단성에 대한 재확인이거나.

컬럼 수준의 취재담과 신변잡기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그저 그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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