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 삶의 완성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말하는 죽음학 수업
박중철 지음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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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well-being 은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well-dying 은 왜 들리지조차 않을까?

 

우리 주변에 장애인이 없는 게 아니라

 

타인의 차별섞인 시선이 두려워 밖으로 나오지 않고 꽁꽁 숨는 것처럼,

 

좋은 죽음, 잘 된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며,

 

삶을 잘 완성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궁금해 하며 펼쳐보았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객관적이고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

 

시종일관 동의하며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를 펼치고 마침내 완독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앞으로 바로잡아야 할 제도에 대한

 

저자의 주장과 분석들을 꼼꼼히 필사하면서 읽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각각 존엄하다고 배웠으면서

 

실상은 곳곳에 차별이 존재하고 있고

 

인간이 만든 제도가 과연 인간에게 이롭게 작용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삶은 이렇듯 부조리함 투성이지만,

 

인간의 탁월함과 고결함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우리는 또한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과 규범들이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고자

 

문제의식을 갖고 개선하고자 노력하지만

 

여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돌리기가 참 녹록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내부자의 고발과 좋은 세상을 위한 제언이

 

끊임없이 나오고 그것을 독자들이 읽어 곳곳에 퍼지게 한다면

 

또 모르죠..... 희망을 놓고 싶진 않습니다!

 

 

"황폐한 죽음의 문화를 고발하면서

 

삶만큼 죽음도 존중되는 세상을 제안하는 책" 이라고 설명하는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의 저자 박중철은

 

가정의학과 의사이면서 동시에 호스피스 의사입니다.

 

의사생활을 하다가 겪었던 어떤 결정적인 일로 인해

 

의사라는 직업과 현대 의학기술, 의료계의 모든 민낯들을 다시 보기에 이릅니다.

 

미덕과 관행을 바탕으로 하는 그 옛날의 마을 공동체가 아니라

 

이제는 법과 규범이 지배하는 이 개별화된 한국 사회에서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사자의 의사는 존중받지 못한 채

 

초라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이 사회의 불친절한 죽음의 문화를 고발하고 있어요.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던져진 채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지만,

 

모두에게 죽음이 놓여져 있다고 해서

 

그저 단순한 요식행위로 끝맺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새삼 갖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지 뭐' 체념하는 일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할 권리' 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진지한 고민도 없었을 뿐더러

 

인간이 점점 도구로 전락해 가는 사회이다 보니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일이 너무나 당연해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나는 지금 이 둔감함에 얼마나 젖어들어 있는지

 

경각심을 심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물론 경각심을 갖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죠.

 

좋은 죽음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인식을 위해서

 

죽음 교육이 필요하다는 공감대와

 

법 제도의 변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임종실 설치의 필요성, 연명의료의 민낯,

 

안락사 논쟁의 신호탄이었던 김득구 선수 사건,

 

병원 임종을 일반화시킨 보라매병원 사건,

 

인공 영양과 같은 수명 연장의 의미, 마약성 진통제 처방,

 

현대 의학기술의 집착적 모순,

 

원칙만 고수하려는 한국 의료계의 도그마와 자기기만,

 

연명의료결정법, 호스피스 완화의료.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시스템이 인간의 존엄함에 반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지금의 현실들을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요목조목 접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웠고, 어이가 없었고, 과연 변할 수 있을까 거대한 관행 앞에 무력감도 생깁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각자의 좋은 죽음을 위해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사회적인 공감대를 갖고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진지한 관심을 갖고 실질적인 대안을 조직화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잠시 관성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을 멈추고

 

되돌아보는 시간부터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타인과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 시나리오를 좇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나의 죽음의 주인이 될 것인지.

 

 

주택임종보다 병원임종의 수치가 높은 것은

 

이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말해 줍니다.

 

분명히 대다수의 바램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도시화로 인해 마을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기 어려워지면서

 

죽음의 순간에 어떠한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사회적 약자들도 너무나 많아지고 있죠.

 

하지만 이 책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한정되지 않는 게 문제라는 점입니다.

 

이 사회 전체가 모두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불친절하다는 거예요.

 

개개인의 죽음에 대해서 이 사회가 친절하지 못하다는 것이

 

저에게는 '비인간적인 태도' 라고 들렸습니다.

 

저자는 최전선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의사들까지도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필요성을 상당부분 느끼고 있으면서도

 

한국 의학계의 인식은 환자에게 끝까지 의학 기술을 펼치는 것이

 

최선이라는 기술주의 도그마에 빠져 있다는 것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 존중이라는 명분에 숨어서 치료를 놓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그것을 마치 의사로서의 실패라고 생각하는

 

의료진들의 집착과 자기기만, 위선적인 행위들을 꼬집고 있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 가족들의 인식이 더 뼈아프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연명의료는 당연히 환자를 위한 최선이 되어야 하고

 

자기결정권에 의해 행해져야 하는 것인데

 

생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명분, 가족의 사랑이라는 가면에 숨어서

 

죄책감을 피하려는 자기만족과 자기위로를 위한 변명이라는 것이었어요.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의료진들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비뚤어진 소명의식과 집단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일부 의료진들과 다르게

 

소신 발언,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의료진들도 분명 있습니다.

 

가족들이 환자를 향해 애도할 시간조차

 

넉넉히 주어지지 않는 이 불친절한 죽음의 문화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볼 수 있는 임종실의 설치를 아무리 제안해도

 

돈이 되는 장례식장만 여전히 확충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종실과 장례식장, 과연 무엇이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죽음은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절대주의, 생명지상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물음에 의구심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는 와중에는 그래도 오래 사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생명을 연장하게 도와주는 일이 이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하지만 당신이 죽음 앞에 놓인 당사자라면..... ?

 

연명의료의 끝에 그 환자의 몸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죽음을 원하고

 

좋은 죽음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고통 없이죽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의료계에 몸 담고 있는 내부자로서 의료진들의 위험하고도 안일한 인식이 어떠한지,

 

현대 의학기술이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고 있는지,

 

이 사회는 인간의 죽음을 삶만큼이나 존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폭넓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 통계 자료와 앞으로 어떤 개선방안들이 필요한지,

 

무엇보다도 법과 제도로 단순히 봉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어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과정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마주하기 불편하고 씁쓸한 현실 앞에서도

 

오히려 더더욱 냉철하고 분석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이고 진지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느꼈습니다.

 

결국 이 사회를 둘러싼 모든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나의 물건을 타인에게 아무 생각없이 맡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왜 자신의 죽음인데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결정에 맡겨 버리나요?

 

죽음을 선택할 권리는 나 자신에게 있음을 모두가 인식한다면

 

현재 이 사회의 죽음에 대한 문화에 대해 다같이

 

심도있게 관찰하고 숙고해봐야 합니다.

 

'소멸하는 주체'는 결국 나 홀로이고 고통 또한 오롯이 나의 몫이니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불안의 근원인 고통스러운 죽음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은

 

인간적인 연민을 놓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 현대 의학기술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인간의 존엄함을 짓밟는 것이

 

또한 기술주의라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존과 실존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였습니다.

 

인간에게 생존은 실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

 

생존이라는 말은 그 뒤에 '본능'이 자주 따라 붙는 것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저절로 일어나는 본성이지만

 

실존이라는 것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맞서야 하고 도전해야 하는 것.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지 않고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주체적으로

 

삶을 완성하고자 마지막 실존에 맞섰던

 

어느 의사의 이야기를 우리는 <숨결이 바람 될 때> 라는 책에서도 만났었구요.

 

살아가면서 실존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서야

 

비로소 실존을 인지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도전은 그래서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지도.

 

도전을 멈추지 않으면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게 되는 것이니까요.

 

(마음 한 켠이 웅장해 집니다 ㅠㅠ)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실존보다 생존에 더 몰입하며 살아가고 있지요.

 

 

 

 

 

한국의 보건의료 수준은 높지만

 

평화로운 임종을 위한 체계는 너무나 미흡한 게 현실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 수도 생각보다 적더라구요.

 

2010년 기준이지만 OECD 40개국 중 '죽음의 질 지수' 가 32위,

 

2015년에는 80개국 중에서 18위에 한국이 자리합니다.

 

 

 

 

 

연명의료는 필요하다 vs. 연명의료는 의미없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시겠어요?

 

저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연명치료는 본질적으로 환자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늦추는 것일 뿐이고

 

현대 의학기술을 만든 것도 인간,

 

그것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도 인간이라는 관점.

 

저자의 시선으로 본 현대 의학기술에는 인간성과 연민은 없다고 말합니다.

 

병원 임종의 가장 큰 문제로 저자가 강조하는 것 역시

 

죽음이 인간적인 마무리가 아니라 하나의 의학적 사건으로 처리된다는 것이니까요.

 

죽음의 반대 방향으로 환자를 잡아끌고 버티는 연명치료를

 

지금까지는 당연한 관행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환자는 원치 않는 연명치료에, 가족들은 경제적 부담을 줌으로써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예요.

 

고통경감에 주력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을

 

국가 차원에서 늘리는 일이 나와 가족,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의학계도 연명의료를 사명으로 여기며 기계적으로 행하는 그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개개인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어느 누구도 박탈할 자격은 없으니까요.

 

그런 특권이 의사에게는 없습니다 결코!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윤리적 최선이라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왔던 의료진들부터 각성하고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주길.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의료인의 판단보다 우선시되야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니까요.

 

대한의학회가 연명의료의 무익함을 처음 제기한지 17년 만인 2018년에 드디어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시행되었다고 하는군요....;;

 

인간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담론과 공감대 형성 노력은 건너뛴 채

 

바로 입법 작업에 착숙했다는 것을 저자는 많이 아쉬워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순서가 좀 바뀌긴 했어도 법과 제도부터 바꾸는 일이 의미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근차근 바로잡는 그 시작이 되길 바래요!

 

 

 

 

 

저자가 하이데거라는 실존주의 철학자를 언급한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삶이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아야 하는 고통의 여정이라고 했다지요.

 

인간에게 늙어감과 죽음은 필연이라고 한다면

 

무의미하게 연명의료로 목숨을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운명을 마주할 용기로 삶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실존을 되찾을 것인가.

 

죽기 전까지 선택의 연속이지만 ..... ^^;;

 

선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은 알면서도 행동하기는 참으로 어렵죠.

 

늘 우리는 살면서 이렇듯 실존의 문제에 부딪히나 봅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과 현실을 균형있게 접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아가 미래에 좋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삶에 실존의 문제를 붙잡을 수 있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삶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데 있어서 인생 도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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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3
메리 셸리 지음, 김나연 옮김 / 앤의서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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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고 싶었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앤의서재 출판사 책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제대로 읽기 전에 대략 들어본 바로는


앤젤라 카터의 <피로 물든 방>이나 셜리 잭슨의 <제비 뽑기> 같은 고딕 소설,


그리고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에서 마사가 나오는 장면이 풍기는 


그런 비슷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경험해 보고 스스로 판단할 일이었어요, 역시!


호러, 서스펜스 , 공포 느낌보다는 연민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소설이더라구요.


세상에 없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의 행위를 보면


과학의 위험성을 알리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그 피조물인 괴물에게 


자꾸만 연민의 감정이 생기더라구요.


소중한 가족들과 친구,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괴물에 대한 복수심으로 치닫는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달리


괴물은 오히려 이성적으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굉장히 설득력있게 이야기하거든요.


인간의 언어와 감정, 사회에 적응하기까지 빠른 속도로 습득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던 괴물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 세상을 힘과 그만의 능력으로 정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중에 하나인 그것,


외로움을 나눌 친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괴물에게 주어진 삶의 시작은 하나의 생명체로 이 세상에 빅터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인간들에게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그저 평범한 인간의 본질을 점점 보여주었던 부분이 


제가 가장 몰입했던 지점이었어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고 


빅터가 괴물의 친구를 만들어 주지 않는 한,


괴물 또한 빅터의 가족과 친구처럼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마치 신과 같은 능력을 보여줬지만 그도 결국은


영원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듯!







메리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 을 쓰기 전에


남편이었던 퍼시의 삶에서 소설의 영감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신비학자이자 연금술사인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책을 접하며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빅터의 이야기가 소설에서도 나오는데


메리 셸리의 남편 퍼시 역시 그러했다고 해요.


당시 과학이 지금만큼 발달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 오히려 과학을 사실로 접근하기 보다는 


마술과 같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봤다고 하니


그렇게 만들어진 괴물이라는 생명체가 온전하게 창조되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갈수록 인간을 알아가는 습득 능력이 정말 신의 경지 같기도 하고.^^;







악마의 존재가 등장하는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몰입도 최고조를 찍었던 순간!


<프랑켄슈타인> 같은 소설은 정말 영화나 뮤지컬처럼


다른 형태의 예술작품으로 만나도 너무 흥미롭고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을 보지 못했는데


소설을 접했으니 조만간 뮤지컬로 만날 날도 당겨질 듯 하네요.^^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나의 창조주를 혐오한다. "




사랑받고 싶은 대상이었던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보려 하지 않고


흉측한 겉모습만 보고 괴물이라고 치를 떠는 모습에


 자기혐오까지 더해져서 마지막 희망으로


외로움을 나눌 친구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데요.


부단한 노력과 설득으로 프랑켄슈타인의 약속을 받아내지만


결국 괴물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프랑켄슈타인의 의도를 알고


처절하게 그의 소중한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이게 됩니다.


빅터와 괴물 모두 복수심에 불타는 전개로 결말까지 나아가는데요.


슬픈 둘의 엔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이 소설을 처음으로 열었던 화자는 로버트 월턴.


북극을 항해하던 선장이었고 


그가 북극에서 만난 이방인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이었습니다.


그에게서 신비롭고도 희한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록해 두었던 것을


로버터의 누이 마거릿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전하게 되죠.


월턴으로 시작되었던 소설의 화자가 프랑켄슈타인도 되었다가,


중간에 악마가 프랑켄슈타인과 대화를 하기도 하죠.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이어지고


끝까지 흡입력있게 전개되는 소설이었어요.


근래에 이렇게 재밌게 읽은 소설이 있었나 싶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주워들은(?)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는 양 호기심으로 세상에 없던 생명체를 만들었었죠.


막상 흉측한 악마의 모습을 보더니 도망갔으면서


버려진 악마가 복수심으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죽이니까


그 때가 되서는 복수하기 위해 괴물을 쫓는 모습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 그 자체였습니다.


어떤 인간보다도 공감할 줄 알고, 사랑을 베풀었던 악마였지만


인간으로 인해 상처받고, 철저히 버려진 괴물에게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괴물이 느끼는 상처와 상실감은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것에 


결코 지지 않을 만큼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세상에 이렇게 위험한 존재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과학의 위험성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지만 


좀 더 면밀히 들여다봐야 하는 작품인 것 같아요.


괴물을 통해 저는 인간의 본성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시 사회 문제에 대한 작가의 인식도 눈여겨봐야 할 소설인 것 같아요.


소설 <프랑켄슈타인> 의 작가 메리 셸리는 당시 


노예 해방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해서


그 지점을 염두에 두고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인간의 삶과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이 문학이고 소설이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서 참 읽어내기가 녹록치 않은 장르이긴 하죠.


어렵지만 읽어냈을 때의 그 희열을 이겨내는 것이 또 없어서 


제가 문학덕후가 된 것이기도 하구요.^^


여러모로 오독하기 쉬운 소설 중에 하나가 바로 


<프랑켄슈타인> 이 아닌가 싶기는 한데 


소설의 매력은 또 재미 아니겠어요?


우선 작가가 의도하는 것을 찾아내려고 소설을 읽으려고 들면 


머리만 아파지니까 다른 건 다 접고 그냥 이야기에 몸을 맡겨 보세요.


재미 보장합니다.^^


이렇게 재밌는 소설이라고 왜 주변에서 얘기를 안 해줬나 싶을 정도였어요.


19살에 쓰기 시작한 소설이라니 한 번 더 놀라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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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3
메리 셸리 지음, 김나연 옮김 / 앤의서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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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에 쓰기 시작한 소설이라니 믿기 어렵도록 재밌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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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계절의 여행 - 인생의 여행길에서 만난 노시인과 청년화가의 하모니
나태주 지음, 유라 그림 / 북폴리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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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책 한 권이 나왔어요.

 

오랜만에 만나보는 시화집입니다.

 

그것도 나태주 시인이 참여한 북폴리오 신간 <서로 다른 계절의 여행> 을 만났어요.^^

 

책표지를 유라의 그림 중 하나를 골라 채웠는데

 

조금 아쉽다면 뒷표지처럼 앞표지도 무광으로 했으면 더 예뻤겠다는 생각이.....


걸스데이 멤버로만 알고 있던 유라가 알고 보니 울산예고 미술과 졸업에

 

이렇게 그림 실력이 좋은 줄 이번에 처음 알았지 뭐예요.^^

 

지금 시니가니 세대는 유라를 잘 모를 수도 있어서

 

이 책을 보여주면 화가가 사실은 과거에 아이돌이었다는 것이 

 

아마 연결이 안 될지도 모르겠네요.

 

유라로서는 참으로 영광일 것이 최근 2년간 유라가 직접 캔버스에 작업했던 그림들을 보고

 

나태주 시인이 모든 시를 다 새로 썼다는 것!

 

 "봄이 피고 여름이 흐르고 가을이 익고 겨울이 내리다" 

 

라는 4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 이번 시화집에서는 

 

유라의 그림을 보면 그 계절이 바로 연상되는 행복감을 선사해 줍니다. 

 

거기에 나태주 시인의 시가 더해져서

 

계절과 여행을 노래하는 서정적인 완성품이 되죠!

 

책 속에 들어가 있던 멋진 유라의 그림들로 12달을 채우고

 

한 폭으로 연결한 2022년 캘린더는 덤입니다.^^

 

4계절과 여행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이번 시화집 속 나태주 시인의 시 중에서도

 

저는 "풍경" 이라는 이 시가 참 좋았어요.

 

여행이라면 저도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특히 제주도의 경우 갈 때마다 늘 이방인인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나태주 시인이 제 맘 속을 다녀갔는지 딱 제 마음을 표현해 주셨더라구요.

 

인간과는 종이 다른 나무나 풀들과 물론 교감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겠지만

 

마음으로 먼저 말을 거는 사교성을 발휘하고픈 마음이 생기게 하죠, 여행이라는 것은.

 

나는 여기에 와서 너무 좋은데 너희들도 좋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풍경이 나를 한 가족으로 받아줄 때

 

비로소 편안하게 숨도 쉴 수 있게 된다는 것!

 

현학적이거나 어렵지 않게, 우리의 일상어로도 충분히 감동을 주는 

 

나태주 시인의 시는 언제 봐도 참 마음이 훈훈해 집니다.

 

"풍경" 이라는 이 시가 어디 제 마음만 대변하는 시이겠습니까.....

 

저와 같이 공감하는 분들이 많으실 거 같아요.

 

이것이 바로 시의 보편성이 갖는 힘이겠죠!

 

똑같은 시를 보면서도 각자가 다 내 마음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

 

 

 


"너를 사랑함으로 하여

 

더욱 내가 순해지고 깊어지고

 

끝내는 구원받는 그 어떤 사람이고 싶은 것

 

이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하다."

 

 

 

똑같은 시를, 똑같은 사람이 보는데

 

왜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걸까?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한 줄이 왜 오늘은 더 가깝게 다가온 느낌이 드는 걸까?

 

개인적으로 늘 궁금했던 것이었습니다.

 

시란 그렇게 섬세하고도 내밀한 인간의 심리 그 어디에 닿아 있는 것인가 봐요.

 

그래서 함부로 못하고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은 건가 봐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나태주 시인의 시와

 

유라의 아름다운 그림이 하나로 어우러진 멋진 시화집이었습니다.

 

왠지 여행지에 가면 조용한 동네책방에서 더 많이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서로 다른 계절의 여행> 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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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들은 왜 산으로 갔을까 - 노르웨이 코미디언의 반강제 등산 도전기
아레 칼뵈 지음, 손화수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노르웨이의 책을 읽은 적이 있던가?


블로그를 찾아 보니 제가 좋아하는 Take on me 의 가수 A-ha 가 노르웨이 출신이라는 글이 뜨네요.^^


"노르웨이 코미디언의 반강제 등산 도전기" 라는 부제로는


저자 아레 칼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가늠하기엔 부족하겠다 싶은 에세이였어요.


30~40년 전까지만 해도 도시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등산과 야외 활동이


이제는 대중적인 취미 활동이 되어버린 노르웨이인들의 모습을 


 때로는 반어적인 표현으로 비꼬는 듯한 뉘앙스를 보이기도 하고


코미디언인 저자 특유의 유머가 더해진 문체가 가독성과 흥미를 높여줍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소음보다는 널찍하고 조용한 환경에 익숙한 사람.


새로운 일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단조로운 일상에 익숙하고 자연 속에서 자란 사람.


크로스 컨트리 스키 선수로도 활약했을 정도로 신체를 움직이는 일에도 익숙한 사람.


사람들이 많이 모인 도심의 중심가에서


목적지를 따로 생각지 않고 정처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저자 아레 칼뵈는 자신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렇게 의문을 갖죠.


자연 속에서 등산, 스키, 스키 점프 등 자신도 이렇게 활동적인 것들을 즐겼던 경험이 있는데


나는 왜 자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까?


언젠가부터 펍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농담을 주고받았던 유머 감각이 풍부한 친구들이,


그리고 수많은 노르웨이인들이 산 사진을 찍거나 눈 위의 스키 자국을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포스팅을 하고 있는 거예요.



#눈위에서맞는행복한아침, #자연이최고, #밖으로나가,


#소파에서내려와, #야외가최고, #자연속에서의삶이최고, #산정상, 


#집안에서멀뚱멀뚱바보되지않기, #ilovenorway,


#산꼭대기에서바지를벗은채하늘을향해두팔을뻗는것은행복을향한지름길



저자는 자신의 삶에 의문이 생길 때면 계시를 받는 듯


자연 속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합니다.


살아가면서 삶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한 번쯤은 누구에게나 오는데


그럴 때면 사람들은 자연에 애정을 갖게 되는 된다고.


그런 순간은 저도 제주도 여행 중에 발견하긴 했었죠.^^


그런데 여기에서 코미디언 특유의 관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유머 감각과 머리숱을 잃어버리는 시기에 등산을 시작한다는 것.


유머 감각과 머리숱이 동시에 사라진다는 생각까진 재밌게 받아들였는데


너무나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하는 듯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좀 다른 생각이 들기도.


사람에게 진지함이 있다고 해서 유머 감각이 사라진 것이라고 보는 게 맞는 건가 저로선 의문이 생기기도 하더라구요.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돌아가면 유머 감각을 상실한 것으로 보는 저자의 생각이


너무 이분법적인 시각 아닌가?  물어보고 싶더라구요.


유머 감각을 유지하는 삶에 대한 긍정이 너무 강하다 보니


다른 면모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보이기도 하지만


기조가 강한 것은 아니어서 뭐 사람은 다 다를 수도 있다 가볍게 넘어갑니다.


일부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서 살짝 불편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요.





등산을 하는데 이렇게 한 줄로 가는 노르웨이인들.


워낙 인기 있는 곳이어서 이런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나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향하는 사람들을 아레 칼뵈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들이 왜 자연을 좋아하는지, 친구들을 뺏긴 기분도 들고


한편 너무나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자신도 반강제적으로 등산을 감행하면서 펼쳐지는 에세이, <내 친구들은 왜 산으로 갔을까>^^


등산을 좋아하는 건 한국 사람들도 지지 않죠.


처음에는 타인의 욕망이 마치 자신의 것인 듯 착각해서 등산을 시작한다고 하지만


직접 경험해본 후에는 그 착각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계속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등산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가 전과 달라져서 지속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구요.


그 의미와 가치는 사람들마다 행복에 대한 만족도가 다르듯이 일정한 기준이나 잣대는 없다고 생각해요.


건강이나 외모 등 구체적인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솔직히 운동을 할 필요가 있냐고 에세이 초반에 저자가 묻기도 했는데


행복을 위해 건강을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들도 있고,


등산이 자신의 외모를 업그레이드 하는데 잘 맞는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건강이나 외모를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 말고


바쁜 현대인의 생활에서 벗어나 자발적 고립을 위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 중에 제주도 오름을 즐겨 찾는 저도 해당되겠네요.^^





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이렇게 두 팔 벌려 환호하는 행동이 마치


종교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저자의 관점도 재밌었어요.^^


왜 믿어야 하는지 말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고 잘 모르겠는데


난 그냥 이 종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야외 활동이나 산장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대놓고 말할 경우,


사회 부적응자나 패배자로 간주될 확률이 크다고 해요.


저자의 말을 들어 보면 등산 애호가들과 종교인을 비교하는 저자가 이해되기도 하구요.


현대로 오면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에너지와 소음을 발산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신을 찾는 대신 자연을 찾는다는 시각도 흥미로웠어요.


과거 종교의 영향력 만큼이나 자연이 지금은 개인을 세상과 타자로부터 자유롭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너무나 커진 현재를 보여주기도 하구요.





 

저자는 산에 빼앗긴(?) 자신의 친구들을 되찾을 수 있겠다는 바램으로 그들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합니다. 


나아가 노르웨이인들이 자연을 찾는 이유와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노르웨이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어요.


자연 속에 스며들면 나 자신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등산을 시작했다는 아레 칼뵈는


이제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궁금해 지네요.^^


지금 내가 즐기고 있는 활동들이 나에게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주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인생의 의미가 과연 이것이 맞는 건지 정확히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허풍과 거짓말로 감추는 이들에게 저자는 코미디언답게 풍자의 도구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노르웨이인들이 생각하는 자연의 의미를 유쾌하게 파헤치는 


 <내 친구들은 왜 산으로 갔을까>.


심각하지 않게 다루고 있어서 가볍게 읽기 좋은 북하우스의 에세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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