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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한다. 하루키의 열풍이 일던 시기부터는 아닐 것이다. 내가 책을 좋아하며 읽기 시작하기 전부터 하루키는 아주 유명했으니까 말이다. 우연히 <노르웨이의 숲>(내가 읽은 책의 제목은 이 제목이 아니었는데, 애를 쓰는 데도 그 제목이 생각이 안난다. 언젠가부터 이 제목으로 바뀌었는데, 이 제목의 책을 읽은 것도 아닌데 이 제목만 기억이 난다.)을 읽었는데, 정말 빠져들어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좋아하는 것들(달리기, 재즈, 요리 등)에 공통점이 너무 많아서 소설과 다른 에세이들을 찾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모두가 다 좋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 에세이들은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과는 결이 달랐다. 소설들도 재미에 있어서는 퐁당퐁당 하듯 좋았던 소설들과 그렇지 않은 소설들이 나뉘었다.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책은 출간 알림도 요란한다. 아주 조금의 관심만 갖고 있어도 도저히 신간이 나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다. 이 책도 작년 연말에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솔직히 이렇게 두꺼운 책일줄은 몰랐다. 책이 도착하고 그 두께에 놀라 바로 읽기 시작하지는 못했다. <1Q84>이후로 그렇게 재밌게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이 딱히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도 한 몫 했다. <기사단장 죽이기>가 떠오르긴 했으나, 재미와 그렇지 않은 경계 사이에 머물러 있는 책이었기에 결정에 큰 도움은 주지 못했다.
이 책은 처음부터 이끄는 힘이 있었다. <1Q84>처럼 재미있었다. 책의 두께가 전혀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여전히 뭐지 뭐지, 하는 부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서 다음은 다음은 하는 느낌이 훨씬 더 강했다. 이야기의 힘이랄까. 조금은 더 친절을 요하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1Q84>처럼 뭔가 아쉬움이 남는 끝맺음도 아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라도 쓰고 싶으나, SF 요소적인 소설들은 줄거리를 남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읽어보면 된다. 꼭 이야기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중간 중간 드는 생각들이 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영화 <매트릭스>가 읽는 내내 자주 떠올랐다. 모두가 현실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상공간에서 프로그램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실체는 그 가상공간을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건전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이 책도 어찌보면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쌓인 도시에서 도시가 부여한 삶을 본체가 살아가고, 그림자들은 본체를 대신하여 현실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유의 의미야 꼭 같지는 않겠지만,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나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하는 듯 했다.
나는 아직 잘 모른다. 무엇을 모르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이 적기에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고, 무엇을 모른던 간에 아직 잘 모르는 것은 사실이다. 불확실한 벽의 존재만큼은 확실한 것처럼, 불확실한 앎의 존재도 내게는 확실하다. 마지막이 왠 헛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떠올라서 써 본다. 오래간만에 재밌는 소설을 만났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 P11
그러나 그 여름 해질녘에 내가 어깨를 안은 것은 진짜 네가 아니다. 네가 말한 대로, 그것은 너를 대신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P14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 P15
내 생각에, 이 세계에서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까? - P44
"특별히 구체적인 원인 같은 건 없어. 그냥 순수하게 그렇게 돼버릴 뿐이야. 커다란 파도 같은 게 소리 없이 머리 위를 뒤덮고 나를 집어삼켜서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려. 언제 닥쳐오고 얼마나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어." - P106
네가 무슨 말을 꺼낸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특별한 잉크를 써서 특별한 종이에 적은 틀림없는 약속이다. 그래서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기다림이다. - P134
내가 보기엔 저쪽이야말로 진짜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생하며 나이들고 쇠약해져 죽어가요. 물론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 과정을 이어가는 게 순리입니다. 나 또한 미흡하게나마 그에 따르고 있고요. 시간은 멈출 수 없고, 죽은 것은 영원히 죽은 겁니다.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겁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 P153
계절이 바뀌고 있어. 주위 풍경이 전과 다르게 보이고 공기의 감촉이 바뀌어가. 아마 나도 조금은 변하고 있겠지. 하지만 어디가 변했는지는 스스로 알 수 없어.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P156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불합리할 만큼 갑자기 사라지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얼마나 격렬하게 당신의 마음을 쥐어짜고 깊숙이 찢어놓는지, 당신의 몸안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흐르게 하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 - P182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어째서 이곳에 있고,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어째서 이곳에는 늘 이렇게 세찬 바람이 불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묻는다. 물론 대답은 없다. - P184
이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이 아니다, 라고 피부로 느끼는 감각은, 그 깊은 위화감은, 아마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리라. - P228
어쩌면 남에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 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닥에 선을 한 줄 긋고 여기 안쪽으로는 넘어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사람은 그런 기척을 미묘하게 감지하는 법이다. - P251
"가끔 저 자신을 알 수 없어집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혹은 잃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인생을 저 자신으로, 저의 본체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그저 그림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 때면 제가 그저 나 자신의 겉모습만 흉내내서, 교묘하게 나인 척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 P451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P452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 P452
그렇다, 그건 뚜렷한 열을 품은 각인과도 같다. 한 세계와 또다른 세계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각인. 나는 아마도 그것을 내 존재의 일부로 간직한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 P667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 - P681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 P684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걸까? 나는 무언가가 시작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가 끝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변화는―그게 어떤 종류건―더이상 멈출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 - P711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 작가 후기 중 - P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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