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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ㅣ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평점 :
음.. 나는 술꾼일까.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술꾼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모자란 느낌이다. 자칭으로도 '꾼'을 붙이기 힘든데, 타칭이라고 가능할까. 언제부터 술을 마셨을까. 이 책에서 등장하는 수능을 100일 앞두고 마시는 술도 마셔본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꽤나 일찍 시작을 했었던 것 같다(내 기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정말 정신없이 마셨던 것 같다.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사발식을 견디지 못하고 부모님께서 호출을 당하셨고, 그 이후로도 취하지 않은 날보다 취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20대였던 것 같다.
이 책은 '아무튼'으로 시작하는 시리즈이다. 이렇게 많은 분야의 시리즈로 출판이 되고 있는지 몰랐었다. 최근에 신간 알림으로 <아무튼, 잠>이라는 책을 보았는데, '잠'이 많은 나라서, '잠'을 좋아하는 나라서 관심있게 보다가, 같은 시리즈의 이 책이 눈에 딱 들어왔다. 그래, '아무튼'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다면, 그건 '술'부터가 아닐까 싶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책 선택에 머뭇거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책을 읽으면 뭐라도 해야겠기에 남기기 시작한 리뷰다. 리뷰 작성을 위해 올 해 읽은 책들 목록을 살피다, <개와술>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머뭇거림은 그 책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술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모두 재밌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책은 너무 재밌다. 우선 저자가 글을 잘 쓴다. 이름이 낯설지 않았는데, 여자 축구에 관한 이전의 에세이가 유명한 것 같았다. 여튼 저자의 글을 처음 읽어 보는데, 문장마다에 위트가 넘친다. 부러운 글쓰기다. 한글 표현을 잘 사용한다고 해야 할까. 동음이의어를 갖고 표현하는 재치와 함께 술에 대한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맛깔나게 표현하는 능력은, 가끔 좋아하는 작가들의 필력에서 느껴지듯, 타고나는 재능이 아닐까 싶다. 부러운 재능이다. 특히, 노래방 리모컨 관련 에피소드는 정말이지, 공감과 함께 큰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끝부분에 등장하는 혼술 부분에서는 뭔가 짠함도 느껴지긴 했는데, 내가 가끔 보는 혼술하는 여성분에 대해 느끼는 멋짐과는 다른 부분의 이야기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혼술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느끼는 멋짐이란 부러움이 99.9%니까 말이다.
그렇게 술을 마셔대던 20대에는 술을 먹고 실수도 많았더랬다('나는 배추다' 정도의 주사는 귀여운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들이 대부분일테지만, 나의 주사로 피해를 본, 나와 함께 술자리를 했던 분들께 지금에서야 진정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지금은 술을 마실 기회가 정말 많이 줄기도 했지만, 그렇게 모처럼의 기회가 있을때 그 기회를 주사로 망치는 일이 이제는 5년에 한 번 정도 되는 것 같다. 최근에야 내가 좋아하는 술자리가 술을 많이 마시고 꽐라가 되는 술자리가 아니라 오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술자리라는 걸 알았다.
왜 그렇게 술을 마셨던 걸까. 외로웠기 때문이 아닐까. 술을 마시는 순간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함께 마시는 술보다 가족들이 잠든 시간에 혼자 맥주 한 캔 마시는 지금은?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그동안 내 몸에 인이 박힌 알코올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무튼, 술인 것이다.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때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언젠가 가닿기를, 언젠가 쉬워지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망이 단단하게 박제된 말은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바닥에라도 굴러다니고 있으면 나중에 필요한 순간 주워 담아갈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언젠가 힘을 내야만 하니까. 살아가려면.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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