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불안하다면 - 불안감을 추진력으로 바꾸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
트레이시 데니스 티와리 지음, 양소하 옮김 / 와이즈베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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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과 불안감에 대해 연구해온 신경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저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며 살아가는 감정인 불안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어떤 태도로 대처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심리학책 <불안이 불안하다면> 에서 불안은 결코 질병이 아니며

과거 그렇게 접근했던 인류의 역사에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저자의 경험과 과학적 연구 결과를 버무려서 "불안의 쓸모" 를 역설함으로써

불안감을 추진력으로 바꾸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을

3부,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 삶의 불청객이라 생각하기 쉬운 불안이 사실은

인간에게 친구가 되자고 속삭이는 것이라며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를 소환한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친구보다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중요한 말을 해 주는 친구가 진짜 좋은 친구이듯이

그간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던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실은 인간에게 제법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불안, 걱정, 우울, 초조함은 그저 불완전한 감정일 뿐이며

누군가에게 태도로 강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불안을 공포나 질병의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특징을 밝혀줄 하나의 감정으로 접근하여

기존의 오해를 깨부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불안의 정의, 불안이 존재하는 이유,

중세 암흑기의 현대 의학에서부터 시작된 질병으로서의 불안의 역사,

미래의 불확실성을 통해 올바른 방법으로 불안해하는 법 등을 만나게 될 것이다.

불안은 우리 신경계를 활성화해 긴장감을 높이고

심박수를 증가시킬 뿐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생각을 불러일으켜

우리를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로 '목을 조르다',

'고통스럽게 조이다', '불편하다' 를 뜻하는 말에서 파생된

이단어는 불쾌함과 더불어 두려움으로 마비된 몸과

우유부단함에 사로잡힌 마음,

다시 말해 신체적 및 정신적 질식의 결합을 뜻한다.

<불안이 불안하다면> P.20

불안함을 느끼게 되면 인간의 시야는 숲 대신 나무를 보는 수준에 머무르게 되고

부정적인 가능성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인간을 바짝 긴장하게 하는 경계심이 작동하게 되면서

불확실성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이는 불안이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불안에 대처해왔던 우리의 자세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불안이 보낸 경고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무시하고 덮어버림으로써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니까.

하지만 외면하는 것은 결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보이지 않으면 해결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

본인이 느끼는 현재의 불안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자신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 때부터 불안은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쓸모를 경험하게 해줄 것이고

그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과 지혜를 발견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올바르게 불안해하는 법의 시작이다.

불안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불안을 내가 쥐락펴락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불안이라는 감정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의 불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고민하게 되고

내가 원하는 방식을 선택해서 실험해 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불안의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과거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경험론과 과학적 관찰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있을 때

화학적 약물을 통해 고통을 가라앉히는 것이 산업이 되었고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불안이 질병인 것처럼 여겨져

빠른 시간내에 고통을 잠재우는 것의 효용성을 찬양했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전혀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여전히 약물의 힘에 의존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목격하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면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

인간은 불확실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인간의 조건을 거역할 수 없다면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본의 아니게 인류는 지혜를 얻었던 경험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바로 그것이다.

남녀노소, 빈자와 부자 상관없이 인류는 안전과 생명에 대한 최고 수준의 불안을 경험했다.

전염에 의한 예측 불가능성은 인간을 조급하고 이기적이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공동체의식, 시민의식을 결집시키며 존엄한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게 되었다.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인생 최우선 과제로 삼으며

그 때의 불안이 오히려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주의력과 추진력을 끌어모으게 했다.

주변의 상황과 환경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계획하고 실천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인한 불확실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위기의 순간에 사회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했고

함께 하는 것의 힘을 일깨워 주었다.

전염병의 대유행이 위기였음은 자명했으나

생존을 위해 어떠한 행동을 취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폐기하지 않았고 창의성으로 연결시켜

삶의 진보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본다.

물론 인류 앞에 예고없이 찾아온 뉴노멀 시대와 패러다임의 변화가

인간의 삶을 무조건 행복하게 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늘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만이 인간을 만족시키는 삶 또한 아닐 것이다.

변화가 없는 삶은 인간에게 곧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에.

전 인류가 경험했던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을 마주하게 했고

적응할 수 있게 했으며 나에게 이로운 환경으로 만들게 하는 힘을 심어주었다.

심리학책 <불안이 불안하다면> 을 읽으면서

불안이라는 감정이 인류에게 지혜와 통찰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에서 나는 불안의 쓸모를 이렇게 찾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어디 가서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불안과 친해지는 3가지 원칙' 방출~~!!!

1. 불안은 미래에 관한 정보다. 불안에 귀를 기울여라.

2. 불안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그냥 내버려두어라.

3. 만약 불안이 유용하다면

그 불안으로 목적성 있는 무언가를 하라.

<불안이 불안하다면> P.216

 

 

이 책에서 저자 트레이시 데니스 티와리는

불안을 '극복' 하는 게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한 뒤에

삶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면 될 것이다.

앞으로는 "불안" 이라는 감정에 허우적대며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매몰되기 보다는

영감과 에너지를 얻는 기회로써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처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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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마이클 샌델 지음, 이경식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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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즈베리에서 믿고 보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이 개정판으로 나왔다.

초판은 1996년에 <민주주의의 불만>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었고

거의 4반세기 만에 전체 분량의 1/4을 새로 써서 나온 개정판의 제목은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정의란 무엇인가> 에서는 한국 사회에 그야말로 '정의' 열풍을 몰고 왔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에서는 시장지상주의를 비판했으며,

<공정하다는 착각> 에서는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능력주의가 마치

절대선인양 사회 질서를 교란시켰다고 본 그의 문제의식이

이번에는 "민주주의" 로 향한다.

감수로 참여한 숭실대 철학과 김선욱 교수

마이클 샌델의 국내 번역서 대부분의 번역과 감수를 맡고 있을 정도로

인지도만큼은 확실하다.

이번 책의 해제 역시 문장이 명료하고 깔끔한 정리 굿~~!

 

마이클 샌델의 글은 전후 논리가 촘촘하면서도 친절해서 자동으로 집중 모드가 된다.

총 7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목차를 통해 보이는 키워드들이 이번에 마이클 샌델이 중요하게 다루는 것들이 맞다!

정치경제학, 시민적 덕목, 임금노동, 자유노동, 자유주의, 케인스혁명, 절차적 공화주의....

현재 우리 모두가 느끼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어떤 시대적 흐름에 의해서

변화해 왔는지 민주주의의 서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불만에 대한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도.

아하~~

표제관련정보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였구나.^^

민주주의를 이룩하고자 하는 이들의 염원과 달리

언제부턴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기 시작하더니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불편함과 온갖 해악들은

오롯이 제도를 만든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격이다.

 


 

<공정하다는 착각> 이후 3년 만에 마이클 샌델이 꺼낸 불편한 화두는

"불만을 너머 파탄이 난 민주주의" 이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지만

현실도 정말 그럴까?

이 질문에 어느 누구도 시원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읽혀져야만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90년 독일의 통일을 보았던 시기까지

우리는 냉전시대를 지켜봤고 냉전의 종식과 함께 공산주의가 붕괴되며

미국판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살아남아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간에게 이로운 민주주의로 진화한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현재로선 불행히도 그래 보이진 않는다.

공동선을 향해 바로잡아야 하는 길이 아득히 멀어 보이기만 하다.

미국 건국 초기 도덕적 덕목과 자치의 역량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여

국가가 부패한 힘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공화주의와 다르게

인간의 욕망대로 자유롭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유지상주의가 점점 팽배해지면서 시민적 덕목은 고사하고

사회적 결속력마저 붕괴되어 가는 현실 속에 무기력하게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자본주의까지 활개를 치며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실험중이다.

미 공화국 초기의 정치인들에게서 마치 사상가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영국의 강제적인 과세법에 저항하며 독립을 이뤄냄으로써

유럽발 부패를 끊어내고 공화주의적 이상을 신대륙에

제대로 뿌리내리려는 열망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공화주의는 시민적 덕목과 소박함을 갖춘 시민으로 국가를 구성하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민주적 시민의 권리보다 소비자 마인드가 부상하게 되고

시장에 대한 믿음과 금융의 역할이 커지면서

경제 논쟁에서 시민적 노선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 현재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문제는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자유지상주의의 파급력은 한국에서도 역시 상당하기 때문에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인가에 대한 의심이 있다면 이 책이 적절하다.

정치경제를 주무르는 엘리트들은 사익을 추구하며

죄책감없이 시민들에게 금융 자본주의적 폭력을 행사하지만

부채로 허우적대는 소시민들은 온갖 폐해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시장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만 죽어나고

설상가상 공동체의 도덕적 결속력마저 느슨해지는 것이 우려스럽다.

미 공화국 초기의 정치인들은 미국의 발전을 꿈꿨지만

구체적으로 만들어가는 방식은 너무나 달랐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제도인지 묻고 싶어진다.

인간이 만든 제도지만 일부에게만 이로울 뿐,

평범한 시민들은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수단으로 삼으며

비인간적인 산업과 상업의 방대한 구조 속에서 교묘하게 존재 가치를 착취하고 있다.

건국 초기 공화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형성해 갔던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이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자유방임적 자유주의,

자발주의적 자유관이 지배하는 세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미국적 이상, 공화주의적 이상은 점점 소멸되어 가고

번영과 성장에만 몰두하면서 이제는 인간의 욕망이 민주적 지배를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좋음(the good) 과 옳음(the right), 무엇이 선일까?

사생활의 권리를 지나치게 보호해주는 자유주의.

개인만 있고 공동선, 공적인 삶은 황폐해져 가는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과연 건강해 보이는지, 인간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묻고 싶다.

시민의 바람직한 덕목을 형성하게 한다는 것도 특정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라 보았던 존 롤스는 정면으로 공화주의적 발상을 거부한다.

그는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하며 개인권이 공적인 삶보다 중요하다는

자발주의적 자유관의 입장을 취한다.

여기에 마이클 샌델은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 가지는 소중한 가치들이

인간과 삶에 깨달음을 준다는 믿음으로 대응하고 있다.

시장 논리의 효율성이 모든 사회 문제를 덮어버리고 번영을 제공할 거라는

자본주의, 자유 지상주의의 교묘한 술수에 맞서

"시민적 공화주의" 라는 공공철학으로 끊임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경제가 민주적 통제에 순응하지 않음으로 해서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공동선을 포기하지 않는 자유적 공동체주의자의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가 경제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시민이 시민으로 적절한 자치를 행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미국 국가 건설 당시부터 품었던 시민다움.

마이클 샌델은 현재의 민주주의를 위기라고 진단하며

미국 공화주의의 기초 정신을 끌어올려 다함께 공적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 한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사실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 한편 무섭기도 하다.

시장의 지배에 휘둘리지 않는 시민적 덕목을 갖춘 국민들이

자본의 힘에 대항할 수 있도록 모두가 바람직한 삶, 공동선을 만들어서

인간 친화적인 민주주의 환경을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돈이나 권력, 사치나 허영 같은 부패한 힘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경제권력을 지배할 수 있도록

인간적인 덕목, 공공의 정신이 이 사회에서 주류의 공공철학이 되길 희망한다.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자치의 역량, 시민성에 대한 인식, 공적인 삶의 회복.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민주주의를 다시 형성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공화주의, 공동체주의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기까지

마이클 샌델식의 철학적 해석과 통찰이 담긴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이번에도 역시 수용할 수밖에 없도록 설득력 충만한 인문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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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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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덕후라면 파스칼 키냐르는 첫 입에 감히 '정복' 이라는 말을 꺼내기는 무리수일 것 같고

다만 조심스럽게 주변이라도 맴돌고 싶은 작가가 아닐까 싶다.

그런 마음에 <음악 혐오> 부터 만나 보겠노라 책장에 들였지만

첫 인연은 따로 있었나보다.

을유문화사 고전 시리즈 신간으로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부터 만나게 되었으니.

이런 경우는 며칠 전 존 버거를 통해 이미 겪기도 했다.

마음이 가면 책으로라도 만남의 시기를 앞당기고 싶어서

<A가 X에게>, <다른 방식으로 보기> 를 곁에 두었지만 결국은

<결혼식 가는 길> 을 가장 먼저 만나보게 되었드랬다.

문학이나 작가와의 '연'은 독자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을 넘어서서,

때로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세상은 '우연' 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필연으로 가기까지 어쩌면 당사자에게만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삶의 경험과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미지들로 인해서

독자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어떤 작가나 작품에 이끌리듯 책을 펼친다.

좀 더 특별한 연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언제나 문학은 나에게 신비롭다.

파스칼 키냐르의 글도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당당하게 자신의 문학론을 설파해가는 파스칼 키냐르의 거침없는 문장들 속에서

신비로움과 통찰이 주는 그만의 깊이를 처음으로 겪어보았다.

그리고 감당하기로 들어간다...

 

당황스러운 첫 독자는 그의 문장을 내 온몸으로 담아내고 감당해야 하는 첫 발을 내디딘 느낌이다.

언어가 표현하는 그 속내가 접하면 접할수록 너무 깊어서

내 눈으로 문장은 읽고 있으나 그의 말대로

언어 속에 빠져 익사할 수 있는 덫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집중, 몰입하면서 읽지 않으면 여지없이 헤매게 된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을 읽다 보면

이성과 언어에 파묻혀 작품 전체를 보는 시야를 잃게 되는 오류,

그의 말대로 홀려버려 독자로써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음을 일러둔다.

좀 각오하고 보시길...!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문체는

그것을 읽는 자를 전속력으로 덮쳐드는 방식으로,

독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초반에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키냐르의 문장에 적응하는 새벽의 시간을 잘 보내고 나면

곧 몰입으로 인한 보상의 시간도 올 것이다.

각오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부부 관계가 주는 편안함은 곧 예측 가능함에서 오는 것일 터.

파스칼 키냐르와의 만남은 바로 이 부부 관계가 주는 편안함의 극단에 있다.

한 마디로 예측 불허.

독자로 하여금 쉬이 예상을 허용하지 않는 파편적인 글들이 난무하다 보니

어떤 연결고리를 스스로 찾고 전체의 맥락을 짚어보려는 독자의 노력에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느낌이랄까...^^;;

첫 느낌은 이렇듯 정신을 못 차리게 어려운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끝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었는데 뭔가 개운치 않다.

'내가 읽은 게 뭐지???'

(자연스럽게 자기반성의 시간이 이어지고 ㅋㅋ)

이어서 '다시' 책을 펼치게 하는 그런 마력이 있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속에는 그가 보물처럼 여기는 소론집들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함도 있다.

독자의 주도하에 연결점을 찾아 책 한권을 이해하고 싶지만

파스칼 키냐르의 책은 녹록지 않기에

그의 문학론과 문체를 오롯이 수용하는 방법으로 나는 여러 번 곱씹기를 택했다.

그랬더니 어렴풋이 짙은 안개가 깔린 새벽이 점차 상쾌한 아침 하늘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언어, 말이 주는 덫에 빠지면 안 된다는 깨달음도

비로소 파스칼 키냐르 덕분에 눈을 뜨게 되었고

저자가 심어준 가상의 삶 이야기를 인간 고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미지로 한결 더 깊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물론 그간 소설을 즐겨 읽으면서 작중인물과 그를 둘러싼 환경과 사건들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몰입하게 되는 과정들을 경험하긴 있으나

막연하게 스며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속 이 구절 덕분에

소설을 읽는 나의 행위에 대해서 좀 더 선명한 접근점을 찾은 것 같다.

음악이 현악기 속에 있지 않듯이

소설은 일상의 언어 속에 있지 않다.

문학 언어, 나이 없는 언어가 지역 특색을 띤 언어,

날짜 붙여진 언어보다 낫다.

소설은 언어 속에 있지 않다.

꿈이 결코 언어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꿈은 언어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언어 없는 동물들도 꿈을 꾼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P.157

 


 

이 책은 사실 키냐르의 책마다 "사색적 수사학"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

키냐르에게 많은 스승들이 읽다고 이미 책 속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을 여는 인물은은

전통적인 서양철학사에 반기를 든 1세기 로마의 수사학자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개인 교사였던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이다.

서양철학사에서 잊혀진 이 인물의 반철학적 전통을 통해

키냐르는 이성적 논증보다 이미지 탐구에 천착하는 것이

어떤 문학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전통의 기원을 끌어올려 거침없이 보여준다.

"이미지 예술은 각 말을 관습과 분리해서 자연의 본성과 다시 이어 준다."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언어로 표현하여 설득하고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끼침으로써 수사학이 갖는 힘이 있던 시대에

프론토의 사색적 수사학은 당시로선 이단, 비주류, 비정상의 범주에 속한 것이었다.

인간의 지적인 반응을 부각시킬 뿐, 인간의 정서 유발은 안중에도 없었던

소피스트들의 수사학과 달리 프론토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로고스 방식 외에 에토스와 파토스의 방법도 끌어 들였으니.

키냐르는 이미지를 늘리고 신화를 구축해갔던 프론토의 수사학을 통해

당시 박해받았던 한 전통의 기록을,

망각되어왔던 이미지와 메타포의 흔적들을 정리하려는 것이라 밝히기도 하였다.

다수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전통이라는 힘을 얻은 것에 대항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또한 시간의 힘 앞에서 너무나 쉽게 잊혀지기도 한다.

 

파스칼 키냐르는 이러한 반철학적 흐름의 계보를 추적함으로써

자신의 문학 이론을 좀 더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수사학의 기원을 되짚으며 키냐르의 문학론을 만나는 여정이 내게는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독자, 플롯, 서스펜스, 작가의 문체와 어조, 멋진 서사의 조건,

키냐르식 소설가 분류법, 심연, 페르소나, 메타포, 그리고 이미지.

파스칼 키냐르가 문학을 옹호하는 방법을 이렇듯 폭넓게 만날 수 있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로고스가 가하는 폭력에 관한 부분이었다.

메타포(이동)를 통해 존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존재자 속으로 옮겨가도 결코 거기에 체류하지 않는다.

언어는 결코 직접 말하지 못한다.

언어는 잠깐의 휴식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실어 나르고,

빼내고, 솟구치고, 지나간다.

우리는 얼굴을 가질 수 없는 말들을 전달한다.

폭로되는 사실은 언어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이동하고 옮겨 가며 흔적 아래로 사라지고,

제 붕괴에서 떨어지는 돌 틈으로 끊임없이 달아나며,

모든 단일성의 맥락을 벗고 드러난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P. 26

책방투어를 하다 보면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많은 곳에서

이따금씩 발견하게 되는 작가들 중에 한 명이

바로 파스칼 키냐르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조르주 바타유.

도서관에 가야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파스칼 키냐르와 조르주 바타유는 나에게 이전까지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이

각각 알고 싶은 작가들이었는데 이렇게 연결점이 생긴다.

세상도 이렇듯 다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문학은 반反윤리다.

그것은 고상하게 다듬어진 정서이고,

제 질료의 추출, 언어의 추출이고,

제 원천에 자리한 약동의 재생이다."

"문학적이라는 건 관습에서 문자가 절대 분리되지 않는

생물학적 바닥까지 거슬러 오르는 무엇이다."

"소설은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 다른 무엇을 담는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P.50

 

 

 


 

 

언어는 사람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하는 '계시'의 관점이 아니라

그저 신호하고 가리킬 뿐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언어 속에 빠져 익사하는 일은 좀 줄어들까?^^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이것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라고 고정관념을 건드려주는,

내게는 키냐르의 문학론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이 그러했다.

다른 독자들은 모르겠고, 나에게 다소 이런 고정관념이 있었던 듯 하여.

작가인지 사상가인지 모를 경계에 서 있지만

존재감 만큼은 확실하고도 커 보였던 키냐르의 문체를 만나

개인적으로 어지러웠지만 그 안에서 발견한 깨달음들이 적지 않아서

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내용은 이렇다 하고 이 책의 외적인 속성으로도

내용을 담은 폰트가 취향저격이었고

요철감이 느껴지는 책표지의 두께감과 색감,

키냐르의 얼굴이 있는 폭넓은 띠지도 맘에 든다.

원래 띠지는 읽고 나면 버리는 타입이지만 이건 보관해야지!

키냐르의 문장을 처음 만난 기념으로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타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나 스스로 의미부여하고 해석하면서 사는 삶이 곧 내가 주인인 삶 아니겠어?^^

텀을 두지 않고 두 번 연속 읽는 책이 흔치 않은데 키냐르는 그걸 해냈다...

(내가 뭐라고...후훗...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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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마이클 샌델 지음, 이경식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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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 교수라면 균형감있는 시각일거라 믿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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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문해력 - 나도 쓱 읽고 싹 이해하면 바랄 게 없겠네
김선영 지음 / 블랙피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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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해석하는 힘" 을 일컫는다.

부분적으로 단어 하나에 모든 비중을 실어서 이해하기 보다는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맥락을 찾아내고 의미와 상징을 읽어내어

내 글로 확장하는 능력까지를 문해력이라고도 본다.

물론 단어 하나하나의 중요성을 낮추는 것은 아니다.

영어의 경우도 어휘 하나를 알면 문장 전체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그 지분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커지기도 하고

우리말 단어에서도 역시 문해력을 가늠하는 데 있어서 그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다.

<어른의 문해력> 의 저자인 글밥코치는 그래서 기분만 내는 독서를 할 게 아니라

정확히 문해력 PT 5단계를 통해

각자의 문해력 체급을 파악하고 문해력을 이루는 3가지 근육을 키워서

자신의 문해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확인하기까지를 목표로

주3회 8주 완성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일명 "문해력 PT(Personal Training)"

 

누구나 문장 하나를 볼 때 쓱~ 읽고 싹~ 이해하면 참 좋겠지만...^^

(나도 그렇다.)

문장과 문맥을 수용하는 각자의 능력이 다르고

나아가 그 능력을 끌어 올려야 한다는 필요성 내지는 그 가치에 대한 생각 또한 다양하다.

글밥코치의 친필 사인 속 내용처럼 어디가서나 '독서에 진심' 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내게

<어른의 문해력> 은 출간되었을 때부터 늘 주변에서 어슬렁 거리는 그 무엇이었다.

내게도 '독서 소화제' 의 역할을 하는데 기여하는 책으로 남길 바라며

예스리커버를 만나게 되었다.

어떤 책이든 서문과 목차를 통해서 내가 정하는 나만의 '책의 질' 을 평가하게 되는데

서문 속 이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튼튼한 문해력' 을 위해서는 젓가락 두 짝처럼 '읽기와 쓰기'를 함께 가야 한다.

문해력의 중요성은 이제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고

이 책은 실질적으로 문해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오리엔테이션에서부터 활자와 친해지기, 활자와 놀기를 권하며

문해력 부족이 결국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예스리커버 블랙래빗에디션 <어른의 문해력> 에서 말하는 문해력 향상의 3가지 토대는

어휘 근육, 독서 근육, 구성 근육을 키우는 훈련에 있다고 말한다.

보통 PT를 받으러 가면 인바디 측정부터 시작하듯이 문해력 체급 측정을 위해서

어휘 자체의 의미를 알고 적재적소에 적용할 수 있는지 (어휘 근육),

맥락이 있는 긴 글을 포기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지 (독서 근육),

읽고 소화한 내용을 내 방식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지 (구성 근육)

문해력 체급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스마트폰으로 못할 것이 없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요즘

물성을 지닌 책을 직접 들고 다니는 불편함을 최소화 시켜주는 e북을 간편하게

스마트폰 안에 넣어서 이동하며 보는 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스마트폰에 적혀 있는 글들은 집중력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유혹하는 환경이기 때문에

'읽는 글' 이라기 보다는 '보는 글' 에 가깝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집중하고 몰입하는 단계로 들어갔을 때 독서의 행위가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인데

스마트폰 글은 전체를 읽지 않고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며

발췌독하는 경향이 커서 훑는 독서가 되다 보니 읽은 내용이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글자 자체보다는 맥락 파악에 더 힘을 쏟으며 읽을 때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잘하는 뇌로 바꾸는 것이 문해력 PT의 목적이라고 볼 때

그 시작은 역시 '반복'이다.

스스로 스무고개 문제 내보기, 유의어와 반의어를 이용하여 문장 짓기,

문장 속에 적절한 어휘를 골라 넣기, 접사와 한자어 이해하기,

독후감이 아닌 '독전감' 써 보기, 낭독하기, 질문하며 읽기,

한 줄 핵심문장으로 요약하기, 나의 경험을 배경지식화하여 읽기 등의 방법을 통해서

어휘 근육과 독서 근육을 만들고 나서

문단 재구성하기, 맥락에 맞게 이어 쓰기, 문장 구조 베껴 쓰기,

형식을 바꿔 다시 쓰기, 비슷한 단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질서 잡아보기의 방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구성 근육에 필요한 트레이닝까지 받아볼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들을 후루룩 넘어갔지만 사실 이 부분이 요체이다!

저자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독자로서 동의하고 설득될 때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독서의 이로움이기 때문이다.

읽고 이해하는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쓰는 단계로 나아가며

더 높은 난이도를 요구하긴 하지만

이는 모두 일상 전반에 걸쳐서 사람들과 더 유연하게 소통하는 기술을

장착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맥락을 읽는 것은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능력은 아니다.

문해력은 이렇게 글밥코치의 PT처럼 훈련과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고로 누구나 문해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문해력 향상이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될까?" 라는 의문이 있다면

여기서 인간의 욕구를 언급하고 가야겠다.

끊임없이 타자의 이해와 인정을 받고 싶은 존재가 인간이고

주변 사람들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램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문해력 향상을 원하는 1인으로서 글밥코치의 문해력 PT를 일상 생활에 적용, 실천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자신감을 키우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지금은 다시 안정권으로 들어왔지만 작년 후반 근거없이 스스로 위축되어 추락했던 내 자신감을

다시 끌어올리기까지 참 힘든 여정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후회없이 노력하는 것이었고

나의 내면을 면밀히 들여다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힘에 부칠 때도 있었지만 서서히 궤도에 안착한 나를 다시 만났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를만큼 흔들리는 나 자신이라 여겨진다면

<어른의 문해력> 이 제시한 주3회 8주 완성 프로그램을 속는셈 치고 시작해보길 추천한다.

진행하는 중에 이미 기존의 생활 패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될 테니.


 

<어른의 문해력> 에서 알려준 여러 방법들 중에서

나는 '요점을 정리해서 말하는 습관' 에 귀가 솔깃해진다.

메타인지를 가늠할 때의 기준은 타자에게 설명을 할 수 있고 없음에 있다고 볼 때

다른 곳에서 얻은 정보와 같은 말을 글밥코치도 하고 있으니

이젠 확신을 갖고 실천해보려 한다.

두괄식으로 중요한 내용, 즉 결론부터 말하는 습관!

나의 메시지를 타자에게 선명하게 전달하기 시작하면

화자인 나도, 청자인 타자도 대화에 집중하는 데 한결 도움이 될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금처럼 읽고 쓰기는 행위를 계속하면서

글밥 코치의 문해력 PT 프로그램을 필요할 때마다 꺼내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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