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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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겨울이라는 유터버가 운영하는 겨울서점이라는 북클럽이 있다. 가끔 음악을 검색할 때가 아니면 유튜브를 잘 하지 않아서 우연히 알게 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몰랐을 것 같다. 덕분에 유튜브에 가끔 들어가 보면 최신 업데이트된 겨울서점의 영상들을 볼 수 있다. 차분하게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좋았고, 책을 다양하게 읽고, 지루하지 않고, 조리있게 말해 귀에 잘 들어와서 좋았다. 그 채널에서 최근에 꼭 읽어 보라며 추천을 해준 책이다. 제목이 내 시선을 끌기에 좋은 것도 아니었고, 처음 들어 보는 저자(외국 작가들은 거의 아는 분들이 없다)에, 출판사도 낯설었다. 그럼에도 아무 사전 조사 없이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읽어 보라고 한다. "그냥 읽어 보세요. 그리고 이 책에 관한 리뷰 영상만 따로 한 달 정도 있다가 올릴게요"라고 하며 추천한다. 뭐야, 뭐지? 이 책을 안 읽고 그 영상을 보면 도태될 것 같은 느낌에, 순전히 그 이유만으로 당장 책을 구입했다.


  외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유는, 최근 겨울서점 채널에 초대되어 나온 김문정님과 비슷한 이유다. 등장인물들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다. 아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글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머리 속에 이미지로 그려지는데, 이름과 매칭이 되지 않는다. 이름이 등장하면 뒷 페이지로 돌아가 그려놓았던 이미지들과 이름 연결짓기를 여러번 하는 과정을 거쳐야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탓일까. 여튼 이 책도 처음에 이름이 등장한다. 에휴 나랑은 안 맞는 책인 것인가. 추천하는 책들이 모두 나와 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아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중요한 책이 아니다. 초반에 약간 추천에 속은 거 아닌가 하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초반에 아주 살짝이다. 읽어보시라. 추천대로 될 것이다. 그냥 끝까지 읽게 된다.


  이 책의 찬사에 등장하는 온갖 현란한 수식어들.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훌륭한 책인가 싶을 수도 있다. '훌륭한'이란 범주는 모두가 다를테니 말이다. 이 책은 그 범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여러가지 범주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작은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찬사에 미치고 못 미치고, 그런거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재밌다. 리뷰를 써 오면서 누누히 이야기한 여러가지 의미에서의 각종 재미다. 글이 재밌고, 내용이 생각해볼 것들 투성이다.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생각중이다. 나는 과연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 책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처럼, 별들을 포기하고 우주를 얻을 수 있을까. 이 세계의 규칙들을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지배자(Ruler)들이 채운 족쇄라는 자(ruler)만큼의 범주로 한정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웠고 겁이 났다. 내 안의 긍정이 그 동안의 그런 규칙들을 최선이라고 여기게 한 것일까. 사다리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다리의 끝에 오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으며, 어느 순간 내 위치에서 군림하듯 살아오고 있던 것은 아닌지. 무섭도록 질책하는 책이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혼돈의 일부일 뿐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정하고 기억해라. 혼돈 속의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해라. 잊지 마라.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그렇다. 우리 모두 중요한 것이다. 나도 중요하고, 당신도 중요한 것이다.


혼돈이 그 사람을 집어삼킬 것이다. - P12

마치 내가 살아오는 내내, 그 질문을 할 순간만을 열렬히 기다려왔다는 듯 아버지는 내게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통보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 P54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정교한 뭔가를 쌓아 올렸다가…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하는 그 질문.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파괴되지 않는 것은 낙관주의와는 전혀 무관해. 낙관주의에 비하면 훨씬 더 심오하고 자의식은 훨씬 덜하지. 우리는 그 파괴되지 않는 것을 온갖 종류의 다른 상징과 희망과 야심 등으로 가리고 있어. 이런 상징과 희망과 야심은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인정하고 강요하지 않으니까. - P130

음… 만약 그 모든 잉여를 제거한다면(혹은 제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파괴되지 않는 그것을 찾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일단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카프카는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 그는 우리가 파괴되지 않는 것을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해주지 않아), 그것은 실제로 우리를 찢어발기고 파괴할 수도 있어.
그래도 어쩔수 없는 거지…. - P130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에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 P207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P227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 P228

여전히 내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우리 모두는 헤드라이트와 희망을 켠 차를 타고 어디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여전히 똑같은 텅 빈 지평선. 나는 우리의 지배가가 여전히 야멸차고 냉담하다고 생각했다. 저기 저 돌아서는 모퉁이에서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無라고 확신했다. 약속은 없다. 피난처도 없다. 희미한 빛도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든 상관없이. - P228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 P252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닐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 P263

과학자들은 "긍정적 환상을 갖는 것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터널 시야 바깥에 훨씬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게 됐다. - P266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 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격자가 없는 곳. - P267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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