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 - 김훈 문장 엽서(부록)
김훈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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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말을 돌려서 할 필요가 없다. '쉽지 않다'는 말은 '어렵다'는 말과 꼭 같지는 않지만,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는 말보다는 '글을 쓰는 일은 어렵다'가 더 정확하고 솔직하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글이든 정확하고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에둘러 표현하게 된다. 말도 글도 모두 그렇다. 그렇게 말이 많아지고 글은 길어진다.


  김훈 작가님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표현이 정확했다. 어떻게든 닮고 싶었지만, 내 습관은 쉬이 고쳐지지 않았고, 선생님의 문장은 멀었다. 선생님의 새 작품, 산문이 나왔다. 글을 읽는 중에 선생님의 글쓰기와 관련된 부분이 있었는데, 내가 닮고 싶은 글쓰기 부분에 적용할 수 있는 문장이 실려 있었다.


"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쓸 때 주어와 동사의 거리를 되도록이면 가까이 접근시킨다. 주어와 동사가 바짝 붙으면 문장에 물기가 메말라서 뻣뻣해지지만 문장 속에서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선명히 알 수 있고, 문장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주어와 동사의 거리가 멀면 그 사이의 공간에 한바탕의 세상을 차려 놓을 수 있지만 이 공간을 잘 운영하려면 글 쓰는 자의 몸에 조사들이 숨결처럼 붙어 있어야 하고, 동사의 힘이 문장 전체에 고루 뻗쳐 있어야 한다." (p. 135)


  그랬다. 내 글과 말은 주어와 동사의 사이가 멀었다. 주어와 동사 사이에는 물이 가득 차있고, 한바탕의 세상이 차려진 것도 아니다. 그저 문장만 불명확해지고 문장의 힘도 빠져 나갔을 뿐이다. 글을 쓰는 일이 많지 않지만, 리뷰 쓸 때를 비롯해서 앞으로 글을 쓸 때는 조금 더 주어와 동사 사이의 거리를 고려하려고 노력할 생각이다.


  책 소개를 하자면, 딱히 주제는 없다. 소설은 아니고 산문이기에, 선생님 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내용 중에 '죽음'에 대한 소재들이 많이 등장한다. 얼마전에 유치원 다니는 딸이, "아빠는 언제까지 살거야?" 라고 물어 왔다.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무슨 철학적인 질문도 아니고, 그저 오빠와 장난을 치다가 물어본 듯 한데,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80? 그렇게 생각하고 무심하게 답을 했는데, "오빠, 아빠는 80살까지 살거래" 하며 뛰어갔다. 딸이 가고 나서 생각을 해보니, 80살은 어떤 의미일까, 그 전에 죽음이 다가온다면, 혹은 80살 이후까지 살게 된다면, 하고 생각이 길어졌다. 김훈 선생님의 나이도 비슷하다. 병원에 다니는 소재도 이야기에 간간히 등장한다. 특히, 죽음에 대한 경험담도 나온다. 어떤 의미일까.


  그 의미에 대한 물음과 생각들이 계속 이어지다 책 읽기가 끝이 났다. 책장을 덮는데, 제목이 보였다. '허송세월'. 80살이 목표는 아니지만, 공공연하게 목표가 되어 버린 듯하다. 목표를 기준으로, 살아 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게 남은 현재이다. 돌이켜 보면 살아 온 날들엔 '허송세월'한 시간들이 많아 보인다. 나머지 살아갈 날들은 시간이 '허송세월'이지 않게 노력해 봐야겠다. 그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 물음에 대한 의미가 아닐까.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는 나름 의미를 부여해본다.

죽은 지 이삼 년 지나서야 죽었다는 소식이 오는 경우도 있다. 소식이 없는 동안 나는 그가 살아 있는 줄 았았는데, 이 말은 그가 죽었다는 걸 몰랐다는 말이다. 그동안 그는 죽은 것인가 안 죽은 것인가. 내가 그의 죽음을 모르는 동안에 그는 내 의식 속에서 살아 있었던 것인데, 이런 시간은 삶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죽은 자에게도 시간의 흐름이 있는지, 그 시간의 질감과 작용은 어떤 것인지 살아 있는 자들은 알지 못한다. 산 자의 시간과 죽은 자의 시간은 서로 넘나들지 못한다. 이 경계에 관하여 산 자는 말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 - P35

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쓸 때 주어와 동사의 거리를 되도록이면 가까이 접근시킨다. 주어와 동사가 바짝 붙으면 문장에 물기가 메말라서 뻣뻣해지지만 문장 속에서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선명히 알 수 있고, 문장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주어와 동사의 거리가 멀면 그 사이의 공간에 한바탕의 세상을 차려 놓을 수 있지만 이 공간을 잘 운영하려면 글 쓰는 자의 몸에 조사들이 숨결처럼 붙어 있어야 하고, 동사의 힘의 문장 전체에 고루 뻗쳐 있어야 한다. - P135

독서는 쉽고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는 어렵고, 책과 세상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기는 더욱 어려운데, 책과 세상이 이어지지 않을 때 독서는 괴롭다. - P157

꽃이 아름다운 색깔과 냄새로 곤충을 유혹한다는 생물학의 정설을 나는 의심한다. 이 학설이 진리 대접을 받으려면 곤충에게 미의식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벌과 나비는 꽃으로 가지만 잠자리, 메뚜기, 방아깨비, 오줌싸개, 여치는 꽃으로 가지 않고, 파리는 한사코 똥으로 모인다. 벌은 똥으로 가지 않고, 파리는 꽃으로 가지 않는다. 벌은 미의식이 있고 파리는 미의식이 없는가. 꽃 냄새를 따라가는 벌의 감각은 우아하고 똥 냄새를 따라가는 파리의 감각은 추악한가. 인간은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 P309

이 마지막 한 문장을 쓰기 위하여 나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 P318

육조 혜능(慧能, 638~713)은 인간의 내면에서 풍겨 나는 향기로운 냄새를 말했다(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

마음속에 그릇됨이 없고 질투와 성냄이 없고…악을 짓지 않고…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참성품에 변함이 없는 것…이러한 향기는 각자의 안에서 풍기는 것이니, 결코 밖을 향해 구하지 마라.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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