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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01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평점 :
올 해는 시를 많이 읽으려고 했다. 좋은 시집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시를 읽는 데에 부담이 조금 덜 해진 덕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시린이인 내게, 아직 좋은 시집을 고르는 기준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저 제목을 보며 뭔가 끌리는 시집을 구매하곤 한다. 이 시집도 그렇게 만났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만, 시인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이다.
시인을 부단히도 생각해내려 했지만, 내 기억에서 시인의 작품을 본 기억은 없었다. 검색을 해보니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끌림> 등의 작가였다. 두 작품을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베스트셀러로 기억되고, 서점에서 두 책의 표지를 많이 봤었던 것 같다. 만남이야, 시인분이야 어떻든, 제목에 이끌려 구입한 시집을 그렇게 읽게 되었다.
읽기 시작하면서 '끌림'이 시작되었다. 뭐야, 이거 너무 좋은데?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지던 시들과는 분명 달랐다. 이 시집이 쉽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다. 나에게 맞는다고 해야 할까. 정서나 감정의 표현들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시어에 녹아서 전달되는 서사도 좋았고, 서사에서 느껴지는 감정들도 좋았다. 겨울에 읽어서 그런지, 시집 전체가 눈 내린 간이역의 대합실이 떠오르게 했다. 그 대합실의 한 가운데는 연통이 이어진 난로가 있는 그런 간이역 말이다. 간이역에서 느껴지는 포근함, 따스함, 외로움, 고독함 등이 말이다. 전반적으로 시집의 제목처럼 사랑이 느껴졌다.
시를 읽기가 두려워지던 때도 있었다. 읽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힘듦은 감정이 전달되지 않는 언어의 장벽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시집에서는 그 장벽이 없는 것 같았다. 있더라도 낮아서 넘어갈 수 있었다. 설령 장벽이 너무 높아 넘어가기 어려울지라도 장벽의 어느 한 곳에는 그 곳을 통과할 수 있는 작은 문이라도 있었다.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따뜻했다.
다시 시를 읽기 시작한다. 다시 시가 좋아진다.
농밀
당신 눈에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당신 눈 속에 반사된 풍경 안에 내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틀이 자발적으로 윤곽을 잡게 되었습니다
별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당신 눈동자가 흔들린 거라 믿게 되었습니다 - P23
어질어질
눈은 녹아서 벚꽃으로 피고요
벚꽃은 녹아서 강물로 흐르고요
강물은 얼어서 눈으로 맺히고요
눈은 피어 사무치게 벚꽃으로 흩어지고요
말 안 듣는 마음은 엎질러져 쏟아지고요
당신에게 잘 하고 싶고요 - P26
폭설
붙들고 울고 있다
한없이 서로를 껴안고 울고 있다
놓지 않고 있다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 붙들고 서서
함께 허물어지려고 붙들고 있다
두 사람 신발 등이 눈물에 젖고 있다
두 사람이 껴안고 서 있는 자리에
열과 공기가 닿은 것처럼
두 사람을 제외한 곳만 눈이 내려 쌓이고 있다 - P27
사랑
나는 왜 누구의 말은 괜찮은데 누구의 말에는 죽을 것 같은가
누구는 나를 만지면 안 되는데 누구는 나를 만져도 되는가
누구는 거칠게 다가와서 힘이 드는데 누구는 거친 것 뒤에 표정을 감추는 것 같은가
나는 누구의 총알이라면 기꺼이 맞고 누구의 총알이라면 피하고 싶은가
나는 누구의 이빨이라면 물려 죽어도 괜찮고 누구의 이빨에 씹혀 죽으면 억울할 것 같은지
나는 너의 눈을 찌를 것인가 네가 나의 눈을 찌를 것인가
내 몫까지의 용기와 순서를 맡기겠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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